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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얘기들 !

+ NOW -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 에크하르트 톨레

 

 

 

< NOW -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 >

 

- 에크하르트 톨레 - (NOW 중에서)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150억 년 전 거대한 폭발 속에 탄생했으며 그 이후 계속 팽창해 왔음을 암시하는 증거들을 발견해 왔다.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잡성도 증가하고 있고, 점점 더 다양해져 가고 있다. 또한 어떤 과학자들은 단일성으로부터 다양성으로의 이 운동은 마침내는 거꾸로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주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그것이 나온 현상계 이전의 상태,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무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탄생, 팽창, 수축, 그리고 죽음을 또다시 반복할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왜 우주는 이 성가신 일을 반복하는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어떤 수학적인 모델도 그 해답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만일 외부 세계만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당신은 자신이 하나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대우주를 반영하고 있는 소우주이기 때문에 우주 역시 하나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의 목적은 당신의 목적과 분리될 수가 없다. 우주의 외부적인 목적은 형상들을 창조하고 형상들의 상호작용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것을 당신은 놀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꿈이나 연극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우주의 내면적인 목적은 자신의 형상 없는 본질을 깨닫는 일이다. 이때 외부적인 목적과 내면적인 목적의 조화가 찾아온다. 그 본질, 즉 의식을 형상의 세계 속으로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 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마음이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이 시간 이 행성에서 그 변화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그것은 외부적인 목적과 내면적인 목적의 조화, 세상과 신의 조화이다.

 

우주의 팽창과 축소가 자신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살펴 보기 전에, 우리는 여기서 마음속에 새겨 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주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어떤 것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개념이나 수학 공식들로는 무한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생각으로도 전체의 무변광대함을 요약할 수 없다. 실체는 하나로 연결된 전체이지만, 생각은 그것을 조각들로 분해한다. 생각은 개별적으로 분리된 사물들과 사건들이 존재한다거나, 이것은 저것의 원인이라는 식의 근본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생각은 하나의 시각을 바탕으로 하며, 모든 시각은 그 본질상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옳지 않거나, 적어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의미한다. 오직 전체가 진리이지만, 전체는 말이나 생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시간 밖에 존재한다.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심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

 

상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일출과 일몰을 생각해 보자. 태양이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진리이긴 하지만 오직 상대적으로만 옳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은 허구다. 지구 표면 위나 지구 근처에서의 제한된 시야로 볼 때만 태양은 뜨고 진다. 만일 당신이 우주공간 멀리 있다면 태양이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며, 항상 빛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깨달은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일출과 일몰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다. 이제는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상대적인 진리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따라서 잠시 또 다른 상대적인 진리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보자. 우주가 형상을 갖는 것과 다시 형상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것은 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각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내 자신의 삶'이라는 개념은 물론 생각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제한된 시각이며, 또 다른 상대적인 진리다. 궁극적으로 '나의'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삶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현상계 속으로 나타나는 것과 현상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즉 팽창과 수축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두 개의 보편적인 운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나아감과 안으로 돌아옴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많은 방식으로 우주 전체에 반영되고 있다. 당신 호흡의 들숨과 날숨뿐만 아니라 심장의 끊임없는 팽창과 수축이 그것이다. 잠과 깨어남의 주기적인 순환에도 그것이 반영되어 있다. 당신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매일 밤 꿈 없는 깊은 수면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당신은 모든 생명의 큰 근원인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며, 아침에 생기를 얻어 다시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운동, 밖으로 나감과 안으로 돌아옴은 각 사람의 삶의 주기에도 반영된다. '당신'은 무에서부터 갑자기 이 세상 속에 나타난다. 탄생에 이어 팽창이 뒤따른다. 육체적인 성장만이 아니라 지식, 활동, 경험의 성장이 있다. 당신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팽창하고, 삶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이것은 당신이 주로 자신의 외부적인 목적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시기다. 대개 이 시기에는 그것에 따른 에고의 성장이 있다. 에고는 위에 열거한 모든 것들과의 자기 동일시이며, 따라서 당신의 형상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믿음은 더욱 뚜렷해져 간다. 이것은 또한 외부적인 목적, 즉 성장의 지배권을 에고가 쥐고 있는 시기다. 에고는 자연과 달리 팽창의 추구를 언제 멈추어야 할지 알지 못하며,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왕성한 식욕을 지니고 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해냈다고 여기고 자신이 이곳에 속해 있다고 생각할 때쯤, 돌아가는 운동이 시작된다. 아마도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 당신 세계의 일부인 사람들이 죽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가 당신의 육체적인 형상이 약해지고, 당신은 이제 작아지고 적어진다. 에고는 그것에 대해 나날이 커져 가는 불안과 우울로 반응한다. 당신의 세계는 수축하기 시작하며, 당신은 자신이 더 이상 지배권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이 삶에 영향을 주는 대신 삶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서서히 당신의 세계를 축소시킴으로써. 그러던 어느 날 당신 역시 사라진다. 당신의 안락의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하지만 그곳에 당신이 앉아 있는 대신, 단지 하나의 텅 빈 공간만이 남는다. 당신은 수십 년 전 당신이 온 곳으로 돌아갔다.

 

각 사람의 삶, 각각의 생명 형태는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하나의 독특한 방식, 하나의 세계를 대표한다. 그리고 당신의 형상이 해체될 때, 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 중 하나가.

 

한 개인의 삶에서 돌아가는 운동, 즉 형상의 약해짐과 해체는 그것이 늙음, 질병, 장애, 상실, 또는 어떤 종류의 개인적 비극을 통해 일어나든 관계없이 영적인 눈뜸의 큰 가능성을 함께 데리고 온다. 의식이 형상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문화에는 영적 진리가 매우 적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의 기회로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형상의 붕괴가 그들이나 그들과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날 때, 그들은 그것이 대단히 잘못된 일이며,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문명에는 인간 조건에 대한 크나큰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 영적으로 무지할수록 더 많이 고통 받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서양에서 죽음은 하나의 추상개념 이상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형상이 분해 시점으로 다가갈 때 그 인간 형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다. 그래서 노쇠하고 늙은 사람들은 대부분 요양원에 격리된다. 다른 더 오래된 문화들에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는 시신이 소위 문명국가들에서는 감추어진다. 아주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 아니면 고인의 시신을 보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불법이다. 나아가 그들은 장례식 때 고인의 얼굴을 분장하기까지 한다. 위생적으로 처리된 죽음만을 보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죽음이 그들에게 단지 하나의 추상개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상의 분해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접근해 올 때 충격과 몰이해, 절망, 큰 두려움이 밀려 온다. 어떤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삶이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던 의미와 목적들은 쌓아 올리고, 이루고, 세우고, 지키는 것과 관계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만족과 관계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외부로 향하는 운동, 형상과의 동일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에고와 관계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외부로 향하는 운동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전통적으로 영적 차원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정확히 늙음의 습격 또는 상실과 개인적인 비극을 통해서다. 말하자면 내면적인 목적은 외부적인 목적이 붕괴되고 에고의 껍질이 갈라지기 시작할 때만 나타난다. 그러한 사건들은 형상의 분해를 향해 돌아가는 운동의 시작을 상징한다. 고대 문화들에서는 이 과정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늙은 사람들이 존경받고 존중받았다. 그들은 지혜의 저장고였으며, 깊이의 차원을 제공했다. 그러한 것이 없었으면 어떤 문명도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외부 차원과 완전히 동일시되어 있고 내면의 영적 차원에 대해서는 무지한 우리의 문명에서는, '늙음'이라는 단어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쓸모없음과 동의어이며, 누군가에게 늙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모욕에 가깝다. 그 단어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어르신이나 연장자와 같은 완곡어법을 사용한다. 최초국가(First Nation,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부르는 용어)에서 '할머니'는 높은 위엄을 지닌 인물이었다. 오늘날의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이 부르는 호칭에 불과하다. 왜 늙음이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는가? 늙은 나이에는 중심점이 행위에서 순수한 '있음'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며, 행위에 몰두하는 우리의 문명에서는 순수한 '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은 묻는다. 순수한 '있음'이라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어떤 사람들은 성장과 팽창이라는 외부로 향하는 운동이 훨씬 일찍 습격해 온 형상의 분해에 의해 심하게 방해받는다. 그것이 일시적인 혼란인 경우도 있지만, 영구적인 중단이 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어린아이는 죽음에 직면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사실 어떤 아이들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부모의 죽음과 대면해야만 한다. 심지어 그들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과도 직면해야할 때가 있다. 어떤 아이들은 삶의 자연스런 팽창을 극도로 제한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또는 어떤 심각한 한계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한 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시기에 외부로 향하는 운동이 방해받는 것은 한 개인 속에 더 일찍 영적 깨어남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크다. 궁극적으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더 큰 전체의 일부가 아닌 것, 더 큰 전체의 목적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외부적인 목적의 파괴와 좌절은 내면적인 목적을 발견하도록 당신을 인도할 수 있고, 그 결과 내면적인 목적과 연결된 더 깊은 외부적인 목적이 나타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많은 고통을 겪은 아이들은 종종 나이에 비해 한층 성숙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형상의 차원에서 잃는 것이 본질의 차원에서 얻어진다. 고대 문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눈 먼 현자' 또는 '상처 입은 치료사'와 같은 전통적인 인물들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들에게 형상의 차원에서의 커다란 상실이나 장애는 영적 차원으로의 입구가 되었다. 형상의 불안정한 속성을 직접 경험했을 때, 당신은 다시는 형상을 과대평가해서 맹목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거나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형상의 분해, 특히 늙음이 상징하는 기회가 오늘날의 문화에서 이제 막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기회를 놓치고 있다. 에고가 외부로의 운동과 자신을 동일시했듯이 돌아가는 운동과도 똑같이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에고의 껍질이 단단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열림보다 수축이 되는 것이다. 이때 권위가 손상된 에고는 두려움, 분노, 자기 연민, 죄책감, 비난, 그 밖의 온갖 부정적인 심리적 감정적 상태들에 사로잡힌 채 나머지 인생을 투덜거림과 불평으로 보낸다. 또는 추억에 집착하거나 끝없이 과거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회피 전략을 택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에서 에고가 돌아가는 운동과 더 이상 동일시되지 않을 때, 늙음과 죽음에 다가가는 것이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다. 즉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늙어가면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의 허약해져 가는 형상들은 맑고 투명해져서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늙음이 인간 개인의 의식이 꽃피어나는 시기로 인식되고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을 것이다. 아직 삶의 외부적인 환경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목적에 눈을 뜰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늙음은 깨어남의 과정이 강렬해져서 마침내 절정에 이르는 시기가 될 것이다.

 

외부로 향하는 운동과 함께 찾아오는 한 사람의 자연스런 삶의 확장(팽창)은 지금까지는 에고가 그 지배권을 갖고 에고 자신의 확장을 위해 사용해 왔다. 자기 신체의 힘과 능력이 커진 것을 발견한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곧잘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봐. 넌 이렇게 못해." 이것은 외부로 향하는 운동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에고의 첫 번째 시도이다. '너보다 많다'는 개념을 통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은 축소시킴으로써 자신을 크게 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에고의 많은 착각들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의식이 더 많이 깨어 있고 에고가 더 이상 삶을 지배하지 않게 되면, 굳이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을 뜨기 위해 자신의 세계가 수축되거나 붕괴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새로운 의식이 이 행성에 등장하기 시작함에 따라,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의식이 깨어나기 위해 충격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성장과 팽창이라는 외부로의 주기에 속해 있는 동안에도 자발적으로 깨어남의 과정을 밟는다. 외부로의 주기가 더 이상 에고에 지배권을 빼앗기지 않을 때, 생각과 말과 행동과 창조 같은 외부로의 운동을 통해서도 영적 차원이 강력하게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침묵, 순수 존재, 그리고 형상의 분해와 같은 돌아가는 운동을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우주 지성의 작은 측면인 인간 지성은 지금까지 에고에 의해 왜곡되고 잘못 사용되어 왔다. 나는 그것을 '광기에 봉사하는 지성'이라고 부른다. 원자를 쪼개는 것은 커다란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 지성을 이용해 원자폭탄을 만들고 비축하는 것은 정신이상이고, 좋게 말해야 극도로 비이성적인 행동이다. 어리석음은 비교적 피해가 없지만, 지성적인 어리석음은 고도로 위험하다. 그 명백한 예를 들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지성적인 어리석음이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기능장애에 걸린 에고로 인해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은 우주 지성의 외부 팽창 주기와 완벽하게 연결되어 그 창조 추진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형상의 창조에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참여자가 된다. 사실은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지성이 우리를 통해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것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하는 행위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우리는 창조의 행위가 가장 강렬한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배울 것이지만, 그것은 '힘든 노동'이나 스트레스와는 다를 것이다. 스트레스와 열정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싸움이나 스트레스는 에고가 돌아왔다는 표시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의 부정적인 반응들처럼.

 

에고의 욕망 밑바닥에 있는 힘은 '적'을 만들어 낸다. 즉 똑같은 강도의 반대되는 힘을 가진 반발을 낳는다. 에고가 강할수록, 사람들 사이의 분리 의식이 더 커진다. 반대하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행위들은 모두의 선을 목표로 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포용적이며, 배타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분리시키지 않고 합친다. 그것들은 '나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위한 것이며, '나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 속의 의식의 등장을 위한 것이다. '나의' 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자연 전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행위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다. 비록 필요한 것이긴 해도 행위는 우리의 외부 세계에 나타나는 이차적인 요소라는 것을. 창조의 첫째 요소는 내면 의식이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든, 우리의 의식 상태가 우리의 세상을 창조한다. 만일 그 내부 차원에서 아무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행위를 해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단지 형태만 다른 똑같은 세상을, 에고가 밖으로 투영된 하나의 세상을 또다시 재창조할 뿐이다.

 

의식은 이미 완전히 깨어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형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세계, 영원한 세계다. 그러나 형상을 가진 우주는 오직 서서히 의식이 깨어 간다. 의식 그 자체는 시간을 초월해 있으며, 따라서 진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의식이 우주라는 현상계로 모습을 나타낼 때, 그것은 시간에 종속되며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 인간의 어떤 머리로도 이 과정의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 속에 의식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다.

 

의식은 모든 형상들의 일어남 뒤에 있는 지성이며, 세상을 조직하는 원리다. 의식은 수백만 년 동안 형상들을 준비해 오고 있다. 그것들을 통해 현상계 속에 그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형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의식이 또 다른 차원으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이 형상의 차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형상과 형상 없음은 서로 맞물려 있다. 형상 이전의 차원이 내면 공간으로서, 현존과 자각으로서 이 차원 속으로 흘러든다. 그것은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 형상을 통해서이며, 그럼으로써 그것의 운명은 완성된다. 인간 형상은 이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수백만의 다른 형상들은 그 기초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의식이 현상계 속으로 하나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난다. 다시 말해 하나의 형상이 된다. 이때 의식은 그 형상 속에서 일종의 꿈꾸는 것 같은 상태로 들어간다. 지성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의식은 그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형상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며, 형상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이 물질 속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우주 진화의 이 단계에서 외부로 향하는 운동 전체가 이 꿈의 상태에서 일어난다. 깨어남의 짧은 경험은 오직 개인적인 형상이 분해되는 순간, 죽음의 순간에만 일어난다. 그리고 그 다음 육체, 그 다음 형상과의 또 다른 동일시가 시작된다. 집단적인 꿈의 또 다른 개인적인 꿈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자가 얼룩말의 몸을 찢어 놓을 때, 얼룩말의 형상으로 육체화되었던 의식은 그 분해되는 형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잠시 동안 의식으로서의 자신의 본질, 그 불멸의 본성에 눈을 뜬다. 그러다가 금방 잠 속으로 다시 들어가 또 다른 형상으로 육체화된다. 사자가 늙어 더 이상 사냥할 수 없을 때, 그 사자의 형상이 마지막 숨을 내쉼에 따라, 깨어남의 짧은 순간이 다시 찾아오고, 또 다른 형상의 꿈이 따라온다.

 

이 행성에서 인간의 에고는 의식이 형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우주적인 잠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낸다. 이것은 의식의 진화에서 필요한 단계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것을 통해 의식이 이 지구 차원으로 들어오는 고도로 특수화된 형상이다. 그것은 뉴런이라고 불리는 대략 천 억 개 정도의 신경 세포를 담고 있는데, 우리 은하계에 있는 별들과 같은 숫자다. 우리의 은하계는 대우주의 두뇌로 볼 수 있다. 두뇌가 의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그 자신의 표현을 위해 지구에서 가장 복잡한 형상인 두뇌를 창조한 것이다. 두뇌가 손상을 당했을 때, 당신은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의식이 이 지구 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더 이상 그 형상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의식을 잃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만을 잃어버릴 수 있다. 당신 자신인 것은 잃어버릴 수 없다.

 

깨어 있는 행동은 우리 행성에서 일어나는 의식 진화의 다음 단계이다. 우리가 현재의 진화 단계의 끝으로 다가갈수록, 에고의 기능장애는 더 커진다.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기 전에 기능장애가 더 커지는 것과 같은 식이다. 하지만 과거의 것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의식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간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전환점의 한가운데 있다. 하지만 오늘밤 텔레비전 뉴스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성에서,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은하계와 그 너머의 많은 행성들에서 동시적으로 의식이 형상의 꿈으로부터 깨어나고 있다. 이것은 모든 형상(세상)이 분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적지 않은 형상들이 거의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이제 의식이 자신을 그 곳에 잃어버리지 않고 형상을 창조하고 경험하는 동안에도 자신을 자각한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왜 의식은 계속해서 형상을 창조하고 경험하는가?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서다. 의식은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깨어 있는 행동의 의미를 배운 깨어 있는 인간 존재들을 통해서다.

 

깨어 있는 행동은 당신의 외부적인 목적, 즉 당신이 하는 일을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 즉 깨어남과 깨어 있음과 연결하는 일이다. 깨어 있는 행동을 통해 당신은 우주의 외부로 향한 목적과 하나가 된다. 의식은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것은 당신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그것들에게 영감을 준다.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안내하고 그것에 힘을 부여한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완성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일 그 자체가 당신이 하는 일의 주된 목적이 될 때,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깨어 있는 의식의 흐름이 들어올 때, 당신 삶의 최우선 사항에 반전이 일어난다. 그 의식의 흐름이 일의 질을 결정한다.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의 의식 상태가 첫 번째 요소다. 그 상황,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는 이차적이다. '미래'의 성공은 그 행위들이 나오는 의식에 달려 있고, 그 의식과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에고의 반응하는 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깨어 있는 의식의 온전한 주의력일 수도 있다. 진정으로 성공한 행위들은 에고나 조건 지어진 무의식 상태의 생각보다는 모두 깨어 있는 주의력의 장으로부터 나온다.

 

의식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는, 그리하여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당신의 삶을 우주의 창조적인 힘과 일치시키는 세 가지 양상이. 이때의 양상이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에너지 주파수를 의미한다. 그 에너지 주파수가 당신의 행동을 이 세상 속으로 등장하는 깨어 있는 의식과 연결하는 밑바탕이 된다. 이 세 가지 양상들 중 어느 하나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는 일은 기능장애적이고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루의 일과 중 변할 수도 있다. 당신 삶의 특정 단계 동안에는 그것들 중 하나가 지배적인 상태에 있을 수도 있지만, 각각의 양상은 특정한 상황에 해당한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양상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의 것들은 의식의 특정한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로부터 가장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든 당신은 그것들 중 하나가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의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통을 창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즐겁게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든, 당신은 적어도 그것이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임이란, 지금은 이 일이 이 상황, 이 순간이 나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일이므로 나는 기꺼이 그것을 하겠다는 자세다. 우리는 일어나는 일을 내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길게 말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그것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아마도 폭우가 퍼붓는 밤의 낯선 도로 한가운데서 펑크 난 자동차 바퀴를 갈아 끼우는 것을 가슴 뛰면서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즐겁게 하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 받아들임의 상태에서 행동을 하는 것은 그것을 하는 동안 당신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평화는 그때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알아차리기 힘든 에너지 파동이다. 겉에서 볼 때 받아들임은 하나의 수동적인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활동적이고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 속에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평화, 그 미묘한 에너지 파동이 순수 의식이며, 순수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 중 하나가 순응하는 행위를 통해서다. 순응은 받아들임의 한 가지 측면이다.

 

만일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길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면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이 실제로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것, 또한 진정으로 중요한 유일한 것에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로 당신의 의식 상태가 그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자신의 의식 상태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순응하는 행위와 함께 찾아오는 평화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실제로 즐기면서 할 때 생명력의 느낌으로 바뀐다. 즐거움은 깨어 있는 행동의 두 번째 양상이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즐거움이 사람들의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는 힘으로서 결핍감을 대체할 것이다. 결핍감은 자신이 모든 창조의 배후에 있는 힘으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된 조각이라는 에고의 망상으로부터 일어난다. 즐거움을 통해 당신은 우주의 창조적인 힘 그 자체와 이어진다.

 

과거나 미래 대신 현재의 순간을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는 능력은 극적으로 커진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삶의 질도 높아진다. 기쁨은 순수 존재의 역동적인 측면이다. 우주의 창조적인 힘이 자신을 자각할 때, 그것은 기쁨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하는 일을 마침내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의 삶 속으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쁨 속에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있다. '삶을 시작하기 위해 기다리는' 증후군은 무의식 상태의 가장 공통된 망상 중 하나다.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기 시작할 수 있도록 어떤 변화를 기다리는 대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이미 즐길 수 있다면, 외부 차원에서의 확장과 긍정적인 변화가 당신 삶 속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 당신이 하는 일을 즐길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의 마음에게 허락을 구하지 말라. 당신이 얻게 될 것은 그것을 즐길 수 없는 수백 가지 이유가 전부일 것이다. 마음은 말할 것이다. "지금은 아니야. 내가 바쁜 게 안 보여? 시간이 없어. 아마도 내일이면 즐기기 시작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기기 시작하지 않고서는.

 

"나는 이것 또는 저것을 하는 것을 즐긴다."라고 말할 때, 사실 그것은 잘못된 이해다. 그 말은 기쁨이 당신이 하는 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쁨은 당신이 하는 일로부터 오지 않는다. 기쁨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며, 그리하여 당신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기쁨이 당신이 하는 일로부터 온다는 오해는 정상적이지만 위험하다. 왜냐하면 기쁨이 하나의 행위나 일 같은 무엇인가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세상이 당신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끝없는 좌절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상이 그들에게 주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하는 일과 기쁨의 상태는 무슨 관계인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행할 때, 그 행위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닐 때 그것이 어떤 행위든 당신은 즐길 것이다. 당신이 실제로 즐기는 것은 당신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강한 생명력의 느낌이다. 그 생명력이란 당신 존재와 하나다. 이것은 당신이 무엇인가를 즐기면서 행할 때, 실제로는 역동적인 측면에서 순수한 '있음'의 기쁨을 경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즐기면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당신을 모든 창조의 배후에 있는 힘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여기 당신의 삶 속에 권한과 창조적인 확장을 가져다줄 하나의 영적 수행이 있다. 자신이 자주 행하는 매일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목록으로 만들라. 당신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여기는 활동들도 포함시키라. 하지만 당신이 몹시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일들은 포함시키지 말라. 이것은 당신이 하는 일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중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 목록은 일터로 가고 오는 것, 시장을 보는 것, 빨래를 하는 것, 또는 매일의 일과 중에서 당신이 지루하거나 스트레스 받는다고 느끼는 것들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당신이 그 행위들을 할 때마다, 그것들이 깨어 있음의 도구가 되게 하라. 당신이 하는 일 속에 온전히 존재하고, 그 활동들 배후에 있는 당신 내면의 그 깨어 있음, 살아 있는 침묵을 느껴 보라. 머지않아 당신은 스트레스 받고 지루해하고 짜증 내면서 하는 대신 그러한 높아진 자각 상태 속에서 당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즐거워져 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이 즐기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외부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내면의 의식 차원이다. 이것은 당신이 행하고 있는 일 속에서 순수 존재의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다. 만일 당신의 삶에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거나 너무 스트레스 받거나 지루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직 그 차원을 당신 삶 속으로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직 당신 삶의 주된 목적이 아닌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자신들의 주된 목적이 이 세상 속에 의식의 빛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발견하고, 무엇을 하든지 의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함에 따라 새로운 지구가 시작된다.

 

순수 존재의 기쁨은 깨어 있는 의식에서 오는 기쁨이다.

 

그때 깨어 있는 의식이 에고로부터 지배권을 넘겨받아 당신 삶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하나의 행위가 의식에 의해 힘을 받고 자연적으로 훨씬 더 큰 무엇인가로 확장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많은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를 통해 어떤 것을 성취하거나 무엇인가 되려는 바람 없이 단순히 자신들이 가장 즐기는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은 음악가, 화가, 작가, 과학자, 교사, 건축가일 수도 있고, 새로운 사회 구조나 사업 구조(깨어 있는 사업 구조)를 실현시킬 수도 있다. 때로 몇 년 동안은 그들의 영향 범위가 작게 머물러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는 점진적으로 창조적인 힘의 물결이 그들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와 그들의 활동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확장되고, 헤어릴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가닿는다. 그들이 하는 작업은 이제 즐거움에 일의 강도가 더해지며, 그것과 더불어 일반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창조성이 따라온다.

 

그러나 너무 자만하지 말라. 거기 어딘가에 에고의 잔재가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전히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 존재다.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그것이 특별한 것이다. 그 본질은 당신뿐 아니라 모든 존재가 공유하고 있다.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이며 수피의 스승인 하피즈는 이 진리를 아름답게 표현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숨이 통과해 흐르는 피리의 한 구멍이다. 그대여, 이 음악을 들으라."

 

그리고 여기, 깨어남이라는 내면적인 목적에 변함없이 충실한 사람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또 다른 창조적인 실현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자기 삶의 외부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들은 하나의 커다란 비전, 하나의 목표가 있으며, 그때부터 그 목표의 실행을 향해 일해 나간다. 그들의 목표 또는 비전은 더 작은 규모에서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무엇, 그리고 이미 즐겁게 하고 있는 그 무엇과 대개 어떤 식으론가 연결되어 있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번째 양상인 열정이 일어나는 곳이 이곳이다.

 

열정은 당신이 하는 일 속에 큰 즐거움과 함께 당신이 일해 나가는 하나의 목표 또는 하나의 비전이라는 요소가 덧보태졌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는 일의 즐거움에 하나의 목표를 덧보탤 때, 그 에너지 장 또는 진동 주파수가 변화한다. 우리가 구조적인 긴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어느 정도 이제 그 즐거움에 더해지며, 따라서 그것은 열정으로 바뀐다. 열정에 의해 연료를 공급 받아 창조적인 활동이 절정을 이룰 때는 당신이 하는 작업에 엄청난 일의 강도와 에너지가 있다. 당신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하나의 화살처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여행의 즐거움까지도.

 

구경꾼에게는 당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열정의 강렬함은 스트레스와 아무 관계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원하는 만큼보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더 많이 원할 때,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즐거움과 구조적인 긴장 사이의 균형은 깨어지고, 뒤의 것이 승리한다.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것은 대개 에고가 되돌아왔다는 표시이다. 당신은 우주의 창조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단지 에고가 느끼는 결핍감의 잡아당김만이 있을 뿐이며, 따라서 당신은 그것을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힘들게 일해야만'한다. 스트레스의 영향 아래서는 당신이 하는 일의 질과 효율성이 늘 떨어진다. 또한 스트레스는 불안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과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신체에 독이 되며, 이제 암과 심장병 같은 퇴행성 질병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재정리되고 있다.

 

스트레스와 다르게, 열정은 높은 에너지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적인 힘과 공명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말한 것이 그것이다. "어떤 위대한 것도 열정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고대 희랍어에서 엔en과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에서 나온 말이다('내재하는 신 a God within' 즉 '내 안에 신을 둔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단어 엔토우시아제인enthousiazein(신적 영감 상태)은 '신에 사로잡힌'의 뜻이다. 열정과 함께할 때, 당신은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 당신 혼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변함없는 열정은 창조적인 에너지 물결을 존재 속에 가져다준다. 이때 당신은 '그 물결을 타기만' 하면 된다.

 

 

열정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엄청난 힘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그 힘에 접근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모두 '당신이' 이룬 것을 놀라움으로 바라볼 것이고, 그것들을 당신의 존재와 동등시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가 가리켜 보인 진리를 안다. "내 자신의 힘으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라는 만큼 정확한 강도로 반대되는 것을 만드는 에고의 결핍감과는 달리, 열정은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열정은 대립하지 않는다. 열정에서 나오는 행위는 승리자나 패배자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에 바탕을 둔다. 열정은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조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창조 그 자체의 힘이며, 따라서 어떤 이차적인 원천으로부터 에너지를 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에고가 느끼는 결핍감은 언제나 무엇인가로부터 또는 누군가로부터 취하려고 시도한다. 반면에 열정은 자신의 풍요로움으로부터 나누어 준다. 적대적인 상황이나 비협조적인 사람들의 형태로 장애물들을 만날 때, 열정은 결코 공격하지 않고 그들을 돌아서 가거나 양보와 포용을 통해 그 대립하는 에너지를 도움이 되는 것으로, 적을 친구로 바꿔 놓는다.

 

열정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다. 하나는 다른 것의 부재를 의미한다. 열정은 자신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과 깊이 하나가 되어 있다. 그것의 생명력, 기쁨, 힘의 근원인 지금 이 순간과. 열정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과 하나다. 열정에 고무된 행동들이 아무리 역동적이라고 해도 당신은 그것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바퀴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의 고요한, 그러나 강렬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 있다. 모든 활동의 한가운데에 평화로운 중심부가 있다.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열정을 통해 당신은 외부로 향하는 우주의 창조적인 원리와 완전히 연결된다.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자기와 동일시함 없이, 즉 에고 없이 그렇게 한다. 자기 동일시가 없을 때, 집착이 없다. 고통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집착이.

 

일단 창조적인 에너지의 물결이 지나가면, 구조적인 긴장은 다시 줄어들고,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기쁨은 남는다. 누구도 열정 속에 언제나 내내 살 수는 없다. 훗날 새로운 창조적인 에너지의 물결이 찾아와 새로워진 열정으로 인도할지도 모른다.

 

형상의 분해를 향해 돌아가는 운동이 시작될 때, 열정은 더 이상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열정은 외부로 향하는 삶의 주기에 속해 있다. 그 돌아가는 운동, 즉 집으로 가는 여행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응을 통해서다.

 

간추려서 말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즐거움이 자신이 일해나가는 하나의 목표 또는 하나의 비전과 결합되면 열정이 된다. 설령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해도, 주의력의 초점은 자신이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일에 머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적인 목적과 연결된 상태에서 떨어져 나올 것이다. 자신이 가진 비전이나 목표가 영화배우나 유명 작가나 부유한 사업가가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풀린 이미지가 아닌가, 따라서 에고의 숨은 형태가 아닌가 확인하라. 또한 당신의 목표가 바닷가의 대저택, 당신 자신의 회사, 또는 은행에 천만 달러를 갖는 것과 같은, 이것저것을 소유하는 데 초점이 있지 않은가 확인하라.

 

자신의 부풀린 이미지나 이것저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비전은 모두 정적인 목표이며, 따라서 당신에게 힘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의 목표들이 반드시 역동적인 것이 되게 하라. 즉 당신이 현재 행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다른 인간 존재들뿐 아니라 전체와 연결되는 활동에 초점을 맞추라. 자신을 유명한 배우나 작가와 같은 모습으로 보는 대신, 자신의 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기 자신을 보라. 그 활동들이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고 깊어지게 하는가를 느껴 보라. 하나의 문이 된 자신을 느끼라. 모든 생명의 드러나지 않은 '큰 근원'으로부터 나온 에너지가 그 문을 통해 모두를 위해 흘러가는 것을.

 

이 모든 것은 당신의 목표나 비전이 이미 당신 안에서는, 즉 마음과 느낌의 차원에서는 하나의 현실임을 의미한다. 열정은 마음속 청사진을 물질적인 차원으로 옮기는 힘이다. 그것은 마음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결핍감도 개입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나타나게 할 수 없다. 오직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만을 나타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힘든 노동과 스트레스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새로운 지구의 방식이 아니다. 예수는 마음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의식을 통해 물질을 나타나게 하는 열쇠를 주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형상을 향한 외부로의 운동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은 강도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건설하고, 창조하고, 참여하고, 성취하고, 세상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만일 그들이 무의식적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에고가 외부로 향하는 주기의 에너지를 지배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허용되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크게 축소시키며,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점점 더 '노력'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들의 의식이 깨어 있다면, 외부로 향하는 운동이 강한 그 사람들은 고도로 창조적일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육체적인 성장과 함께 오는 자연스러운 확장이 그 과정을 끝내면 외관상 별로 주목할 것이 없는, 겉으로 보기엔 더욱 수동적이고 비교적 평온무사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본성상 내면으로 더 눈을 돌리며, 그들에게 형상을 향한 외부로의 운동은 최소한으로 유지된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기보다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세상일에 강하게 개입하거나 세상을 바꾸려는 욕망이 없다. 만일 그들에게 어떤 욕심이 있다면, 그들은 대개 자신들에게 어느 정도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일거리를 찾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이들은 운 좋게 자신을 보호할 은신처를 발견해 그곳에서 비교적 세상의 풍파로부터 격리된 삶을 이끌어갈 수 있다. 또는 그들에게 정기적인 수입을 주는 일자리는 그들 자신의 소규모 사업을 발견한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공동체나 수행처의 삶 쪽으로 이끌릴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그들이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느끼는 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약물에 의존한다. 이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걸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들은 마침내 치료사나 영적 교사, 즉 순수 존재의 스승들이 된다.

 

과거 시대에 그들은 아마도 명상가로 불렸을 것이다. 우리의 현대 문명 속에는 그들을 위한 장소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지구에는 그들의 역할이 창조하고 행동하고 개혁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들의 기능은 이 행성에 새로운 의식의 주파수를 고정시키는 일이다. 나는 그들을 '주파수 보유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날의 삶의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접촉을 통해 이곳에 깨어 있는 의식을 일으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함으로써 이 세상에 넓은 침묵을 가져오는 일이다. 그들이 하는 일 속에는 심지어 가장 단순해 보이는 일에도 의식이 있고, 따라서 질적인 깊이가 있다. 그들의 목적은 성스런 방식으로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각각의 인간 존재가 집단적인 인간 의식의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삶의 표면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지구는 단지 또 다르게 각색된 하나의 유토피아가 아닌가? 모든 유토피아의 그림들은 공통적으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의 시기에 모든 것이 좋아지고, 우리가 구원 받고, 평화와 조화가 찾아오고, 우리의 문제들이 끝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의 투영이 그것이다. 그런 많은 유토피아의 그림들이 있어 왔다. 어떤 것들은 실망으로 끝이 나고, 어떤 것들은 큰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모든 유토피아의 그림들 핵심에는 낡은 의식의 특징을 이루는 구조적인 기능장애가 한 가지 있다. 구원을 미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미래는 오직 당신 마음속에 하나의 생각의 형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구원을 위해 미래를 바라볼 때,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형상 속에 갇혀 있는 것이고, 그것에 에고다.

 

"그리고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성서의 예언자는 쓰고 있다. 새로운 땅을 위한 기초는 새로운 하늘이다. 깨어난 의식이 그것이다. 땅, 즉 외부 현실은 그것이 외부로 반영된 것일 뿐이다. 새로운 하늘의 일어남,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새로운 땅의 등장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미래의 사건들이 아니다. 어떤 것도 미래에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이 곧 깨어남이다.

 

미래의 사건으로서의 깨어남은 아무 의미가 없다. 깨어남은 현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하늘, 깨어난 의식은 성취해야 할 미래의 상태가 아니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은 지금 이 순간 당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당신 머릿속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 너희 안에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예언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매우 적은 숫자의 사람만이 그것을 이해했다. 예수는 말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오늘날의 성서 번역본에서는 '온유'를 겸손으로 번역하고 있다. 온유하거나 겸손한 자는 누구이며, 땅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온유한 사람은 에고가 사라진 사람이다. 그들은 순수 의식인 자신의 참 본성에 눈을 뜬 사람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 모든 생명 형태들 속에서 그 본질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음을 열고 순응하는 상태 속에서 살아가며, 전체와 '큰 근원'과의 하나됨을 느낀다. 그들은 자연을 포함해 우리 행성의 삶의 모든 측면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깨어난 의식을 구체화한다. 왜냐하면 지구 위의 생명은 그것을 지각하고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인간 의식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는 땅을 물려받으리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새로운 종이 이 행성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바로 그것이다!

 

<NOW -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中, 에크하르트 톨레

 

 

제공: Lee-k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