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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 얘기들 !

+ "사자의 서" [죽음의 안내서] 역사 미스터리 탐사 - 히스토리 채널 [ 사후의 삶 ]

 

 

 

히스토리 채널

티베트 "사자의 서" / 역사 미스터리 탐사

 

 

 

 

 

 

 

 

 

 

 

신지학 - 사후의 삶 / 천계 혹은 천국

 

모든 종교들은 하나같이 천국의 존재를 선언하고 지구에서의 삶을 잘 보내면 지복의 즐거움이 따라 온다고 말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천국의 삶을 신이 준 보상으로 간주하나, 대부분의 다른 종교들은 신지학의 관점과 같은 선한 삶을 보낸 필연적인 결과로 본다. 그러나 모든 종교들이 휘황찬란한 용어들로 행복한 삶을 그리지만, 그것들 어느 것도 실재적인 인상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천국에 대하여 쓰여진 모든 것이 우리가 알아왔던 어떤 것과도 유사한 것이 결코 없으며, 많은 설명들이 거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어릴 때부터 익숙해 온 전설들에 대한 이런 부분을 인정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다른 위대한 종교들의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그런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다.

 

불교나 힌두교 문헌에서 금과 은으로 이루어진 나무들과 다양한 보석들이 열매로 열려 있는 끝없는 정원들에 대한 과장된 설명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금으로 이루어진 길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문들에 대한 얘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웃고 싶어질 것이다. 사실은 이런 설명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때 터무니 없는 요소가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고, 율법학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노력하지만 모두가 다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뒤에 가려져 있는 위대한 진리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힌두교 학자는 보통 자주 이용하는 인도 왕들의 화려한 정원들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유대 학자는 그런 것들과 익숙하지 않았겠지만 어쩌면 알렉산드리아 같은 위대하고 웅대한 도시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웅대함의 개념이 어쩌면 도시였을 것이나 물질이나 장식은 지상의 것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각자 나름대로 너무나 웅대해서 말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비유들을 써서 진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천국의 영광을 보고 미약하나마 그것을 묘사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옛날부터 있어왔다. [천계 혹은 데봐챤계(Devachanic Plane)]도 그런 방향으로 노력한 것이다. 엄청나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색깔과 형태에 대한 개념을 전달하고자 할 때, 금과 은, 루비와 다이아몬드들과 같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석양의 색깔과, 하늘과 바다의 장관에서 비유를 찾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이 더 한층 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본 사람들은 우리가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어떤 말로도 그릴 수 없는 실재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실패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스스로 알게 되겠지만.

 

천국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휘황찬란한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주제에 대한 처음의 생각들 중에 하나를 바꿔야 한다.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 상태이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바로 여기 당신이 숨쉬고 있는 공기처럼 당신 근처에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오래 전에 부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빛은 당신 주위에 가득 차 있다. 당신은 당신의 눈에서 굴레를 벗어 던져버리고 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런 굴레를 벗어 던져버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한층 높은 단계로 의식을 높여서 미세한 물질이라는 매체들 속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아스트랄체와 관련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했으며 그럼으로써 아스트랄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과정의 단계를 진전시켜서 의식을 멘탈계로 올리면 그 세계에 적합한 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 체를 통해서 진동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천국의 휘황찬란한 웅대함 속에서 살게 된다. 물론 그런 경험을 한 뒤에는 육체로 다시 되돌아 오고자 하는 흥미가 거의 없게 될 것이지만.

 

보통 사람은 이런 지복의 상태에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하게 되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후에 즉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사후에 자아(Ego)가 서서히 수축해 들어가는 방법을 이미 설명했다. 사실 전체 아스트랄 삶은 지속적인 수축의 삶으로서, 때가 되면 혼이 아스트랄계의 경계에 도달해서 물질계에서 죽었듯이, 아스트랄계에서도 죽게 된다. 즉, 아스트랄계의 체를 벗어버리고 더 높은 고차원의 삶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남겨놓고 간다. 어떤 종류의 고통이나 슬픔도 이 두 번째 죽음에서는 없으며 첫 번째 죽음처럼 무의식 상태의 기간만이 있다가, 거기에서 서서히 깨어나게 된다. 몇 해 전에 [데봐챤 계 혹은 천계]라는 책에서 내가 본 것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가능하면 정리하기 위해서 글로 썼다.

 

아마도 가장 포괄적인 말은, 이곳이 신의 정신 세계(Divine Mind)라는 것이고, 우리는 생각 자체의 영역 속에 있으며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실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을 실재이고, 비물질적인 것은 꿈과 같아서 비실재라 라고 여기는 불리한 습관 하에서 일하고 있다. 반면에 물질적인 모든 것은 바로 이 문제 속에 숨겨져 있으며,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실재가 무엇이든 고차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훨씬 불분명하고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의 세계에 대해서 들을 때, 우리는 즉시 시인들이 말하는 꿈 같은 물질로 세워진 비실재적인 세계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육체를 떠나서 의식을 아스트랄 삶에서 깨어났을 때, 그 첫 번째로 느끼는 감각은 강렬한 생동감과 삶의 실재감이어서 “난생 처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자. 그러나 그 삶을 떠나서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가게 되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삶은 아스트랄 삶보다 훨씬 풍부하고 넓고 강렬해서 어떤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삶 너머에는 또 다른 삶이 있어서, 그 삶이 햇빛이라면 이런 삶은 달빛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의 영역이 물질계 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것이 터무니없게 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이런 삶보다 그런 고차원의 삶을 경험할 때까지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 어느 한 순간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훨씬 그 이상의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세계에서는 무한하며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는 신의 마인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혼에게 무한하게 열려 있지만 그 혼이 받을 수 있는 만큼만 열려 있다. 만약 자신의 정해진 진화를 모두 마쳤다면, 그 씨앗이 자신 속에 있는 신성함을 깨닫고 개화되었다면, 이 전체 영광은 그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는 이전의 노력에 의해서 가져갈 만큼만 인식해서 가져간다. 서로 다른 개개인은 서로 다른 능력을 가져온다. 동양에서 비유하듯이, 사람은 각자의 컵을 가지고 오며, 그 컵들 중에서 어떤 것은 크고, 또 어떤 것은 작지만, 모든 컵은 자신의 용량만큼만 가득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지복의 바다는 모두를 위해서 충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모든 종교들은 천국의 지복에 대해서 말해왔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이 사상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즉 모든 사람은 설명 불가능한 신 자신의 생각의 광휘로부터 선택해서 자신의 천국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사상은 천국의 지복이 어떻게 모두에게 다 똑같이 가능한지 합리적으로 설명해준다. 사람은 지구에서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낸 원인들에 의해서 자신이 보낼 천국의 삶의 길이와 성격을 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정확히 자신이 가질 만큼의 양만을 가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질에 가장 적당한 기쁨의 특질을 정확히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바로 거기에 자신의 의식이 있다는 사실로 모든 존재가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 최고의 영적인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자신의 열망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힘은 단지 열망하고자 하는 능력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구에서 사는 동안 자신의 욕망들과 열망들을 가지고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만들었으며 아스트랄 존재 상태 동안에는 그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기간은 그 성격에 따라서 행복하거나 비참하다. 이제 자신의 성질 중 하위 부분을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이 연옥의 시간이 끝나서, 지구 상에 사는 동안에 쏟아 부은 고귀하고 이타적인 열망들과 고차원의 세련된 생각들만 남아 있게 된다. 이것들이 그를 둘러싸서 일종의 껍데기를 만들며, 그는 그것을 통해서 미세한 물질들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유형의 진동들에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 그를 둘러싸는 이런 생각들이 천상의 부에서 끌어내는 힘들이고, 물질계 및 아스트랄계에서 생활하는 동안 만들어낸 그런 생각들과 열망들의 힘에 비례해서 자신이 이끌어낼 수 있는 무한한 저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모든 최고의 애정과 헌신이 그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남은 게 없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모든 것은 욕망계에 남겨졌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애정이 있다. 하나는 그렇게 숭고한 가치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애착에 대한 대가로 얼마나 사랑을 받을 것인지 항상 생각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보여 주는 만큼의 애정에 대하서 걱정하며 그래서 질투와 의심이라는 나쁜 그물에 얽혀 있게 된다. 탐욕으로 가득 차고 욕심 많은 그런 느낌은 결과적으로 욕망계에서 의심과 비참함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는지 결코 생각하지 않고, 애정의 대상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 붇는 것이 단 하나의 목적인 사랑이며,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런 느낌을 행동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것만을 생각한다. 여기에는 한계가 없다. 왜냐하면 움켜잡지도 않고 자신에게로 끌어 당기는 것도 없으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고, 바로 그것 때문에 아스트랄 물질로 표현할 수 없으며 아스트랄계 차원에서도 그것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훨씬 미세한 물질과 높은 수준의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생겨나는 에너지는 멘탈계에 속한 에너지이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만 생각해서 참배를 하나의 거래로 전락시키는 종교적인 헌신이 있는 반면에, 신성에 대한 관조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진정한 헌신도 있다. 우리들이 가진 최고의 헌신 속에는 결코 만족되지 않은 어떤 것이 있고, 웅대한 열망들이 아직까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이타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의 감정이 물질계에서 표현할 수 있는 힘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과 숭고한 음악이나 가장 완벽한 예술이 우리들 심금을 자극해서 느끼는 심오한 감정은, 지루한 지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깊이와 높이에 도달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고, 그 결과를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일반적인 세계에서처럼 생각과 열망의 세계인 상위계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움직임을 만든 사람에게 작용해야 하지만 물질계에서는 물질의 조잡함 때문에 작용할 수 없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그 필연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린다. 기회가 될 때까지 축적된 에너지로 있게 된다. 그 사람의 의식이 물질계와 아스트랄계에 몰입해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멘탈계로 의식을 이동시키자 마자 그것은 준비가 되어 수문이 열리자마자 그 작용이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정의가 행해지는 것이고, 하위계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것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는 것이다.

 

 

펌.출처: 신지학 / 사후의 삶 - 천계 혹은 천국  http://cafe.daum.net/theosophy/GxP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