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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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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80년에는 5월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해 7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92년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현실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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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파란만장 인생사
2009년 08월 18일 (화) 13:58
[경제투데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 전라남도 목포 앞 바다에서 뱃길로 3시간 남짓 떨어진 하의도(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김운식(74년 작고)-장수금(72년 작고)부부의 4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그의 어머니는 김 전 대통령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학업을 위해 목포로 이사를 결정한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전국 10대 명문중 하나로 손 꼽히던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다. 이때 훗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그는 사실 만주 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1943년 상경, 시험을 합격했지만 징집 위기에 처하면서 당시 일본인 상선회사였던 목포상선에 취업해 경리사원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이한다. 이때 일본인 사주가 물러나면서 경영일선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 친구의 동생이었던 첫 부인 차용애씨(1954년 사망)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정계 입문 과정과 역경의 정치사 해방 후 목포신문 사장과 해운회사 사장을 역임하며 경영수완을 발휘한다. 기업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에게 1956년은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를 정계로 이끈 장면 박사를 만난 것. 그는 민주당에 입당하게 됐고, 장면 박사와의 인연은 종교적인 끈으로 이어진다. 1957년 장면 박사를 대부로 김철규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 것.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도전은 녹록치 않았다. 잇단 국회의원 선거 참패, 조강지처 차용애 여사의 자살 등으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내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1961년 5월 14일 인제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민의원 금배지를 단다. 하지만 이틀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선서도 해보지 못한 채 첫 임기를 마감한다. 이후 이희호 여사를 만나 재혼하고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의정활동에 나선다. 이후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 정무위원 겸 대변인을 거쳐 그해 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70년 치러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과 손잡고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과반의 득표를 얻어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된다. 당시 그는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은 같은 해 10월, 유신이 발생하자 현실화된다. 1971년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540만표를 얻었지만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로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실존적 위협의 상징이 되고, 가혹한 탄압이 시작된다. 투옥과 연금, 살해 위협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재야 인사, 민주 투사의 길을 걸으며 ‘인동초’(忍冬草)라는 별칭을 얻는다. 박정희 정권에서 신군부 정권에 이르는 기간 동안 55차례의 가택연금, 6년여의 옥고, 2차례의 망명을 감수하면서 총 4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일본 망명 중인 1973년 8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당해 동해에 수장당할 뻔 한 일화는 유명하다. 1980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내란음모사건’을 조작,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는 당시 최후 진술을 통해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석방압력을 가속화한다. 국내외 여론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결국 사형에서 무기로, 다시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한다. 그러다 결국 1982년 12월 그는 석방됐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도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다. 1985년 귀국해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 1987년 6월 항쟁 등으로 대통령 직선을 이뤄낸다. 하지만 1987년 겨울 치러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 결정적인 정권교체의 호기를 놓치고 만다. 이후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1992년 대선에 도전하지만,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의 이른바 3당합당에 밀려 패배하고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1993년 영국으로 출국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 1997년 7월 귀국했다. 그해 12월 아시아·태평양 민주 지도자 회의(이른바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 공동의장에 취임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95년 6월 자자체 선거의 지원유세에 나서 조순 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 등 파란을 일으킨다. 결국 그는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그해 9월 민주당을 떠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어 1997년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단일화를 이뤄내고 드디어 1997년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1033만표를 얻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후대에 37년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역사적인 순간으로 평가된다. ◇외환위기의 어두운 터널을 극복 하지만 그가 집권한 1998년은 ‘외환위기 사태’로 기억되는 악몽같은 시간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대가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받았고, 정부는 기업들의 투명성 강화와 부채비율 축소 정책을 추진한다. 이 같은 구조조정 과정은 절차상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8조4000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을 외국계 펀드 뉴 브릿지 캐피털에 5000억원이라는 헐값으로 매각한 일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 외에도 벤처 기업육성 정책은 벤처 버블을 야기하게 됐고, 소비 활성화와 내수 진작을 위한 정책은 신용카드 산업의 무차별한 확장을 막지 못하며 카드대란 사태가 발생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결국 2001년 IMF에 빌린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면서 4년여에 걸친 외환위기 사태는 막을 내리게 된다. ◇대북관계 '햇볕정책'으로 노벨평화상 수상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인다. 북한과의 화해, 협력 등을 강조하는 이른바 ‘햇볕정책’은 새로운 대북 온건정책을 제시한다. 결국 2000년 6월15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며 그의 대북정책은 꽃을 피운다. 같은 해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한국 인권향상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그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도중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군의 군사분계선 침범으로 제 2연평해전이 발발해 참수리급 고속정 1척이 침몰하고 5명의 군인이 사망, 18명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기도 한다. 2003년 퇴임한 김 전 대통령은 2004년 1월 29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판결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 신군부로부터 짓밟혔던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이후 현실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강연과 집필활동 등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민동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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