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 저널 제 32권
전기와 중력의 특성
사난다가 남겨 둔 주제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
1. 일반적으로 관찰자들이 ‘중력[gravity]’과 ‘자기력[magnetism]’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자연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들은, 사실상 ‘전기적 잠재력[electric potential]’에 그 원인이 있다.
2. 태양과 같은 질량 덩어리의 중심에는 인력적인 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폭발력을 갖는 열과 압력의 최대값적 중핵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열은 팽창하려 하며, 격렬하게 바깥방향으로 빠져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수천, 수만개의 태양들이 폭발해 왔습니다. 이들을 보통 신성[novas]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대부분은 우주공간의 냉기에 의해 식혀지고 다시 갇힌 상태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성의 폭발 가운데 가장 컸던 것으로, 게자리 성운[Crab Nebula]이라고 알려진 것이 있습니다. 이는 아주 최근에 발생한 폭발로, 대단한 장관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이 신성은 당신들과도 관련이 있는 별이었습니다.
이러한 별의 변화들에 대한 주의깊은 연구를 통해, 당신들은 우주공간의 냉기와, 그 전기적 분리에 저항하려 하는 신성들이 만들어내는 열기 사이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대규모의 마찰을 뚜렷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된 오도된 결론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당신들의 행성위에서의 당신들의 과학적 진보를 가로막아 왔습니다. 이러한 결론들에 대한 수정은 오늘날 여러분들의 진보를 돕는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질 것입니다.
과학 교과서들은, 전기는 두가지 종류, 즉 양극과 음극을 갖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저는 이러한 개념이 얼마나 불가능하고도 비논리적이며, 또한 물질의 구성에 있어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과정에 반하여, 이 개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여기 제가 반복적으로 언급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전기는 오직 한가지일 뿐이라는 점입니다—전기는 평형 상태를 동등한 쌍으로 분리시킨 후, 하나의 정지된 중력 지점 주변부로 폭발적인 상태를 형성해 내도록 뭉쳐질 때까지 이들을 다시 압축시킵니다. 이러한 목적성이 완료되었을 때, 전기는 서서히 전체 질량 덩어리 속에서 죽어가게 되며, 그러한 과정은 그 덩어리 속에서의 모든 움직임이 완전히 멈춰질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전기는 어떠한 것을 압축시키기 위해 두 개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타이어에 바람을 불어 넣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가해지는 힘을 통하여 타이어를 팽창시키게 되며, 그 힘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작용합니다. 당신이 그 방향으로 보다 더 큰 힘을 적용하게 되면, 타이어 내부에서의 저항 압력은 타이어 바깥과 비교해 볼 때, 보다 배가되어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타이어를 잠그는 벨브를 열어버리면, 타이어 내부의 압력은 바깥 방향으로 분출되어질 것인데, 그 때 그러한 압력이 속박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어떠한 다른 종류의 전기적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평형 상태를 찾게 되겠지만, 이 과정에서 이를 돕는 다른 형태의 힘은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주공간상의 진공상태는 우주적 평형상태입니다. 그러한 자연적 정상상태[normal condition]로부터의 이탈을 위해서는 그 이탈을 위한 힘이 요구되어지고, 그러한 힘은 또한 긴장과 부담이 동반된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영점상태의 우주[The zero universe]는 긴장과 부담이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물질들은 압축된 움직임들입니다. 모든 압축된 움직임들은 폭발력을 갖습니다.
이는 정확히 당신이 긴장과 부담을 가진 상태가 되도록 압력을 가한 타이어가 갖는 상태와 같은 상태로서, 그러한 물질들 또는 타이어에는, 우주적 균형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만들어내는 내부적인 힘이 그 속에서 끝없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깥방향으로 폭발하고자 하는 욕구는 모든 물질들에 내재되어져 있는 속성인 것입니다. 그 어떠한 물질도 자기 자신에게 다른 물질을 끌어당겨 함께 뭉쳐지고자하는 욕구를 갖지는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탄성력을 띤 물건을 늘어뜨려, 그 정상적인 균형상태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려는 시도를 해 본다면,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데 보다 도움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 물건을 늘어뜨리는 데에는 분명히 힘이 가해져야 하지만, 그 물건이 정상상태로 되돌아 가도록 만드는 데에는 어떠한 힘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탄성 물체를 늘어뜨림을 통해, 당신은 비정상적인 상태 속에서의 긴장과 부담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영점상태의 우주는 균형이 잡혀져 있습니다.
자연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균형이 깨어졌을 때, 궁극적으로 우주적 진공상태 속에서 균형을 찾게 되며, 이러한 상태는 우주공간의 단 하나의 정상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상상태는 또한 모든 결과들의 원인이자, 모든 에너지들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아마 당신은 지금쯤 과학 분야의 가장 위대한 석학들도 풀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던 거대한 미스테리를 풀 수 있게 되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그 미스테리란, 어떻게 물질이 우주공간으로부터 생겨나고, 또 어떻게 우주공간이 그 물질을 다시 집어삼키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초기의 과학자들은 전기가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한가지가 아닌, 두가지의 상반되는 극성을 띤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의 반대되는 상태들, 즉 삶과 죽음—성장과 부식—가열과 냉각—극화와 비극화,, 뿐만 아니라, 모든 기타의 움직임의 결과들도, 겉보기에 뚜렷히 상반되는 두가지 힘들이, 또한 겉보기에 뚜렷히 상반되는 두 방향으로 표출되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반되는 방향들도, 또 어떠한 상반되는 힘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같은 방향 속에서 같은 힘을 표출하는, 나누어진 성(性)들[divided sexes]만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힘, 즉 하나의 힘은 압축[compression]이며, 같은 방향, 즉 하나의 방향이란 나선형 방향[spiral]입니다. 마치 두가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뭉쳐졌을 때 하나가 됩니다. 그 각각이 반대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그들은 뭉쳐질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 각각이 상반되는 것이라면 역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감각에 기반한 인간들은 잘 속기 쉽습니다. 감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펼쳐지고 있는 바의 정반대가 되는 것을 믿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초기의 과학자들은 움직임이란, 정지상태의 교란으로부터 야기된, 우주적 비정상성[cosmic abnormality]의 상태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우주의 정상 상태란 안정화된 상태입니다. 움직임이란 안정 상태로부터 생겨난 결과로서 다시 그 안정 상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 ‘움직임의 우주’는 돌이 던져진 상태의 호수에 비견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호수의 ‘정상적인 고요함[the normal quiet]’은 하나의 ‘힘’에 의해 교란되어집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다른 ‘힘’의 도움없이도, 호수의 ‘정상적인 고요함’은 되찾아지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만드는 어떠한 반대적인 힘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 양자는 겉보기에 반대되는 압력으로부터 만들어진, 창조주의 영점상태의 우주인 우주적 진공상태로부터의 교란에서 생겨난 것으로, 역시 겉보기에는 마치 반대되는 결과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뿐만 아니라, 열과 소리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 즉 힘의 적용에 의해 생성되어지는 모든 것들은, 다른 전기적인 힘의 도움없이도 그들의 정상적인 안정 상태로, 또는 단 하나의 우주적 나선형 방향을 향하는 변화 속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같은 자연의 중심적이고도 기본적인 특징—바로 수세기에 걸쳐서 그 수많았던 위대한 과학자들을 잘도 속여왔던 이 자연의 특징을 당신들이 이제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시 타이어 이야기로 되돌아 가고자 합니다. 주변의 상태보다 훨씬 높은 압력으로 당신이 바람을 불어 넣었던 그 타이어 말입니다. 타이어의 압력은 바로 밀봉된 외피에 의해 유지되어집니다. 하지만 타이어를 완벽하게 밀봉하기란 아주 어려운 문제로, 어딘가로부터 조금씩 압력은 새어나가게 됩니다.
항상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은 움직임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움직임은 전기적입니다. 그리고 전기는 나선형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또한 그러한 나선형 방향으로의 움직임은 항상 쌍을 이룬 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전기의 흐름이 있는 곳 어딘가를 잘라 그 단면을 볼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은 전기가 흐르고 있는 가운데 공간 주변부를 회전하는 고리들이 만들어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험해 보십시오. 이를 시각화 할 수 있도록, 소개관[evacuated tube]을 충분한 공기 또는 증기로 채운 다음, 이 관을 따라 전류를 흘려 보내 보십시오.
당신은 전기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고리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를 검은 빈공간 주위를 회전하는 빛의 고리들로써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보게 되는 이러한 고리들은 창조의 “궁극적인 입자들[ultimate particles]”의 분리와 확장인 것인데, 자연상태에서는 이러한 고리들의 ‘열림과 닫힘’ 이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존재하는 모든 형태들의 기초이자 질료들입니다. 이들이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생겨나느냐에 따라서, 물질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리들이 사라질 때, 물질도 사라지게 되며, 이와 더불어 물질들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결과들, 즉 소리, 색, 열, 형태, 밀도, 차원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반복하자면, 이 ‘움직임의 우주’는 완전히 전기적이며, 어떠한 힘[power]이나 특질[quality]도 존재하지 않고, 내부로부터 안쪽으로의 당김을 야기하는 ‘전기’ 속에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기는 오직 한가지 뿐인 것으로서, 전기적 잠재력[electric POTENTIAL]이라고 알려진 응축된 압력상태의 생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전기는 쌍을 이루는 속에서의 나눠짐이 형성되어질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적 진공 상태의 저항에 반하여 가해지는 것으로서, 이 우주적 진공 상태는 궁극적으로 이처럼 압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전기의 모든 시도들을 재정복해 버리고 맙니다.
물질의 구성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기본원리은, 4개의 고리를 가진 항존하는 진공 상태 속에서의 안정적 영역을 둘러싸는 환경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분리되고 확장된 쌍으로서 존재하는 고리들의 압축은, 빈 공간이 제거되어질 때까지, 작열하는 탄소의 태양들이 그 빈 공간들을 점령해 버릴 때까지 계속되어집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빈공간이 회복될 때까지 태양들은 그 4개의 고리를 벗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전기는 압축을 만들어 내는 반면, 진공의 영점상태[zero vacuum]는 팽창을 만들어 내는 마음-에너지[Mind-energy]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우주는 압축과 팽창의 펌프와도 같습니다. 피스톤 활동의 한 끝은 영구적인 진공상태[eternal vacuum] 속에 존재하며, 피스톤 활동의 나머지 한 끝은 전기적 잠재력의 압력[pressures of electric potential] 속에 존재합니다.
나무가 성장하는 것, 호수 속에 돌을 던지는 것등의 모든 ‘전기적’ 행동들은, 자연 속에 다 기록되어지는 것으로서, 그러한 움직임 속에, 빈 공간과 함께 고리들을 생성해 내게됨을 기억하십시오. 어린 나무는 마치 하나의 튜브와 같은 상태에서 생장을 시작하지만, 압축을 통해 그러한 빈공간을 폐쇄시켜 버리고, 점차 더 딱딱해집니다. 그런 다음에, 무수한 고리의 층들로 구성된 이 딱딱한 나무가 마침내는 서서히 내부적 “공간”을 형성해 내게 되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공간이 나무의 전부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 나무가 완전히 그 빈 공간들 속으로 사라져버릴 때까지 역방향의 진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체의 일부를 잘라 횡단면을 관찰해 본다면, 당신은 그것이 빈 공간을 둘러싼 고리들로 구성되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가슴, 당신의 두개골, 당신의 뼈, 혈관, 심장, 숨통, 신경, 그리고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전기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전기는 그 빈 공간들을 메워버릴려고 할 것이지만, 수백만번의 시도 중에 극소수의 몇 번에 걸쳐서만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기체적인 생명체는 완전히 딱딱해질 수는 없는 구조체로서, 심지어 코끼리의 상아조차도 완전히 딱딱해지지는 못합니다. 신체는 빈공간에 의해 중심이 잡혀 있고, 신체의 모든 세포들은 많은 구멍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도처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물들은, 원자핵이라는 비자연적이고, 불가능한 상태에 저항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자연물들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세포들은 그 단면상에 고리들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들은 4쌍의 고리의 결합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자연은 또한 미스테리하고도 신비적인 성격의 우주적 ‘아교[glue]’, 즉 핵 속에 원자들을 붙들어 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 ‘아교’의 개념에 저항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원자들은 오직 바깥으로부터의 압력과,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밀봉의 역할을 하는 냉기에 의해서만 뭉쳐져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원자적 덩어리의 내부는 발열기이자, 또한 열량 소모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원자적 단위들은 차가운 중심점들을 갖지만, 결합된 원자적 덩어리들은, 그들의 목적과 위치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뜨거운 중심점들을 갖습니다. 원자적 덩어리로 된 세포들은 전기적으로 그러한 열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조건지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세포가 어떠한 온도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 세포는 열을 발산하려고 하지, 열을 가지고 있을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세포 자체는 아교의 역할을 한다기 보다가는 폭발성을 띠는 것입니다.
관찰자와 연구가들이 전기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어야만 한다고 판단하도록 만든 추론 과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움직임의 결과들을 관찰하였던 초기의 과학자들의 사고와 추론방식 속에, ‘우주적 진공 상태’의 개념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개념이 부재했기에, 그들은 가장 본질적인 전제, 즉 창조는 마음[MIND]의 산물이라는 기초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부차적으로, 그들은 열이 움직임을 야기하는 현실적인 것이라고 가정하고, 냉기는 단지 열이 없는 상태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냉기야말로 영구적인 미창조적 원인[eternal uncreated CAUSE]이 되는 것으로서, 열은 냉기로부터 창조된 하나의 결과라는 가정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열이 움직임의 원인이 아니라, 그 반대가 사실인 것입니다. 열은 움직임의 결과입니다. 열과 움직임, 양자 모두는 ‘우주적 안정’에 비추어 볼 때, 비정상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전기의 개념에, 한쪽 방향으로 향하는 전기의 개념, 즉 배증되어질 수 있는 잠재력이면서, 동시에, 배증되어질 수 있는 열을 압축시켜 둔 단일 방향성으로의 전기의 개념을 더해 볼 수 있습니다. 반대방향으로의 흐름이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또한 필요한 것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모든 전기적 효과에는 두 개의 극, 즉 두가지의 반대되는 상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직 한 방향으로의 움직임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열리는 우주[opening universe]와 닫히는 우주[closing universe]라는 두가지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이 두가지 모두는 변치않는 단일 방향성 속에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위 단락 중 한 문장을 반복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새겨 들어야 하며, 또 나중에 다시 위로 되돌아가서 재참조하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것은 열리는 우주와 닫히는 우주라는 두가지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이 두가지 모두는 변치않는 단일 방향성 속에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양성으로 분리된 상태’라는 개념을 이러한 초기의 과학자들은 간파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러한 생각 자체에 이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sex]이란 유기체적 생명체의 기능이며, 성이 비유기체적 물질의 원자적 생명성의 특질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들은 스펙트럼의 적색과 청색으로의 분리도 역시 그러한 개념에 바탕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장력(張力)[tension]의 개념이 전기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즉, 스펙트럼 색상 분리의 장력은, 움직임의 색상들이 우주적 고요함[universal stillness]의 자기적 백색[Magnetic White Light] 속으로 소실되는 과정 속에 요구되어지는 단일체라는 것, 달리 말하자면, 이는 무성의 단일체[unity in sexlessness] 속에서 요구되어지는 부성과 모성[Father-Motherhood]이 부성체와 모성체로 표현되어질 때의 양성분리적 장력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두가지의 반대적 개념, 즉 압축과 팽창이라는 것이, 집중과 분산—성장과 부식—삶과 죽음—, 또는 극화[polarization]와 비극화[depolarization]의 원칙과 함께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도 고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몇몇 과학자들은, 쿨롱[Coulomb]의 법칙, 즉, 물질은 반대의 극으로 “충전된[charged]” 전기적 물질을 끌어당기고, 같은 극으로 “충전된” 물체는 밀어낸다는 법칙에 강한 확신을 가진 채, 원자의 구조에 대한 개념들을 그려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러더포드[Rutherford]와 보어[Bohr]). 자석의 한 극은 너무나도 분명히 반대의 극을 끌어당기고, 같은 극을 밀어내는 것처럼 보여졌기에, 다른 어떤 것도 이 법칙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그 각각의 성안에서는 단일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은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전기와 관련해서도 성의 개념을 그들이 떠올릴 수 있었더라면, 결코 쿨롱의 법칙이나 원자의 핵과 같은 개념들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자명한 사실’보다가도 ‘감각과 추론[sense-reasoning]’을 통한 확신이 더 컸기에, 전기에는 두개의 극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비록 전기의 흐름은 오직 한 방향으로 향할 뿐이지만, 그것이 두 방향을 향해야만 할 것 같은, 입증되지 않은 의심만을 가지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분리된 음극[cathode]으로부터 반대방향으로 펼쳐지는 두 개의 극들, 그리고 이 두 극들은 양극[anode]으로부터 반대방향으로 펼쳐짐을 통해 서로서로 접근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많은 혼동들이 또한 야기되어져 왔습니다. 바로 이를 통해, 전기가 반대되는 방향을 갖는 두가지 극들로 되어있다는 믿음, 또 그 중 하나는 끌어당기고 다른 하나는 밀어내는 성질을 갖는다는 믿음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극성은 움직임이 아니다(polarity is not motion)’라는 것입니다.
극성은 움직임의 중심을 잡는 중력의 고정됨[stillness of gravity]인 것입니다. 움직임이란 중력의 가장자리를 영구적으로 회전하는 전기적 고리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고리들은 그들의 항존(편재)하는 중력 통제부[omnipresent gravity controls]의 주변을 도는 하나의 방향성만을 가질 뿐이며, 또 이 고리들은 두가지의 분리된 효과들의 원인이 될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효과들 가운데 하나는 구심력이고, 다른 하나는 원심력입니다. 바로 이러한 두가지 효과, 즉 삶과 죽음의 효과로 인하여, 이 우주는 어쩌면, 두 방향의 열리는 우주와 닫히는 우주, 그렇지만 실상 한가지 방향성을 띤 우주로 묘사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기에는 두 개의 극이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몇가지 새롭고 중요한 발견들도 있었습니다. 각각 서로 대응되는 것들로, 전기에는 두가지 극성이 있다는 믿음을 여러분들이 부인할 수 없게끔 만들었던 이러한 발견들 가운데 한가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는 여러분들 각자가 스스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인데, 브리테니커[Britannica] 백과사전에 보면, “전자 튜브[Electronic Tube]”라는 제목으로 된 부분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꼭 필요한 ‘사실’보다가는 차라리 “권위주의적인[authoritative]” ‘사실’을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는 것처럼 서술되어져 있습니다. “에디슨[T. Edison]은, 마치 음극의 입자가 필라멘트로부터 방출되듯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즉 뜨거운 필라멘트에서 밀폐된 공간 안의 차가운 금속 판으로 나아가는 전기의 흐름을 관찰하였다.” 여러분들은, 테슬라[Tesla]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에디슨은 테슬라가 알아낸 정보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떻게 이 사실이 당시에 잘못 이해되어졌던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 이 실험 자체가 아닙니다. 에디슨이 관찰했던 전기적 흐름은 균형을 찾으려는 열화된 상태[heated condition]로부터의 방사였습니다. 이것은 밀폐된 튜브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태양광선 아래에 손을 대고 있으면 따뜻하게 느껴진다거나, 또는 방안의 전기 난로로부터 신체가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효과인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복사 에너지[Radiant Energy]로 알려져 왔습니다. 복사(방열)[radiation]는 전기적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생성(발열)[generation]역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압축하고, 다른 하나는 팽창합니다. 그러나 이는 똑같은 전기적 흐름으로서, 이러한 전기적 흐름은 온 우주를 돌아다니고, 심지어 당신의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부터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방의 한쪽 구석에 뜨거운 쇠를 두고, 다른 쪽 구석에 얼음덩어리를 두었을 때, 이는 양방향으로 흐르는 전기적 흐름을 만들어 내고, 이러한 흐름은 쇠와 얼음과 방이 모두 같은 온도가 될 때까지 계속되어집니다—나는 당신들, 탐구자들과 발명가들이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당신이 두 개의 뜨거운 쇠를 방의 반대편 구석에 각각 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납니다. 차가운 쪽으로 솟아 오르는 따뜻한 물은 전기적 흐름을 만들어 내지만, 이러한 사실이, 전기의 한 극이 차가운 물을 밀어올리고, 다른 극이 반대쪽을 꺼집어 내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종류의 물이 있는데, 한가지의 물이 올라가고, 다른 한가지의 물이 내려간다는 ‘합리적인 추론’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은 전기의 한 극이 사람을 살게 만들고, 다른 한 극이 사람을 죽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전기는 자신의 속도를 증대시킴을 통해, 전기가 갖는 잠재력을 배증시킬 때, 구심력을 띠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속도를 증대시킴을 통해, 전기가 갖는 잠재력을 감소시킬 때, 원심력을 띠는 것입니다.
전기는 움직임입니다—어떤 종류의 움직임이건, 또는 움직임의 단계이건 간에 다 전기입니다. 두 극의, 즉 두 종류의 전기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의 전기만이 있고, 바로 이 한가지 전기가 자신이 갖는 사이클의 첫번째 절반동안에는 압축을 위해, 나머지 절반의 사이클 동안에는 분리를(팽창을) 위해, 자신이 갖는 힘을 배증[multiply]시키는 것입니다. ‘속도’를 ‘높은 잠재력’으로, ‘높은 잠재력’을 ‘속도’로 오인함을 통해, 많은 혼동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예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
음극(cathodes)으로부터 방출된 4쌍의 고리를 압축시켜 물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 중력의 축[shaft of gravity] 주위를 도는 전기적 흐름의 속도가 끝없이 증대되어야 하고, 또한 그 속도 증가와 더불어 부피의 감소가 동반되어 충돌이 발생할 때까지 계속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적으로, 충돌로 생겨난 전기적 단위체의 회전 속도는 점점 늦춰져서, 충돌 이후에 완성된 이 단위체적 덩어리가 최소한의 수준에 이르게 될 때까지 감속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으로부터 모든 효과는 그 역의 효과를 갖게 됩니다.
행성들이나 위성들을 포함하여, 하나의 질량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분리된 단위체들은 그들 제각각의 중력축을 중심으로 한 회전속도가 점차적으로 늦춰지는 반면, 각각의 단위체들을 있게 만들었던 그 원래적 중력축을 중심으로 한 개별 단위체들의 회전은 점점 더 빨라지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속도는 잠재력은 낮추고 부피는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 수성과 수성 너머에 있는 다른 행성들은 끝없는 감속 과정과 함께, 태양에 위치해 있는 그들의 본래적 중력 축 주위를 원심성을 띤 채 돌고 있습니다. 반면, 행성들 자신들의 축을 중심으로 한, 행성 저마다의 회전 속도는 점차적으로 크게 증대되어, 각 행성들은 각각 증대되는 원심력으로 인해 빠르게 분해되어지는 것입니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이것이 모든 전기적 효과의 특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삶, 그리고 성장이라는 부르는 것들, 또 각각의 변화를 역행시켜 죽음과 부식에 이르는 과정들에 관한 기본적인 원칙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움직임 역시 두가지의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임은 그것이 빠른 움직임이든, 느린 움직임이든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공기 역시 그것이 뜨겁든, 차갑든, 같은 종류의 공기입니다. 특히 움직임은 그것이 여러가지 종류의 것이며, 또 여러가지 실체를 가진 것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이들 모두는 같은 ‘것’의 여러가지 상태들일 뿐입니다.
이 우주 전체에 걸쳐서 우리는 오직 두가지의 기본적인 원리를 가질 뿐인데, 그것은 바로—쉼과 움직임[Rest and Motion]인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모두는 박동하는 영화[pulsating cinema]로서 이것이 바로 창조주[Creator]와 창조[Creation] 양자 모두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확장되어져 감에 따라, 인간은 서서히 우주를 보다 단순하게 바라 보게 될 것이고, 또 인간이 ‘마음의 현실[the reality of Mind]’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움직임’에 대해서 점점 더 적게 의존적이 되어감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덜 혼동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는 전기를 이용하여 창조합니다
전기적으로 충전된 육체는, 그 육체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마지막 자취가 떠나가 버릴 때까지, 여전히 충전된 상태의 육체인 것입니다. 당신의 자동차 밧데리도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방전되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한, 다시 재충전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신은 음성적 상태, 또는 비어진 상태라고 적절히 부를 수도 있겠으나, 아무도 방전되어가는 육체를 두고, 그것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음성적으로 “충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음전기’ 또는 ‘음전기적 충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의 용어를 ‘침묵 상태에 있는 소리’ 또는 ‘죽은 생명’에 대해 사용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성적[negative]’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부정하는 것—무효화시키는 것—속이 비게 만드는 것, 또는 마이너스가 되는 것등이라 하겠습니다. ‘채운다(충전시킨다)[to charge]’함은 어떤 것에 더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성적 채움(충전)이라는 표현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또 적절하지도 않다고 할 수 있겠는데, 문자그대로의 의미라면, ‘뺌’으로서 ‘더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창조주가 육체(물체)[bodies]를 만들어 낼 때 사용하는 힘입니다. 육체(물체)는 진공상태에서의 ‘전기적 교란[electrical disturbances]’입니다. 전기가 이러한 교란 상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전자 공학의 원칙이란, 진공상태에서 전기가 무엇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소형화된 예[miniature exampl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공 튜브는 그것을 분리시키는 어떠한 전기도 갖지 않은 채로 있는, 우주의 정상적인 ‘쉼[rest]’의 상태입니다. 진공 튜브 안에서 빛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전기는 항존하는 우주로부터 생겨났다 다시 그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전기는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게 되었을 때, ‘전기’이기를 멈추게 됩니다.
당신이 ‘전기적 팽창’이라고 이야기할 때,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약화되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데, 비유할만한 예를 들자면, 사람이 아직 살아있기는 한데, 죽어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기자체는 팽창하지 않으며, 전기의 어떠한 측면도 팽창적이지 않습니다. 전기는 단지, 잠재력과 속도가 낮아짐에 따라 약화되어질 뿐입니다.
전자 튜브가 진공화되었을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기적 소요와 긴장[electric commotion and tensions]’이, 그 전자 튜브 안은 ‘쉼의 영점 상태[zero state of rest]’로 남겨둔 채, 그 곳으로부터 떠밀려 나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곳을 통과하도록 보내지는 전기의 흐름은, 그러한 전기의 흐름을 야기하는 그 속에서의 움직임의 패턴을 기록하게 됩니다. 진공 상태는 다른 움직임의 패턴으로부터 새로운 움직임의 패턴을 절연화시키게 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움직임의 패턴이 그 튜브안을 점령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절연화된 그 새로운 움직임의 패턴과 마찬가지의 패턴이 그 튜브로부터 방사되어질 수 있고, 이러한 패턴 자체는 우주의 어느 곳에서건 반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튜브는 정확히 고요한 상태 속에 있는 영점화된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영점화된 우주는 움직임의 복잡다단한 우주를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작용에 대해서 보다 깊이 연구하게 된다면, 자연적 과정[Nature’s processes]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이 점점 더 발달하여, 어떠한 다른 압력이나 패턴으로부터의 간섭작용 없이 제로 상태로부터 생성되는 패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러한 동일 패턴들을 재창조해 내고, 또 그 속에 있는 중력적 통제력에 따라 이를 배증시켜나가는 원칙들에 대해 당신들이 더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당신들은 실용적으로 보다 새로운 전자 공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공학도들이 전기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알아 나갈 때, 또 전기적 압력과 이 전기적 압력을 통제하는 자기적 우주[the Magnetic universe]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들을 알아 나갈 때, 전자공학의 실용성은 어마어마하게 커져갈 것입니다. 아직은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이러한 새로운 과학은 이미 인간들의 삶에 놀랄만한 변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러한 학문이 발달하면 할수록, 계속적으로 더 큰 변화들이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 학문이 안고 있는 핸디캡이라면, 바로 비효율적인 튜브와 비효율적인 투사(방사) 체제[projection apparatus]에 있습니다.
이 둘 중 그 어느 것도, 최대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자연이 만들어 둔, 옳은 원칙에 따라 구성되어져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간상의 기하학에 관련된 파동의 원칙과 레이더의 원칙의 비밀들에 대해서 전자 공학도들이 더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점점 더 발전해 나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이 습득하게 되는 새로운 지식에 비례하여서만 진보하고, 또 그러한 진보는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새로운 발견들에 따라, 기존 개념들을 폐기해 버리는 일을 마땅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 특정 영역에 관한 논의만을 더 전개시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러분들 각자각자가 전자공학 분야에서 매일 같이 이루어지는 발전들에 대해 보다 더 정통할 수 있게 되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기술적 전문성은 차치하고라도, 전자공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패턴을 당신이 튜브안에 집어넣게 되든, 그것이 소리이든, 그림이든, 움직임이든, 무엇이든 간에, 당신이 집어 넣은 것과 동일 패턴에 해당하는 것이 그 튜브로부터 다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만들어 내는 소리나 움직임 자체가 튜브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건 당신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 역시 아무것도 튜브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며, 파동 패턴의 전기적 기록들, 빛과 소리의 파동 패턴들, 그리고 파동이 기록하는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파동의 패턴들이 튜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기서 당신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바로 그 전기적 흐름에 주파수를 맞추기만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튜브 안에 집어 넣은 것을 당신이 원하는 한 언제든지, 또 여러 번에 걸쳐서 다시 듣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라고 할 것 같으면, 전기는 수신과 기록의 자연 원칙이며, 동시에, 영점화된 우주[zero universe]는 방송의 원칙과도 같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우리를 데려가게 되는데, 이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는 잠시 템포를 늦추고, 깊은 숙고를 가져봐야 됩니다. 그 핵심이란 바로, 영점화된 보이지 않는 우주[Zero invisible universe]는 창조의 생각하는 마음 에너지의 원천[THINKING-MIND-ENERGY-SOURCE OF CREATION]이며, 모든 물질화된 객체들은 오직 마음과 사고[MIND-THINKING]의 기록들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은 만약 그들이 가치있는 무언가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단지 그 가치를 갖는 바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 속에서만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가치의 원천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게도 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전기는 ‘움직임’을 압축하여 겉보기에 형태와 효과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 압축된 움직임이 방출되어졌을 때, 예를 들면,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이것이 방출되어졌다고 할 때, 이 소리는, 어떠한 힘(그것이 무엇이건 간에)의 도움 없이도, 영점화된 우주 속으로 팽창됩니다. 당신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소리가 당신의 육체가 갖는 밀도 속으로 재압축되어짐을 통해 전기적으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전기적으로 압축된 육체는, 재탄생된 이 죽어가는 소리에 대한 수신장치가 되는 셈으로, 절벽의 벽면이 메아리 속에서 소리의 재탄생을 위한 수신장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인 것입니다.
이 때, 필수적으로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마음과 사고[Mind-thinking]의 전기적 생각-기록[electric thought-record]체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를 전기적으로 충분히 활성화시켜서, 당신의 사고가 만들어 내는, 당신이 갖게 되는 이미지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한, 이러한 생각-기록체인 당신은 우주적 진공 상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습니다, 소위 말하는 ‘은줄[silver-cord]’이란, 바로 ‘보이지 않는 전기적 연결선[invisible strand of electrical connection]’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사고-기록체로서의 모든 창조물들에,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에 적용되어지는 것으로서, 이들은 얼마간 움직였다가 다시 쉼의 휴지기를 갖는 동안, 우리가 씨앗들[seeds]이라 부르는 작은 전자 튜브들 속으로 되감겨 들어가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기적 흐름을 이러한 전자 튜브 씨앗들[electronic tube seeds]로 보내게 될 때, 그 전기적 흐름에 해당하는 것이 우리자신에 관한 것이든, 나무에 관한 것이든, 태양계에 관한 것이든, 우리는 이를 얼마든지 반복적으로 다시 보고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만으로도 불멸성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연의 영원한 전자적 진공[the eternal electronic vacuum of Nature]상태 속에는, 모든 시간에 걸친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들이, 비차원적이고 항존하는 공간 속에 감겨 들어가 있는 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전자 튜브가 당신에게 밝혀줄 또 하나의 교훈, 즉 차원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명상을 통한 내부 감각적 인식의 영적 전개가 이루어지는 동안, 당신은 차원이란 단지 상상되어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앞 50마일에 걸쳐 펼쳐져 있는 광활한 땅과 건물들과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당신 눈 속에 있는 비차원적인 공간 상의 한 점 속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이를 단순히 ‘깨닫게’ 될 때, 그러한 깨달음은 아마도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차원이란 상상된 결과물이라는 앎의 습득’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딛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 우주는 비차원적인 마음-앎[Mind-Knowing]의 상태 속으로 축약되어질 수 있고, 이 마음-앎의 상태는 그 영원한 제로 상태로부터 확장되어지는 상상된 우주의 원인이 되는 것이며, 또한 이 상태는 결코 원인에 있어서[in CAUSE] 제로를 초과하지 못하지만, 결과에 있어서[in EFFECT], 차원에 의해, 제로를 초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우주를 창조하지만, 형태나 사건들이 그 상상하는 바의 일부이듯이, 차원 역시 그 분이 상상하는 것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멸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단지 신비로운 개념인 채로 남아 있는 어떤 한 사람이, 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그 자신에게 놀라운 교훈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적 보편성에 관한 보다 더 큰 교훈은, 이러한 것에 대해 숙고해 보면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의 미시적인 씨앗으로부터 나무가 자라고, 인간의 육체가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을 경이롭게 관찰해 왔습니다. 패턴화된 전자 튜브 속에 들어 있는 기록들을 다시 펼쳐내는데 쓰이게 될 전기의 흐름을 생성해(이해해) 내기 위해,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앞마당에 씨앗을 심은 날로부터도 이제 여러해가 지나갔습니다. 자연의 전자 튜브 씨앗들은 그 속에 감겨져 들어가 있는 저마다의 영상(영화) 패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제 이 패턴들을 자신들의 영화관에서 각각 틀어봐야 될 것이고, 또한 이러한 상연을 위한 영사기는 인간들이 만든 영사기여야 할 것입니다—반면 자연의 영사기는 지구의 모태인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상연을 위한 조건들이 갖춰지기만 한다면, 이 패턴화된 미시적 이미지는 삼차원적인 양상 속에 항상 재상연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설명은 인간 복제의 개념, 그리고 그 복제 인간 속으로 단순히 “마음”을 다운로드시키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얼마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씨앗”의 전기화[electrification]일 뿐인 것입니다.
현재 당신이 미국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작은 전자 씨앗 튜브가 수천마일 떨어진 아프리카 땅에 심어져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만약 당신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면, 그 튜브는 당신의 인식범주에 상당히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시적 씨앗 안에서, 심각한 충돌이, 사람들, 비행기들, 총들이 등장하고 다툼이 벌어지는 그러한 충돌이 벌어진다고 합시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지라도, 바로 그 기록 씨앗으로부터 벌어지는 일이, 동시적으로 다른 씨앗들로, 곧 당신의 방안에 있는 씨앗들로도 전개되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로부터 수천마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과 같은 수백만의 사람들은, 지구상의 수백만 군데에 이르는 특정 지점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동시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주적 보편성과 모든 것들의 편재성(遍在性)[omnipresence]에 대한 교훈을 당신에게 남겨주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 화산이 폭발했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 함께 지켜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차원은 어디에 있고,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만약 전자적 씨앗으로부터 전개되어지는 사건이, 지금 당신의 방안에서도 펼쳐진다고 할 때, 또 이 무차원적인 씨앗이 수백만개의 다른 방안에서도 동시적으로 전개되어진다고 할 때, 어떻게 당신은 이것이 수천마일 떨어진 곳의 일이라거나, 혹은 수주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큰 줄자로 거대한 떡갈나무의 높이를 재고, 또 그 나무가 갖는 여러가지 차원들을 측정했는데, 그 떡갈나무가(그 씨앗의 기록대로 전개되어져 있었고, 당신 눈앞에 서 있었던 그 떡갈나무가) 이내 존재하던 차원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당신은 당신이 자를 가지고 측정했던 차원들, 그리고 그 무게와 같은 것들이, 이 우주 속에서(당신이 믿는 실체가 이미 당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그 우주 속에서), 실체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매번 보이지 않는 기록창고로부터 나와서 항상 그 전기적 흐름을 재상영하는 우주적 영화관 속에서, 영원히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움직임 속에 현실이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원천인 생각[IDEA] 속에 현실이 있습니까? 영원히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그 현실을 인간이 찾아 나서려고 할 때, 그러한 인간 앞에 보여지는 현실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까? 모든(각각의)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천상의 왕국[Kingdom of Heaven]을 발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인간이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하기도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현실은 드러나 있습니까?
우리가 이 광활한 세상을 바라다 보면서, 인간들의 영혼 속에서 사랑과 행복 대신에, 공포를 발견하게 되고, 그저 움직이는 물체에 불과한 무가치한 것들을 쌓아두고자 하는 탐욕만을 발견하게 되고, 또 마음-영감[Mind-inspiration]보다가는 단지 육체-감각[body-sensation]이 원하는 욕구만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인간들이 자신들 속에 있는 내재해 있는 빛[Light], 바로 십자가에 못박혔던 한 명의 인간이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바로 그 자만이 알 수 있었던 그 빛[Light]에 대해 알기까지에는, 아직도 많이 못미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Violinio Germain, 비올리니오 저메인
피닉스 저널 제 32권, “I and My Father are One—Secrets of Universal Order; Eternal Quest of Man”, Pleiades Connection Vol. III. 제 12, 13장, pp. 102-114에서 발췌.
'피 닉 스 저 널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조달러짜리 거짓말, 홀로코스트 (0) | 2008.11.22 |
---|---|
+ 창조 / 물질의 구성 (0) | 2008.11.22 |
+ 주기와 진동 그리고 자아.독선 (0) | 2008.11.22 |
+ 하나님의 계획 (1) | 2008.11.22 |
+ 생명의 신비 (0) | 2008.11.22 |
+ 복제인간 / 로보토이드 & 씬테틱 (0) | 2008.11.22 |
+ 기록되지 않은 역사 (0) | 2008.11.22 |
+ 그리스도 vs 사탄 (0) | 2008.11.22 |
+ 육체와 마음, 분리된 우주와 분리되지 않은 우주 (1) | 2008.11.22 |
+ 나치의 남극기지 / U F O 은폐 (3) | 2008.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