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 우리 역사의 재 조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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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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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나온 발자취다. 그러면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우는가, 인간은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반성을 하고 위대한 역사로부터는 용기와 힘을 얻어 더 나은 삶을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를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쳐서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힘과 용기 반성의 근거가 되는 역사가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되고 왜곡 되었다면 이를 토대로 더 나은 삶을 설계한다는 것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또한 개인적 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어떠한 노력도 힘은 힘대로 들이고 열매가 없거나 노력의 결과가 반감되는 공허한 소모전으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심각하게 왜곡 조작되었고 현재 소설책 같은 엉터리 역사를 진짜로 알고 배우고 있다. 민족혼이 뿌리체 날아가 버린 역사를 우리의 뿌리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호랑이에게 너는 고양이니 고양이로 살아가라는 것과 같으며, 본래 신분은 왕자인데 거지라고 세뇌시켜 원치 않게 거지의 삶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는 개인은 물론 민족전체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해를 몰고 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된다.
이제 우리의 참역사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 조작되었는지 실상을 파헤치고 이로 인해 우리가 어떤 정신적 중병에 걸려 있는지 진단 한다.나아가 한민족 참역사를 확인함으로써,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짓눌린 민족혼의 부활을 모색해 본다. 그러면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무한한 저력을 제한 없이 발휘하여 우리가 바라는 풍요로운 삶을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고 신명나게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1.한민족사 왜곡조작의 실상
한민족 사학계는 현재 우리의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조작 되어 있다고 하며 쥐나족(중공)과 왜족 서양세력 그리고 우리자신에 의해 복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첫째 쥐나족(촤이나, 중공)에 의한 역사왜곡조작이다. 한민족의 역사가 중원대륙에서 꽃을 피울 때, 쥐나족은 대만 섬 건너편 조그마한 구석에서 겨우 대만 크기의 강역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의 작은 나라(송국-연사)의 종족이었다. 이것과 다소 차이가 나긴 하지만 쥐나족의 발생지는‘낙양’이라고 하며 크기가 대만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저명한 화교의 양심고백에서 밝혀졌다. 이 화교에 고백에 의하면 쥐나족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쥐나족이 자기네 역사요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전설적인 삼황오제, 요순시대, 하,은,주, 춘추전국시대의 열국(진,초,연,제,한,위,조)이나 모두 한민족(동이족)이지 쥐나족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의 유력한 역사서인 한단고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위와 같은 고백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쥐나족은 왕성한 번식력으로 인구를 빠르게 증가시켰고 이에 따라 중원의 주인인 한민족은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터어키 티벳 위글 몽고 중원대륙의 소수민족, 한도(한반도) 등으로 분산하여 각자 축소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쥐나족은 원래 주인이었던 한민족이 남겨놓고 간 땅을 자기들이 차지하자, 거기서 꽃피운 한민족의 역사도 자기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쥐나족의 역사왜곡조작은 시작된다.
이에 따라 쥐나족은 고래로 부터 중화중심주의를 내세웠고 자기 주위의 민족은 전부 오랑캐라고 부르며 자국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본래 중원대륙의 주인인 한민족을 동이족東夷族으로 부르는데 서도 저들의 왜곡수법이 드러난다. 이른바 ‘춘추필법’은 자국을 높이는 역사서술 방법인데 사마천 이하 역대 쥐나족의 역사가들은 철저하게 이 방법을 따른다.
특히 사마천의 역사왜곡 수법이 왜인(일본인)인 ‘오향청언吾鄕淸彦’에 의하여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는데 본말전도本末顚倒식이다. 즉 중원대륙의 단군조선의 한민족Corea의 역사를 쥐나족의 역사로 뒤바꾸었다고 한다. 더구나 사마천이 편찬한 역사(사기史記25권)는 그가 태어나기전의 거의 1천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당시 까지 제대로 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마천이 그 많은 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사마천이 서술한 사서들은 거의 꾸며낸 쥐나족 위주의 재미있는 이야기 책 수준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쥐나족의 역사왜곡수법에는 크게 세 가지 원칙 있다. 하나는 자기나라의 허물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은 자기는 높이고 남은 낮춘다는 것이며, 셋은 자기 것은 자세히 말하고 남의 일은 축소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춘추전국시대를 정리하고 통일 왕조를 세운 진(쥐나-촤이나-China)시왕 이라는 자는 당시까지 존재하던 한민족(동이족)사료를 수거하여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이른바 분서갱유의 만행을 저지른다. 따라서 소위 쥐나족의 정사(정통사서)로 알려진 25사도 전적으로 믿을 게 못된다. 그런데 한국 사학계는 이 25사를 역사기술의 원전으로 삼으며 맹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한민족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고 있는 역사왜곡의 결정체 동북공정도 쥐나족의 이러한 못된 버릇에서 나온 것이며 알려진 것 보다 훨씬 심각하다.
현재 중원대륙은 오십여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수민족이 장악하고 있는 땅이 쥐나땅의 60%나 되며 이 지역에는 무한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그런데 티벳의 경우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하는 분리 독립운동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중권대륙의 소수민족들은 가능하면 쥐나 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한다. 이에 쥐나 공산당 정권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생겼고 이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역사의 통일이다.
그래서 서남공정 서북공정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조작을 하게 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쥐나족은 기를 쓰고 한민족 역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모조리 쥐나족의 역사로 둔갑시켜 한민족의 혼과 뿌리를 송두리체 뽑아버려 결국 한민족을 말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황하문명도 자기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더 윗대의 선진문명이 속속들이 발견되자 곧 바로 자기 것이라고 하면 앞뒤가 안 맞아 억지라는 것이 탄로 날까봐 외부에 공개를 하지 않고 숨기면서 자기 것으로 짜 맞추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 하나를 고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전에는 한민족의 신시배달국 14대 한웅천황‘치우’를 쥐나족의 조상으로 보지 않았다. 반면에 치우천황과 운명의 대결을 펼친 황제헌원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북공정이 그 마각을 드러내던 1990년대 들어와서는 이제 치우천황까지도 자기네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히 고구려사 강탈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사 강탈은 일부분이다. 물론 저들이 고구려를 빼앗아 가면 당연히 북한지역도 저들의 땅으로 편입된다. 실제로 요녕성의 쥐나족 역사학자(양군)는 북한의 대동강유역이 쥐나족의 영토였다는 논문을 공적게시판에 올리고 중공당국도 이를 공식화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동북공정의 전체적인 윤곽이다.
현재 티벳과 중원대륙의 심장부 서안(주신제국=단군조선의 서울)과 북중국 그리고 만주지역에는 이집트의 피라밋보다 큰 것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조차 없는 피라밋이 산재해 있다. 이것은 기원전 3천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유적으로써 주신제국(단군조선)과 구려(고구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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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거기에서 출토되었던 부장품들이 조선반도에 사는 한민족과 일치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쥐나족은 이러한 사실을 숨긴 체 철저한 통제속에서 지금 열심히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이 동북공정이 완성되는 날 쥐나족은 바로 자기들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의 시조 단군할아버지도 저들의 할아버지로 둔갑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줄기차게 단군할아버지의 목을 치는 얼빠진 자들은 얼씨구나 하고 좋아할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에게는 유력한 역사서 한단고기라는 것이 있다. 사대주의 식민반도사관에 중독된 제도권 강단사학계는 이를 가짜라고 하며 매도하고 있으나 이들의 뿌리라고 하는 이병도 조차도 한단고기를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한단고기를 쥐나족은 동북공정의 근거자료로 인용하기 시작하였다. 참고로 올림픽 개막식이나 체육경기에서 남북한이 단일조로 나올 때 ‘한반도기’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쥐나족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꼴이 될 수 있음을 밝혀둔다.
한민족은 기원전 7천년 경부터 중원대륙의 진정한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그런데 쥐나족은 종족을 빠르게 번식하여 기껏해야 기원전 2~3백년 경에 와서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는 진시왕의 진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 후 쥐나족의 역사가 한, 수, 당, 송, 명으로 이어진다고 보더라도 영토적으로는 현재 쥐나족 강역의 3분의1 수준에 해당하고 기간도 다 합쳐봐야 1천 2~3백년을 넘지 못한다. 현재의 쥐나족의 영토는 우리와 한 핏줄인 대청제국이 선진 최강의 군사제도(팔기군제도)를 앞세워 넓혀 놓은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뻔뻔스럽게 역사를 왜곡 조작하여 모두 자기네 역사라고 한다.
둘째, 왜족(일본)에 의한 역사조작이다. 지리적으로도 조선반도의 남쪽에 있고 역사적으로도 한민족으로부터 인력과 선진문물을 이어받아 원시야만에서 벗어난 왜족이 산업화에 먼저 성공함으로써 은혜를 저버리고 한민족을 식민 지배하였으니 이른바 일제 36년이다. 일제는 한민족을 말살하여 영원히 통치하고자 한민족의 혼이요 뿌리인 참역사를 치밀한 계획 하에 왜곡조작 하였다.
일제가 한민족을 강제병합하고 나서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 조선반도 전역에 산재 해 있는 역사관련 책자를 색출 수거하는 일이었다. 1910.11.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어 이듬해인 1911.12.까지 수거하였는데 그 분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나타나는 숫자를 보면 51종20여만권에 해당한다. 일제는 이렇게 수거한 서적을 한국사를 왜곡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불태우거나 왜국으로 약탈해 갔다. 전국에서 수거한 책을 경복궁 안에서 불태웠는데 종이 타는 냄새가 3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이렇게 1차적인 정리 작업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한민족역사 조작에 착수한다. 1922.12.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사>를 편찬하였는데 무려 35권에 해당한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10원도 안되었다고 하는데 일제는 이 조작된 역사를 만들기 위해 100만원이상을 쏟아 부었다고 하니 역사 조작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일제는 왜인들만 역사조작에 참여하면 탄로날까봐 조선인도 참여 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날 국사교과서 편찬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이병도다. 이 자는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손자인데 당시 이완용이 고문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대학의 사학교수등 강단사학계의 주류는 이 이병도가 키워낸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제자들이 전국의 중.고등학교 국사교사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말년에 이병도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는지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실재하는 역사라고 고백을 한 바 있다.
일제의 한민족 역사조작은 한민족정신 말살의 일환인데 한민족정신 말살의 기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역사,전통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조선인의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케 하고 그들의 무기력, 무능함, 악행을 들추어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의 후손들에게 가르친다. 그리하여 조선 청년들로 하여금 그들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든다.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은 자국의 모든 인물과 역사책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 패배주의, 노예거지근성, 피동적가치관, 가학적 상호비난에 빠질 것이니, 이때에 일본의 역사,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齌藤實)-
이러한 기치아래 일제는 역사조작의 가장 우선순위로 한민족의 국가시조와 상고사를 부정한다. 그래서 실제 역사적 사실인 단군조선을 부정하여 단군을 한 개인으로 둔갑시켜 신화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곰의 자손이 되어버렸다. 삼국유사 원본에는 한국->한웅신시배달국->단군조선 7천년의 역사가 이어지는데 일제는 이것을 한인->한웅->단군으로 조작하여 3대에 걸친 세 사람의 이야기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라 우리의 실질적인 역사는 앞의 수천년의 역사는 날아가 버리고 소위‘삼국시대’부터 시작하게 된다. 현재 우리 국사교과서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국유사 임신 영인본(1921년 일제가 발표한것 환국을 환인으로 변조함)
이렇게 역사의 기간을 축소해 버린 후에는 한민족의 강역도 조선반도내로 역시 축소한다.‘너희는 한반도에만 국한되어 살았던 민족’이라고 세뇌를 시켰는데 이것이 이른바 ‘반도사관’이다. ‘한반도’라는 말도 일제가 만들어낸 용어다.
일제는 이이서, 한민족은 오늘날까지 완전한 독립을 해 본적이 없고 주인도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을 일삼는 망국근성의 민족임으로 일본이 식민통치해 주는 것은 조선인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주입시킨다.
즉, ‘전국시대에 유랑민들이 떠돌아 들어온 곳이 한반도 인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져 싸움박질 만 하고 고려시대에는 음탕한 역사가 진행되었고 이씨조선시대에는 사색당쟁이나 사화가 끊이질 않았으며 , 영웅적 인물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족족 죽여 버리는 등 서로 용납하지 못하여 스스로 발전할 수 없고 추진력이 없이 살아온 미개 민족이다. 그러니 대동아의 미래를 책임져야할 일본이 조선을 합방해서 보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왜족은 자신들을 미개와 야만에서 문명인으로 개화시켜준 한민족의 은혜를 저버린 체, 미개하고 야만스런 옛 버릇이 도져 다시 야만적 역사조작을 오늘날 까지 해대고 있다.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최근에는 우리의 유력한 사서‘한단고기’조차도 일부 조작한 것이 드러났다. 저들은 아직도 정신적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족과 쥐나족은 현재 국력과 사람숫자를 믿고 위와 같이 왜곡 조작된 역사를 세계 각국에 선전 광고를 해대고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 각국은 저들의 국력과 사람숫자를 신뢰하여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남한만 빼고 북한까지 쥐나족의 영토로 표기된 세계유명지도가 허다하며,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지도가, 동해로 표기된 지도보다 훨씬 많다.
결국 이조시대와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역사는 완전히 창작소설로 변하였고 특히 일제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조선사> 조작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참으로 알아왔던 역사가 모두 가짜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도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일제가 왜곡조작한 역사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용어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한자漢字 한문漢文>이라는 용어가 일제가 우리의 민족혼을 뽑아 버리고자 창조된 말이라는 것이다.
즉 한자도 한민족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은폐 왜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사>를 왜족조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자라는 말이 없었고 <참글>또는 <진서眞書>라는 말로 통했다. 이조시대에 간혹 한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한나라 선비들이 지은 문장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결코 한자자체를 한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일제의 역사왜곡조작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뿌리가 깊은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셋째, 서양세력에 의한 한민족 역사왜곡이다. 합리적 과학적 사고로 산업혁명을 일으켜 일찌감치 근대화에 성공한 서양열강이 19세기 말부터 조선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우수한 물질문명을 가지고 들어와 한민족을 압도하였다. 1945년 정치적 광복이후에는 이 역할을 아메리카가 조선반도 남쪽을 점령함으로써 이어 나갔다.
이들은 물질주의의 우수성을 주입시키고 모든 것을 서양 중심으로 재편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실증주의 역사관도 이식되었고 향후 한국역사학의 커다란 주류로 성장한다. 실증주의 역사관이란 역사를 논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물적 증거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적 증거가 없이 말하는 역사는 역사라고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한민족역사의 주 무대는 시베리아 바이칼지역의 광활한 땅과 한주(만주) 그리고 중원대륙이다. 그러니 조선반도에서는 제대로 된 유적이나 유물등 물적 증거가 나올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우리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오늘날 한민족이 조선반도로 축소되고 쥐나족과 왜족이 왜곡 조작한 역사를 의심 없이 수용하여 이를 확대 재생한 함으로써 서양은 한민족역사왜곡의 한축을 이루고 있다.
중공이 조작하여 배포한 [한]나라 지도를 현재 서양세력이 사용하는 것
그러나 역사사라는 것은 단순히 물적 증거만 가지고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문학 철학 인류학 언어학 연대기학 고고학 그리고 생활풍습 전통문화 등이 어우러질 때 역사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넷째, 한민족 스스로에 의한 역사 왜곡이다. 한민족 스스로에 의한 역사 왜곡이 구체적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시기는 이성계 조선시대다. 여기서 리조시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살펴보면, 이러한 용어는 일제가 한민족 말살의 한 일환으로 사용하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쓰면 안 되고 조선시대 내지 조선왕조라고 불러야 맞다고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조시대는 한민족 전체역사를 놓고 볼 때 한민족을 위한 시대라기보다는 이씨왕조와 여기에 부역해온 귀족을 위한 시대이고 더욱이 쥐나족(명나라)의 새끼중국 내지 지방정부로 존재하였다. 도무지 한민족 정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또한 조선이라고 하면 주신제국(단군조선)이 있고 이게 원래 우리 조선의 참모습이고 한민족의 조국이다. 만약 새끼중국 노릇을 한 이씨왕조를 조선왕조(조선시대)라고 부른다면 주신제국을 부정해야한다.
왜냐하면 한민족의 정통성 측면에서 볼 때 이 둘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이씨조선(이씨왕조)이라고 불러야 맞다. 현재 왜족 외에 쥐나족도 이씨조선이라고 부른다. 더구나 조선에는 기자조선 은조선 위만조선도 있는데 유독 이씨조선만 조선으로 부를 이유가 없으며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선생도 이씨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북한도 리조시대라고 한다.
한편, 한민족 전체와는 괴리되어 있고 자기정권의 무사안녕에만 집착하고 있는 이북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정일 정권도 북한이 아니라 김씨조선이라고 해야 맞다. 김정일 정권도 한민족 전체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한민족을 위한 정권이라기보다는 집권자와 이에 부역하는 소수세력의 이익을 위한 정권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백성이 기아에 허덕이고 이를 견디지 못해 탈출하여 쥐나족의 성노리개로 전락케 하는 정권은 도저히 한민족 정권이라고 볼 수 없고 김씨조선(김씨왕조)이라고 해야 맞다.
한민족 스스로에 의한 역사왜곡은 이성계가 위화도 대 반역을 일으킨 후 세운 새끼중국노릇하던, 이씨조선에 와서 명백하고 구체적으로 진행된다. 새끼중국으로 살아가려면 기존의 대륙을 호령했던 위대한 한민족역사를 없앨 수밖에 없다. 반역으로 세운정권을 정당화 시키려면 반역을 알고 있는 세력을 제거해야 하고 이론적 측면에서는 반드시 역사를 왜곡하여 이씨조선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래서 이성계 일당은 이씨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당시의 지배세력과 현자 및 관련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을 하였는데 무려 2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나라를 새로 만들면서 불가피하게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1~2백명도 아니고 20만명이나 죽인 것은 세계역사상, 한민족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가 없다. 이렇게 백성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것은 이성계가 한민족이 아니고 이민족 이었기 때문이다.
이씨정권은 개국하자마자 먼저 고려사를 새로 쓰고, 주신제국을 ‘고조선’이라고 하고 스스로를 ‘조선’이라고 하여 역사를 왜곡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를 왜곡 조작하여 새롭게 펴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다. 그러나 원래 김부식이 만들었다는 역사서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해동사’(동이국사-연사)였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물들어 삼국사기를 지었다고 욕들 하는데 사실은 이방원이가 김부식의 ‘해동사’를 수거하여 폐기처분하고 왜곡 조작하여 ‘삼국사기’라는 사서를 새롭게 내놓은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조작된 역사서‘삼국사기’에 기초하여 ‘삼국시대’라고 하는 용어는 틀린 말이고 고구려시대라고 해야 옳다.
또한 이씨조선 개국당시 전국에 산재해있던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기록한 고서적들에 대하여 수거령을 내려 모두 국가가 관리하였다. 어버이나라 쥐나족을 거스르는 역사서가 함부로 민간에 돌아다니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씨정권은 이렇게 수집된 우리 한단의 고사서를 폐기처분한 것으로 보인다. 한단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태백일사에 보면 이씨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우리의 역사서가 존재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씨조선은 이후 철저히 대 쥐나족 사대주의를 표방하며 쥐나족을 어버이로 떠받들고 모든 제도를 쥐나족 중심으로 재편하고 쥐나족 사상을 전 백성에게 주입시킨다. 그리하여 공자유가사상에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사문난적’이라하며 가차 없이 처단을 하였다. 천자는 쥐나족 뿐이며 새롭게 왕이 등극할 때 반드시 쥐나족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모든 것을 쥐나족에게 의지하는 새끼중국, 쥐나족의 지방정권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리하여 사농공상 이라는 국가정책을 일관하였는데, 맨 위에 공자의 유가사상을 모시고 그 다음에 먹고는 살아야 하므로 농업을 중시하였다. 그 다음에는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상공업을 천시하는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 결과 한민족은 이씨조선시대 내내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여야 했다. 왕족과 귀족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원시생활이라고 해야 맞다. 옷을 물들여 멋 좀내고 싶어도 가난하여 물감이 없어 할 수 없이 흰옷을 입어야 했다. 우리민족은 흰색을 좋아하여 옷도 하얀 옷만 입는다는 백의민족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들으면 슬퍼해야 옳다.
이조말엽(구한말) 민초들이 광장에 모여있다.색깔옷과 사람얼굴은 후에 인위적으로 채색한것
(선교사가 촬영-미 남가주대 소장)
이조시대 이전의 우리조상들의 복색을 보면 흰색 옷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 특히 구려(고구려)의 벽화를 보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색깔로 물들인 복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씨조선시대의 흰옷은 민족정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궁핍의 상징이다. 구한말 선교사가 사람들이 시장이나 광장에 모이면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한다고 감탄을 하였는데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정권유지가 급선무였으므로 백성이 똑똑하거나 배부르면 안 되었다. 깨어있는 정책입안자가 국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 중요하니 도로망을 개설하고 넓혀야 한다고 했을 때도, 외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이 될 수 있으니 안 된다고 하는 엽기적 정권이었던 것이다. 또한 신분을 양반 상놈으로 나누고 양반은 다시 적서로 차별하여 오늘날 차별문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개성상인’ ‘고려인삼’이라는 말이 잘 나타내 주듯이 상공업의 발달로 백성들은 적어도 기아선상에서 해매이지는 않았다. 아라비아 상인까지 들락거릴 정도면 국제무역측면에서도 엄청난 발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씨조선시대에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군사무기나 과학 발명품도 따지고 보면 고려시대에 개발해 놓은 것을 응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씨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추어 버리고 거꾸로 돌아가고 말았다. 구한말에 궁궐을 지킬 병력이 없어 왜족의 깡패들에게 왕비가 살해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발생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이와 같이 이조정권은 우리의 위대한 역사와 정신을 폐기처분하고 철저히 사대모화중심으로 역사를 왜곡 조작시켜버렸다. 그 결과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년에 가서는 농민들에게 조차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골로 변해 버렸고 결국 나라가 사라져 버리는 한민족역사상 있을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또한 폐륜정권 이씨왕조의 이러한 역사왜곡의 결과 오늘날 터키(투르크), 티벳, 몽고(원제국) 만주(금,후금,청제국)족 위글족 그리고 소위 ‘흉노족, 거란(요제국)족, 말(갈)족’등 북방민족이 모두 우리 한민족과는 상관없는 다른 민족처럼 세뇌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모든 나라와 민족은 우리와 한 핏줄인 한민족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다음으로 한민족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 선 세력은 일제에 부역한 이른바 친일반역자 집단이다. 구한말의 기득권세력은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친일부역으로 친일반역자집단의 주류를 이루며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비호하에 정치 경제 문화 언론 군사 학문(역사) 등 우리사회 모든 영역에서 지배세력으로 자리를 굳힌다. 사학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독 왜독 양독에 물든 무리들이 사학계의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고 사대주의에 입각한 반도 식민사관으로 역사왜곡을 심화 고착 시킨다.
일제의 <조선사>조작 편찬에 참여한 이병도가 주도한 현행 국사 교과서의 편찬, 각종 국가 공무원시험과 고시에서 주 수험 교재로 사용되는 한국사교재는 이병도의 영향권 안에 있었고 실증주의로 무장한 이기백이 만든 것이 대세를 이루었다. 또한 초대 국사편찬위원장은 만주의 친일반역자로 알려진 이선근이 맡았다.
한편 뿌리 뽑힌 종교세력도 한민족 역사 왜곡에 일조를 하는데 종교 세력은 각 시대마다 자기종교에 유리하게 우리역사를 난도질 해왔다. 정사로 알려진 삼국유사를 승려일연은 석가모니와 관련시켜 역사기술을 하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도 일제에 빌붙어 먹다가 정치적 광복이 되고 아메리카가 대세를 이루자 이번에는 미제에 빌붙어 자기종교에 유리하게 우리의 역사를 파괴하였다. 저들은 아직도 일제와 미제가 세뇌시킨 단군신화를 고집하며, ‘단군상은 신화속의 인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며, 보는 대로 목을 쳐 버리고 있다. 특히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의 발호가 두들어 진다. 이들에게는 이제 미제가 어버이의 나라가 되었고 나라와 민족이라는 개념도 기득권 수호유지를 위하여 이용해 먹고 있다.
이와 같이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는 쥐나족과 왜족 서양세력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쥐나족과 왜족의 일부 양심 있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한민족사 왜곡조작을 사실대로 고백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의 주류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만약에 사실대로 인정을 해버리면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쌓아온 소위 ‘학문적 지식과 업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자신들이 학계에 설자리가 사라져서 밥줄이 끊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세력들에 의해서 우리의 참역사는 심각하게 오염된 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현행 국사교과서는 일제가 한민족 혼을 말살할 목적으로 편찬한 <조선사>에 뿌리를 두고 있어 국사책이 아닌 정신적 독극물이다. 한국은 현재 정치적으로는 독립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제가 만들어 놓은 <조선사>에 기초한 국사교과서를 국가가 앞장서서 강요함으로써 아직도 일제식민통치는 계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족정기(고려정신)도 계속 말살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매국노 땅 소송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고 법관도 이들의 손을 들어 준다. 또한 매국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살고, 가산을 팔아가며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하면 3대가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기에 왜국은 대 놓고 독도를 침탈하고 있고, 왜곡 조작된 국사교과서를 먹고 자란 정치권과 정부는 왜구에게 참역사 의식을 상실한 체 맥없이 끌려 다니고 있다.
2.한민족 역사 왜곡조작의 폐해
민족정신의 토대가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는 한민족역사 왜곡조작은 한민족의 정신세계에 심각한 문제를 촉발시켰다. 역사왜곡조작은 사대주의를 낳았고 한민족을 뿌리 없이 방황하는 정신적 유랑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1) 사대주의事大主義
사대주의란 말 그대로 큰 것을 섬긴다는 뜻이다. 작은 자는 큰 자를 넘볼 수 없고 섬기며 복종해야 하며 자기생각 보다는 큰 자의 생각이 더 우수하니 큰 자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종살이, 노예살이를 달갑게 받아들여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수동적 피동적인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자기 색깔을 버리고 남이 하는 것을 흉내 내어 따라하자는 것이다. 이 사대주의는 이조시대에 본격적으로 발흥하여 이조시대에는 중화사대주의, 일제침략기에는 일제사대주의, 현대에 와서는 서양사대주의 특히 아메리카(미제) 사대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러한 사대주의 풍토는 우리사회전반에 전염병처럼 번져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2)사대주의의 폐해
사대주의는 주인이면서도 종, 노예로서 사는 것을 의미하고, 자기정신이 있으면서도 남의정신을 마치 자기정신인양 가져다가 사는 것을 말한다. 또한 원래는 호랭이인데 고양이로 살려고 하는 것이고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거지의 신분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다 보니 한민족은 자기가 주인인지 노예인지, 호랭이인지 고양이인지, 왕자인지 거지인지 헷갈려 혼란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었고 온갖 부정적 병리적 현상으로 고통을 당하며 이런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른 체 끝없는 소모전을 반복하고 있다.
첫째, 이기주의의가 판치는 사회로 변해 버렸다. 노예 거지근성이 우리의 심리를 지배함으로써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고 이를 보장받기 위해 가능하면 내 것을 많이 확보해 놓아야 안심이 되었다. 이는 나하나, 내 가족, 또는 내가 속한 집단만 잘 먹고 잘살면 그 만이라는 심리이다. 이기주의는 더욱 강고해져 이제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 지역적 이기주의로 까지 발전하였다.
오늘날 집단(지역)이기주의는 우리사회 모든 분야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정치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학계 재계 공무원세계 등 자기집단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것이 국가적 민족적 전체이익과 배치되는 것이라도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기주의가 생활화되면서 자신에게 특별히 이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막무가내로 우기며 악을 쓴다.
이와 같이 현재 한국은 지독한 이기주의로 금이 가 있다. 그러나 본래 우리의 심성은 이렇지 않았다. 한단시대의 고사서인 소도경전본훈(한단고기 태백일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22대 단군 색불루(기원전1285년)때에 풍속은 순박하고 두터운 것을 숭상하고 의로운 싸움에 용감하고, 공동의 이익에 힘쓰며, 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 공덕公德에는 밝았다. 선업하고 잘못은 바로 잡고 스스로 예의 있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즉 민족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 민족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였고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이기주의는 이씨조선 5백년과 일제36년을 지나오면서 발생한 사대주의의 폐습임을 알 수 있다.
둘째, 기회주의가 성공하는 사회가 되었다. 노예와 거지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또한 희망과 미래가 없다. 끼니를 해결하고 희망과 미래를 약속받는 길은 주인에게 잘 보이고 환심을 사야한다. 그러려면 주인의 눈치를 잘 살펴 두었다가 주인의 맘에 들게 처신을 해야 한다. 그러다가 주인이 바뀌면 바뀐 새 주인에게 다시 충성을 해야 한다. 이게 기회주의고 노예와 거지의 운명이다. 반민족적 이씨왕조의 등장과 일제식민통치, 서양세력 그리고 이들에게 부역한 자들에 의한 역사왜곡조작은 사대주의를 탄생시켰고 한국사회를 기회주의가 성공하는 풍토로 만들어 버렸다.
기회주의 민족반역자들이 우리사회 상층부를 장악함으로써 일반백성들도 이들의 모습을 알게 모르게 닮아가고 중독되어 좋은 게 좋다고 기회주의적 처신에 동조하며 이에 편승하게 된다. 그래서 사안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합리적 이성적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분위기 와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한다. 특히 기회주의 상층부 지배계급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한 아주 고약한 풍토를 만들어 냈다.
최근 검찰은 국민이 부여한 국가공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작태를 보이며 국가경제에 심대한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집단적 조직적 범죄를 가볍게 처리하며 적절히 타협하고 말았다. 바로 재벌에 대한 관대함이다. 반면에 절도 강도 등 생계형 일반 잡범에 해당하는 개인적 범죄에 대하여는 시퍼런 칼을 들이대고 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풍토는 자기보다 못하거나 못사는 사람에게 어설픈 주인행세를 하며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거리를 서슴치 않게 만들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과거 왜인들의 한국기생관광을 저주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당한 것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것인지 쥐나국이나 동남아의 저개발국가에 가서 왜인들이 하듯이 기생관광을 하며 온갖 엽기적인 행태로 한국의 위상에 먹칠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잠잠할 만하면 터지는 초대형금융범죄, 정.관계 재계를 아우르는 천문학적 비자금 사건 모두 기회주의가 낳은 자업자득이다. 국가경제를 좀먹고 제2,제3의 환란을 야기 시킬 이러한 초대형범죄는 우리사회가 지금 어떤 자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겉으로는 정의와 국민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외치지만 뒷구멍으로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아부와 협잡으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이중적 위선적 변태들이 한국을 말아먹고 있다.
우리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는데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우두머리들이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기는커녕 뒷구멍으로 온갖 불법을 저질러 놓고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할 때는 무책임하게 도주해 버림으로써 기회주의의 모범이 되고 있다. 그래놓고 이 죄 때문에 감옥에 갈 듯하면 사회에 몇 천억 기부하겠다고 하며 죄 값조차도 돈으로 사려는 아주 저질스럽고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셋째,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사대주의는 주인이 아닌 노예정신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 이는 주인만이 벌인 일에 책임을 지지 노예는 결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한국사회 상층부를 장악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득권 매국노세력이 앞장서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문화와 풍토를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재정을 좌지우지 하며 자기 돈이 아니라고 함부로 쓰거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각종정책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재정이 투입되는 일을 벌려 놓는다. 고속철도사업, 청계천사업, 러시아 유전개발사업, 새만금 사업 등이 그것이다.
새만금사업의 경우는 특히 심각하다. 이것은 대권욕과 탐욕에 찌든 정치꾼들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무책임한 사업인데, 여기에 투입되는 비용만 수십조원이다. 새만금은 담수호로 유지되고 제2의 시화호가 되지 않게 하려면 상류의 강에서 유입되는 각종 공장, 생활하수를 정화시켜야 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비용도 천문학적이다. 새만금 사업 자체 비용을 제외하고도 추가로 지출되는 비용이 이 정도다. 따라서 투입대비 수익을 볼 때 처참하다. 정부는 친환경적으로 개발하겠다고 둘러대지만 이미 국가적 대재앙은 시작되었다고 봐야한다. 사태가 이러한데 지금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 1993년에 우루구아이 라운드라는 것이 열려 한국도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라고 하였다. 특히 쌀 시장은 한국도 이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유예기간을 주며 일정한 시기에 전면 개방하라는 것이다. 그때 농민들은 정부와 정치권에게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라며 전국적으로 연일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정치권과 정부는 농민들을 안심시키며 쌀 시장만큼은 절대 개방하지 않겠다고 천연덕스럽게 약속을 하면서 쌀을 제외한 농산물에 대한 급조한 각종정책을 요란하게 내놓았다.
그런데 그 유예기간이 지난 지금 그런 정책은 모두 실패하고 쌀 시장 개방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전무한 상태로 개방을 맞이하고 있다. 책임지고 대책을 세우고 추진하겠다던 자들은 지금 일선에서 모두 은퇴한 상태다. 그리고 얼마 전 아메리카 쌀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농민들은 애써 수확한 쌀을 길바닥에 뿌리며 사생결단식의 저항을 하고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사회의 현실이 이렇다 보니 우리에게는 어느새 상호혐오주의, 자학적 허무주의, 패배주의, 낙담좌절, 피해의식, 남 헐뜯기, 남 잘되는 것 배 아파하기, 왜소주의, 불신풍조, 망각주의, 엽전근성, 아첨과 아부 문화가 자리 잡았고 불확실한 미래와 기약 없는 생활에 민족성은 급한 성격에 분위기에 휩쓸리고 다혈질적이고 즉흥적인 냄비근성으로 변해 버렸다. 이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독도문제다. 정신적으로 아직 야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섬나라 원숭이 떼, 왜족이 2006.3.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며 범 정부차원으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공식 선언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1년 전에도 그랬듯이 신문방송이 앞을 다투어 격한 분노를 표출하고 관련전문가 데려다가 토론회 몇 번하고 만다. 또한 정치권에서도 단기적 자극적 대책만 내놓으며 이로 인한 정치적 이해득실만 저울질 한다. 정부도 주한일본대사를 불러서 항의하고 주일한국대사도 왜국정부에 찾아가서 따지는 정도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잠잠하다.
왜족은 이러한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잘 파악하고 있기에 더욱 노골적으로 독도침략을 치밀하게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게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왜국은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고발한 일제의 구한말 한국침탈 수법을 오늘날 독도침탈에서도 그대로 써먹고 있다.
3. 한민족이 나아갈 길
이와 같이 우리는 나라 안에서 사대주의에 중독되어 이기주의 기회주의 냄비근성으로 혼돈의 늪에서 해매며 자학적 소모전으로 표류하고 있는데, 나라밖에서는 다시금 세계사가 재편되는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다.
아메리카 중심의 세계가 새로이 떠오르는 쥐나(중국)와 이를 견제하고자 하는 아메리카(미제)가 인도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아시아가 다시 세계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도는 머리산업(소프트웨어산업) 쥐나는 몸둥아리 산업(하드웨어산업)으로 세계역사의 흐름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제까지 일본과 아메리카를 제외한 국제경제관계에서 한국은 비교우위를 통해 국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건재함과 쥐나와 인도의 성장으로 우리의 설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한편 조선반도 정세는 더욱 꼬여가고 있다. 북한의 김씨조선은 김정일과 소수 공산당세력의 정권유지에 매달림으로써 조선반도 전체 한민족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핵문제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꼬여가고 아메리카는 이를 이용해 위폐문제 인권문제 등을 내세워 김씨조선을 압박하고 있다. 쥐나족은 이를 틈타 다시 김씨조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북한지역의 지하자원을 독점하고 경제 원조를 한다는 명분으로 물질적 문화적으로 김씨조선에 대한 지배를 가속화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내외적 상황을 보건데 가히 제2의 구한말이 찾아온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민족정신의 토대가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는 우리의 역사는 왜곡조작 되었다. 그리고 심각하게 오염된 역사를 우리는 지금까지 참된 역사로 배워왔고 그 결과 사대주의라는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주인이기보다는 노예정신으로 살아왔고, 왕자이기 보다는 거지정신으로 살아왔으며, 호랭이가 아닌 고양이의 삶을 강요받아 왔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오늘날 끝없는 혼란과 병리적 현상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과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본래 주인이요 왕자요 고양이가 아닌 호랭이라고 알려주는 우리의 참역사를 확인함으로써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와 혼란을 걷어내고 우리가 바라는 삶을 신명나게 꽃피울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아울러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전환기를 맞이하여 이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다시금 우리가 이를 주도하고 나아가 세계역사를 이끌어 가는 하늘자손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주신제국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
1.현생인류의 시원은 한반도 한민족
45억년전에 지구가 생겨 난후 인류가 출현한 시기는 대략 150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인류이기는 했으나 유인원에 가까웠고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생인류는 언제 어디서 출현하였을까, 또한 현생인류로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발견된 화석을 조사해보니 약3~4만년전의 것으로 보이는 유럽의 크로마뇽인과 중원대륙의 상동인의 뇌의 용적이 오늘날 인간의 뇌의 용적과 크기가 비슷하여 이들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화석만 발견될 뿐, 구체적으로 어떠한 흔적을 남겼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반면에 고인돌(지석묘,Dolmen)은 당시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부장물이 무수히 묻혀있다. 따라서 현생인류의 조상 그것도 직접적인 조상은 인공적 시설물인 고인돌이 유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인돌이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지만 그 고인돌의 80%이상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모여 있다. 이는 현생인류의 발상지가 한반도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분포 되어있는데 그 숫자가 약7만 여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1만여기는 북한지방에 3만여기는 남한에 분포 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침략기 신작로나 저수지 도로 철도 건설과정 및 해방 후 도시와 공단건설 농지정리 댐건설 등 국토개발을 하면서 무수한 고인돌이 파괴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수만 기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 할 때 한반도내에 세계고인돌의 80%이상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한반도 내 고인돌 선돌 분포도(고인돌 사랑회 제공)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평안도 증산군 용덕리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의 경우 돌 뚜껑 겉면에 80개의 구멍을 뚫어 별자리를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또한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뚜껑돌에도 역시 80개의 구멍을 내어 북두칠성의 국자 자국을 만들어 놓았다.
일반적으로 세계천문학계에서는 기원전 12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토지경계비에 새겨진 별자리를 고대 천문학의 원형으로 보아왔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위 고인돌의 별자리는 이보다 1800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쥐나 운남성, 베트남, 태국, 인도의 아삼과 대칸고원 주변의 고인돌에는 한국의 것과 같은 고누판이 새겨져 있고, 제주도 오누이 장사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인도의 아삼지역 고인돌 부근에는 한국 것과 닮은 당간지주와 솟대가 발견된다고 한다. 인도 매갈라야주의 박물관장은 인도의 고인돌이 한반도의 고인돌 보다 나중 것이라는 것을 근거로 인도인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점을 살펴 볼 때 한반도에서 고인돌문화를 발생시킨 민족이 한민족임을 알 수 있고,따라서 한반도에서 출연한 현생인류의 시조인 한민족은 점차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갔고 가는 곳 마다 고인돌 문화를 건설했다고 봐야한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고, 황인종인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출발하여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현생인류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흑인종의 경우 어떻게 황인종인 한민족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강한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는 오랜 세월동안 기후와 풍토의 영향을 받아 유전적 형질이 변형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1만년이상의 세월을 다른 환경에서 산다면 각자 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원래 같은 종족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외형적 모습은 변할 수밖에 없다.
첫째, 아프리카 흑인의 머리는 곱슬머리 그것도 비비꼬인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아프리카지역의 강렬한 태양열이 피부에 직접 닫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이 그렇게 변하였다고 한다.
둘째, 피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피부가 하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열대지방에 가서 몇 년을 살다보면 원래의 피부보다 상당히 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인도에 가서 몇 개월 살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검어져서 처음 한국에 돌아 왔을 때 동남아인 취급을 받은 경험이 있다.
따라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만년이상을 그러한 곳에서 산다면 충분히 피부색깔이 변할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셋째, 한국에 우유가 처음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은 비위가 상해서 제대로 마시질 못했다. 우리의 몸이 우유를 흡수할 만한 체질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하여 자주 마시게 되자 우유를 흡수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자 즉, 한국인의 인체에 없었던 효소가 새롭게 생성되어 현재는 누구나 편하게 마시고 있다. 이는 환경에 따라서 우리의 인체가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반대로 아무리 흑인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보편적 성질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흑인종의 피나 황인종의 피나 똑같아서 서로 피를 주고받을 수 있다. 또한 이빨 색깔도 같고 정액의 색깔도 황인종이나 흑인종이나 똑같다. 즉 겉 거죽만 색깔이 틀리지 그 외는 똑같다는 것이다.
아울러 백인종의 경우도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현재 헝가리인의 경우 백인종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그 골격이나 내부적인 인자가 한민족으로 증명된 훈족(흉노, 스키타이)의 후손임이 드러났다. 참고로 훈족은 아틸라 시대에 로마제국을 호령했다. 최근에는 독일(게르만족)이 스스로 자기네들의 뿌리가 한반도 한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현생인류의 발상지인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한반도에서 이곳의 주인인 한민족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각지의 기후와 풍토라는 환경의 영향을 받아 백인종으로도 변하고 흑인종으로도 변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편 고인돌 외에 우리나라 경남 창녕지방에서 지금으로부터 약8000년전의 소나무배가 발견된 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약1만5천년전)가 한반도 충북 청원에서 발견된 점도 주목할 만한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또한 2004.5.에는 전남 장흥 신북마을에서 2만2천년전의 마제석기가 발견되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최고로 알려진 마제석기는 1만1천년전의 것으로 이란 이랔 팔레스타인등지에서 발견된바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약1만5천년전 충북청원)
결국 한반도에서 현생인류가 발생하여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오늘날의 다양한 인종으로 변했다고 본다. 따라서 그 원형은 한민족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2.현생인류 최초의 문명국가 한국(환국)
1)문명의 의미와 발생조건
오늘날 문명이라는 말은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문명이란 인간이 원시생활을 뛰어넘어 인간의 생각을 통하여 인공물을 창조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생활경험을 통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도구를 사용하여 노동을 하며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때 문명이 발생한다. 즉 문명은 도구와 언어(문자) 그리고 인간의 생각이라는 3가지 요소가 갖추어졌을 때 발생한다.
2)수메르문명
인류 문명과 관련하여 초 고대 문명으로서 ‘아틀란티스’와 ‘뮤’ 그리고 ‘위글’ 문명 등이 거론되지만 구체적인 증거들이 확보되어 보편화 단계까지 오지 않은 상태이며 전설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민족의 유력한 사서인 ‘삼성기전 하편’에서는 지금으로부터 9203년전 파내륜산 밑에 남북5만리 동서2만리의 강역과 12개 나라를 거느린 한국이 있었고 3301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은 천해의 동쪽 땅이며 천해는 지금 북해라고도 한다. 고인돌과 이 기록을 근거로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발원하여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중원대륙을 아우르는 남북5만리 동서2만리의 한국문명을 건설했다고 본다.
또한 통치자 명칭을 한인(환인)이라 하고 한인 7인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그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세 한인‘안파견’, 2세 한인‘혁서’, 3세 한인‘고시리’, 4세 한인‘주우양’, 5세 한인‘석제임’, 6세 한인‘구을리’, 7세 한인‘지위리’이다.
그런데 3301년동안 ‘어떻게 7명이 다스릴 수가 있는가’ 라는 강한 의문이 생긴다. 21세기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 경전의 성경 창세기에서도 나오는 바와 같이 아득한 옛날 인간이 수백년을 사는 것은 기본이었다. 900살 이상 사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님을 성경 창세기는 말한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신선’이 가장 적합한 비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3301년 동안 7명이 다스렸다는 기록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그런데 한국이 거느린 12개 국가 중에서 ‘수미리’국이 나타나는데 이는 지금까지 밝혀진 인류문명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수메르’가 바로 ‘수미리’라는 것이 민족. 재야사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유력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 수메르문명이 동북아시아에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유적이 이라크 북부 자그로스산맥에서 발견되었는데 자모르 유적이라 한다.
이 자모르유적에서 곡식 알갱이와 돼지, 사슴, 개의 뼈와 사슴 뼈로 만들어진 돌낫이 나왔는데 탄소연대가 BC.6700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5000개가 넘는 곰, 염소, 돼지, 개의 점토조각과 작은 두상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두상의 형태는 가늘고 긴 얼굴에 얇은 입술과 뾰족한 턱, 높은 광대뼈와 째진 눈을 하고 있는데 편두를 한 동이족의 얼굴이다.
이렇게 자모르 유적에서 개의 뼈와 돼지를 키우고 흑요석의 세석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약 3000년 앞선 시기의 동북아시아문화와 일치한다. 이는 한반도 백두산지역의 흑요석 문화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까지 개를 포함한 가축사육이 시작된 것을 신석기초기에 메소포타미아지역으로 보았는데 스웨덴의 왕립기술원에서 개의 조상을 분석한 결과 이는 동북아시아의 2종류 늑대에서 15000년 전에 유전형질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15000년 전이고 이 개가 전 세계에 퍼진 것은 12000~ 8000년 사이다.
그런데 자모르 유적에서 개의 뼈가 발견되고 이스라엘의 나티피안유적(BC.10000년)에서도 개를 순장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개를 순장하는 풍습은 동북아시아의 오환, 숙신, 견융에서 행해진 풍습이다.
이렇게 세계 역사학계가 수메르와 이집트문명의 갑작스런 출현을 최대의 수수께끼로 보고 있는데 개의 조상을 알아보면 그들이 동북아시아에서 이동한 종족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둘째, 언어의 유사성이다. 교착어란 명사에 토씨를 바꾸어서 주어나 목적어를 표현하는 언어다. 예를 들어 주어의 경우 교착어가 아닌 영어나 한어는 ‘나’를 표현할 때 그냥 I 나 我 로도 충분히 말이 된다. 그러나 교착어인 한국어는 ‘나’만 가지고는 주어가 안 된다.
나+는 이라고 해야 말이 된다. 목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는 me 로서 충분하다. 그러나 한국어는 나+를 이라고 해야 말이 된다. 일본어도 마찬가지로 ‘아나따’(당신)만 가지고는 목적어가 될 수없다. ‘아나따’+‘오’라고 해야 ‘너를’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문장구조도 교착어는 주어+목적어+동사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교착어는 ~다. ~까? ~로 ~가 등의 조사를 써서 언어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교착어를 쓰는 종족은 동이계열의 종족으로서 한국 몽고 일본과 터키 그리고 헝가리와 쥐나국(촤이나)의 소수민족인 묘족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수메르어에서도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현상이 나타나고 발음과 뜻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슈메르발음[뜻] 한국어 발음[뜻] 슈메르발음[뜻] 한국어 발음[뜻]
아누(Annu)[신] 하느님 [하느님,上帝] Bad 바드 [ 밭 ] 밭 (Bat) [밭, 田 ]
안 (An) [天] 하늘 (ha) [ 하늘, 天 ] Na 나 [나 1인칭] 나 Na [ 나,我 ]
기르(Gir) 길 (Gil) [路] Ge 그 [3인칭 ] 그 Ge [ 3인칭 ]
라(Ra)[~에서 ] 로 (Ro) [ 조사 ] I 이 [1 인칭 ] 이 [지시대명사]
아비Abi[아버지] 아비 (Bo) [아버지] Uhma 움마[엄마] 엄마 Uhma [엄마]
니므 Nim[님 任 ] 님 (Nim) [ 님 任] As아스:처음[1] Asi아시[처음,시작]
위 ‘아시’의 경우는 우리의 고어로써 처음 한 빨래를 ‘아시빨래’라고 하는 기록이 고문헌(삼국사기)에 나온다. 충청도의 경우 필자의 어머니가‘아시로 먹는다’‘아시로 한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 아느(An)는 하느님을 뜻하고 최고의 신을 말하는데 우리말의 하늘님, 한울님과 같은 의미로 [아래아]를 기준으로 하면 모두 같은 소리가 난다.
또한 안(An)은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우주의 최고신을 대신해서 땅을 다스리는 성인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한’은 한자 한韓이 아니라 순 우리말 ‘한’인데, 이는 단=칸과 같은 것으로 큰, 지도자, 호태왕(황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 우리의 지명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충남‘대전’은 이씨조선이 한자지명으로 바꾸기 전에는‘한밭’이었고, 충남대천도‘한내’였다.
한자에서도 한(汗)과 간(干)은 같은 소리의 글자로 한국어에서는 칸으로 읽기도 하는데 징기스칸을 한자로는 성길사한(星吉沙汗)이라 했으며 신라왕을 거슬막한(汗)이라고 한다. 즉 한(汗)은 고대에는 안(An)으로 통했고 안과 한(칸,단)은 결국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수메르인들은 스스로 검은머리에 황금색피부를 한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자모르 유적에서도 나왔듯이 얼굴 생김새가 가늘고 긴 얼굴에 얇은 입술과 뾰족한 턱, 높은 광대뼈와 째진 눈을 하고 있는 동이족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수메르인들은 현재의 이란 이랔 파키스탄을 아우르는 지역에 동방으로부터 건너와서 문명을 건설하였는데 이미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사법제도 학교제도 최초의 창조설화 등 세계최초라고 하는 39개 사건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 지역에 정착을 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문명의 꽃이라고 볼 수 있는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문자는 페니키아->그리이스로 이어지며 알파벳의 원조가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남긴 점토판에는 한자까지 보인다는 점이다. 한자는 이미 한민족(동이족)의 발명품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쥐나족의 양심 있는 학자나 지식인들(임어당-생활의 발견 저자)은 이것이 사실임을 고백하였다. 더구나 한자의 원형이라는 갑골문자가 은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갑골문자를 발명한 은나라가 사실은 동이족인 한민족이 세웠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더욱이 박씨집안에서 고려시대부터 가보로 전해 오던 갑골문자 천부경이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은허의 갑골문자 외에 더 많은 갑골문자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양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한편, 이 수메르인들이 정착할 당시 이지역의 원주민들의 생활상은 원시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직조기술이 없어서 동물의 가죽을 옷을 입고 다녔고 사냥을 통해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지역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히브리인인데 Habiru로 불렸다. 이 말은 ‘산적’또는 ‘떠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들이 이렇게 원시생활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수메르인들은 이미 옷을 짜서 입었고 옷에 물까지 들여 입었다. 건축기술도 발달하여 2층 가옥까지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넷째, 이외에도 수메르 왕을 ‘던건(단건)’이라고 불렀고 기원도 ‘던기(단기)’기로 하였다. 동이족의 발명품이라고 알려진 1년을 12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 다시 하루를 24시간으로 만들었다는 점,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하는 60진법을 만들었다는 점, 인류 최초의 토기가 송화강(아무르)지역에서 1 만여년 전에 시작되었고 소위‘레반트’문화가 중동지역에 등장한 것이 약 6천년 전이라는 점, 수메르의 12궁도와 한민족의 12간지의 유사성, 그밖에 수메르와 한국은 묘장제도, 순장제도, 최고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고 있는 점 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뿌리가 아니고 서는 설명될 수 없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벽에는 거대한 봉황 한 쌍이 그려져 있다.
또한 수메르문명의 특징 중의 하나는 지구랏이다. 지구랏은 높이만 하더라도 수십미터나 되는 거대한 사각형모양의 신전이며 피라밋과 유사하다. 2003.3. 아메리카(미제)가 이랔을 침공하면서 이랔지역에 산재해 있던 수메르유적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는데, 이때 이랔에 남아 있는 지구랏에 총탄이 맞은 것을 방영해주기도 하였다. 이 지구랏은 제천의식을 하던 곳으로 알려졌고 우리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모습과 닮아 있다.
이러한 수메르문명은 이후에 나타나는 이른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문명에 영향을 주었음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3)수메르 문명과 기독교 및 이슬람교
현재 서양정신의 주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헤브라이즘이 녹아 있는 기독교성경 첫 번째 경전인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나온다.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약1900년 사람이다. 이 사람은 기독교(천주교 개신교)와 이슬람교의 실질적인 시조이다.
그 전에 노아도 나오지만 아브라함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직접적인 계보조상이라고 알려졌다. 즉, 기독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낳은 적자 이삭의 후손이고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이 그의 하녀 하갈에게서 낳은 서자 이스마엘의 자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Ur)에서 살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인 현재의 이스라엘 지방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문명의 중심지인 이랔 지방으로 밝혀졌다.
또한 성경에는 바벨탑사건이 나오는데 이 바벨탑도 사실은 지구랏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르남무(Urnammu)법전은 수메르인이 만든 것인데 인류최고의 법전이다. 이 법전의 명칭에도 우르(Ur)가 나온다. 기독교 성경에는 10계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모세가 나온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이집트 왕립도서관 서고에서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유대역사를 집필하였는데 이것이 소위‘모세5경’이고 구약성경의 초반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도 함무라비법전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함무라비 법전은 수메르법 우르남무법전을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수메르 문명의 상징 지구랏(천제단-무당인 여사제가 주관-이라크 소재)
한편 수메르인은 이미 고도의 농사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홍수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홍수가 수메르인들에게는 엄청난 골치 거리였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홍수이야기가 나오는 서사시‘길가메시(Gilgamesh)를 남겼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사건은 이 길가메시와 완벽하리만큼 일치한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창조설화 홍수이야기의 원형이 이미 수메르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위 자모르 유적에서 나타난 사람의 모양과 관련하여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네피림이라는 종족이 나오는데, 독사의 얼굴과 매서운 눈을 가진 외래의 주시자들이 기술과 천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금지된 신의 문명'의 저자 앤드류 콜린스도 이 자모르인들이 마치 ‘아시아인 같은’ 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네피림 주시자들 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따라서 서양정신의 모태인 기독교와 아랍회교문화의 이슬람교조차도 수메르 문명의 영향권 안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빛은 동방에서’ ‘문명의 빛은 오리엔트에서 비추기 시작했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사에서도 최초의 서양문명인 기원전 1000년전에 발생한 그리이스(희랍 또는 헬레니즘)문화와 뒤를 이은 로마문화가 오리엔트 즉, 동방에서 왔다고 인정하는 것을 보면, 이들 두 문화도 수메르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서양문명은 그리스의 합리적 이성(헬레니즘)과 히브리의 감성적 신앙(헤브라이즘)이라는 두 물줄기로 이루어 졌고 이 문명은 한민족의 후예 수메르에서 나왔다.
한편 수메르인들은 인도에도 내려가 인더스 문명이전에 모헨조다로라는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벽돌로 쌓은 신전을 만들었다. 이 수메르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면서 기원전 2300년에 폭이 10m나 되는 도로를 건설했으며 상수도와 쓰레기 처리장은 물론 공동 목욕탕까지 갖춘 계획도시를 만들었다.
현재 교착어로 알려진 드라비다어(수메르어의변형)가 인도 여러 지방에서 사용되고 있고 드라비다어로 알려진 타밀어는 인도 남동부 타밀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말과 같은 것이 무려 1천여 개나 달한다고 한다. 필자는 현지 여행 중에 마치 전라도 사투리를 듣는 착각에 빠진 적이 있다. 또한, 인도의 고대어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범어)의 모태가 되고 동서언어의 뿌리인 ‘천축실담어’는 거의 1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현재 한반도 각 지방의 사투리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담어만 수십년 동안 연구해온 <셰죵ㅎ한림원>의 강상원 박사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펴낸 ‘산스크리트-영어’사전에 나오는 ‘천축 실담어’를 비교분석한 결과 우리의 각 지방 사투리와 ‘천축실담어’가 대부분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천축실담어’ 옥스퍼드사전에 나오는 예를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ri-langh(아리랑): ‘사랑하는 사람이 서둘러 이별한다’. Asia(아시아): 와서 쉬야, 쉬시오, 안식의땅. Um-jive(움집):엄마,음마(um-ma),음(陰um),자궁(子宮),태->영어로는 홈home. geshi khieya(거시기):머리속에서 찾아 가지고 밝히겠다. manura,manusa,manavi: wife 인류의 조상, 지혜의 화신. masi-kheya(머시기):계산해서 밝히겠다. gama(가마):나아가다. iriya jjaja(이리여 짜짜-소를 몰때): 빨리 심(力)내라. uli-ta(얼리다.어울리다):성교하다.음양의 조화. Ehden(에덴.이전엔):하늘로부터 ‘얻은동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 사투리(표준말포함)가 알파벳으로 그대로 표기되어 있고 그 뜻도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대동소이 하다. 오히려 우리가 모르고 있던 뜻까지 나와 있을 정도다.
또한 한민족은 앞서 본바와 같이 수메르인이 인도에 이동하여 살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도무굴제국을 세운 몽고족이 주도권을 행사하며 살았다. 그리고 불교의 석가모니는 천축실담어와 한가지인 산스크리트어(범어)를 사용했는데 이 산스크리트어가 우리의 사투리에 속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래서인지 석가모니도 한국인이었다는 말이 나오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석가모니의 초상이 가장 신빙성을 갖는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한국인상이다.
그리고 현재 인도 구자랏 지방의 구자랏어도 우리 한글의 모태가 되어있는 가림토 글자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림토 글자는 한단고기 단군세기 편에 기원전 2181년 경자2년에 이 글자를 창제하게 된 과정이 기록되어있다.
구자랏문자
"આજે નસીબ સારું છે!" બટન, આપને આપની શોધના પ્રથમ વેબ પાના પર લઇ જશે.
"આજે નસીબ સારું છે!" એટલે શોધવામાં ઓછો અને વાંચવાનો વધુ સમય.
20세기 인도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시인 타골(Tagore)은 일찍이 영감에 휩 쌓여 한국을 열렬히 사모하였다. 그의 일생과 작품은 현재 인도 캘커타의 빅토리아여왕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는 필자가 1997년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곳에 들러 확인한 바 있다.
타골이 얼마나 한국(Korea)를 그리워하였는지 그의 시 한수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한국이 ‘홍익인간’사상과 ‘신선의 나라’ ‘지상낙원’과 같은 나라였음을 노래하고 있는 듯 하다.그의 시를 감상하면서 한국문명의 존재를 확인해 보자.
‘과거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한국(Korea)은 문명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나라중의 하나였다.
그 찬란한 횃불이 다시 타오르기를 기대하노라.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상은 높은 곳을 향하여, 지식은 자유를 구가하고,
아집의 담벽을 시원히 헐어버려,
세상에 분열이 사라진 곳,
언어가 진리의 샘에서 솟아나는 곳,
은근과 끈기로 노력하며,
성취를 위하여 뻗어가는 그곳에,
맑은 지성의 물결이 낡은 풍속에나,
황량한 사막으로 흘러도 윤택하게 꽃이 피고,
생각과 행동이 무한히 퍼져 열매를 맺는 곳,
우리들의 마음이 자유의 천국으로 인도되어,
내 마음속에 기리는 조국, Korea(Kuliya-구려,고려)여!
깨어 일어나, 태초문명의 찬란한 횃불을 높이 드소서!’
이처럼 한국의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인더스지역에 수메르 문명을 일으켜 이후 나타나는 이른바 세계4대 문명의 원조가 되었다. 수메르문명이 발견되기 전에 세계사학계에서는 ‘황하문명, 인더스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등 이른바 4대문명이 대세를 이루었다.
쥐나족(촤이나-중국)이 자기들의 문명이라고 우겨대는 황하문명도 사실은 그 이전에 하북성과 요녕성 내몽고지역 일대에서 발생한 홍산문명보다 1천년이상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 홍산문명의 주인공이 동이족 즉 한민족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4)아메리카 인디언 인디오 문명
현생인류 최초의 한국문명의 흔적을 태평양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북아메리카와 멕시코의 원주민과 남미의 인디오들이 사실은 한국시대를 전후하여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현지에 정착을 하면서 이주해 올 때 가져온 한국문명을 이식하였다. 이러한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첫째, 피라밋이다. 피라밋은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이집트의 피라밋이다 그런데 중원대륙의 티벳, 서안, 내몽골자치주 한주(만주)등에서도 피라밋이 발견되었고 이집트 피라밋보다 규모면에서 월등히 큰 것도 있다. 그리고 조선반도에서도 발견되는 피라밋도 그 규모는 아주 작지만 원형은 중원대륙에서 발견되는 피라밋과 같다. 그리고 이 이들 피라밋의 특징은 사각뿔모양의 피라밋이 아니라 꼭대기가 평평한 방단형 피라밋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메리카와 멕시코 남미에서 발견되는 피라밋도 이런 방단형이라는 것이다.
만주 집안의 장수칸(황제)의 피라밋(위에 천제단이 있었다)
중국서안의 제2단군릉 피라밋 (방단형 계단형-중공은 나무를 심어 야산으로 위장 숨기고 있음)
멕시코의 태양 피라미드 (천제단-방단형 계단형-인공위성사진)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피라밋 위 부분이 모두 평평한 방단형(계단형)이다.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단이라고 한다. 앞서 살펴본 수메르문명의 상징 지구랏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메리카지역의 피라밋은 한국에서 이주한 시기와 피라밋을 지은 왕들을 조사해 본 결과 중원대륙이나 고구려의 피라밋보다 시기적으로 늦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둘째, 이른바 편두遍頭식 머리를 하는 제도가 한국과 마야문명이 같다는 것이다. 편두란 이마가 납작한 머리를 말한다. 한국의 경우는 앞서본 수메르의 자모르 유적의 인두상이 편두를 한 동이족의 모습이라는 것과 가야시대와 신라시대에 편두식 머리를 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마야인들도 역시 같은 편두식 머리를 한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편두식 머리를 하게 된 이유도 양쪽 다 거의일치하고 있다. 편두식 머리를 한 것은 령적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셋째, 언어와 풍속 유물 문자 그리고 주요사건이다. 먼저 언어와 풍속을 보면 마야문명과 잉카문명(남미)의 언어와 풍속이 한민족 문화와 똑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네’를 ‘그네’로,‘꽃신’은 ‘꼬신’으로, ‘낫’은 ‘낫’으로, 나무를 묶은 것을 다바리(경상도 사투리)라고 하는데 이것도 똑같다. 새를 쫓을 때 새끼(사내끼-충청도 사투리)를 꼬아 만들어 <휘이~ 휘이~>돌려서 새를 쫓는 소리도 한민족과 똑같다. 이외에 도자기, 꼬막단지, 맷돌, 팽이, 물레, 베틀, 물 두레박, 윳놀이, 뜨개질, 베틀로 옷감을 짜서 입는 것, 물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 등에서 일치한다. 참고로 이러한 현상은 인도와 쥐나사이의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소수민족에서도 나타난다.
에콰돌의 경우 한국방송이 ‘걸어서 세계속으로’라는 세계풍물여행을 방영하는 것을 보았는데, ‘키토’라는 지역을 소개하면서 인디오들의 생활모습을 비쳐 주었다. 이들의 생활은 가난하였다. 대부분 뜨개질과 바느질 베틀로 옷감을 짜서 시장에 네다 팔아 살아가고 있었다. 아기를 퍼대기로 둘러서 업고 다니는 것은 역낙없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다음으로 유물과 문자다. 멕시코 올멕 유적지에서 옥으로 만든 홀(笏)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갑골문인데 해독 결과 신시배달국 14대 한웅천황 치우(蚩尤)와 소호(少昊)등 한민족(동이족東夷族)의 이름으로 밝혀졌다. 또한 아메리카 캘리포니아에서 3000년경으로 보이는 인디언의 돌 닻이 발견되었는데 재질이 아메리카 대륙에는 없는 것으로써 동아시아에서만 출토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쥐나의 <용봉문화원류> 책에는 중앙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인 올멕문화는 은(殷)왕조가 주나라에게 망해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은왕조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한다. 은왕조는 은조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다음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마야문명이 한국에서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 전문위원이자 고건축 전문목수인 신영훈申榮勳씨가 1968멕시코 올림픽 때 멕시코에 가서 주변 유적을 방문할 기회가 생겨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의 대규모건축물들(계단식)이 위가 평평한 방단方壇으로 치켜 쌓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이 방단에는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현지 원주민들의 엉덩이에는 푸른점(청반점 몽고반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영훈씨가 현지에 지은 한국정 준공식을 할 때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곳사람들이 찾아와서 신영훈씨가 입은 한복의 대님을 쓰다듬으며 옛날에 자신들도 이런 옷을 입었다고 했단다. 그리고 현지 동포들이 말하기를, 높은 곳에 사는 고산족은 우리와 거의 같은 풍속을 지녔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1910년, 청나라의 외교관 구양경이 멕시코에서 멕시코 혁명 때 죽은 화교에 대한 배상문제를 협의하는데 멕시코 원주민인 인디오의 지도자가 찾아와 만나기를 요청하여 만났는데 자신들은 원래 동이족(은복포족=은나라사람)으로써 약 3천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고 하며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실사로써 정식외교문서인 대만외교부 자료보관처에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참고로 청나라는 한민족 구려(고구려)의 후손 려진족이 세운나라다. 인디오의 지도자가 이것을 알고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전에도 쥐나족의 관리가 멕시코에 갔을 때는 찾아오지 않다가 같은 한민족인 청나라 관리가 오자 찾아온 것이다.
남미의 경우 잉카문명에는 솟대가 보이고 인디오들이 아이들을 퍼대기로 둘러서 업고 다닌다. 북미의 경우 아메리카(미제)의 전차 잡는 최신형 공격무기인 헬기이름이‘아파치’인데 이것도 북미 인디언의 말인‘아파치’에서 따온 것인데 우리 북한 사투리‘아바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위‘나이아가라’폭포도 원래 이름이 ‘네가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순 우리말이다. 즉 네개의 물줄기 또는 냇물이라는 뜻이다. 뤄시아 합바롭스크 지방을 상징하는 문양이 청색과 홍색을 바탕으로 하는 곰과 호랑이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단군조선시대에 이 지역이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증명한다고 본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면 아메리카의 옛 지명이 남아있는 곳도 그 어원을 따라가면 한민족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 세워진 문명도 한국문명의 후손들이 이주해가서 건설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5)기타 한국문명의 증거들
현재 인도와 중국사이의 히말라야 고산족,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 파키스탄의 고산족, 중원대륙의 소수민족, 티벳족, 그리고 시베리아의 부리야트 공화국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민족, 알래스카 옆의 캄차카 지역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보면 우리의 풍습과 문화와 거의 일치한다. 그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이 많으나 몇 개의 예를 들어보면, 첫째 무당문화가 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성황당과 한가지인 돌무더기가 있고 형형색색의 천과 끈이 나무나 기둥에 매달려 있다.
둘째, 짐승을 잡아 제단에 올려놓고 제천의식(고사지내기)을 한다는 것이다. 셋째, 맷돌, 절구통, 뜨개질이 있고, 베틀로 형형색색의 옷을 짜서 입고, 아기를 업고 다니고, 춤과 노래 음악을 즐기는 풍류문화가 고도로 발달해 있다. 넷째, 명절날이나 제천의식을 마치고 나서는 집집마다 방문하여 액운을 쫓는 행사를 한다. 그리고 이때 집에서는 보답을 하는데 보통 곡물을 내놓는다. 이는 우리가 대보름날을 맞이하여 풍물패가 요란스럽게 풍장소리를 내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액운을 쫓아주고 집에서는 쌀을 내 주는 행위와 같다. 필자는 고향이 충청남도 보령 웅천인데 이러한 행사가 해마다 대보름날에 있었음을 기억한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수메르문명과 아메리카 인디언 인디오가 세운 마야, 잉카문명이 모두 한국문명 이었음을 알 수 있고 약 1만년전에 거대한 한국문명이 발생하여 오늘날 전 세계 인류의 모든 종교를 포함한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토대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한민족이 전 세계국가에 대하여 종가집의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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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및 인용의 주요출처:
한단고기(임승국역주-정신세계사)
실증 한단고기(이일봉-정신세계사)
한민족사(율곤 이중재-명문당)
한겨레 상고문화사(윤용빈,윤범하)
대쥬신을 찾아서(김운회)
한민족의 뿌리 사상 (송호수)
부도지(박제상저,김은수역주)
무속에 살아있는 우리상고사(조성제)
한국통사痛史(박은식)
고교 세계사(교학사)
서양문화사(민석홍,나종일)
개관 동양사(동양사학회)
NIV개신교 성경
불교반야심경
동서언어의 뿌리 천축실담어(강상원)
한국사통론(변태섭-삼영사)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박창범-김영사)
<우리역사의 비밀> 인터넷 누리집
기타 인터넷누리집과 인터넷 까페 및 블록
여기까지는 한겨레참역사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한겨레 참역사 펌 ~!
우리 민족의 계보
환 국 (桓 國) : 환인 계보 (7대, 재위년수 : 3,301년)
1대 안파견(安巴堅) 환인(B.C.7199)
2대 혁서(赫胥) 환인,
3대 고시리(古是利) 환인,
4대 주우양(朱于襄) 환인,
5대 석제임(釋提任) 환인,
6대 구을리(邱乙利) 환인,
7대 지위리(智爲利) 단인(檀仁이라고도 한다)신시배달국 : 환웅 계보 (18대, 재위년수 : 1,565년)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B.C.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 련 환웅(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 운 환웅(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 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단군조선 단군 계보 (47대, 재위년수 : 2,096년)
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시대 :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蘇台) (B.C.2333∼1286 : 1048년간)
1대 단군 왕검(王儉, 93, B.C.2333)
2대 부루 단군(扶婁, 58, B.C.2240, 태자)
3대 가륵 단군(嘉勒, 45, B.C.2182, 태자)
4대 오사구 단군(烏斯丘, 38, B.C.2137, 태자)
5대 구을 단군(丘乙, 16, B.C.2099, 羊加)
6대 달문 단군(達門, 36, B.C.2083, 牛加)
7대 한율 단군(翰栗, 54, B.C.2047, 羊加)
8대 우서한 단군(于西翰, 8, B.C.1993, ? )
9대 아술 단군(阿述, 35, B.C.1985, 태자)
10대 노을 단군(魯乙, 59, B.C.1950, 牛加)
11대 도해 단군(道奚, 57, B.C.1891, 태자)
12대 아한 단군(阿漢, 52, B.C.1834, 牛加)
13대 흘달 단군(屹達, 61, B.C.1782, 牛加)
14대 고불 단군(古弗, 60, B.C.1721, 牛加)
15대 대음 단군(代音, 51, B.C.1661, ? )
16대 위나 단군(尉那, 58, B.C.1610, 牛加)
17대 여을 단군(余乙, 68, B.C.1552, 태자)
18대 동엄 단군(冬奄, 49, B.C.1484, 태자)
19대 구모소 단군( 牟蘇, 55, B.C.1435, 태자)
20대 고홀 단군(固忽, 43, B.C.1380, 牛加)
21대 소태 단군(蘇台, 52, B.C.1337, 태자)
나. 백악산 아사달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B.C.1285∼426 : 860년간)
22대 색불루 단군(索弗婁, 48, B.C.1285, 욕살 고등의 아들로 우현왕을 거쳐 단군으로 즉위)
23대 아홀 단군(阿忽, 76, B.C.1237, 태자)
24대 연나 단군(延那, 11, B.C.1161, 태자)
25대 솔나 단군(率那, 88, B.C.1150, 태자)
26대 추로 단군(鄒魯, 65, B.C.1062, 태자)
27대 두밀 단군(豆密, 26, B.C.997, 태자)
28대 해모 단군(奚牟, 28, B.C.971, ? )
29대 마휴 단군(摩休, 34, B.C.943, ? )
30대 내휴 단군(奈休, 35, B.C.909, 태자)
31대 등올 단군(登 , 25, B.C.874, 태자)
32대 추밀 단군(鄒密, 30, B.C.849, 아들)
33대 감물 단군(甘物, 24, B.C.819, 태자)
34대 오루문 단군(奧婁門, 23, B.C.795, 태자)
35대 사벌 단군(沙伐, 68, B.C.772, 태자)
36대 매륵 단군(買勒, 58, B.C.704, 태자)
37대 마물 단군(麻勿, 56, B.C.646, 태자)
38대 다물 단군(多勿, 45, B.C.590, 태자)
39대 두홀 단군(豆忽, 36, B.C.545, 태자)
40대 달음 단군(達音, 18, B.C.509, 태자)
41대 음차 단군(音次, 20, B.C.491, 태자)
42대 을우지 단군(乙于支, 10, B.C.471, 태자)
43대 물리 단군(勿理, 36, B.C.461, 태자)다.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 : 188년간)
44대 구물 단군(丘勿, 20, B.C.425, 욕살) :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고치고 三韓을 三朝鮮으로 개정
45대 여루 단군(余婁, 55, B.C.396, 태자)
46대 보을 단군(普乙, 46, B.C.341, 태자)
47대 고열가 단군(高列加, 58, B.C.295, 대장군)
계해 58년(B.C.238) 단군조선을 폐관하고, 이후 6년간 오가(五加)들이 함께 다스린다.
이제 또 우리 한민족의 시원으로 알려지고 있는. 현생인류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 마고의 성으로 역사를 추적해 올라가야겠죠!
바이칼호애서 제주까지..
선조님들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기가 막힌것이라 ... 천손, 장손 민족의 역사는 엉클어지고 엉망이되고...기가막혀...
그래서 마야문명에서 예견 했듯이. 이땅에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2012 사건이 계획되지 않나싶다.우주의 계획
하늘에서는 신과 영적 정부가 지도하고...이 땅 위에서는 한민족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문명을 다시 세우는...[즐거운 얘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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