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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실황중계 !

+ 깨어남/깨달음은 총체적 디프로그래밍이고, 우리 자신의 본질인 우주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 Vera

 

 

 

깨어남/깨달음은 총체적 디프로그래밍이고,

우리 자신의 본질인 우주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9월 9일 베라의 강연회에 참가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강연회에서 시간 관계로 AH의 메시지에 대한 질의응답과 자유토론을 전혀 갖지 못한데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가지며, 일반 독자들을 위해 강연회 원고를 나누려고 합니다. 상승의 길에 있는 많은 독자들/학생들에게 다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Vera


제목:


1) 깨어남/깨달음은 총체적 디프로그래밍이고, 우리 자신의 본질인 우주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2) 원인과 결과 법칙의 중요성, 분리의식의 실체, 그리고 생명의 연결망에 대한 인상들


안녕하세요. 여러 곳에서, 먼 곳에서 시간을 내어 와주신 여러분 한분 한분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들이 이런저런 평범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와 있지만, 참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면 우리들 자신도 놀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고, 따라서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노력을 쏟았다면, 지금쯤은 한 재산을 가지고 넉넉하게, 즐기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성이나 소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단순한 삶의 체험을 위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정과 어둠, 유혹과 위험이 가득 찬 이 세계에 빛을 가져오기 위해, 창조자 아톤과 계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자 아톤은 우리가 제때에 깨어나도록 필요한 정보를 주시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AH를 통해 지켰으며, 그러한 정보의 덕분에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루시퍼 반역의 잔재들로 많은 것이 혼란되어 있고, 빛과 어둠이 도착되어 있어서, 아무리 위대한 마스터가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도 한동안은 혼란과 방해들로 제 정신을 차리기가, 자신의 소명을 찾는 것이 어려워서, 빈번히 실패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해당되는데, 많은 빛의 사람들이 태어났지만, 그들의 사회와 환경이 너무나 물질주의적인 생존투쟁으로 얽혀있어서, 그들이 하고자 왔던 그 사명을 찾는 것을 어렵게 하고, 뉴에이지 운동에서처럼 많은 이들이 진실의 길로부터 탈선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와있는 우리들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몸과 마음을 일깨울 필요성을 느꼈고, 진실의 정보를 찾기 위해 분투했으며, 다행히도 천상에서 보내주는 정보와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오늘날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 모두는 자신을 칭찬하고 축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구에, 네바돈의 천상 정부의 대표 기관을 설립한 분들이 모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기 와 계실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데, 이것이 그들의 기관이고, 그들이 불렀던 사람들, 빛의 일꾼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들 각자는 내가 현재 나 자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인물이고, 해야 할 훨씬 더 큰일을 위해 여기 와있는 중요한 존재임을 자신에게 인지시키십시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축복을 주시고 있는 네바돈의 창조자 아들, 크라이스트 마이클 아톤님, 지구의 행성 왕자인 이수 임마누엘 사난다 쿠마라님, 그리고 AH 본부의 총재이고, 플레네타리 크라이스인 캔데이크님의 영이 여기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아시고, 이 함께 하는 시간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큰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이것들이 대답하기에 쉽지 않은 질문들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적당히 순응하면서 살아갑니다. 나의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왜 내가 어리석은 일과 잘못들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그 결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의문을 가졌고, 어쨌든 이것에 해결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의식의 꿈을 꾸었고,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완전한 의식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면, 왜 내가 여기 있고, 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옛날에는 득도나 해탈을 하려면 몇 번의 생애에 걸친 노력으로도 그것을 얻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지구의 의식 수준, 지구 밀도의 차원이 너무나 낮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지구의 상승을 앞두고 있는 지금, 많은 높은 에너지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그것들에는 태양계가 주기적으로 들어가는 광자대로부터 나오는 광자들, 그리고 은하핵으로부터 나오는 DNA에 영향을 주는 감마선들, 그리고 지구의 5차원 상승을 위해 파라다이스로부터 보내지고 있는 웨이브 파동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높은 파동들 덕분에 우리는 훨씬 쉽게 상승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파동들이 물질파들보다 주파수가 훨씬 높아서 그냥 물질을 통과하고, 그 파동들이 물질의 파동 수준에 작용하면서 그것들을 변형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만히 앉아있을 때에도, 그 파동들이 지구의 물질들을 투과하면서, 물질과 우리의 육체를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에, 상승과 변형, 5차원으로의 의식적 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시대적 혜택을 받고 있는데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이 과정을 그대로 흡수하고 촉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연적 변형을 막고 있는, 이 변형에 장해물들이 되는, 우리가 우리 의식들 속에,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쌓아놓은 정신적 쓰레기들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먼저 치우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떤 지를 아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덧붙인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했을까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의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하나의 수정란을 형성할 때, 우리의 육체를 제조하기 위한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수정란이 가진 DNA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 DNA들은 완전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어서, 완전한 육체를 만드는 공정이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육체는 자동운영체계, 자가 운용 프로그램을 가진 하나의 완벽한 생물 컴퓨터입니다. 그 DNA 청사진은 완전히 기능하는 육체를 만들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모든 기관들을 운영하는 자율 프로그램을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경에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능들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나 생각이 없을 때에도, 모든 것을 자율 체계로 운영합니다. 우리들의 심장 혈액 순환기, 호흡 기관, 소화 기관들, 내분비기관들, 신경계, 생식 기관, 골조들, 근육과 피부 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운영하는 하나의 멋진 컴퓨터입니다.


자, 갓난아기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는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감지하는 순수하고, 민감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말을 못한다고 해서, 걷지 못한다고 해서, 발육이 안 되었다고 해서, 그가 무언가가 부족할까요? 나는 이전에 외국에서 아직 걸음을 떼지 못한 보행기에 앉아있는 친구 아기를 보았는데, 그의 파란 눈이 나를 꿰뚫어보면서, 흥미롭게 나를 관찰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그가 가지고 온 본래의 의식을 사용하면서, 아마도 자신이 태어난 세계를 살펴보고 어떻게 적응할지를 배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 의식은 완전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의식이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완전한 순수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부터 교육이 시작됩니다. 그는 완전하지만, 그가 막 태어난 세상과 관계해야 하고, 그의 주변 사람들과 관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조급한 마음으로 말을 가르칩니다. 어린 아기는 모든 것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가진 노력을 하면서, 몇 번이고 넘어지는 것을 불사합니다. 부모는 무엇보다도 어린 아기와 대화하고 싶어서, 말을 부지런히 가르칩니다. 말과 더불어, 부모가 가진, 모든 좋고 나쁜 것, 해야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개념들이 아기에게 전달됩니다. 그들은 말을 가르치면서, 또한 그들의 믿음과 희망사항, 전통적 인식들을 무의식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아이가 자라서 6,7세가 되면, 이제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을 기게 되고, 더 많은 지식과 개념들을 그의 뇌 속에 프로그램 해 넣게 됩니다. 그가 배운 모든 것이 그의 뇌에 저장되고, 뇌의 정보처리를 활성화하는 프로그램들이 됩니다.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웁니까? 기본적인 언어, 산수, 과학을 배우고, 경험과 논리적, 합리적 사고에 기초해서 수립된 모든 지식 체계들, 사회적, 전통적 규범들, 역사, 도덕, 윤리까지 배웁니다! 이렇게 검정된 교과서로 수립된 이 내용들이 얼마나 진실성에 가까울까요? 예를 들어, 역사는 진실입니까? 얼마만큼 진실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까? 흔히 역사는 승자의 유산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칼을 든 강한 자들이 평화롭게 사는 약한 민족들을 침략하고, 살상하고, 땅과 모든 것을 강탈하면서 정복자가 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자부심에 따라 역사라는 것을 미화하면서 기록했습니다. 역사가 제아무리 자세히 기록되었다 해도, 그것은 일부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의 기록들일 뿐이고, 당시 국민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집되고 편집된, 혹은 누군가에 의해 검증된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들과 기록들은 진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 도덕, 윤리에 대해선 어떤가요? 그것들 모두가 인간들의 전통과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개념화한 것들은 아닐까요? 그것들도 일종의 사회적 프로그램들입니다. 거기다 인간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주는 종교가 있으며, 이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절대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합니다. 이전에 위대한 마스터들이 원시적 믿음과 미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직 동물들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를 위해 진실을 가르치려고 왔습니다. 그 가르침들이 얼마나 이해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가르침들은 그들의 마스터들이 떠나자마자, 그것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그것들을 기록하고, 문서화, 교리화 하면서, 그 위에 조직과 체계들을 만들고,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정신을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진실은 존재하는 생명, 살아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성문화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그때그때 마스터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나 비유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가르침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진실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죽은 글자들 안에 갇힐 때,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진실로서 영감을 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개념들, 논리들, 체계들 속에 갇혀버린 진실이 사람을 참으로 깨우치게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종교들이 바로 이런 모습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의 마스터들이 남긴 것을 달달 외우고, 그것을 읊으면서,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언젠가 구원되고 천국에 가거나, 깨달음을 얻고 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사람을 죽은 개념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죽은 개념들로 자신들을 프로그램 하는 것을 보세요. 그들이 믿고 있는 것, 그들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들이 바라는 것, 그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그들의 의견들, 주장들, 판단들, 신념들, 이론들을 만들고, 그것들에 기초해서 그들의 인생관, 가치관, 대인관, 사회관, 역사관, 종교관, 세계관을 수립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프로그램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가치관들이 또한 나의 신분과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각종 신분, 명함들을 줍니다. “나는 아무개이다. 나는 이런 남자다. 나는 이런 여자이다. 나는 회사 사장이다. 나는 정치인이다. 나는 철학자이다. 나는 연예인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등등이 있습니다. 정말로 이런 명함들이 내가 누구인지, 내 안의 진짜 나를 대변합니까? 만약 내가 무한한 의식의 존재라면, 이것들은 오히려 나를 이런저런 범주로 제한하고, 제약하는 것들인데, 이것들이 또한 모두 내가 나 자신에게 덧붙인 나의 신분 프로그램의 명칭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크리슈나무르티의 그 유명한 말을 한 번 듣고 지나갑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인도인, 무술림, 혹은 기독교도, 혹은 유럽인, 다른 누군가로 부른다면, 당신은 폭력적이 되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폭력적인지를 당신은 볼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분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신념이나, 국가나, 전통으로 분리할 때, 그것은 폭력을 기웁니다.” 이 사람의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우리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돌아보면 압니다.


우리들이 정규 교육을 통해 사회 적응을 위한 프로그램을 끝냈을 때, 학교를 끝내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 사회에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또 다른 광고들과 선전들이 난무합니다. 우리의 물질주의적 생활에서 이 광고들은 마치 생존투쟁을 하듯이 우리의 생활 전반으로 폭주하고 있습니다. 만약 물건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고, 그것들이 유용할 때, 왜 광고가 필요합니까? 우리들 사회는 많은 사업들, 공장들, 상업들이 있는데, 이들의 유일한 동기는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만들어내고, 필요하지 않는 물건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사게 만들기 위한 구매 충동 방법으로 광고와 선전들을 고안해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자신도 모르게, 귓가에 흘러넘치는 광고들과 선전들로 세뇌됩니다. 그들은 TV, 라디오로부터 들리는 광고들로 세뇌되며,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구매합니다. 이 많은 상품들 중에 우리가 반드시 필요한 물건들을 과연 몇 %가 될까요? 나는 그것이 아마 10%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화장품 광고, 술 광고, 약품 광고, 영양제들의 광고들이 있고, 모든 허영과 사치를 부추기는 광고들이 우리 의식에 스며들면서, 우리를 중독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광고들로 알게 모르게 세뇌된 사람들은 그들의 소비 생활에서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잃고 있습니다. 이 모든 광고 선전들이 또한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프로그램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문화적인 광고 선전은 영화들, 드라마들을 통해 나오는데, 끊임없이 살인과 죽음의 공포를 자극시키는 많은 폭력 영화들, 범죄 영화들, 전쟁 영화들, 공포 영화들은 오락 영화라는 미명아래, 현대인의 정신/심리 체계들을 심각하게 오염, 중독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부패시키고 말살시키는 대단히 심각한 병적인 프로그램들이고, 이것으로 인해 자신이 가치 없고, 일시적인 물질적 덩어리라고, 삶의 의미와 자신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흔히 영화들에서처럼, 좀비들이 되거나, 아니면 AI, 기계 지능의 뛰어난 힘을 동경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주변에서 끊임없이 발사되는 정보들로 의식 없이 노출되고,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그들의 의식 속에 쌓이고 굳어질 때, 더 이상 그들은 내부로부터 빛이 새어나올 수 없고, 사람들은 모든 행동에서 즉각적인 대응이 아니라, 저장된 프로그램들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으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요즈음 인공지능 AI들이 생산되는데, 이것이 얼마만큼 이러한 인간들과 구분, 구별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우리의 과거의 체험들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기억들은 얼마나 믿을만할까요? 과거는 무지와 제한들, 두려움으로 인한 우리의 많은 실수들과 상처들의 체험들을 지니고 있고, 우리를 더욱 위축되게 만들 수 있으며, 매번 우리의 행동과 결정의 선택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이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또한 거대한 프로그램의 일부로 우리의 뇌 안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모든 지식 기반은 당신이 전체 교육으로부터 받아들인 모든 프로그램들, 당신이 사회적, 문화적 선전을 통해 받아들인 모든 프로그램들, 당신의 과거의 기록된 기억들의 모든 프로그램들인데, 이것들이 당신의 뇌를 가득 채우고, 24시간 뇌를 그 정보처리 작업으로 바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매 순간, 행동과 결정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되며, 이러한 결정에 따른 결과들이 책임감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순간의 우리의 말과 행동의 선택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 만든 거대한 프로그램들에 기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프로그램 된 정보, 지식들이 완전하다면, 내가 잘못된 선택을 덜 할 것이고, 삶을 사는데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중에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들,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면서 살고, 갈등과 불안, 고민과 고뇌를 가지고서 삽니다. 우리의 삶은 행복해지는 것이 그 목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맑은 정신, 맑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 선입견과 의견들을 갖지 않은 사람들, 결론들을 쉽게 끌어내지 않는 사람들,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삶을 생각 없이 보는 사람, 삶을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자신에게 프로그램한 모든 것이 과거의 것이고, 완전하지 않으며, 생각 자체의 성질인 한정성과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하는 일이 왜 사람들을 피곤하고, 불행하게 만듭니까? 우리는 하루 종일 생각하고 삽니다.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능력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생각은 필요할 때 창조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매 순간에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할까요?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프로그램하고, 그것을 생각을 통해 끊임없이 반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밤낮 생각하고 삽니다.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의 뇌가 쉴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가 존재할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덧붙인 이 모든 종류의 프로그램의 작동을 멈출 수 있을까요? 생각하지 않고도, 생각함 없이도, 그래도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험을 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최근에 인터넷에서 톰 브라운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현대의 인간들을 덕지덕지 프로그램들을 처바른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을 실험했는데, 과연 생각 없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기 위해, 음식과 생각의 단식으로 들어갔습니다. 단지 물만 마시고. 그리고 그는 발견했습니다. 그의 몸의 욕구들이 수그러들면서, 그의 생각들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주위와 내부가 조용해지면서, 내부에 비어있는 공간, 어떤 힘으로 꽉 차있는 에너지 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점점 생각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생각이 없는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장 안에 있었습니다. 그 장은 살아있는 에너지로 가득 차있었고, 그는 생각으로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확장된 의식 속에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거기, 본래, 언제나 있었던, 우주를 채우고 있는 우주 에너지, 우주 의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고요 속에서 평화와 자유, 그리고 무애자재로운 에너지가 주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몇 시간, 며칠을 그곳에서 지낼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곳이 그의 고향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우주 에너지와 그 자신의 에너지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 우주 에너지는 또한 그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본질이고 근원인, 바로 그 생명력을 주는 살아있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의 본질적 의식이 그의 생각들, 태어난 이래 받아들인 프로그램들을 꿰뚫어보기 시작했고, 집 청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확연해졌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인 모든 것이 불완전한 생각들과 지식들과 과거의 기억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모든 정보의 프로그램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생각은 필요할 때만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때는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우주 의식의 장 안에 머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도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자신이 두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았는데, 하나는 온갖 형태들과 색채들로 가득 찬 우리의 이 현실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근원이고 본질인 우주 의식의 장이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든 눈만 감으면, 그 고요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그 평화 속에 잠길 수 있습니다. 그 장은 단지 지금 고요하게 살아있습니다. 생각이 없어집니다. 오직 지금 순간만이 존재합니다. 그 장은 모든 생각을 배제합니다. 생각들이 침입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비어있지만, 또한 꽉 차 있는 공간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고, 단지 존재한다는 그 느낌, 그 에너지만이 있습니다. 생각은 당신이 일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 할 수 있습니다. 대화나 일이 끝나면, 당신은 고요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지금 순간에서 사는 단순하고 순수한 삶이 시작됩니다. 모든 의견과 편견, 비난, 불평이 사라집니다. 당신이 우주 의식의 장 안에 머물 때, 그것은 반사경 역할을 합니다. 당신의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 프로그램들이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우주적으로 확장된 맥락에서 비추어진 그 생각들의 부족함, 제한들과 불균형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의 조절, 조정, 조율이 가능해집니다. 아마도 그것이 사고 조절자가 활성화되고, 그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 생각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나이만큼 그들의 뇌는 끊임없는 생각의 상태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 습관의 고리를 끊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제 생각이 없는 상태, 무념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동양의 종교들은 오래 전에 많은 방법들을 고안해냈습니다. 명상에는 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명상은 간단하게 뇌가 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내부의 에너지를 느끼기 시작하는 훈련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호흡법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 안에는 주의력을 지시할 수 있는 하나의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앉은 다음, 자신의 호흡을 관찰합니다. 어떻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가에 어려 가지 방법을 곁들일 수 있습니다. 무작정 무념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어쨌든 인지할 수 있는 리듬을 가진 들숨, 날숨을 관찰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처음에 조금씩, 하루에 1분씩, 5분씩, 조금씩 그 시간을 연장해가면서, 정기적으로 한다면, 그것이 몸 안에 쌓이면서 습관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요가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근육의 긴장으로 초점을 주면서, 뇌의 생각하는 기능을 쉬게 합니다. 톰 브라운처럼 단식을 통해서 할 수도 있고, 듣는 것의 집중, 보는 것의 집중 훈련을 통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명상들은 뇌를 쉬게 해주는 것이므로, 아마 몸이 무척 좋아할 것입니다. 지나친 사고 생활 때문에, 폐와 심장은 충분한 호흡을 갖지 못했을 테고, 항상 산소 부족으로 몸이 많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명상은 과잉 생각이 가져오는 스트레스로부터 몸을 해방시킵니다.


내 경우에는 뇌 속에서 집중하는 명상을 아주 오래 동안 해왔습니다. 처음에 강한 햇빛을 잠시 보고 눈을 감으면, 망막에 그림자들이 생기는데,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보는 훈련을 합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본다는 초점 훈련이 시작됩니다. 아마 이것이 관음, 빛과 음을 본다는 훈련이 되겠지요. 눈 속에, 머리 속에 초점을 만들고, 집중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몇 분, 그리고 계속 그 시간을 조금씩 늘리면서, 할 수 있는 만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 속에 온통 전류들이 흐르기 시작했고, 가끔 눈가로 빛이 발산되어 나갔는데, 밤에는 이것이 무서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집중력의 초점이 다름 아닌 송과선, 제 3의 눈, 즉 우주 의식의 창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장기간의 훈련이 송과선을 완전히 여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동시에 우주 의식의 장 안에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톰 브라운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고 있고, 내게는 부족한 그의 멋진 표현력을 빌려서 이 지식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보하는 중에 잠시 풀숲의 정자에서 쉬는데, 눈만 감으면 나는 다른 세계 속에, 고요의 장속으로 즉시 들어갈 수 있고, 그곳에서 우주의 배움을 들으면서, 내안의 살아있는 에너지를 느낍니다. 물론 나는 새소리도 듣고, 산들바람도 느낍니다. 얼마 후에 눈을 뜰 때 나는 주위에 강렬한 색체들과 형태들로 폭발하는 세상을 발견하고, 매번 깜짝 놀라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하나는 나의 외부에, 하나는 나의 내부에 존재함을 나는 확연히 인식합니다. 나는 물질세계와 에너지의 세계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물질세계에서는 나는 하나의 분리된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에너지의 세계에서는 나는 나 자신을 우주 의식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내부 의식이 나의 일반적 의식 상태가 되었으며, 평소에 나는 저절로 생각이 없는 상태에 머뭅니다. 생각은 그때그때 필요할 때 일어납니다. 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습니다. 보통 때에 나는 생각 없이, 걱정이나 염려 없이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고, 장애물이 없는 공간에서, 두려움과 불안 없이, 무엇이 다가오든 활짝 열린 순수한 의식 상태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 교육으로 세뇌 프로그래밍이 없었을 때, 생각 없이, 순진한 마음으로 살았을 때와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그 톰 브라운(http://humansarenuts.blogspot.kr/2017/05/it-makes-big-difference.html)이 표현한 글의 일부를 직접 덧붙이겠습니다. 그의 명료한 설명이 이해를 더욱 명확하게 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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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자신을 비울 때, 당신이 없어지며,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참된 당신은 걸어 다니는 존재이고, 생각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당신이 육체 속에서 가질 최대의 계시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평소에 당신 자신인 누구인데, 당신이 그것을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생각을 멈춘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당신은 다시 태어났고, 당신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의 몸이 아니며, 그것은 빛의 몸입니다. 그것은 빛에 속하며, 어떤 이는 그 빛을 신으로 부릅니다. 그 몸이 태어날 때, 그 마음은 공백상태입니다. 서서히 날들과 해들이 지나가면서 그것이 프로그램 됩니다. 몇 년 후에 당신은 자신이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남은 모든 것은 걸어 다니는 몸뿐입니다. 그것은 다시 아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생각을 버릴 때, 당신 자신을 아무개라고 확인하기를 멈출 때, 당신은 하나의 진공, 하나의 빈 공간을 창조하며, 그 공간은 정말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인 빛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빛 몸이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유전자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성격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견들, 신념들, 믿음들, 희망들, 꿈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것들의 어느 것도 아닌데, 비록 당신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당신에 의해 획득되었고, 당신은 그것들을 자신에게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생각을 멈출 때, 당신이 그것들이라는 생각을 멈출 때, 무엇이 남습니까? 당신 몸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의 컵, 당신의 몸과 마음이 비었을 때 무엇이 일어납니까? 그것이 비어 있기 때문에 빛이 그것을 채웁니다. 그때 무엇이 일어날까요? 그것을 실험해보세요. 당신은 발견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당신의 몸과 동일화를 멈추세요.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세요. 단지 다른 누구로서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세요. 그러면 그 다른 누구는 사라지는데, 그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세요.


당신이 깨달을 때, 빛으로 들어갈 때,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그 어둠, 그림자를 버렸을 때, 그것은 당신이 현실을 보는 방법을 바꾸게 합니다. 깨달음 전에 당신은 먹을 물과 땔 나무를 날랐습니다. 깨달음 후에도 당신은 먹을 물과 땔 나무를 나르지만, 지금 당신은 자신이 정말로 누구이고 무엇인가를 아는데, 그것이 생명인 하나의 빛, 모든 것, 우주의 근본에 있는, 우주의 그 근원인, 우주에너지, 우주 의식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컵이 비었으므로, 그 빛이 그것을 채웁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채워집니까? 당신이 결코 전에, 이전에 당신의 마음이 너무나 많은 세속적 물건들로,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채워졌기 때문에 다운로드할 수 없었던 직관, 계시, 놀라운 정보를 받게 됩니다. 당신이 세속적 생각들로 가득 찼을 때는 이 놀라운 영감, 계시, 창조적 아이디어, 놀라운 정보가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빛입니다. 나는 걸어 다니는 빛입니다. 아무개는 죽었습니다. 나는 빛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나는 아무개로 동일화하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의 유기체, 하나의 총체성, 하나의 의식의 통일장, 하나인 창조력의 단일한 하나의 표현으로 일하는 우주인, 그 생명력인 그 빛의 총체성이고, 동시에 그 일부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집에 왔습니다. 나는 천국에 있습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이고,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나의 현실로 어떻게 영향을 줄까요? 나는 존재하는 것을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신을 표현하는 빛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옳습니다. 빛은 원인과 결과를 행합니다. 빛은 그 모든 것을 행하는데, 그것이 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이 나의 생각이고,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하는 것도 나의 생각입니다. 나는 지금 존재하는 것을 빛의 하나의 표현으로서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빛에 대항하는, 존재하는 것에 대항하는 짜증, 불만, 속상함, 분노, 불평, 폭력이 없습니다.


나는 폭풍 속에서도, 초원과 들꽃 위로 나붇기는 여름 산들바람으로 평온합니다. 나는 모든 폭풍의 존재 속에서도 평온합니다. 나는 삶의 아름다움, 하나의 생명의 삶, 세상의 생명인 하나의 빛의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나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평화 속에 있는데, 심지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그 평화 속에 있습니다. 내가 자아와 그 생각들, 관점들, 판단들을 버렸을 때, 나의 평화를 흔드는 생각이나 감정을 버렸을 때, 바로 그 본질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일어나는 일, 내게나 누구에게나, 다른 무엇에게 일어나는 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창조와, 존재하는 것과 논쟁하지 않습니다. 나는 유리 같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잠자는 아기처럼 평온하며, 나는 여전히 먹을 물과 땔 나무를 가지러 갑니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 따라서 당신이 바라거나 기도하는 것에 조심하세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자신의 마음으로 운영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가 당신의 마음을 통해 당신의 삶을 운영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 마음의 제한된 이해를 신뢰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의 무제한한 이해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사용하면서 세계로 속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가 당신의 마음을 사용하게 하고,

세계 속에 있지만, 그러나 세계에 속하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거울을 사용하면서 당신의 삶을 운영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의 거울을 사용하면서 당신의 삶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이해를 신뢰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의 무제한의 지식과 이해와 지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의 의지로 항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제한된 의식을 사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의 무제한한 의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지식으로 자신의 삶을 운영할 수 있거나,

아니면 당신은 우주가 가진 지식으로 당신의 삶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 일을 할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합니까?

더 나은 일은 더 많은 평화, 행복, 기쁨, 희열, 엑스타시를 의미하며 ...

지금과 이후의 삶의 장기적 운영에서 당신에게 더 많은 가치를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1부 주제를 끝내고,


다음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 모든 것을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분리의식의 실체, 그리고 그 표면 한 거풀 아래에 조밀하게 짜여 있는 연결망에 대해 생활 속에서 받은 몇 가지 인상들을 간단하게 나누겠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


어쨌든 여기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세상으로 온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세상으로 적응을 위해, 그리고 그 목적을 잘 이루기 위해 그 모든 프로그램들이 필요했고, 그것을 충분히 수집하고, 그것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러한 프로그램들과 동일화하고, 그것들로 행동하고, 그것들을 주장하며, 경쟁하고, 투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필연적인 결과들이 우리들에게 제약과 불균형, 모순과 갈등들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균형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두 세계에 거주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은 훈련과 노력을 요하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과정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우리의 행동패턴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온 이 세상은 우리가 믿고 있듯이, 불완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자연은 균형과 조화의 법칙으로 그 자신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곡되고, 한정되고,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우리들의 관점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자연의 법칙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따르는 자연의 일부로서 산다면, 우리들 또한 그 자연처럼 아름답고, 평화롭고, 풍요롭고, 행복하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가 우리 인간의 구성에서 이 모든 프로그램들의 정체를 파악했다면,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정직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기본적 태도, 방향 감각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주, 그 축소판이 자연은 의식을 가진 생명체들의 끊임없는 운동들과 변화들로 구성되고, 그 자체 끊임없는 균형 상태를 가져오는 몇 가지 규칙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입니다. 자연 속의 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우리는 쉽게 인정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에서의 이 법칙의 적용을 그리 민감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카르마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고, 특히 의지의 생물인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모든 선택이 이 카르마의 작용에 적용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매 순간이 많은 선택들로 구성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매 순간 무슨 말을 할까,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행동을 할까, 무슨 결정을 할까 에서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카르마의 에너지 장부에 기록됩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때, 이 카르마의 에너지 부하가 커집니다. 우리의 생각들과 감정들이 쌓이고, 그 부하가 커지면,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방출로를 찾게 되며, 그것들이 감정적으로 분출될 때, 발산된 그 에너지들은 없어진 듯 보이지만, 언젠가는 균형을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부당한 판단에 대해, 사회와 국가의 불공정한 처우에 대해 불평하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내놓는 에너지는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끌어들인다는 또 다른 에너지 법칙으로 인해, 더 많은 불만과 비난, 불안의 요소를 끌어들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당함과 불행, 그것이 외부에 원인이 있을까요? 그것은 내부의 그러한 상황을 끌어들이는 그 원인, 촉수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전적인 책임감을 져야 하는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끌어들인 것이고, 그 원인은 내가 만들었다고, 그러므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확히 그 결과들이라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그 내부의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한, 그러한 상태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 내부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것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 현명한 삶의 태도가 될 것입니다.


에너지의 법칙은 정확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법칙들을 이해하고, 그러한 원인을 만들지 않도록, 매 순간에 깨어있어야 하며, 매 순간의 선택과 태도에 의식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내장된 프로그램들에 의한 무의식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의 고리를 끊어야 하며, 매 순간을 지금 의식으로 관찰하면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생각이나 태도를 돌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점을 인식한다면, 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역으로, 우리에게 이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가 “아,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어딘가에 그 원인을 가지고 있어,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 그 원인이 있어, 우리가 단숨에 판단하지 말고, 이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닐까. 그리고 좋은 원인들을 심는 것은 어떨까? 좋은 원인은 좋은 과실들을 맺을 것이고, 그것이 나와 이웃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등등”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친절한 말, 배려하는 말, 다른 사람을 북돋아 주는 말을 선택한다면, 모든 생각을 긍정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쪽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만든다면, 어떤 결과들이 생길까요?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우연히, 이유 없이 거기 있거나, 생기는 일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누군가의 어떤 필요성에 의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며,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 오늘 내 몸이 건강하고, 아픈 데가 없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동료들과 이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등 살펴보면, 내가 감사할 수 있는 일의 리스트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베풀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습관은 좋은 씨앗이 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더 많은 감사할 일들을 끌어들이면서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사회를 불완전한 것으로,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있는 곳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이 모든 불완전함이 혹시 나의 관점, 나의 안경 때문이 아닐까요? 모든 문제가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외부는 내부가 투사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혁명은 내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내부가 정리, 정돈될 때, 외부가 또한 정돈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내부의 청소로 돌아오는데, 내부에 쌓인 모든 프로그램들로 얼룩진 우리의 안경을 청소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만약 안경이 유리알처럼, 수정처럼 맑아진다면, 그것은 내부에 있는 것을 외부로 투사할 것입니다. 톰의 말대로, 내부는 앎을 가진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흔히 그 빛은 전능하고, 전지하며, 편재한 신으로도 표현됩니다. 이 자유롭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 거대한 앎의 바다가 우리들 모두의 내부에 존재하며, 우리가 사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모든 것, 우리를 신과 같이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을 단지 깨닫지 못하고, 단지 찾지 못하며, 단지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분리 의식)


다음으로, 우리들 세상에서 우리들의 의식적 진화, 영적 깨어남을 막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만연한 분리된 의식이라고 현자들은 지적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그 본래 의식은 잊혀지고, 그 이후 체험과 교육을 통해 얻는 지식이 모두 분리된 물질세계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세계에는 분명히 모든 것들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빛의 두 가지 성질에 기인하는데, 빛이 입자의 성질과 파동을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원인 에너지의 생각, 운동이 빛이며, 그 빛은 방대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밀도와 차원에 따라 그 빛의 두 가지 성질에 의해 우주 안의 모든 평행 우주들과 세계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세계들의 공통점은 하나인 근원에서 출발하는 빛의 파동적 성질을 공유한다는 것이지만, 그 빛의 입자적 성질들로 말미암아 각각의 평행 현실들, 홀로그램들을 창조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현실이 빛의 입자적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에 분리된 물질세계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입자를 빛의 보다 근본적인 파동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과학자들이 물질의 성질을 파악하기 위해 물질들을 나누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세포, 분자, 원자, 소립자, 아원자로 계속 나눠지다가, 그 끝에서 더 이상 입자가 아닌 파동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초끈 이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또 과학자들이 빛의 성질을, 그것이 입자인가, 파동인가를 알기 위해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이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장치를 사용할 때, 그것이 입자임을 나타냈고, 그들이 파동의 성질을 타나내는 장치를 사용할 때, 그것이 파동임을 나타냈는데, 여기서 관찰자들의 어느 것을 볼 것인가의 선택에 기초해서 그 결과가 결정된다고 하며, 결국 의식의 개입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즉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의식이 존재할 때에만 지각되고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이 의식이 그 무수한 개체들로 분리된 듯 보이는 것은 그 빛의 그 양면적 성질에 의한 것이고, 그 양면은 하나이고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뇌의 지각 체계인데, 우리의 우뇌는 정보를 파동으로 인식하는 반면, 우리의 좌뇌는 입자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뇌의 사용보다, 환경과 사회에 더 잘 순응하지 위해 주로 좌뇌를 사용하며, 우리의 시각 체계는 모든 것을 분리된 입자들로서 지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은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눈이 빛으로 반사된 코드들을 받고, 망막에서 그것이 전기 신호로 신경들을 통해 뇌의 뒷골 부분에 있는 시각중추로 전달되며, 거기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시각적 상을 수립한다는 것입니다. 즉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시각적 상들은 뇌 속의 전기신경 작용에 의해 그 뇌의 한 구석에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이 무수한 빛의 코드들로, 전자파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는가를 의심합니다.


워너부러더스 영화사의 로고 화면에서 주택들이 파동들로 흔들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흔히 우리보다 한 차원 위에 있는 존재들은 그들이 볼 때 우리의 세계가 파동들의 형태로 보인다고, 꿈을 꾸는 듯이 보인다고 하고, 또 우리들이 그들을 본다면 같은 현상으로 보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빛 몸의 주파수를 조절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대로 조절하면서 우리 수준으로 내려올 수 있고, 우리들에게 보일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깨질 수 없는 단단한 물질세계가 그렇게 프로그램 된 파동적인 세계, 단지 하나의 홀로그램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한두 가지 간단히 실험해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어떤 대상, 물체에 시선을 집중해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만약 장미꽃을 들여다본다고 할 때, 시선을 계속 집중하면, 대상이 어느 순간 흐려지면서, 단단한 물체의 상이 허물거리는 파동의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과정이 강렬해지면, 어느 순간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의 경계가 없어지고, 우리가 하나의 장 안에 있다는 특이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실험은 햇빛이 비치는 날에 하늘의 어떤 공간을 바라보세요. 시선을 그 공간에 고도로 집중하다 보면, 아주 작은 빛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빛들은 빛을 내면서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하면서, 물처럼 흐릅니다. 공간이 온통 그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돌아온 크라이스트, 그의 진실을 말하다”에서 우주와 세계가 티끌보다 더 작은 티끌 같은 빛으로, 빛의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빛들은 입자라기보다는 에너지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분리되어 보이는 모든 것은 그 표층일 뿐이고, 우리가 의식을 집중할 때, 파동적 장이 나타나며, 경계들이 없어집니다. 이런 것이 또한 물질에 대한 우리의 환영을 깨뜨려주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결망)


이렇게 모든 것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우리들의 물질적인 세상에서도 우리가 조금만 세밀한 조사를, 논리적인 조사를 해본다면, 근원인 우주 에너지지로부터 나온 무수한 표현과 형태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장으로 무수한 연결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물과 공기, 돌과 모래, 식물, 동물, 인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의 속성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나는 나의 부모의 자손이고, 그들은 그들의 부모들을 가졌고, 그들이 또한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나왔고, 이렇게 무한히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끝에 가서는 한 민족이 몇 커플의 사람들로 줄어들 것이고, 그들이 여기 오기 전에는 아마 다른 행성에서 살았을지도 모르며, 이것이 또한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여기 하나의 웅장한 나무가 서 있는데,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그것의 어미 나무로부터 온 하나의 씨앗에서 나왔고, 그 나무가 또한 그 부모 나무의 씨앗으로부터 나왔으며, 그것이 이렇게 또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해변의 모래알들도 기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계와 우주의 생성과 순환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 그 위의 모든 물질들과 생명체들이 우주의 그 무한으로 이어지는 진화적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사회는 어떨까요? 사회에서 우리들이 따로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 해도, 우리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생명의 연결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없다면, 우리가 산소를 마실 수 없겠고, 또 나무들은 우리가 배출하는 탄산가스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식탁 위에 놓인 바나나는 어디서 왔을까요? 아마도 동남아시아의 바나나 농장에서의 바나나 나무들로부터 열심히 키워진 것일 것입니다. 이것을 그곳의 일꾼들이 힘들게 베어 운반하고, 수출되어 큰 배들로 선적되고, 이것이 우리의 항구에서 하역되고, 수입상들, 중간상들을 거쳐 소매상으로 운반되고, 그리고 우리의 식탁 위에 놓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생산된 모든 자원들과 재료들이 무수한 인간의 손과 머리들을 거쳐 가공, 제조되며, 우리에게 배달되고,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이 됩니다. 자동차는 수많은 부품들로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하나의 부품이 많은 머리들에 의해 설계, 고안되어, 더 나은 성능으로 개발되었고, 우리가 사용하는 멋지고 안전한 운송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택들, 건축물들, 현대 문명의 모든 이기들이 이러한 기술적 진화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의 머리와 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들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존재했던 모든 다른 인간들과 수직적으로 연결되고,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분리되어 있다는 인상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좋은 비유가 있는데, 하나의 거대한 벽걸이 융탄자가 있습니다. 그 위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그림이 아름다운 색채들과 모양들로 선명하게 수 놓여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위의 모든 것들이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움직입니다. 멀리서 볼 때 그 움직임들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는데, 우주 공간으로부터 지구를 볼 때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살아있는 그 그림들에서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움직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표면 바로 밑에는 무수한 실들이 치밀하고 조밀하고 직조되어 하나의 거대한 벽걸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현실의 삶의 표면성과 그 근저의 생명의 하나로의 연결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생명의 그물망의 일부임을 인지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돕고 있는 살아있는 모든 이들과 모든 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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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으로 돌아가서,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복잡하게 프로그램된 홀로그램 현실 속에서 살 때, 우리는 외적인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리의 본질, 생명, 의식으로 돌아와야 하고, 그럼으로써 두 세계의 균형을 맞추고,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더 많은 진실과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창조하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강의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깨달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습득하고, 축적하고, 편집하고, 우리 자신에게 부착시키고, 우리 자신과 동일화해온 이 모든 프로그램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총체적으로 디프로그램하는 것, 그것들을 우리 자신에게서 벗겨내며, 그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프로그램들을 그 기능적인 역할로 제한하고, 그들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이 있었던 본래의 자리, 우주 의식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철학적 사상이 심오하다 해도, 아무리 종교적 신념들이 신성하다 해도, 아무리 과학적 논리들이 유용하다 해도, 그것들 모두가 생각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양의 마스터들은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그들은 인간이 생노병사의 문제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항상 사용하는 상념의 모든 탈바가지들 벗어버리는 것, 즉 해탈이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가르쳤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로 온 크라이스트는 우리가 육체가 아니라 영적인, 에너지적 존재라는 것, 우리가 하나인 근원, 하나님, 우주의식, 대 원인, 대 생명력, 창조자, 신, 아버지로부터 온, 모두 고유하지만 대등한 존재들이라는 것, 즉 신의 아버지됨과 인간들의 형제됨의 관계를 가르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기 아버지 신의 아들과 딸들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넘어서까지 갈 수 있는데, 우리가 신 의식, 크라이스트의 의식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그 아버지와 하나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아버지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형제들이 나의 일부임을 깨달을 수조차 있습니다. 이것이 신에게서 나와서 신에게로 돌아가는 인간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마스터들의 해방의 가르침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 그러나 이제 때가 되었고, 우주의 기운이 변했으며, 천상의 도움으로 지구가 상승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높은 주파수 파동들로 인해,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의식으로 들어가기가 쉬워졌습니다.


지구는 그 동안 루시퍼의 반역의 후유증으로 가장 깊은 어둠의 수렁을 빠졌고,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겪었지만, 그러한 특이성으로 인해, 우리는 네바돈 우주의 창조자 아들의 수여를 2천 년 전에 받게 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네바돈 우주의 천만 개의 행성들이 있고, 현재 320만 개의 거주 행성들 중에 하나만이 그 수여를 받을 수 있는데, 우리들의 지구가 바로 그 행운의 행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대단한 축복은 또 다른 축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창조 이래, 전체 창조 안에서, 창조자 아들이 그의 수여 행성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는데, 우리의 창조자 아톤은 이런 전무후무한 전례를 깨고, 2천 년 전에 그가 약속한 대로 1954년에 다시 돌아왔으며, 우리들의 총사령관으로서 모든 일을 직접 참관, 지휘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여러분들은 이 웅장한 존재로부터 매일 같이 다정한 가르침과 정세에 대한 업데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 속에 우리가 지금 있는지요! 전체 창조 안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이 어둠과의 장대한 실험을 마무리 하고 있는 이 시간에, 온 우주들이 관심과 촉각을 곤두세우며 주시하고 있는 이 대장정의 마무리에 참가하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축복 받았는지요!


현재 어둠의 우두머리들이 거의 제거되거나 이동되었으며, 지금은 어둠의 잔당들이 남아있지만, 그동안 그들이 구축해온 그 지배 매트릭스가 너무나 성공적이었고, 그것이 또한 우리들 삶의 모든 근간에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이 항복하지 않는 한, 이 마무리 작전이 쉽지 않고, 매우 신중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천상은 무엇보다도, 어둠에 속하지 않지만, 단지 생계의 이유로 모든 군산 복합 산업체들, 제약사, 미디어들에서 일하고 있는 방대한 인구 집단의 깨어남을 기다리면서, 현재 통제된 무질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잔당들이 여전히 지구와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금융과 증권과 같은 몇 개의 도화선 쥐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쓸 자원들이 줄어들었고, 쏟아져 들어오는 빛들로 인해 그들의 흉악한 치부들이 나날이 폭로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나긴 빛과 어둠의 전투가 끝날 날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톤의 최근 메시지로 미루어볼 때, 아톤은 이 과정을 무한정 기다리는 것을 그만 두셨고, 대단원의 어떤 시기를 정하신 듯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크라이스트 마이클과 이수 사난다가 지구 재림 공식 기관인 AH가 수립되었을 무렵, 그리고 그 이래, 그들의 모든 계획들과 시나리오들을, 최근 다시 번역되고 있는 비디오 자료들을 통해 읽고, 그 전모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천상에 의해 계획되었던 3일간의 어둠, 지구의 자기극 역전을 끼고 있는 3일간의 어둠과 스타시스, 그에 따른 대피작전, 등의 많은 시나리오들이 제시되었고, 그것들이 또한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있으며,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신속하게 채용될 것입니다. 그 동안의 많은 지연들이 있어왔고, 지금의 지연상태가 한없이 계속되는 듯 보일 수 있는 반면, 이것은 언제든, 일촉즉발의 비상상태로 비화할 가능성을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알고 있는 자들은 언제든 행동으로, 일어날 사태로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일에 참여하기 위해 여기 태어나서, 준비해온 모든 빛의 일꾼들은 무엇보다도 진실한 정보에 정통해야만 합니다. 새 지구의 건설, 재건을 위한 조직과 작업들의 세부는 우리가 스타시스 동안 우주선으로 들어 올려 진 후에, 그곳에서 머물면서, 우리 확장된 의식으로 깨어난 우리들이 배에서 구체적인 교육, 트레이닝,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경청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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