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 란 시 아 북 !

+ 제 95 편 / 레반트에서의 멜기세덱의 가르침

제 95 편 / 레반트에서의 멜기세덱의 가르침

동부 아시아에서는 인도에서 많은 종교들과 철학들이 일어났듯이, 레반트 지역은 서방세계의 신앙 본산지였다. 살렘 선교사들이 남서부 아시아의 전역으로 퍼져나가, 팔레스틴과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와 이란 그리고 아라비아를 지나가면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복음인 기쁜 소식들을 그 모든 곳에 선포하였다. 이 지역들 중에서 일부는 그들의 가르침에 의한 결실이 맺혀졌으며, 다른 어떤 지역들에서는 때에 따라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실패가 지혜의 부족에서 기인되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환경이 그들의 조정력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1.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살렘 종교

기원전 2,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들은 셋 자손들의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으며 주로 두 집단의 침입자들의 원시적인 신앙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는데, 서부 사막지대로부터 스며들어온 베도윈 셈족들과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말을 타는 야만인들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중에서 일곱 번째 날을 숭배하는 초기 아담 자손 민족들의 관습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직, 멜기세덱 시대 동안, 일곱 번째 날이 가장 불운한 날로 간주되었을 뿐이다. 금기(禁忌)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불길한 일곱 번째 날에 여행을 떠나거나 음식을 요리하거나 또는 불을 피우는 일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일곱 번째 날인 샤바툼에 대한 바벨론의 관례로부터 그들이 발견한 메소포타미아의 금기 사항들 대부분을 팔레스틴으로 가져왔다.

살렘 선생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들을 많이 세련되게 하고 증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족들로 하여금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영구적인 인식(認識)에 이르도록 하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은 150년 이상 동안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다양한 신(神)들을 믿는 옛 신앙들에게 점차적으로 길을 비켜주게 되었다.

살렘 선생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하느님들의 숫자를 크게 줄였는데, 한 때는 주요 신(神) 들을 일곱 개로 줄이기도 하였으며, 그것들은 벨, 샤마쉬, 나부, 아누, 에아, 마르덕, 그리고 씬 등이었다. 새로운 가르침이 최고점에 달하였을 때, 그들은 이 하느님들 중에서 세 가지를 다른 것들보다 최극위에 올려놓았는데, 그것은 바벨론의 삼신(三神) 즉,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의 신인 벨과 에아 그리고 아누였다. 또 다른 삼신(三神), 앤다이트들과 수메르인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의 모든 기억들이 다른 장소에서 조성되었으며, 세 개의 동심원으로 된 멜기세덱의 휘장에 대한 살렘 사람들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하느님들의 어머니이며 성적(性的)인 풍요로움의 정령(精靈)인 이쉬타르에 대한 인기(人氣)를 살렘 선생들이 완전히 극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여신(女神)에 대한 경배를 제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바벨론 사람들과 그 이웃들은 성교(性交) 경배의 변장된 형태들을 완벽하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모든 여자들이 일생 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 낯선 사람들의 품에 안기는 것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보편적인 관습이 되었으며 이것은 이쉬타르가 요구하는 헌신으로 여겨졌고, 풍요로움이 주로 이러한 성적인 희생 행위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멜기세덱 가르침의 초기 진보는, 키쉬에 있는 학교의 지도자였던 나보닷이 성전에서 유행하는 매춘관습들에 대해 합의된 공격을 하기로 결정할 때까지는 매우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갱신을 이룩하려는 살렘 선교사들의 노력은 실패하였으며, 보다 더 중요한 그들의 영적 가르침과 철학적 가르침들은 이러한 실패의 좌절감 속에서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살렘 복음의 이러한 실패 뒤에 이쉬타르 숭배가 즉시로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그 숭배 의식(儀式)은 이미 팔레스틴에서는 아쉬토렛으로,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다이트로, 북부의 부족들 에게는 아스타르테라는 이름으로 퍼져 있었다. 바벨론의 사제들이 다시 한번 점성술로 기울어진 것은 이쉬타르에 대한 경배가 이렇게 회복된 것과 관련이 있었는데 점성술은 메소포타미아의 마지막 대부흥(大復興)을 경험하였고, 점치는 일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사제계급은 여러 세기 동안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멜기세덱은 자기 추종자들에게 유일하신 하느님,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조물주이신 그 분에 대해 가르치라고 훈계하였으며, 오직 신앙으로 신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전파하도록 훈계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하는, 속도가 느린 진화를 갑작스러운 혁명으로 대치시키려는 실수를 종종 범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한 멜기세덱 선교사들은 그 민족에게 너무 높은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였으며 너무 많은 것들을 시도하였고, 그들의 고상한 목적은 좌절되었다. 그들에게는 명확한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우주 아버지의 실체에 대한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사회적 관습을 개선하는, 겉으로 보기에 가치 있는 목적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위대한 임무는 탈선하였고 사실상 좌절과 망각 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서, 키쉬에 있는 살렘 본부는 사라지게 되었고,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전파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살렘 학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계속 잔존하였다. 여기저기로 흩어진 적은 무리들이 유일하신 창조주에 대한 자기들의 믿음을 고수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사제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성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구약 성서의 시편들 대부분을 바위 위에 새긴 사람은 바로 자기들의 가르침이 거부된 뒤에 활동하던 살렘 선교사들이었으며, 후대에 이르러서는 그곳에서 히브리 제사장들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 그것들을 발견하였고 그 후에는 유대인들이 썼다고 주장하는 찬미의 시(詩)들을 수집하면서 그것들을 거기에 포함시켰다. 바벨론에서 가져온 이 아름다운 시편들은 벨-마르덕의 신전에는 새겨지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초기 살렘 선교사들의 후손들의 작품이었고, 바벨론 사제들이 수집한 마술적인 것들과는 현저하게 대조적인 것이었다. 욥기는 키쉬에 있는 살렘 학교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가르쳐진 가르침이 매우 잘 반영된 작품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적 문화 대부분은 아메네몹과 이크나톤의 활동을 통하여 에집트로 가는 도중에 히브리 문학과 경배 의식(儀式) 속으로 흡수되었다. 에집트 사람들은 초기의 앤다이트 메소포타미아인들로부터 유래되었지만 유프라테스 계곡을 점령한 후대 바벨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잃어버렸던 사회적 의무에 대한 가르침을 두드러지게 보존하였다.

2. 초기의 에집트 종교

기원적인 멜기세덱 가르침들은 에집트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깊은 뿌리를 내렸고, 그것들은 나중에 그곳으로부터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나일 계곡의 진화 종교는 놋 자손과 아담 자손 그리고 후대에는 유프라테스 계곡의 앤다이트 민족의 우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옴으로써 주기적으로 증대되었다. 때로는 수메르인들이 에집트의 정부 통치자가 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이 시기에 세계의 가장 많은 종족들이 인도에서 섞인 것처럼, 에집트에서는 유란시아에서 발견될 수 있는 종교 철학 유형들이 거의 완벽하게 혼합되는 형태가 조성되었으며, 그것은 나일 계곡으로부터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유대인들은 세상 창조에 대한 그들의 개념 대부분을 바벨론으로부터 흡수한 반면, 신성한 섭리의 개념은 에집트 사람들로부터 도입하였다.

에집트로 하여금 살렘 가르침에 대하여 메소포타미아보다 더 호의를 보이게 한 것은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성향보다는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성향이었다. 에집트의 각 부족 지도자들은, 권좌를 차지하는 투쟁을 벌인 후에는, 자기 부족의 하느님이 다른 모든 하느님들의 기원적인 신(神)이며 창조자라고 선포함으로써 자기 왕좌를 영구히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식으로 해서 에집트 사람들은 초(超)신에 대한 개념에 점점 더 익숙해지게 되었으며, 우주적 창조자 신(神)에 대한 후대의 교리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유일신(唯一神) 개념은 에집트에서 여러 세기 동안 오르락내리락 하였는데,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항상 토대를 이루기는 하였지만 다신론 (多神論)의 진화하는 개념을 제대로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에집트 사람들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의 하느님들을 경배해 왔으며, 더욱 특별한 것은, 여러 개로 분리된 부족들 각각이 하나의 특별한 집단적 하느님을 섬겼는데, 하나는 황소를 경배하고 다른 하나는 사자를, 세 번째는 수양을 그리고 그 다음도 계속하여 다른 것을 섬겼다. 훨씬 전에는 그들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매우 흡사한, 토템을 섬기는 부족들이었다.

때가 되자, 에집트 사람들은 벽돌을 사용하지 않은 무덤에 놓여진 시신(屍身)이 탄산소다 성분을 함유한 모래의 작용에 의해 보호 -썩지 않게 보존됨- 되는 반면, 벽돌로 지은 무덤 속에 장사된 것은 부패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관찰은 그것들을 실험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나중에 시체를 향료로 처리하는 관습을 낳게 하였다. 에집트 사람들은 시신을 보존함으로써 그를 미래의 삶으로 용이하게 옮겨가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 시체가 부패한 후 먼 훗날에도 그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시체 옆에 매장용(埋葬用) 조각품을 두었고 관(棺) 위에도 비슷한 모습을 새겨 두었다. 이러한 매장용 조각품을 만드는 일이 에집트의 예술을 매우 발전시키게 되었다.

에집트 사람들은 무덤이 그 시신을 지켜주고 그 결과로 사후(死後)의 생존을 쾌적하게 해준다는 신앙을 여러 세기 동안 간직하였다. 신비적인 관습들의 후대(後代) 진화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삶에 부담이 되는 것이었던 반면에, 무덤을 믿는 종교로부터 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출하는 것이 되었다. 사제들은 "지하의 세계에서 사람의 심장이 빼앗기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는 마법의 문장을 관(棺)에 새기고자 하였다.

현재 이러한 마법적 문장들의 다양한 내용들이 사자(死者)의 책으로 보존되어 수집되었다. 그러나 나일 계곡에서는 일찍부터 마술적인 종교 의식(儀式)이 양심과 성격의 영역 속에 상당히 포함되기 시작하였는데 영역이 그 당시의 종교 의식에 의해서 달성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정교한 무덤보다는 이러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상(理想)들이 구원의 조건이 되었다.

이 시대의 미신적 관습들은 병을 고치는 수단으로 침을 뱉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 개념은 에집트에서 기원이 되었고 그곳으로부터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전파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호루스와 셋의 전투에서 젊은 하느님이 자기 눈을 잃어버렸지만, 셋이 정복당한 후에, 이 눈이 현명한 신인 쏘스에 의해 회복되었는데, 그가 상처에 침을 뱉음으로써 그것을 치료하였다는 것이다.

에집트 사람들은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존경 받던 사람의 혼이 생존된 것을 나타낸다고 오랫동안 믿었으며 그들은 생존된 다른 사람들이 태양 속으로 흡수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기간 동안에는, 태양 숭배가 조상 경배의 한 형태가 되기도 하였다. 거대한 피라밋의 경사진 출입 통로가 똑바로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왕의 혼이 무덤에서 깨어났을 때 정지된 그곳으로 똑바로 가서, 왕의 거처라고 생각되는 정지된 그 별의 별자리를 확립할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태양의 비스듬한 광선이 구름 속에서 틈새를 통하여 땅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바라볼 때, 그들은 그것이 그 왕과 다른 의로운 혼들이 상승할 수 있는 천상(天上)의 계단이 내려오는 징조라고 믿었다. "페피 왕이 그것을 밟고 자기 어머니에게 올라가기 위해 그의 발밑에 층계를 이루도록 광채를 내려뜨렸다."

멜기세덱이 육신을 입고 나타났을 때, 에집트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민족들보다 훨씬 높은 종교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체에서 분리된 혼이 만약에 마술적인 처방으로 알맞게 무장 된다면 방해하는 악한 영들을 피할 수 있고 오시리스의 재판실로 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만약에 "살인, 약탈, 거짓말, 간음, 도둑질, 이기심"의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천국 세계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에 이 혼이 저울에 달아서 모자라는 것이 판명되면, 그 혼은 지옥으로, 삼키는 곳으로 보내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변에 있는 여러 민족들의 신앙과 비교할 때 미래의 삶에 대한 비교적 진보된 개념이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육체 속에 살았던 삶의 죄에 대하여 저승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개념이 에집트에서 히브리 신학으로 전래되었다. 심판이라는 말은 히브리 시편 문서 전체에서 꼭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특별한 그 성시(聖詩)는 에집트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었다.

3. 도덕 개념의 진화

에집트의 문화와 종교가 주로 메소포타미아의 앤다이트로부터 유래되었고 히브리인들과 그리스인들을 통하여 그 후의 문명들에게 많이 전수되기는 하였지만, 에집트 사람들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이상주의의 거의 대부분은 나일 계곡에서 하나의 순수한 진화적 발전으로 발생되었다. 앤다이트로부터 기원된 많은 진리와 문화가 수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가엘의 증여 전에 다른 모든 주변 지역에 있었던 비슷한 자연적 기법에 의해 나타났던 것보다 더욱 도덕적인 문화가 순전한 인간적 발전으로 에집트에서 진화되었다.

도덕의 진화는 계시에 전혀 의존하지는 않는다. 높은 도덕 개념들이 사람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유래될 수 있다. 사람은 신성한 영이 그의 속에 내주(內住)하기 때문에, 영적인 가치들도 발전시킬 수 있고,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적 삶으로부터 조화우주 통찰력을 끌어낼 수도 있다. 양심과 성격에 있어서의 그러한 자연적인 진화들은, 고대(古代)에 두 번째 에덴으로부터 그리고 후대에는 살렘에 있는 멜기세덱 본부로부터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주기적으로 도래함으로써 증대되기도 하였다.

살렘의 복음이 에집트로 들어가기 수천 년 전에, 그곳에서는 도덕적인 지도자들이 공의와 공정성 그리고 탐욕 회피 등을 가르쳤다. 히브리 경전이 씌어지기 3,000년 전에, 에집트인들의 금언(金言)은 이러하였다: "그 표준이 정의(正義)롭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출세한다." 그들은 친절함과 온화함 그리고 분별력을 가르쳤다. 이 신(新)시대에 위대했던 선생들 중 한 사람의 메시지는: "정의를 행하고 모든 것을 공정하게 대하라"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에집트인들의 3화음은 진리 - 정의 - 공정성이었다. 유란시아의 순전히 인간적인 모든 종교들 중에서 나일 계곡의 이러한 한 때의 인본주의의 사회적 이상과 도덕적 위엄을 능가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한 진화하는 윤리적 이상과 도덕적 이상의 토양 속에서, 살렘 종교의 잔존한 교리들이 번성하였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들은, "평화로운 자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고 죄인들에게는 죽음이 주어진다."고 믿는 사람의 가슴속에서 이미 반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평화로운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며 죄인은 미움 받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다." 나일 계곡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옳고 그른 -좋고 나쁜- 후대의 개념들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러한 최근에 만들어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표준들에 의거하여 여러 세기 동안 살았다.

에집트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반면에 그렇게 영적이지는 못하였다. 6,000년 동안 오직 네 사람의 선지자들이 에집트인들 속에서 출현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아메네몹을 한 동안 따랐고, 오크반은 죽였으며 이크나톤은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하나의 짧은 세대 동안 가슴이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였고 모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살렘의 가르침 대신에 아브라함이 그리고 후대에는 요셉이 에집트 전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종교적인 상황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살렘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에집트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이주민들의 수정된 도덕적 표준들과 합쳐져 진화된 매우 높은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나일계곡의 이 초기 선생들은 양심이 하느님의 명령, 신(神)으로부터의 소리라고 선포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4. 아메네몹의 가르침

때가 이르자 에집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아메네몹이라고 불리는 한 선생이 출현하였다. 이 선각자(先覺者)는 양심을 강화시켜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최고의 지점으로 끌어 올렸으며, 죄에 대해 징계할 것을 가르쳤고, 태양 신(神)에게 요청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였다.

아메네몹은 부유함과 행운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쳤으며, 이 개념은 나중에 나타난 히브리 사상을 속속들이 물들였다. 고귀한 이 선생은 하느님-인식(認識)이 모든 행위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믿었으며 모든 순간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으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책무를 다 하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현자(賢者)의 가르침은 그 후에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구약 성서가 축소되어 기록되기 훨씬 전에 그 민족의 신성한 책이 되었었다. 이 선한 사람의 주요 훈계는 위탁된 정부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할 것을 자기 아들에게 훈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먼 옛날의 이러한 고상한 정서는 현대의 모든 정치가들에게 명예로운 것이 될 것이다.

나일의 이 현자는 "부요함은 자기 날개를 갖고 있어서 날아가 버린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덧없는 것이다- 라고 가르쳤다. 그의 위대한 기도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의 말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의 행동"으로 향하라고 훈계하였다. 물질에 대하여는, 사람이 소유하지만 하느님이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들은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구약 성서의 잠언서의 사상을 결정지었다. 그리스어로 번역됨으로써 그것들은 그 후의 모든 헬라의 종교적 사상을 물들였다.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철학자인 필로는 그 지혜 문서의 사본(寫本)을 갖고 있었다.

아메네몹은 진화적인 윤리들과 계시적인 도덕을 보존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자기가 기록한 문서들을 통하여 히브리인들과 그리스인들 모두에게 그것들을 전해주었다. 그는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종교적 선생들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서방 문명 성장에 있어서 두 가지 중대한 교리들 -히브리인들 속에서는 서방의 종교적 신념의 정점으로 진화되었고, 그리스인들 속에서는 유럽의 가장 위대한 정상에 이르는 순전히 철학적인 사상으로 발전됨- 이 되는 후대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히브리 잠언서 중에서, 15장과 17장과 20장 그리고 22장 17절부터 24장 22절까지는 아메네몹의 지혜서에서 거의 말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히브리 시편 책의 첫 번째 시는 아메네몹이 쓴 것이며 이크나톤의 가르침의 핵심(核心)이다.

5. 비범한 사람 이크나톤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왕족 가문의 여인이었던, 에집트인이면서 살렘 사람이었던 한 의사(醫師)의 영향력을 통하여, 아메네몹의 가르침들은 에집트인들의 마음속에서 그 위치를 서서히 잃게 되었다. 이 여인은 자기 아들인 에집트의 바로 이크나톤을 설득하여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이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멜기세덱이 육신을 입은 상태에서 사라진 이후로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도 이크나톤만큼 살렘의 계시된 종교에 대한 개념을 그토록 놀라울 정도로 분명하게 파악하지는 못하였다. 어떤 면에서, 젊은 이 에집트인 왕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범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영적 쇠퇴가 증대되던 시기 동안에, 그는 에집트에서 엘 엘리온,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교리를 존속시켰으며, 그리하여 그 다음의 미래에 미가엘이 증여되는 종교적 배경에 지극히 중대한 유일신 개념의 철학적 방향을 유지시켰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에집트로 데려가, 그곳에서 이크나톤의 영적인 후계자들 중의 일부가 그를 만나고 유란시아에 대한 그의 신성한 임무의 어떤 위상들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게 한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 중에서도, 이러한 업적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멜기세덱과 예수 사이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모세는 히브리 인종 세계와 에집트의 왕족 가문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선물이었으며 만약에 이크나톤이 모세의 융통성과 능력을 소유 했었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정치적인 천재성과 놀라운 종교적 지도력을 조화시켰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면 에집트는 그 시대에 유일신 개념을 갖는 위대한 국가가 되었을 것이며,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께서 그의 필사자 삶 중에 더 많은 부분을 에집트에서 살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전체 역사 속에서 어떤 왕도 이 비범한 이크나톤처럼 국가 전체를 다신교로부터 유일신교로 옮겨가는 일을 그토록 조직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하였다. 이 젊은 왕은 가장 놀랄만한 결단력에 의해 과거를 청산하였는데, 자기 이름을 바꾸고 수도(首都)를 떠났으며 전반적으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고 전체 민족을 위하여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서둘렀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유지될 수 있는 것보다 너무 많은 것들을 설립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 민족의 물질적인 안정성과 번영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였는데, 그 모든 것들은 나중에 역경과 고난이 에집트인들에게 몰아 닥쳤을 때 그의 종교적인 가르침에 대항하여 불리한 반응을 나타냈다.

놀라울 정도로 분명한 통찰력과 비범하게 일사불란함을 소유하였던 이 사람이 만일 모세의 정치적인 현명함을 가졌더라면, 그는 서방 세계에서의 진리 계시와 종교 진화의 전체 역사를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 일생 동안에 사제들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었고 그들을 대개 신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종파들을 비밀리에 유지시켰고 그 젊은 왕이 세력을 잃자마자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유일신교를 세움에 있어서 에집트가 그 후에 겪었던 모든 분쟁 요소들을 재빨리 결합시켰다.

매우 현명하게도, 이크나톤은 태양- 하느님을 가장하여 유일신교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모든 하느님들을 흡수하여 태양을 섬기도록 함으로써 우주 아버지에 대한 숭배에 접근해 보고자 하는 이 결정은 살렘 사람 의사의 조언에 기인된 것이었다. 이크나톤은 신(神)의 아버지신분과 어머니 관계에 관하여 그 당시에 존재하던 아톤 신앙의 일반화된 교리들을 채택하였고,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긴밀한 신앙적 관계를 실현하는 하나의 종교를 창출하였다.

이크나톤은 외부적으로는 태양- 하느님인 아톤을 경배하는 동시에, 자기 동료들로 하여금 위장된 방법으로 유일하신 하느님, 아톤의 창조자와 만유의 최극이신 아버지를 경배하게 할 만큼 매우 현명하였다. 선생이면서 왕이었던 이 젊은이는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유일하신 하느님" 이라는 제목의 주해서(註解書)를 썼고, 그 책은 31장으로 되어 있으며, 힘을 다시 잡은 사제들이 그것을 철저히 없애버렸다. 또한 이크나톤은 137편의 찬송 시를 썼으며, 그 중에 12개는 현재 구약 성서의 시편에 보존되어 있고 히브리인이 쓴 것처럼 되어 있다.

이크나톤의 종교가 일상생활에 대하여 주는 최고의 말씀은 "공의"였으며, 그는 올바른 행위에 대한 개념을 민족뿐만 아니라 국제적 윤리까지 포옹하도록 신속하게 확대시켰다. 이 세대는 놀라울 정도로 개인적인 경건성을 보여주었으며, 지능이 있는 더욱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를 알고자 하는 참된 열망이 특성을 이루었다. 그 시대에는 율법적인 면에서 볼 때 사회적인 지위나 부유함이 에집트인들에게 우월감을 전혀 주지 못하였다. 에집트의 가정생활은 도덕적인 문화를 많이 보존하고 증대시켰으며 후대에 팔레스틴에서의 유대인들의 뛰어난 가정생활에 감화를 주었다.

이크나톤이 제시한 복음의 치명적인 취약성은 그것의 가장 중심적인 진리, 아톤이 에집트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짐승들 그리고 에집트의 땅 외에도 모든 이방 나라들을 포함하는 온 세상의 창조자이며, 그가 모든 것들을 그 자리에 심고 그들의 필요를 모두 제공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신(神)에 대한 이러한 개념들은 고상한 것이고 숭고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민족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종교에 있어서 그러한 국제성(國際性) 감정은 전쟁터에서 에집트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지 못하였으며, 반면에 그것들은 사제들이 그 젊은 왕과 그의 새로운 종교에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후대의 히브리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신(神)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앞선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건설하는 사람의 목적을 만족시키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유일신 개념의 이상이 이크나톤의 몰락을 야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이크나톤의 사위는 사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옛날의 하느님들을 경배하는 일로 되돌아갔고 자기 이름을 투탄카멘이라고 고쳤다. 수도(首都)는 다시 데베로 되돌아갔고, 사제들은 점점 더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어, 결국에는 에집트 전체의 7분의 1을 소유하기에 이르렀으며, 얼마 안 있어서 바로 이 계층의 사제들 중 하나가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제들은 유일신 개념의 물결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자기들의 하느님들을 합병시키고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느님들의 계통은 점점 더 축소되었다. 이크나톤은 하늘들의 불타는 원반을 창조자 하느님과 연결시켰으며, 이러한 개념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계속 불타올랐는데, 심지어 그 젊은 개혁자가 죽은 후 한참 지난 후에는 사제들의 경우에도 그렇게 되었다. 유일신교의 개념은 에집트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그리고 세계 속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동일한 그 신성한 아버지, 이크나톤이 모든 에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만들려고 그토록 열광적으로 전파하였던 유일하신 하느님의 창조주 아들이 도래할 때까지도 계속 존속하였다.

이크나톤의 교리의 취약점은, 오직 교육을 받은 에집트인들만이 그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그러한 진보된 종교를 제안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일반 대중들은 실제적으로 그의 복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시스와 그녀의 배우자 오시리스, 흑암과 재난의 신인 셋의 손에 의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다가 초자연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에 대한 옛날의 경배로 사제들과 함께 돌아갈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불멸(不滅)한다는 가르침은 에집트인들에게 너무 진보적인 것이었다. 오직 왕들과 부자들만이 부활을 보장 받는다고 믿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심판의 날에 대비하여 그들의 시신을 그토록 신중하게 약품으로 처리하고 무덤 속에 보존하였다. 그러나 이크나톤이 가르쳤던 일반적인 구원과 부활이 결국에는 설득력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는 후대의 에집트인들이 말 못하는 동물들도 생존된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에집트의 통치자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유일하신 하느님을 경배하도록 노력한 것이 겉으로 보기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의 작품의 영향이 팔레스틴과 그리스 양쪽에서 존속되었다는 사실과, 그리하여 나일의 진화적인 문화와 유프라테스의 계시 종교가 혼합된 것을 나중에 서방의 민족들에게 전해주는 매개자 역할을 에집트가 하였다는 사실은 반드시 기록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일 계곡에서 도덕적 발전과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진 이 위대한 시대의 영광은, 히브리인들의 민족적인 삶이 시작될 무렵에 급속도로 소멸되었으며, 그 후에 그들이 에집트에 머무르는 동안 이 베도윈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의 대부분을 가져갔으며 이크나톤의 교리들 대부분을 자기들의 인종적 종교 속에 영존(永存)시켰다.

6. 이란에서의 살렘 교리

일부분의 멜기세덱 선교사들이 팔레스틴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거대한 이란 평원으로 들어갔다.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살렘 선생들은 이란에서 일을 진행시켰고, 국가 전체가 멜기세덱 종교로 기울어지게 되었을 때 통치자들이 바뀌게 되어 갑자기 격심한 박해를 일으켰고 그것이 살렘 종파의 유일신교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파멸시켰다. 아브라함의 계약에 대한 교리가 페르시아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을 때, 그리스도 이전 6세기경 도덕적 문예 부흥이 일어나는 위대한 시대에 조로아스터가 나타나 타다 남은 살렘 복음의 불씨로부터 기운을 소생시켰다.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이 사람은 한참 때의 모험심이 강한 젊은이였는데, 그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우르에 맨 처음 순례여행에서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 반란에 관한 전승들 -다른 여러 가지 전승들과 함께- 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 모든 것들은 그의 종교적인 본성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따라서 우르에 있을 때 꾼 꿈의 결과로, 그는 북부 지역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민족의 종교를 개편하는 일을 착수하는 계획을 확정 짓게 되었다. 그는 공의의 하느님에 대한 히브리 개념, 신성에 대한 모세의 개념을 이미 흡수한 상태에 있었다.

최극이신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그의 마음속에 분명하게 있었으며, 다른 모든 하느님들을 마귀들로 격하시켰는데, 그것은 그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들었던 마귀들의 계급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는 우르에 남아 있던 일곱 주(主) 영들에 관한 이야기를 배웠으며, 따라서 그는 일곱 명의 최극자 하느님들의 무리를 만들면서 아후라-마즈다를 그 꼭대기에 두었다. 그는 이러한 하위(下位)의 하느님들을 정의(正義)의 법, 선한 생각, 고귀한 정부, 신성한 품성, 건강 그리고 불멸성(不滅性)에 대한 이상(理想)과 연관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이 종교는 기도와 경배 의식(儀式)이 아니라 일종의 행동 -활동- 이었다. 그 종교의 하느님은 지극히 높은 지혜의 존재였고 문명의 후원자였으며 그것은 악(惡)과 게으름 그리고 퇴보와 과감하게 싸우는 투쟁적인 종교 철학이었다.

조로아스터는 불을 경배하도록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불꽃을 우주적이고 최극(最極)의 권세를 갖는 순수하고 현명한 영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후대의 그의 추종자들이 상징적인 불을 숭상하고 경배하였던 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마침내, 이란 영주가 회심(回心) 함에 따라, 새로운 이 종교는 무력에 의해 퍼져나갔다. 그리고 조로아스터는 자신이 "빛의 주(主)의 진리"라고 믿는 그것을 위하여 싸우다가 용맹스럽게 죽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일곱 주(主) 영들에 관한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가르침들을 영원히 간직하였던 유란시아의 유일한 신조(信條)이다. 삼위일체의 개념으로 발전하지 못한 반면, 그것은 특별한 방향에서 칠중 하느님에게 접근하였다. 기원적 조로아스터교는 순수한 이원론(二元論)이 아니었으며 초기의 가르침이 악(惡)을 선(善)의 시간적 동격체로 묘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확실히 선(善)의 궁극적 실체 속에 침전된 영원이었다. 다만 후대에 이르러서야 그 신앙은 선과 악이 동일한 조건 위에서 투쟁하는 기반(基盤)을 획득하였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유대의 전승들 그리고 히브리 경전에 기록된 마귀들에 대한 교리는,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에 관한 잔존한 전승들 위에 기초를 둔 반면, 대체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페르시아인에 의해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배를 받는 동안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유래 되었다. 조로아스터는 에집트 사람들처럼 "심판의 날"을 가르쳤지만, 그는 이 사건을 세상의 종말과 관련시켰다.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뒤이은 종교조차도 그것에 의해 현저하게 영향을 받았다. 이란의 사제들이 조로아스터의 가르침들을 폐지시키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미드라에 대한 옛날의 경배체제를 부할시켰다. 그리고 미드라 숭배는 레반트 지역과 지중해 지역 전체에 퍼졌는데, 유대교와 기독교와 동시대에 존재한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조로아스터의 가르침들은 세 개의 위대한 종교들 즉,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그것들을 통한 마호멧교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의 고양된 가르침들과 고상한 성시(聖詩)들로부터, 조로아스터가 수치를 무릅쓰고 호의를 보인 적이 전혀 없는 궤변들에 대한 믿음을 즐기는 것과 연결되어, 죽은 자들에 대한 그들의 깊은 두려움과 함께 그의 복음이 파르시 교도들에 의해 왜곡된 현대의 것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위대한 이 사람은 그리스도 이전 6세기경에 출현하여 영구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나는 길을 자신의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에는 살렘의 빛이 너무나 희미하게 타고 있을 때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꺼지는 일을 막아주었던 독특한 집단들 중의 하나였다.

7. 아라비아에서의 살렘 가르침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비교적 최근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확립되게 되었다.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라비아에서도 살렘 선교사들은 지나친 조직에 대한 마키벤타의 지시를 오해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군사력이나 정부의 강제적인 집행을 통하여 복음을 확장시키려는 모든 노력을 거부하라는 그의 훈계를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써 그러한 방해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중국이나 로마에서도, 바로 그 살렘에 그토록 가까이 위치한 이 사막에서보다 더 완벽하게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실패하지는 않았다. 동방과 서방에 있는 민족들 중에서 다수가 각각 불교도와 기독교인이 된 후로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아라비아 사막은 마치 수천 년 전의 상태가 계속되는 듯하였다. 각 부족들은 옛날의 주물(呪物)을 경배하였고, 수많은 각 가정들은 그들 자신의 가신(家神)들을 섬기고 있었다. 바벨론의 이쉬타르, 히브리의 야훼, 이란의 아후라, 그리고 기독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 개념이 다른 것들을 완전히 대치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라비아 전역의 여기저기에서 가정들과 씨족들이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한 무리들은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와 조로아스터에 관한 전승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예수 공동체의 복음에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수많은 중심지들이 있었지만, 사막지역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에서 선교사들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의 타협적이고 혁신적인 태도와 비교해 볼 때 엄격하고 완고한 집단이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온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그의 명령을 더욱 진지하게 수행하였으며, 그들은 그것을 전파함에 있어서 보다 더 부드러운 태도를 가졌는데, 그 당시에 목수의 아들의 단순한 복음을 기꺼이 받으려고 하였던 많은 나라들이 있었고, 아라비아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레반트 지역의 위대한 유일신주의가 아라비아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막 지대는 하나의 신앙을 산출해 낼 수 있었으며, 사회적인 요구조건이 적었지만, 그래도 역시 유일신적이었다.

그 사막 지대의 원시적이고도 조직되지 않은 신앙들에 관한 부족적, 인종적, 또는 국가적인 특성이 꼭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아라비아 부족들이 메카에 있는 어떤 사원의 검은 돌 주물(呪物)에게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독특하고도 일반적인 경의였다. 그 통속적인 접촉과 숭배가 이루어지는 이 장소로 인하여 나중에는 이슬람 종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화산의 영(靈)인 야훼는 셈족 유대인의 것이었고, 카바 바위는 그들의 사촌인 아랍 족속의 것이 되었다.

이슬람의 강점은 오직 유일한 신(神)인 알라에 대한 선명하고도 뚜렷한 관념이었고, 그것의 약점은 여자를 격하시킨 점과 함께, 그 보급을 위해 군사적인 기세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고부동하게 만유의 유일하신 우주적 신(神),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보이는 존재들을 아시는 분. 자비로우시고 인정이 많으신 분"을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하느님은 참으로 모든 인류 에게 풍성한 선을 베푸신다." "그리고 내가 아플 때 그 분이 나를 고쳐주신다." "세 사람이 같이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든지, 하느님께서 네 번째 존재로 계시는데," 그 분이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또한 보이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숨어 계시는 분"이기 때문인가?

[네바돈의 멜기세덱에 의해 제시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