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 편 / 예수의 유년기 초기
베들레헴에 체류하는 동안의 불확실성과 불안감 때문에, 마리아는 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안전하게 도착한 후 정착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 아기에게서 젖을 떼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친척들과 함께 살았으며, 요셉은 도착하여 얼마 되지 않아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에 가족들을 잘 부양할 수 있었다. 요셉은 몇 달 동안 목수로 고용되어 일하다가 당시 공공건물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많은 인부들의 십장(什長)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후에 요셉이 나사렛으로 돌아온 후 주 계약자이자 건축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무력(無力)한 유년기의 초기 몇 년 동안 내내, 마리아는 앞으로 지상에서 이루어야 할 그의 사명을 방해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떤 위험한 일이 아기에게 생기지 나 않을까 하여 노심초사하였으며 세상의 어떤 어머니도 아이에게 그보다 더 헌신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우연히 살게 되었던 그 집에는 마침 그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가 둘이 있었으며, 동네에도 같이 놀만한 비슷한 또래들이 여섯 명 있었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예수를 늘 자기 가까이에 있게 하였다.
그녀는 예수가 다른 아이들과 마당에서 놀도록 허락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요셉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로 하여금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적응하여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도, 이런 식의 과잉보호가 어쩌면 아이를 자의식 (自意識)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이 약속의 아이를 그 또래의 다른 보통 아이들처럼 자라게 허락하자는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이러한 결정에 순종하였지만, 그녀는 아이들이 집 주변과 마당에서 노는 동안에 항상 지켜보는 것을 일과(日課)로 삼았다. 오직 애정이 깊은 어머니만이, 갓난아기 때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 자기 아들의 안전 때문에 항상 가슴을 졸였던 마리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렀던 2년 동안, 예수는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자라났다. 몇몇 친구들과 친척들을 빼놓고는, 누구에게도 예수가 "약속의 아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셉의 친척들 중에 한 사람이, 멤피스에 있는 이크나톤의 먼 후예들인 몇몇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누설했으며, 나사렛 가족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작은 집단의 신자(信者)들과 함께 요셉의 친척- 후원자의 호화로운 집에 모여 나사렛 가족의 평안을 빌었고 아이에게 경배하였다.
이때 모였던 사람들이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판 전(全)권을 예수께 선물로 드렸다. 그러나 유대인의 신성한 문서들의 이 사본은 이집트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친구들의 청을 그와 마리아가 최종적으로 거부하기 전 까지는 요셉의 손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 신자들은 이 운명의 아이가 팔레스틴의 어떤 이름 난 장소에 있는 것보다도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것이 이 세계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설득 때문에,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도 그들은 팔레스틴으로 얼마 동안 떠나지 못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드디어 친구 이즈라언 소유의 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욥바로 향하였으며, 기원전 4년 8월 하순에 그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곳에서 9월 한 달을 보내면서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지 아니면 나사렛으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 자기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의 상의를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가 다윗의 성읍인 베들레헴에서 성장하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들의 아이가 자라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는 사실 믿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실제적인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자기가 다윗의 족보에 포함된 것은 조상 중 한 사람이 다윗 후손의 가문에 입양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다윗 왕위를 이을 새 계승자가 양육되기에는 다윗의 성읍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마리아는 생각했지만, 요셉은 헤롯 앤티파스의 형제인 아캘라오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헤롯 안티파스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그는 베들레헴이나 유대 지방 어느 다른 도시에서도 아이의 안전에 대해서 크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갈릴리를 다스리는 안티파스보다는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의 위협적인 통치 방법을 더 추구할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이러한 모든 이유들 외에도, 요셉은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는 곳으로는 갈릴리가 더욱 좋은 장소라고 주장하였지만, 반대하는 마리아를 설득하기까지는 3주가 걸렸다.
10월 1일 요셉은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마리아와 그의 친구들을 확신시켰다. 따라서 기원전 4년 10월 초 그들은 베들레헴을 떠나 리다와 스키토폴리스를 거쳐 나사렛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떠났으며, 마리아와 아이는 짐을 나르는 새로 구입한 짐승을 타고, 요셉과 다섯 명의 친척들은 걸어서 갔으며 요셉의 친척들은 그들이 나사렛으로 홀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요르단 계곡을 지나서 갈릴리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서쪽으로 가는 길들도 두 명만의 여행자와 어린 나이의 아이가 홀로 여행하기에는 전혀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1. 나사렛으로 돌아옴
여행한지 4일째 되는 날, 일행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그들은 나사렛의 집에도 알리지 않은 채 도착하였고, 그곳에는 요셉의 결혼한 형제 중 한 사람이 3년 넘게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보자 매우 놀랐으며 그들이 일을 매우 은밀히 추진했기 때문에 요셉의 가족들은 물론 마리아의 가족들도 그들이 알렉산드리아를 떠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다음날로 요셉의 동생은 이사를 나갔고, 예수의 출생 이후 처음으로 마리아는 그녀의 단출한 가족끼리 자기 집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일주일이 채 못 되어 요셉은 목수로서의 일감을 확보하였으며, 그들은 매우 행복하였다.
나사렛으로 돌아올 당시 예수는 3년 2개월쯤 되었다. 그는 이 모든 여행 동안 매우 잘 견디었으며, 건강 상태도 매우 좋았고, 자유스럽게 뛰어다니며 즐길 수 있는 자기 공간을 가지게 된다는 데 대한 흥분으로 아이답게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나사렛으로 오는 동안 요셉은 예수가 약속의 아이라는 사실을 갈릴리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알리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마리아를 설득하였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이 약속을 매우 잘 지켰다.
예수가 네 살이 되던 1년 동안은 정상적인 육체적 발육과 비범한 정신적 활동이 있던 기간 이었다. 그 당시에 그는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이웃 아이인 야곱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예수와 야곱은 항상 재미있게 놀았으며, 그들은 자라면서 훌륭한 친구이자 충실한 동행자가 되었다.
이 나사렛 가족의 생활 중에서 그 다음으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3년 4월 2일 이른 아침에 있었던 둘째 아이 야고보의 출생이었다. 예수께서는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하였으며, 아기의 초기 행동들을 관찰하려고 오랫동안 아기 주위에 서 있곤 하였다.
같은 해 한여름에, 요셉은 마을의 공동 우물과 대상(隊商)들이 묵어가는 장소 근처에 작은 작업장을 지었다. 이 후로 그는 날이 갈수록 목수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명의 형제들과 기술자 몇 명과 연합하였고, 그들이 일하러 나가 있는 동안 자신은 작업장에 남아 멍에나 쟁기 등을 만들거나 다른 목공 일을 하였다. 그는 가죽을 가공하고 새끼줄과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커가면서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에는, 어머니의 가사 일을 돕거나, 아버지가 가게에서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에 거의 같은 양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 방방곡곡에서 오는 대상들과 행인들의 대화와 잡담에 귀를 기울였다.
예수께서 네 살이 되기 한 달 전인 같은 해 7월에, 대상(隊商) 여행자들과의 접촉으로 인한 악성 장(腸) 전염병이 발발하여 나사렛 전역에 퍼졌다. 마리아는 예수가 이 전염병에 노출될 위험성을 크게 우려하였으므로, 나사렛으로부터 남쪽으로 수마일 떨어져 있는 사리드 근방 므깃도 거리에 있는 오빠의 시골집으로 두 아이들을 데리고 피신하였다. 그들은 두 달이 넘도록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있어서 첫 경험이 된 농장에서의 생활을 매우 즐겼다.
2. 5살 되던 해 (기원전 2년)
나사렛으로 돌아온 후 일년 조금 넘었을 때, 소년 예수는 최초로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진심으로의 도덕적 결정을 내릴 나이에 이르렀으며 낙원 아버지의 신성한 선물인 생각조절자가 예수 안에 거하기 위해 도래하였는데, 그 조절자는 이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복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초인간적 존재가 필사자 육신과 똑같은 모습 속에서 사는 육신화와 관련하여 활동하는 경험을 획득한 조절자였다. 이 사건은 기원전 2년 2월 11일에 일어났다. 예수는, 이 생각조절자들이 자기들 마음속에 거하도록 받아들이고 그 마음들이 궁극적으로 영(靈)화되도록 하는 일과 자신들의 진화하는 불멸(不滅)의 혼이 영원토록 살아남도록 일하게 하는, 그 날 이전이나 이후의, 수도 없이 많은 다른 아이들과 꼭 마찬가지로, 이 신성한 감시자가 자신에게 온 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2월이었던 이날, 미가엘이 어린아이로서 육신화 함에 있어서의 안전과 관련된, 우주 통치자들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감시 임무가 종료되었다. 이 날 이후로, 인간으로서 육신화를 나타내는 동안 내내, 예수를 보호하는 임무는 내주하는 조절자와 그리고 관련된 성(聖)천사 수호자들의 관리 안에 있게 되었으며, 때로는 그들의 행성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서 어떤 한정적인 임무들을 수행하도록 배정된 중도 창조체들로부터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예수는 같은 해 8월에 다섯 살이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때를 그의 삶에서 5살 되던 해라고 부를 것이다. 기원전 2년인 이 해에, 예수의 다섯 번째 생일을 한 달 남짓 남겨 놓은 날인 7월 11일 밤, 예수께서는 그의 여동생 미리암의 탄생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다음날 저녁, 예수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세상의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이 각기 독자적인 개체들로 태어나는 방식들에 관하여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의 어린 시절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의 사려 깊고 탐구적인 질문에 대한 부모들의 답변으로 이루어졌다.
요셉은 이 아이의 끝없는 질문에 대해 시간을 내서 충실히 대답해 주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 예수의 질문은 항상 끊어지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질문에 언제나 대답해 줄 수는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의 질문에 대해 그와 함께 토론하고, 갑작스럽게 그의 마음에 떠오른 그 문제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답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였다.
나사렛으로 돌아온 후부터 그들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으며, 요셉은 새 가게를 지었고 또 일을 다시 시작하느라 평소보다 더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에 너무 매여 있었던 나머지 야고보에게는 요람을 만들어 줄 시간이 없었지만, 미리암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요셉이 미리 요람을 만들어 놓았으므로, 편안한 침대 속에 누워 그 주위에 둘러선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어린 예수는 이러한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에 한껏 젖어있었다. 예수는 어린 남동생과 아기 여동생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아이들을 돌보는 마리아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당시에 이방 세계에는, 갈릴리의 이러한 유대인 가정보다 아이들을 더 지적이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으로 키울 수 있는 가정이 매우 드물었다. 이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일곱 단계로 나누었다:
1. 생후 8일까지의 신생아
2. 젖먹이
3. 젖을 뗀 아이
4. 살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시기
5.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시작하며, 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가르칠 책임을 갖게 되는 시기
6. 청소년기의 남, 여 아이들
7. 남, 여 젊은이들
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까지만 아이 기르는 책임을 어머니에게 지우는 것이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으며, 그러고 나서 남자아이인 경우 그 이후의 교육은 아버지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해에 갈릴리 유대인들의 아동성장 다섯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따라서 기원전 2년 8월 21일에 공식적으로 마리아는 앞으로의 교육을 요셉에게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예수의 지적이고 종교적인 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요셉이 지게 되었지만, 마리아는 집안에서 그를 교육시키는 일에 여전히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예수에게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 근처에서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와 꽃들에 관한 지식과 가꾸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지붕 위(여름에는 침실로 사용됨)에 모래를 넣은 낮은 상자들을 올려놓고, 예수로 하여금 지도를 그리거나 아람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나중에는 히브리어까지 쓰는 연습을 일찍부터 하게 하였으며, 예수는 오래지 않아서 이 세 가지의 언어 모두를 유창하게 읽고 쓰고 그리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육체적으로 거의 완벽해 보였으며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정상적인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그의 첫 번째 질병으로, 그는 다섯 번째 해(calendar year) 후반기 즈음에 약간의 소화불량을 경험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의 장남의 장래에 대해 자주 의논하였는데, 만약 너희들이 그때 옆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그 지역에 있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정상적이고 건강하며 아무 걱정 없는, 단지 호기심이 매우 많은 아이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목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6살 되던 해에 일어난 사건들 (기원전 1년)
어머니의 도움으로 예수는 이미 아람어의 갈릴리 사투리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는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어를 그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마리아도 그리스어를 약간 알았지만, 요셉은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스어 교본으로는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 선물로 받은 히브리 경전의 사본 -시편을 포함한 율법서와 예언서 모두를 갖춘- 이 사용되었다.
나사렛 전체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전권(全卷)의 성경 사본이 두 개밖에 없었으며, 그 중 하나를 이 목수의 가정에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찾아오게 되었고, 예수는 자라나면서 진지한 학도들과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끝없이 접할 수 있었다. 예수는 이 해가 끝나기 전에 이 귀중한 책의 보관 임무를 맡게 되었고, 또 그의 여섯 번째 생일에는 이 신성한 책은 알렉산드리아 친척들과 친지들이 자기에게 준 선물이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짧은 기간 내에 벌써 그 책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가 어린 시절에 첫 번째로 큰 충격을 경험한 것은, 그가 아직 채 여섯 살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에게는 자기 아버지 -적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하면- 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방금 일어났던 약한 지진의 원인에 대한 예수의 질문에, 아버지가 "내 아들아, 난 정말 모르겠구나."라고 대답하자, 호기심이 많은 이 아이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해 보라. 그래서 예수는 그의 육신적인 부모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길고 혼란스러운 각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요셉의 첫 번째 생각은, 지진은 하느님이 일으킨 것이라고 예수에게 말해주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순간적으로, 그런 대답은 즉각적으로 더 어렵고 당황스런 질문을 야기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 대답을 피하였다. 예수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자연현상이나 사회적 현상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것들은 모두 하느님이나 악마의 책임이라고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유대 민족의 일반적인 신앙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정신적이고 영적인 현상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으로서 선한 영(靈)들과 악한 영들에 대한 교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지만, 그는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들에 대해서, 그러한 보이지 않는 세력들의 영향으로 돌리려는 것에 매우 어려서부터 회의(懷疑)를 가졌다.
예수가 아직 여섯 살이 되기 전인 기원전 1년 초여름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자기들의 아들 요한을 데리고 나사렛 가족을 찾아왔다. 이 기간 동안 예수와 요한은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그들의 기억 속에 첫 번째 만남으로 간직되었다. 이들은 겨우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였지만, 이 부모들은 아들들의 장래를 비롯하여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른들이 의논에 열중하는 동안, 그 소년들은 지붕 위에 있는 모래 상자에서 벽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또 진짜 소년다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즐겼다.
예루살렘 근처에서 왔던 요한과 만난 후,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안식일의 의식(儀式)들이나 회당에서의 설교 그리고 연례적인 기념일 축제들의 의미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질문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러한 모든 절기들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절기는 겨울철에 행해지는 등불을 밝히는 축제로, 8일간 계속되었으며, 첫째 날 밤에 한 개의 촛불을 켜고, 매일 밤마다 등불을 한 개씩 늘려 가는 것이며 이것은 유다 마카비에 의해서 모세의 경배 의식들이 회복된 후에 성전 헌납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초봄의 부림절 축제로, 에스더와 그녀에 의한 이스라엘의 해방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장엄한 유월절 축제가 이어지며, 이 때 성인들은 가능한 한 언제든지 예루살렘에 모여 축하를 하고, 집에서는 아이들이 일주일 내내 누룩 넣지 않은 빵만 먹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추수를 거둬들이는 첫 열매의 축제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는 가장 엄숙한 절기로서, 속죄의 날인 신년(新年)의 축제였다. 이러한 축제일들과 기념일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어린 예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보았고, 그런 후에는 장막절 축제의 즐거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때 모든 유대 민족은 여름 휴가철이었고, 밖에 초막을 짓고 야영을 하면서 환희와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같은 해 기간 중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께서 드리는 기도들에 대하여 그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육신적인 아버지인 요셉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말할 것을 고집하였다. 신(神)과의 엄숙하고 경건한 대화형식으로부터 이탈된 이러한 방식은 그의 부모를, 특히 그의 어머니를 약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그에게 고치라고 설득하지는 않았으며 그는 가르침을 받았던 그대로 기도를 드린 후에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잠깐 이야기하는" 기도를 하기를 주장하였다.
같은 해 6월, 요셉은 나사렛에 있는 가게를 그의 형제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건축자로서 공식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해가 가기 전에 그 가족의 수입은 세배 이상 늘어났다. 요셉이 죽기 전까지 이 나사렛 가족은 다시는 극심한 가난을 겪지 않았다. 가족은 점점 불어났고 계속되는 교육과 여행에 많은 돈을 쓰게 되었지만 요셉의 수입도 증가하는 경비 못지않게 계속하여 늘어났다.
이 후 몇 년간 요셉은 나사렛과 그 근방에서 건축한 것뿐 아니라, 가나, 베들레헴 (갈릴리에 있는), 막달라, 나인, 세포리, 가버나움, 그리고 엔도르 등지에서 상당히 많은 작업을 하였다. 야고보가 집안일과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를 돕기에 충분할 만큼 자라게 되자,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집을 떠나 근방의 도시와 마을들을 자주 여행하였다. 예수는 관찰력이 예리하였고 그래서 집을 떠난 이 여행들에서 많은 실제적인 지식들을 얻었으며 이렇게 그는 사람에 대해 또 이 세상에서 그가 살았던 방법에 대한 지식을 부지런히 축적해 두었다.
이 해에 예수는 가족 내의 협동과 규율에 맞도록 그의 강렬한 감정과 활력에 넘치는 충동을 자제(自制)하는데 많은 진보를 보였다. 마리아는 자애로운 어머니였지만 동시에 매우 공평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를 더 많이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그 소년의 곁에 앉아 가족들 전체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개인적인 욕망을 자제하는 훈련의 필요성에 대한 참된 이유와 그 이면적인 이유까지도 잘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그 상황이 예수에게 다 설명되었을 때, 그는 항상 부모의 바램들과 가족의 규율들에 현명하게 그리고 기꺼이 협조하였다.
예수는 낮에는 꽃들과 식물들에 대해 그리고 밤에는 별들에 대해 연구하는 일에 여가(餘暇) 시간의 대부분 -어머니가 집안 일로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을 보냈다. 그는 나사렛의 엄격한 가정 속에서 자신의 일상적인 취침시간을 훨씬 넘은 시간까지 자지 않은 채 누워서 별이 가득한 하늘을 신기롭게 응시하기를 좋아하는 별스러운 경향을 보였다.
4. 7살 되던 해 (기원 후 1년)
이 해는 예수의 일생에 정말로 다사(多事)한, 한 해였다. 1월 초 갈릴리에는 굉장한 폭설이 내렸다. 눈이 2피트가 넘게 왔으며, 이것은 예수의 일생 동안에 가장 많이 온 눈이었고 나사렛에서는 100년 이래 최대의 폭설이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 아이들의 놀이는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으며 아이들은 자기들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들을 보고 본받아 그들에게는 좀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놀이를 하는 경우가 매우 많이 있었다. 그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놀이, 그들이 자주 목격하고 또 호화로운 모습인 예식(禮式)들을 흉내 내며 놀았다.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지만, 후대의 아이들이 대단히 즐겼던 그런 조직화된 오락은 거의 없었다.
예수는 이웃집 소년과 그리고 나중에는 동생 야고보와 함께, 가족이 경영하는 목공소 한쪽 구석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그곳에서 톱밥과 나무토막들을 가지고 매우 재미있게 놀았다. 안식일 날에는 어떤 놀이들이 금지되었는데, 예수로서는 그것들이 왜 해악(害惡)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모가 원하는 바를 따르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예수는 유머 감각이 뛰어났고 노는 데 소질이 있었으나 그 시절 그 세대의 환경으로는 그런 자질을 나타내 보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열네 살까지, 예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명랑하고 밝게 보냈다.
마리아는 집에 붙어 있는 축사(畜舍) 지붕에 비둘기 집을 마련해 놓았고, 그들은 비둘기를 팔아 특별 자선기금으로 사용하였는데, 예수는 그것에서 십일조를 떼어 회당의 직원에게 주고 난 후 그 나머지 기금을 맡아 관리하였다.
이 때까지 예수는 진짜 사고는 단 한번밖에 경험하지 않았는데, 천막으로 지붕을 만든 침실로 상승하는 뒷마당 돌계단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이 사고는 7월에 동쪽으로부터 불어 온 예기치 못한 모래폭풍 때문 이었다. 고운 모래를 싣고 오는 이 열풍은 보통 우기(雨期)에 불어 왔으며 3월과 4월에 특히 심하였다. 7월에 이 폭풍이 분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 폭풍이 왔을 때 예수는 평소처럼 지붕 위에서 놀고 있었으며, 건기(乾期) 중에는 이곳이 그의 놀이방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계단을 내려오던 그의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 사고가 있은 후, 요셉은 계단 양옆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사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미리 방지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아이를 보호하기로 되어 있던 일시적인 중도 감시인들, 그 소년을 보호하도록 임명되어 있는 한 명의 1차 중도자와 다른 한 명의 2차 중도자의 실책이라고 볼 수 없었으며 또한 수호천사장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요셉이 엔도르에 간 사이에 일어난 이 조그만 사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매우 염려가 되어, 어리석게도 몇 개월 동안이나 예수를 자기 옆에 붙들어 두려고 애썼다.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늘 일어나게 되는 이러한 물질적 사고에, 천상의 품성체들은 독단적으로 끼어들지 않는다.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단지 중도 창조체만이 운명이 정해진 남녀들의 품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물질적인 조건들에 개입할 수 있는데, 아무리 특별한 상황일지라도 이들은 자기 감독자들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을 때에만 그런 활동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호기심 많고 탐구심 많은 이 아이에게 결과적으로 발생했던 많은 사소한 사고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만약 너희들이 활동적인 한 소년의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본다면, 예수의 어린 시절이 어떠하였는지를 아주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또한 그가 자기 부모들, 특히 그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많은 우려를 끼치게 했었는지도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나사렛 가족의 네 번째 아이 요셉이 기원 후 1년 3월 16일 수요일에 태어났다.
5. 나사렛에서의 학교생활
예수는 이제 일곱 살이 되었으며, 이 나이에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會堂) 학교에서 공식적인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같은 해 8월 나사렛에서, 예수는 다사(多事)했던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소년은 이미 두 가지 언어들,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읽고 쓰고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히브리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앞으로 해 나갈 새로운 학교생활을 진심으로 손꼽아 기다렸다.
3년 동안 -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그는 나사렛 회당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3년의 이 기간 동안 그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있는 그대로 율법서의 기초 과정을 공부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그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율법에 있는 보다 어려운 가르침들을 크게 반복하여 읽음으로써 암기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는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이 회당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교육받은 "계명의 아들"로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국민으로서 책임 있는 시민이 되었고,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유월절 행사에 참가할 수 있는 모든 자격이 부여됨- 회당 관료들로부터 부모에게 인계되었으며 따라서 그 해에 그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유월절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사렛에서는 학생들이 마루에 반원형(半圓形)으로 앉았으며, 카잔이라고 불리는, 회당(會堂) 간부인 선생님은 학생들과 마주보고 앉았다. 그들은 레위기부터 시작하여 다른 율법서(律法書)들을 차례로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예언서와 시편을 공부하였다. 나사렛의 회당은 히브리어로 씌어진 성경 전권(全卷) 하나를 갖고 있었다. 열두 살까지는 성경만을 공부하였다. 여름철에는 수업시간을 많이 단축하였다.
예수는 히브리어를 일찍 통달하였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어떤 저명한 방문자도 나사렛에 체류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정규적인 안식일 경배 때 회당에 모인 신자들에게 히브리어 성경을 읽어 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곤 하였다.
물론, 이 회당 학교들에는 교과서들이 없었다. 수업 방식은, 카잔이 한 문장씩 읽어 나가면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그를 따라 반복해 읽었다. 기록된 율법 책을 접하게 되면, 학생들은 그것을 크게 읽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방법으로 공부하였다.
다음으로, 그의 공식적인 학교생활 이외에, 예수는 자기 아버지의 수리소를 거쳐 지나가는 사람들로서 세계 방방곡곡으로부터 오는 많은 인간 본성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더 나이가 들게 되자, 그는 쉬거나 요기하려고 우물 근처에서 머물고 있던 대상(隊商)들과도 자유스럽게 어울렸다. 유창한 그리스어 덕분에 예수는 대부분의 대상 여행자들이나 안내원들과 대화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사렛은 대상(隊商)들이 경유하는 곳이었고 여행 경로들의 교차점이었으며 주로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고 동시에 그곳은 유대의 전통적인 율법을 개방적으로 해석하는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갈릴리에서는 유대 지방에서의 경우보다 더욱 자유스럽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교제하였다. 그리고 갈릴리의 모든 도시들 중에서도 나사렛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게 되면 더러워진다는 두려움에서 연유된 사회적 제약에 대해서도 가장 개방적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여건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였다.
예수는 도덕적인 교육과 영적인 수양을 주로 가정에서 받았다. 그의 지적이고 신학적인 교육은 카잔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교육 삶의 어려운 문제들과 겨루는 실제적인 시험에 대비한 가슴과 마음의 준비- 은,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그 속에서 받았다. 연령에 상관없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가 어울린 사람들과의 이러한 친밀한 교제는 그에게 인종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예수는 그 속에서 매우 깊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속들이 납득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회당에서 교육을 받는 전 과정 동안, 그는 세 가지 언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큰 이점을 갖고 있었던, 매우 총명한 학생이었다. 나사렛의 카잔은 예수가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 "그 소년을 가르칠 수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탐구적인 질문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요셉에게 털어놓았다.
예수는 자신의 전체 공부 과정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으며 회당에서의 주기적인 안식일 설교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안식일에 나사렛에 머물게 된 저명한 방문자들에게 회당에서 설교하도록 부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예수는 자라면서, 유대인들 전체의 세계에서 위대하게 손꼽히는 많은 사상가들이 해석하는 견해들을 들었고, 또한 나사렛에 있는 회당이 히브리 사상과 문화의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도 들을 수 있었다.
일곱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이 당시에 유대인들은 막 의무교육법을 제정했다), 학생들은 자기 자신의 '탄생 기념 성구(聖句)'를 선택하여 공부하는 동안 내내 하나의 황금률(黃金律)이 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그들이 열세 살이 되어 졸업을 하게 되었을 때 이 성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곤 하였다. 예수가 선택한 성구는 예언서인 이사야서에 있는 것으로: "주 하느님의 영이 내게 임한 것은, 주(主)가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기 위함이며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가슴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영적으로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려고 그가 나를 보내셨다."라는 내용이었다.
나사렛은 히브리 민족의 24명의 제사장이 위치하는 중심지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갈릴리 지방의 제사장들은 전통적인 계명들의 해석에 있어서 유대 지방의 학자들이나 랍비들보다 좀 더 개방적이었다. 그리고 나사렛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도 역시 좀 더 자유로웠다. 그래서 요셉은 안식일 오후에 예수를 데리고 종종 산책을 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사방의 갈릴리 지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집 근처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맑은 날에는 북서쪽으로 갈멜산의 한쪽 능선이 바다를 향해 뻗어 내려간 것도 볼 수 있었으며 예수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오랫동안 전통으로 이어지는 히브리 예언자들 중에서 초기 사람인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그는 아합을 책망하고 바알의 사제들의 가면을 벗긴 사람이었다.
북쪽으로는 눈 덮인 헤르몬산 봉우리가 장엄한 모습으로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었고, 높이가 3,000피트나 되는 상부 능선은 만년설(萬年雪)로 빛나고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을 식별할 수 있고, 더 멀리로는 모압의 바위 언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데가볼리에 있는 그리스 로마 풍의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대리석 벽에 해가 비칠 때, 그들은 원형 극장들과 허세를 부리는 듯이 서있는 높은 신전들과 함께 그 도시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서편으로 지는 해를 향해 거닐 때에는, 서쪽으로 멀리 지중해의 배들을 식별할 수 있었다.
예수는 나사렛을 드나드는 대상 행렬들을 사방으로부터 관찰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길보아산과 사마리아까지 뻗어있는 에스드렐론의 광활하고 비옥한 땅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이는 경치를 내려다보지 않을 때에는, 그들은 시골길을 산책하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형태의 자연을 공부하였다. 예수의 어린 시절의 교육은 가정에서 받은 것 이외에도, 경건하고 가슴이 통하는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 졌다.
여덟 살이 되기 전에, 그는 나사렛의 모든 어머니들과 젊은 여인들에게도 잘 알려졌는데, 그들은 당시에 사람들이 접촉하고 마을 전체에 관한 한담을 나누던 사교 중심지들 중의 하나였던, 그의 집 가까이 있는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해에 예수는 집에서 기르는 소의 우유를 짜고 다른 가축들을 돌보는 일을 배웠다. 그 해와 그 다음 해에, 그는 또한 치즈 만드는 법과 천을 짜는 법도 배웠다. 열 살이 되자, 그는 능숙하게 베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와 이웃 소년 야곱이 냇가 가까이에서 일하던 도공(陶工)과 친구가 된 것도 바로 이 때였으며 나단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도자기 물레 위에서 흙을 주무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커서 함께 도공이 되겠다고 여러 번 다짐하였다. 나단은 이 아이들을 매우 좋아하였고, 종종 그들에게 진흙을 주어 가지고 놀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그들에게 여러 다른 물건들과 동물들을 만드는 경쟁을 하게 하여 그들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애썼다.
6.8살 되던 해 (기원 후 2년)
이 해는 학교에서 재미있게 보낸 한 해였다. 예수는 비범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매우 부지런 하였고, 학생들 중에서 보다 진취성을 보이는 3분의 1에 속하였다. 그는 맡은 일을 잘 해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주일 정도는 출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일 주일 동안에는 대개, 예수는 막달라 근처의 갈릴리 바다 해안에서 어부인 그의 삼촌과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나사렛에서 5마일 가량 남쪽으로 떨어진 농장에 있는 외삼촌(자기 어머니의 형제)과 시간을 보냈다.
비록 그의 어머니는 그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하였지만, 차츰 이렇게 집을 떠나 여행하는 것을 용납하게 되었다. 예수의 삼촌들과 숙모들은 모두 그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이 해와 그 뒤의 몇 년 동안, 예수가 매 달 자기들 집으로 방문하게 하기 위하여 노골적으로 경쟁하곤 하였다. 삼촌의 농장을 방문한 그의 첫 번째(갓난아이 이후로) 일주일 동안의 여행은 이 해 1월에 있었으며, 갈릴리 바다에서의 일 주일간의 첫 번째 고기잡이 경험은 5월에 있었다.
이 무렵에 예수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수학선생을 만났으며, 그로부터 새로운 산술(算術)을 배웠고,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수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숫자와 공간 그리고 비율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키웠다.
예수는 그의 동생 야고보와 노는 것을 매우 즐기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가 끝날 무렵에는 그에게 철자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예수는 낙농제품을 주는 대신으로 수금(악기)을 교습 받기로 합의하였다. 그는 모든 음악적인 것을 남달리 좋아하였다. 나중에는 그의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관심을 가지도록 선동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예수는 능숙한 수금 연주자가 되었고 그의 비범한 연주 실력과 뛰어난 즉흥곡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다.
예수가 학교에서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계속적인 진보를 보이고 있을 동안, 부모들과 선생들에게는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적으로 과학과 종교에 대해 그리고 특별히 지리학과 천문학에 대해 난처한 질문들을 많이 하였다. 그는 특히 팔레스틴의 건기(乾期)와 우기(雨期)가 왜 존재하는 지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또한 그는 나사렛과 요단 계곡의 온도가 왜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계속 요구하였다. 그는 그러한 지적이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세 번째 남동생 시몬이 같은 해 기원 후 2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에 태어났다.
2월에 예루살렘에 있는 랍비 학교의 선생들 중 하나인 나홀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사가랴의 집을 방문한 후에, 비슷한 목적으로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사렛에 왔다. 그는 요한의 아버지의 부추김을 받아 나사렛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예수의 솔직함과 비전통적인 태도에 다소 충격을 받으면서 예수의 이러한 태도를 갈릴리가 히브리 정통 교육과 문화에서 격리되어 있는 탓으로 돌렸으며, 그는 예수가 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 문화의 중심지에서 교육과 훈련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조언하였다.
마리아는 그의 설득에 거의 동의하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맏아들이 메시야, 유대인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셉은 이를 주저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예수가 자라서 운명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였지만 그러한 운명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 지상에서 어떤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리라는 데에는 전혀 의심이 없었다. 나홀의 조언을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를 예루살렘에 머물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져 갔다.
이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에 나홀은 이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전적으로 예수에게 맡기자고 제안하였다. 예수는 주의 깊게 듣고 나서 요셉과 마리아 또한 이웃의 가장 친한 놀이 친구 야곱의 아버지인 석공(石工)과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으며, 그러고 나서 이틀 후에 대답하기를, 자기 부모들과 충고자들의 의견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기 자신은 어느 한쪽으로도 특별히 선호하고 있지 않고, 그러한 결정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는 마침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의논해" 보기로 결정하였지만, 거기에 대한 응답에 전반적인 확신이 없었으므로 차라리 "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말하였으며, "나를 진정으로 알 수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나의 외모를 볼 수 있거나 또는 나의 마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인 낯선 사람들보다는, 나를 그토록 사랑하는 부모가 나를 위해 더욱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고 나를 안전하게 인도해 줄 수 있을 것" 이라고 느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모두 그의 대답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나홀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예수가 집을 떠나는 문제를 다시 고려하게 된 것은 여러 해가 지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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