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 저널 제 222권
오스카 레비의 편지
오스카 레비[Oscar Levy](1867-1946, 의학박사, 문필가—역자주)의 편지
친애하는 피트-리버스[Pitt-Rivers]씨에게,
(조지 피트-리버스[George Pitt-Rivers], 1920년대 옥스포드, 워세스터 칼리지[Worcester College, Oxford] 교수—역자주)
……
[중략]
……
당신도 아시다시피, 유태인들은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집단으로서, 어떤 젠타일[Gentile](유태인이 아닌 자—역자주)이라도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기만 하면, 아주 의심스러워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과 한 편이 아니라면 적이라는 시각으로 경도되어 있고—바로 그들의 험한 경험들 때문에—, 그들의 신념과 그들의 혈통 아래 하나되어, 결코 관용을 보이지 않는 적대감과 같은 “중세적” 편견에 물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논문(‘러시아 혁명의 세계사적 의미 : The World Significance of the Russian Revolution’—역자주, 편지서두에 언급됨)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적대적인 태도에 관한 명백한 증거들이 있음을 저는 부인할 수도 없고 또 부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마땅히 보여야만할 그러한 분노를 갖고서, 금융과 산업 분야에서의 유태인들의 지배적인 위치, 그리고 반란과 혁명에 있어 유태인들이 취해 온 주도성 속에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당신은 열의를 갖고서, 집산주의[Collectivism]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제 금융간의 커넥션에 대해서도 밝혀내고 있습니다—‘현금 가치의 민주주의 (당신이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칼 맑스[Karl Marx]와 트로츠키[Trotsky]의 국제 집산주의’. 이것은 요컨대, 유인(decoy)의 그리고 유인에 의한 민주주의인 것입니다. 정치상의, 그리고 경제상의 이 모든 악과 비참함의 하나의 근원을 당신은 “fons et origo malorum”, 즉 ‘유태인’으로 소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유태인들은 당신의 이처럼 노골적인 관점들에 대해 당신을 중상모략하고 괴롭히게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비난의 합창에 동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보다 저는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감정을 이해할려고 노력할 것이고, 또 이미 잘 이해한 지금으로서는—저는 제가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만—이 맹렬한 인종들로부터 종종 가해지게 될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당신을 방어해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선적으로, 저는 이 부분을 지적해야 될 것 같습니다 : 바로 근대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 가운데, 유태인들로 소급되어질 수 없는 사건은 거의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끝난 것 같아 보이는 대전쟁(1차세계대전을 지칭—역자주)을 예로 들어 봅시다. 전쟁의 명분과 전쟁의 이유가 무엇이었던 것인지를 자문해 보십시오 : 당신은 바로 그게 민족주의였음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또 당신은 이내 대답하게 되기를, 그러한 민족주의는 당신이 우리에게 이미 입증해 보여 주셨듯이, 국제적인 사조들의 창안가들이었던 유태인들과는 실상 전혀 관계도 없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단 볼셰비키즘의 황홀경이나 국제금융의 횡포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아집(제가 이걸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면)도 궁극엔 유태인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택받은 민족’의 신화를 만들어내지 않았고, 이러한 강박관념이 모든 현대 국가들의 정치적 신조의 일부 또는 단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럼, 이것이 사소하고 대수롭잖은 것일까요? 민족주의의 역사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민족주의는 우리 시대에 시작되었고, 나폴레옹에 대한 반발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 그런데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습니다 ; 프랑스 혁명은 종교개혁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
그런데 종교개혁은 생경한 형태의 기독교주의에 바탕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주의는 바로 유태인들에 의해 발명되고, 웅변되고, 선전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바로 유태인들이 지금의 이 전쟁을 만들어 내기도 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제발 이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이 뒤에 거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후로 생겨난 모든 사조들, 운동들은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항상 유태인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이는 바로, 유태인들의 아이디어라는 것이, 결국엔 우리의 이 명백히 비종교적으로 변모된 세상을 정복하고, 완전히 그들의 발아래 이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은 무엇을 개선시키건 악화시키건, 하여튼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젠타일들보다 꼭 앞서 움직인다는 점에 있어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 오늘날 그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은 대단히 주의깊은 조사를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고, 심각한 경종을 울리지 않고서는, 그러한 문제들이 거의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에는 더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커다란 의문점이 있다면, 도대체 유태인들은 바로 그들이 악행의 근원으로서 역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이 점을 정말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제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악행이 악행인 줄을 아는 자는, 제 생각에, 최소한 선행이 무엇인지도 아는 자라고 봅니다 ;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잘못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한 몰이해가 용서되어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사랑—물론 그 사랑은 제가 베푸는 사랑은 아닐 것입니다—이 베풀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개인적인 확신에 따르자면, 저는 이 유태인 혁명가들이, 정말로 그들 자신들이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 지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 최소한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그들은 자발적으로 악행을 행하는 자들이라기 보다가는 무의식적인 범죄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것이 저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 역시, 유태인들도 어쩌면 그들 자신이 만들어 둔 이론과 원칙들의 희생자들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견해를 표명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논문 39페이지에서 당신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유태인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동의하지는 않을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데 항상 도구적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
이는 어쩌면 ‘방랑하는 유태인들’의 저주일런지도 모르겠다.” 설령 제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고 영광으로 여기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설령 제가, 당신이 불공정한 일들에 대해 갖는 그 강한 혐오와,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당신의 열정적인 노력들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한다고손 치더라도, 바로 이 문장, 여기 이 한 문장이야말로 분명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감히 확신하기에, 천박한 반유태주의자라는 불쾌한 오명으로부터, 적어도 저만큼은 당신을 구제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천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가장 깨어있는 우리 인종에 대한 비판가이신 것입니다. 반유태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라고 또 제가 믿는 한, 반유태주의는, 단순히 맹목적인 유태인 혐오주의는 아닌 것입니다. 한편, 단지 감정적으로 “모든 것을 방임하는 자유주의”, 결국 그 자체로는 그저 또다른 인종적 이상주의에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보다가 반유태주의는 오히려 훨씬 더 유태인들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사조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유태인들에 대해 “낭만적인” 접근이 아닌, 공정한 접근을 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당신은 유태적 요소들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자 모두에 걸쳐, 그리고 우리 세계의 정신적 파탄 뿐만 아니라 물질적 파탄 모두에 걸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했노라고 경종을 울리며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당신은 이런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들이 유태인들의 강렬한 이상주의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당신은 완벽하게 옳습니다. 한가지 사고에 사로잡힌 유태인들은, 튜튼족들이나 앵글로 색슨족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엄격한 비밀주의에 입각한 노력의 수준을 이미 지나치게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아예 자신들의 뇌의 좌반구는, 반대쪽 우반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에 이른 것입니다 ; 또 한편 유태인들은 러시아인들처럼 한번 자신들이 이야기한 것을 행동에 옮기게 될 것 같으면, 우선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조로부터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한 연후에는, 확고부동하게 받아들여진 그들의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그들의 신비에 가까운 추진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이 추진력에 대해서 당신은 우선은 물론 비난을 하시겠지만, 볼셰비키주의자들을 예로 들어 볼 것 같으면, 그들의 놀라운 집착에 당신조차도 경탄해 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태인이든 아니든, 우리가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그들의 집요한 추진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의 유태인들이 그들의 원형 속의 유태인들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최근에 보인 유태인들의 모습과 비근한 예가 역사상에 나타나 있지 않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심지어 오늘날에 조차도, 오히려 과거보다 더 혹독한 결말를 맞게 될지언정 그들이 그들의 대의를 따라 나아가기를 멈출 것이라고 보십니까?
지난 독일에서의 전쟁에서 누가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까?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e](성경상의 ‘본디오 빌라도’—역자주)조차도 의아해 했던 사실에 대해서, 누가 그것이 사실이라고 재차 주장했었습니까? 누가 정치에 있어서 정직함과 청렴결백을 주장했습니까?, 바로 그 정직함이란 그저 오늘날의 경험많은 ‘집정관들’의 입술에 영악한 미소만을 더해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했던 많은 작가들, 그들 대부분이 유태인들이었습니다 :
프리드[Fried](알프레드 헤르만 프리드[Alfred Hermann Fried], 1864-1921, 저널리스트, 평화운동가—역자주), 페르나우[Fernau], 라츠코[Latzko], 리처드 그렐링[Richard Grelling]—“J’accuse : 나는 고발한다”의 저자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을 다룬 내용. 드레퓌스사건에 대한 에밀 졸라[Emile Zola]의 ‘J’accuse’와 구별요—역자주). 바로 이러한 이상과 원칙들을 위해서 누가 죽임을 당했고, 또 누가 자신들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까? 바로 다름 아닌 유태 핏줄의 남자와 여자들이었습니다 :
하스[Hasse], 레빈[Levine], 룩셈부르그[Luxemburg](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 1870-1919, 막시스트 혁명가—역자주), 란다우어[Landauer](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 1870-1919, 무정부주의자—역자주), 그리고 바바리아주 수상이었던 커트 아이즈너[Kurt Eisner](1867-1919, 정치인,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역자주).
모세[Moses]로부터 맑스[Marx]에 이르기까지, 이사야[Isaiah](B.C. 8세기, 유태인 예언자—역자주)로부터 아이즈너[Eisner]에 이르기까지, 실제와 이론에 있어서, 이상주의와 물질주의에 있어서, 철학과 정치에 있어서,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채로, 그들의 길을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의 대의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바로 그들만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그들이 흘릴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도 언제나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니, 기꺼이 바쳐 왔던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들은 모두가 그릇된 것들이다. 그들이 세상을 어디로 이끌어 왔는지를 보라. 이제는 그들이 3000년간 저질러온 잘못들에 대해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얼마나 더 오랫동안 당신은 그들이 우리에게 끼쳐온 해악들이 계속되는 상황이 방치되길 바라는 것인가? 유태인들이 세상을 재앙에 가깝도록 이끌어 왔는데, 지금 우리가 처하게 된 난국으로부터 벗어나보자는 주장을 어떻게 (유태인인) 당신이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는 오직 한가지 답변만을 드릴 수 있을 뿐이고, 그 답변이란 : “당신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비난이야말로—제가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서—당신이 가진 반유태주의의 근저가 되는 것이며, 또한 너무나도 잘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공감대에 바탕하여 저는 오히려 당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으며, 인종적 증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당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 만약 당신이 반유태주의자라고 한다면, 유태인인 저,, 저역시 또 한 명의 반유태주의자이며, 그 어떤 반유태주의자보다가도, 심지어 당신보다가도 더 노골적인 반유태주의자입니다.. 우리 유태인들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여러분들 ; 우리는 정말이지 가장 무거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들 가운데, 3000년전에 저질러진, 혹은 2000년전에 저질러진, 아니 단 100년전에 저질러진 잘못들 속에는, 혹시라도 최소한 일말의 진실성이라도 들어 있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 속에는 오직 오류와 광기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광기는 더 큰 비참함과 더 광범위한 무질서 상태를 낳게 될 뿐인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공개적으로, 진심으로, 그리고 슬픔을 안고서 고백합니다.
고대 다윗왕이, 오직 그만이 오늘날 이 불타오르는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고는 비탄에 잠기게 될런지도 모를, 바로 그 분이 느끼게 될 그러한 비참함과 깊은 슬픔을 안고서 고백합니다. 우리 유태인들, 이 세상을 위한 구세주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 바로 또 그 진정한 “구세주(예수)”를 배출했노라고 자랑하기조차 해온 우리들, 그런 우리들은 오늘날 이 세상의 사기꾼들이자, 파괴자들이며, 방화범들이자, 사형집행인들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새로운 천국으로 인도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만, 우리가 당신들을 정작 인도한 곳은 새로운 지옥일 뿐이었습니다..
어떠한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소한의 도덕적 향상도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진보라고 주장되어지는 것 속에 있었던 것이란 단지 우리들의 명분 뿐이었고, 오직 나빠지기만 할 뿐인 이 거짓된 진보는, 폐허가 된 세상의 재건 과정 속에서도, 다가올 미래의 모든 순간 순간들 속에서도, 진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세상을 바라다 봅니다. 그리고 이 소름끼치는 장면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 이런 무시무시한 장면들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온 자들에 대해 제가 더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저는 더더욱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나리오를 쓰는 자들은 아직도 이 경악할만한 내용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그들이 그들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이러한 심각성을 의식하지 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전 유럽이 불타오르고, 곳곳의 희생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대화재의 현장에서 개들이 울부짖고, 바로 그 자욱한 연기가 우리 대륙의 어두운 곳들, 어둡디 어두운 그늘진 곳들 위로 무겁게 내리깔리고 있는 동안에도, 유태인들은, 또는 그들 중의 일부는, 결코 그들이 무가치한 존재들은 아니겠지만, 그저 불타는 건물들을 빠져나와, 유럽을 떠나 아시아로, 혹은 이 재앙으로 쑥대밭이 된 어두운 곳들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햇볕 쪼이는 구석으로 달아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그들의 눈은 온갖 비참한 장면들을 외면해 버립니다. 그들의 귀에는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 엉망이 되어 버린 유럽에 대하여 차갑게 식어있을 뿐입니다 ;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슬픔만을 느낍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만 애통해 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들에게 지워진 짐에 대해서만 한숨을 내쉽니다. 그들은 도움과 안내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유럽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알지 못합니다 ;
그들은 심지어 그들 조상들, 적어도 불쌍한 자들에 대해 연민의 정만큼은 가졌었던 자신들의 조상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 그들은 사랑에 철저히 메말라 버렸으며, 가슴은 차갑디 차갑도록 식어버렸고, 진정으로 옳은 싸움에는 싫증을 느낍니다. 보십시오! 한때는 용맹한 군인들이었던 자들의 아들들이 지금은 후방의 참호에 숨어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며, 전장의 음산한 음악 대신에 샤론 고원[|Plain of Sharon : 이스라엘 영토 중앙의 고원지대—역자주]에서 들려오는 소방울 소리와 추수 노랫소리가 만들어 내는 음악만을 듣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은행가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볼셰비키주의자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시오니스트들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커다란 희망이 분명 남아 있습니다. 악을 만들어 냈던 이 종족들이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해독제, 처방제, 즉 선을 만들어 내는 데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과거에도 그래왔었습니다—물론 나중에 볼셰비키즘을 이끌어 오고 말았던 파멸적인 자유주의를 그 예로 들 수는 없겠습니다만. 어두웠던 19세기 중반에도 유태인들의 대의에 대해 분투적으로 반대를 표해 온 두 명의 계몽된 유태인들이 있었습니다—
독일 보수 정당의 창립자였던 프리드리히 슈탈[Friedrich Stahl]과 영국 보수당의 수반이었던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그들이었습니다. 만약 이 저명한 두 인물이, 바로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중에 직면하게 되고 말 불행한 봉기들의 근저에, 유태종족과 그들만의 신성한 메세지가 들어 있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결코 의심을 가질 수는 없었다고손 치더라도 ; 이 미래에 다가올 반 디즈레일리 세력들은, 그들만의 지극한 간절함, 지극하게 절실한 단호함, 그리고 지극한 열정을 가지고서, 분명코 자신들을 위한 대의, 즉, 그들을 위한 “선”, 그들의 “사랑”, 그리고 그들의 “이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위해서 싸운 결과가, 결국엔 이 세상을 악과 증오로 가득찬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선”, 새로운 사랑, 진정한 사랑, 이지적인 사랑, 안정과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한 복판으로부터 장엄하게 솟아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은, 변질된 사랑, 무미건조한 사랑,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과 귀족주의를 병들게 만들었을 뿐이었던 허구적인 사랑들을 분명코 극복해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증오는 결코 증오로 극복되어질 수 없습니다 : 이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 새롭고 거대한 사랑은, 오늘날의 이 오래되고도 악마적인 증오를 마침내 굴복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래에 져야될 책임인 것입니다. 이 임무는, 제가 확신컨대, 유태인들에 의해 회피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선이건, 악이건 간에 회피한 적이 없었던, 바로 그 똑같은 유태인들에 의해서 이 책임 역시 완수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왜냐하면, 우리 유태인들이 아직 여기 있고, 우리가 남기게 될 마지막 발언은 아직 입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고, 우리가 행해야 할 마지막 임무도 아직 완수되지 못했으며, 우리가 기도하는 마지막 혁명 역시 아직 완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혁명, 우리 혁명가들의 최후를 장식하게 될 이 마지막 혁명, 바로 이 혁명은 실로 그들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혁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곧’ 일어나게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톤 : 나는 당신들이 이 단락을 주의깊게 다시 읽어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위대한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오래된 신념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날이 밝았을 때, 죽고 부패한 가치들은 모두 커다란 도가니 안에 집어넣어질 것이고, 그리하여 진정으로 새로운 권위와 아름다움을 띤 가치들로 변모되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나의 친애하는 피트-리버스씨, 유서깊고 명망있는 젠타일 가문의 자손이신 바로 당신 곁에, 결국은 당신이 승리하고 말게 될 바로 이 유럽에서 벌어지는 모든 식자들 간의 전쟁터 속에서, 당신이 진실로 신뢰하실 수 있을 동반자이기도 한, 최소한 한 명의 유태인이 함께 있게 될 것임을 확신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혁명에 반대하고, 소중한 생명들의 융성을 기원하는,
당신의,오스카 레비[Oscar Levy] 드림.
왕립학회 [Royal Societies Club]
성 제임스 가 [St.James Street]
런던, S.W. [
1920년 7월
디어본 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지, 1921년 4월 30일자.
피닉스 저널 제 222권, “Birthing The Phoenix”, Vol. I, 제 12장, pp. 17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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