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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 얘기들 !

한국이 키운 일본은 부모를 이렇게 속였다!

한국이 키운 일본은 부모를 이렇게 속였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 관계를 거짓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많은 한국인들이 이를 곧이듣고 사실인 듯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과거에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이를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첫 일본 역사책(주: 8세기에 쓰여진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의미함)에서 일어났다...일본 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주: 당시 만주에서부터 한반도 남쪽 가야에 걸쳐서 살았던 한민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15-25대 일왕은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부여 혈통의 왜왕이었다." <부여기마족과 왜> 중에서


미국인 사학자 존 코벨(Jon Covell) 박사의 확신에 찬 증언이다. 코벨 박사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본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한국과 일본 미술사에 대해 가르쳤다. 오랜 동안 일본에 머물며 일본 미술과 역사를 연구하다 그 근원이 한국임을 알고 그 후 1970-80년대에는 한국에서 약 10년간 머무르며 많은 저술을 남기고 칼럼들을 기고하였다. 그의 한일고대사 연구는 학자로서 실제로 일본과 한국에 오래 동안 머물며 직접 보고 듣고 읽고 조사한 것들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신뢰감을 주었다.


코벨 박사는 한국의 절대적 영향력에 대해 일본 천왕가 뿐만 아니라 귀족층에 대해서도 일본이 귀족계급 성씨를 조사한 책 <신찬성씨록>에는 3분의 1 이상이 도래인들로 대부분 백제, 고구려에서 온 한국인들, 혹은 중국인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계속되는 역사조작에 대해 분개하며 다음 사실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왜 일본인들은 그들의 야요이 시대가 한국에 90% 의존했던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왜 일본인들은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일본 고분 시대가 90% 한국에서 받은 결과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일본인들은 7세기의 아름다운 아스카 불교예술이 한국에 90% 빚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가?

왜 일본인들은 14-15세기 중세 미술이 한국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은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일본인들은 2000년 전 야요이 시대부터 5,6세기의 스에키 토기를 걸쳐 1000여 년 간의 일본 도자기 전통과 일본 다도에 쓰이는 다기가 16세기 이래 조선의 도공과 한국으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이 혜택을 입은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코벨 박사에 의하면 한국의 막대한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국교처럼 되어버린 신토(신도)도 일본 불교도 중세 수묵화도 모두 한인들에 의해서 주어진 문화적 선물이었다. 특히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법륭사에 대해 "일본은 이 보물을 한국의 백제 땅이었던 전라남북도와 나눠 가져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고대 한류는 일본이란 나라와 그 문화 자체를 태동시키고 형성시켰던 것이다. 이에 대해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디스커버리(Discovery)지 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에서,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 야요이인, 아이누족을 정복함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당시 한반도는 동북아 문명의 최대 발생지라고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코벨 박사가 앞서 지적하였듯이 한국 특히 백제는 일본의 모국으로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이 고대 일본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 본토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동해안 지역을 함께 거느린 해상 제국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 <송서>와 <양서>의 '백제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했고, 백제도 역시 진평(주: 오늘날의 산동성), 요서의 2군을 차지하여 백제군을 두었다.'


임 승국 교수는 <남제서>의 백제전과 <자치통감> 등에서 중국 북위의 군대가 백제에게 패배당한 내용에 대해 역사적으로 난해한 사건으로 남아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황하 유역에 있었던 중국의 북위가 막강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서 한반도 서쪽에 있던 백제와 싸워 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으며 황해를 건너 해상에서 싸웠다는 내용도 전무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화사상과 식민사관이 가져온 병폐 중의 하나였다.

실상인즉 당시 백제는 중국의 <송서>와 <양서>에서 밝혔듯이 요서, 하북성, 산동성 등의 거대한 중국 동부 해안을 차지하여 멸망할 때까지 약 이백 오십 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 왼쪽에 위치했던 북위와 중국에서 패권다툼을 하여 이겼던 것이었다. 그리고 <남제서>의 '백제전'에서 보여주듯이 왜는 이 대제국 백제의 다섯 번째 속국이었던 것이다. 가령 오늘날도 미국은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고구려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전역에 걸친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수당 통일 중국이 일백만 대군을 잃은 범접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민족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가 외국 세력과 손잡고 동족 형제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친 것은 그 후 한민족이 겪게 된 ‘천년의 한’의 서막이었다.

따라서 역사에서 뼈져진 교훈을 얻은 한국은 오늘날 통일이 가시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이나 중국 같은 외국 세력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결연히 물리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도움에 대해 그 이상의 대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당나라가 신라를 도왔다는 구실로 고구려땅 대부분을 집어 삼켰듯이 말이다.


한일 고대사에 관해 일본 자체 내에서도 도쿄대의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국가의 기원과 정복 왕조>에서 '부여, 고구려계의 도래인인 진왕 등이 일본을 정복하고 일본 왕실의 조상이 되었다'고 발표하였고, 작가 시바료타로는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 문화 후기에 한국인에 의해 쌀농사 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 문화가 북규슈에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백제로부터 도래한 한인 이십 만 명이 일본 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라고 고백하였고, 사학자 쓰다는 한국의 압도적 영향을 부인하고 일본왕가를 독립적인 만세일가로 둔갑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본서기>에 대해 '<일본서기>는 일본 황실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야마토 관인에 의해 작위된 것'이라며 학자적 양심을 지켰다.


또 한국 사학계에서는 최 태영 박사가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에서 위에 상기한 여러 일본 사학자들을 언급한 후,


'일본 고사와 고전책은 한국 땅이 일본 민족의 발상지이며,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고, 일본의 왕가는 한국에서 건너간 망명자 또는 그 자손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결론지으며 그 실례로 오늘날 일본인의 약 1/4 정도가 한인계라는 서울 의대 서정선 교수의 유전자 연구 결과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근세까지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모든 문화를 수입하여 배운 처지였으며 오늘날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는 사실 조선 근세까지 일본인들을 지배한 대세였다. 예컨대, 코벨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10 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가 궁중인들 중에서 누가 한국 춤을 가장 잘 추는지 뽑는 행사였고, 임진왜란 이후인 17 세기에도 일본 덕천막부의 간청으로 파견된 조선 통신사 사절단에 대한 일본인들의 융숭한 대접과 비용 부담만 보아도 한류의 열풍을 실감할 수 있다.

즉, 조선의 관리, 학자, 문인, 의사, 화가, 음악가, 무술인, 곡예인 등 약 오백 명으로 구성된 이 사절단은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일본 명사들이 미리 모여 기다렸고, 선진 문화를 배우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으며 사절단의 수행원이 습작한 휴지까지도 가져다가 가보로 전했을 정도였다는 사실이 당시의 기록과 유물, 그림에 전해진다고 최 태영 박사는 말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주: 1868년의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 길을 걸음) 이후 이 모든 것을 부인하고 8 세기에 위조된 <일본서기>에 근거해 자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역사가 자신들보다 무려 수 천 년 이상 앞선 조상의 나라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제3대 조선 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교육시책'에서 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이는 미국인 사학자 존 코벨이 한국과 일본에서 두루 섭렵한 제삼자로서 객관성있게 지적한 사실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이 한국에 가한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 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수년 동안 나는 한국인 독자들에게 과거 한국의 예술과 문화적 영광으로 자부심을 되찾게 하고 영미의 독자들에게는 과거에 이룩된 수많은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되도록 애써왔다."


그래서 드디어 일본은 전무후무한 역사 조작에 들어갔다. <제헌국회사>와 문정창 저 <군국 일본 조선 강점 36년사>는 먼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취임하자, 1910년부터 1911년까지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 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해서 불태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 첫 번째 분서갱유 이후에도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몰수한 사료가 무려 4,9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화사상으로 물든 <삼국사기>와 승려 일연이 불교적 색채로 저술한 <삼국유사>같은 사서들만 위조된 <조선사> 편찬을 위해 남겨두었다. 이렇게 1차적으로 20만권의 책이 불태워졌고, 2차에는 4,900종 이상의 역사서들 특히 고대사가 적힌 책들이 일본 식민주의자들과 그들의 어용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진 대숙청 가운데서도, 소중화가 되길 바랐던 김 부식의 <삼국사기>와 단군 왕검 한 사람이 천년 이상을 다스렸다고 적은 <삼국유사>만이 남겨지게 된 이유는 적군이 정복한 땅에서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씨를 말리고 부녀자만 살려두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일제 총독부는 기본적으로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하던 짓을 한국의 역사 조작에서도 그대로 되풀이했던 것이다. 결국 일제와 어용 식민사학자들은 1922년부터 1938년까지 위조된 <조선사>를 완성했는데, 이 조선사편수회에는 친일파인 이 완용, 권 중현, 박 영효, 이 윤용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개입되었고, 이 와중에 일본인 이마니시와 한국인 이 병도 등이 '단군 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말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해방 후 이 병도 옹이 국립 서울대 국사학과를 장악하고 그가 키운 식민사학자들과 그 제자들이 한국 사학계를 주도하며 1종 국사 교과서를 편찬해온대 있었다. 지금 기성 사학계(주: 식민 사학자들을 지칭함), 특히 국사 교과서 고대사 편찬에 참여했었던 이들은 그들의 태두인 이 병도 옹이 죽기 전에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에 남긴 회개의 글을 알고 있는가.


"역대왕조에서는 (단군을)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나...제사가 끊어진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황 장엽 씨가 망명 신청을 하고 남한으로 넘어왔을 때, 미 언론은 미국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을 떠난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그것은 황 장엽 씨가 김 일성과 손잡고 바로 북한 50년 역사를 지탱해온 사상적 기반인 '주체 사상'을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주체 사상’은 철저하게 조작된 것이었음을 북한 주민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과 본인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였다.

일제와 손잡고 이 병도 옹이 위조했던 역사에 세뇌당한 사람들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과 본인만큼은 그 역사가 철저하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중심 인물로 단군 조선을 신화화하여 수 천 년의 한국 역사를 잘라냈고 한민족을 반도 안에 가두며 한족과 일본인보다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시킨 바로 그 식민 사관의 장본인이 남긴 유언 아닌 유언이었음을 오늘날 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기성 사학계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국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예전에 KBS에서 방송된 역사 특집 ‘환단고기’의 취재진은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술회하였다. 그것은 기성 사학계가 도무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고, 심지어 반협박성 팩스까지 KBS측으로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환단고기>를 지지하는 교수들과 재야 사학자들은 기꺼이 이 방송사의 인터뷰에 응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났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무언가 찔리는 바가 있을 때 사람들은 빛을 피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 <환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그 기성 사학자들은 무언가 비린내 나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이 방송사 제작진이 프로그램 자체를 만들기 힘들 정도로 취재 협조를 외면했던 것이다.

그들 중 한 교수는 전화 인터뷰만 간신히 응했는데 이런 발언을 하였다. “사람들이 우리를 식민 사학자라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에 그리스도께서 당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던가.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떠들어 댄다.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마태 23)”


기성 사학계를 대표하고 있는 그 교수는 본인 스스로 “우리는 식민 사학자”라고 실토하였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일제 식민 사학자들의 후손(후배들)이라는 자기 고백이요 마음 저변에서부터 우러나온 자기 증언이었던 것이다. 이들 모두는 마치 필자의 눈에 TV에서 보았던 북한의 한 백내장 환자와도 같았다.

2006년도 상반기에 네셔널 지오그래픽(The National Geographic) 주관으로 미국의 의료진들이 북한의 백내장 환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을 때, 그 중 한 환자가 의료진들이 아닌 김 일성 부자의 사진 앞에서 감사를 드렸고, 이를 보도한 방송사 아나운서는 그 젊은 환자가 영양 부족으로 백내장을 앓았던 것은 김 일성 부자의 착취 때문인데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한다고 조롱했는데, 식민 사학자들이 바로 그 가련한 환자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그들이 해방 후 지금까지 일제 식민 사관을 고수함으로써 한국을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역사적으로 철저히 짓밟았고, 지금도 미국을 위시한 세계 곳곳에서 한국과 한민족을 깎아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독도는 일본 땅,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조작하는 일본에게 또 한 번 농락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란 그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판이한 해석이 나온다. 더욱이 고대사일 경우는 조금씩 남아 있는 사료들과 유물들을 토대로 역사서를 쓰고 가르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중국은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자국의 입지를 세우고 2세들에게 자부심을 갖도록 교육시키는 반면, 한국은 밝혀진 역사마저도 신빙성 결여라는 한마디로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 그 ‘신빙성 결여’의 기준이란 그들 자신도 모를 정도로 뇌리에 깊숙이 새겨져버린, 왜곡되고 은폐된 중화사상과 식민사관의 역사 서술에 맞지 않다는 의미이다.

북한의 그 백내장 환자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의 세뇌 교육에 놀아났던 것을 깨달아야 하듯이, 기성 사학계도 한민족을 불행하게 만든 일제의 각본에 놀아났다는 점을 직시하고, 국사 교과서를 다시 쓰고 2세들에게 위대했던 한민족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가르치기를 많은 한국인들은 염원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와 외교통상부는 반드시 모두 조작된 일본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의 그릇됨과 피폐를 전 세계 언론과 학술지에 적극적으로 알림으로써 한민족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더 이상 한국을 일본의 주변 국가나 중국의 변방 국가로 잘못알고 무시하는 작태에 종지부를 찍기를 국민들은 고대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이 각처에서 홍보한 ‘위조된 역사와 폄하된 한민족’에 관해 잘못 배우고 이에 근거해 한국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각성과 노력으로 '천년의 한'이 정치, 외교,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분야에서 승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민족의 정기가 바로 서고 민족혼이 비상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한민족의 비상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유명한 말처럼 한민족은 위대했던 단군 조선과 고구려와 백제의 후손으로서 중국과 일본에게 천년 동안 잃었던 아시아의 패권과 영광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주도권과 영광을 회복하여, 다시 한 번 타고르가 노래했듯이 ‘동방의 빛’으로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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