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기독교의 비극적인 역사
평화주의적인 종교가 전쟁광 엘리트들에게 강탈당한 사연
음... 제가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재차 강조하지만, 사탄 숭배자도 아님) 개념글인 것 같아서 번역해서 올려봅니다. 원글 저자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인사인 듯):
Gary G. Kohls, MD, is a founding member of Every Church A Peace Church and is a member of a local non-denominational affiliate of ECAPC, the Community of the Third Way.
기독교의 비극적인 역사: 평화주의적인 종교가 전쟁광 엘리트들에게 강탈당한 사연
The Tragic Story of Christianity: How a Pacifist Religion Was Hijacked by Rabid Warmongering Elites
Though founded by a pacifist, Christianity has justified some of the most brutal slaughters in human history, but we may be able to recapture its peaceful essence.
평화주의자에 의해 설립된 기독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대량 학살을 정당화한 종교이기도 하다 - 하지만 기독교의 본질인 평화주의 사상을 되찾기에 아직 늦지는 않았다...
January 30, 2012
From time to time, I read about condemnations of religion coming from non-religious groups, especially concerning the all-too-common violence perpetrated in the name of religious gods. Indeed there is plenty to condemn.
비종교 단체들이 종교를 규탄하는 글들을 종종 읽게 된다 - 특히 이들 종교들이 숭배하고 있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욕하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종교를 욕할 이유는 많고도 많다.
Altogether too many religions sects of both major and minor religions, despite verbally professing a desire for peace and justice in the world, are actually pro-war, pro-homicide and pro-violence in practice (or they may be silent on the subject, which is, according to moral theology, the same as being pro-violence).
전 세계의 크고 작은 종교들이 입으로는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외치지만, 현실에서는 전쟁, 학살, 폭력에 동조하고 있다 (또는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윤리신학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폭력에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Obvious examples include those portions of the three major war-justifying religions of the world: fundamentalist Islam, fundamentalist Judaism and fundamentalist Christianity.
전쟁을 정당화하기로 유명한 대형 종교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 원리주의, 유대교 원리주의, 그리고 기독교 원리주의를 들 수 있다.
I use the term fundamentalist in the sense that the religious person, who ascribes to a fundamentalist point of view, believes, among other dogmatic belief, that their scriptures are inerrant and thus they can find passages in their holy books that justify homicidal violence against their perceived or fingered enemies, while simultaneously ignoring the numerous contradictory passages that forbid violence and homicide and instead prescribe love, hospitality, mercy,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필 자가 생각하는 "원리주의"의 개념은 이러하다 - 원리주의적 사고를 가진 신자는 성서(코란, 성경 등)의 내용이 100% 진실이며, 따라서 자신이 적대시하고 있는 "적"을 대상으로 한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절을 성서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여긴다. 동시에 이와 반대로 폭력과 살인을 금지하고, 사랑, 친절, 자비, 용서, 화해를 중요시하는 구절들은 무시한다.
Behind the scenes, of course, there are hidden elites - amoral, politically and financially motivated operatives who are embedded in these religious organizations - who, through the strength of their political power, can easily manipulate the followers into clamoring for war, not against their enemies, but rather against the enemies of the ruling elites: the politicians, the financiers and the other exploiters of natural resources.
종교의 배후에는 물론 정치적/경제적인 동기 때문에 종교에 깊숙이 침투한 비도덕적인 엘리트들이 있다. 이들(정치가, 자본가, 그리고 지구의 자원을 착취하는 기타 세력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공공의 적이 아니라, 엘리트들의 적을 향한 전쟁에 동조하도록 쉽게 분위기를 부추길 수 있다.
And so nonviolent portions of the various religions - and they are there, albeit often hidden and censored - can be erroneously painted with the same brush that justifiably condemns the hypocrisy and the violence.
그러다 보니 비폭력을 신봉하는 세력들(이들의 존재는 숨겨져 있거나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까지 위선과 폭력으로 뭉친 세력들과 함께 싸잡아 욕을 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
It is certainly true that the Catholic Church endorsed and/or orchestrated the genocide of the Crusades, the Inquisition and many wars of colonization and exploitation - with the origins of these atrocities in fundamentalist interpretations of "holy" scripture.
가톨릭 교회가 십자군 원정, 종교재판, 그리고 식민지 확보와 착취를 위한 수많은 전쟁을 묵인하거나 직접 지휘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 그리고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들의 명분은 "성서"의 원리주의적인 해석이었다.
But I do have to take exception to the blanket condemnation of the entirety of the religion by pointing out one reality - that the original form of Christianity, the church of the first generation after Jesus and even most of the first three centuries was a religion of pacifists, oppressed women, orphans, those forced into prostitution, despised people of all stripes and others of those called "the least."
하 지만 일방적으로 기독교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이 자리를 빌어 이에 대한 한 가지 현실적인 근거를 들고자 한다 - 초기 기독교, 즉 예수의 등장 이후 약 300년 동안 하나의 종교로 형성되어 온 초기 기독교의 주축은 평화주의자, 억압받고 있던 여성들, 고아들, 강요에 의해 몸을 팔아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다양한 계층의 "하층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Though this history has long since been forgotten or ignored, the earliest followers of Jesus rejected violence, tried to return good for evil, fed the hungry, did acts of mercy and unconditional love and tried to make friends out of their enemies (by caring for them, feeding them, praying for them and certainly refusing to kill them or pay for somebody else to kill them).
이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잊혀지고 무시되어 왔지만, 이 시기에 예수를 따르던 신도들은 폭력을 멀리하고, 악행을 선행으로 갚고, 굶주리는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자비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고, 적을 친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적들을 위해 헌신하고, 밥을 먹이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물론 적을 죽이거나, 적을 표적으로 한 청부살인 따위는 당연히 거부했다).
Practicality of Nonviolence
비폭력의 실용성
It was a hugely successful ethical stance to take. It could be described as an act of divine genius. And it made tremendous practical sense. One bit of evidence of the practicality of gospel nonviolence is the fact that in the first couple of centuries, no early Christian male ever acquired combat-induced PTSD or the soul-destruction that always accompanies that reality.
당 시 기독교의 이 같은 도덕적인 입장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가히 신성한 천재성의 발휘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훌륭했다. 비폭력을 신봉했던 초기 복음주의자들의 성공을 암시하는 한 가지 근거로, 초기 기독교 남성 중 전쟁으로 인한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시달리거나, PTSD에 따른 영혼의 파괴를 겪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And no early Christian ever felt depressed, ashamed, guilty or suicidal about killing, plundering or raping innocent unarmed women and children in wartime. The earliest Christians took seriously Jesus's clear command to love and befriend their enemies, and - despite brutal Roman persecutions - the religion survived; indeed, it thrived.
초 기 기독교인들은 또한 전쟁에서 무고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살해하고, 약탈하고, 강간하는 죄에 대해 우울해하고, 수치스러워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 충동을 일으킬 일도 없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적들도 사랑하고 가까이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로마 정부의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살아 남았다. 살아 남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크게 번성했다.
In fact, by 300 CE, it had grown into one of the largest religions in the empire, at which point the emperor Constantine (who was a worshipper of the Sun god until his deathbed baptism into the "faith") co-opted the church by stopping the persecutions and granting it power, property and prestige, thus seducing it into becoming the obedient and increasingly dependent state church whose master was the brutal, often satanic Roman Empire and its army generals.
기 원 후 300년이 될 무렵에는 로마 제국의 가장 큰 종교 중 하나로 성장했고, 이 무렵 콘스탄틴 황제(태양신을 숭배했다가 임종의 순간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함)는 기독교에 대한 기존의 탄압을 중단하고, 그 대신 권력, 재산, 위신을 교회에 안겨다 주었다. 이렇게 교회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복종을 강요했고, 사탄을 숭배하는 잔혹한 로마 제국과 로마 군의 장군들이 교회를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다.
Eventually - and logically - church leaders who were now dependent on the largesse and protection of the empire felt obliged to support it and its troops, pay homage to the emperor and send its young Christian men to violently defend the empire's borders against the fingered enemy. Or homicidally enlarge the empire if it was profitable for Rome or the Papal State to do so.
점차적으로, 제국의 후원과 보호에 의존해야 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젊은 크리스천 군인들을 황제에게 제공하여 목숨을 걸고 제국의 국경을 지키도록 했다. 이 젊은 크리스천 군인들은 물론 로마 또는 교회의 이익에 부합할 경우, 국토를 확장시키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나가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Just War Theory
"정당한 전쟁" 이론
St. Augustine wrote the first Christian Just War Theory (CJWT) in the late Fourth Century, making legitimate, in certain rare circumstances, killing by Christians in wartime, which had been long forbidden to the followers of Jesus.
4 세기 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초로 "기독교의 정당한 전쟁 이론(CJWT: Christian Just War Theory)"을 발표하여, 특수한 상황 하에서는 크리스천들도 전쟁에서 살인을 할 수 있도록 허용(정당화)했다 - 오래 전부터 예수의 신도들이 금기시해 왔던 불문율을 엎어버린 것이다.
Soon thereafter, Christianity became a religion of justified violence, contrary to the teachings and modeling of Jesus, and it remains that way until this very hour. However, it is generally agreed among Just War scholars that no war in the past 1,700 years has been conducted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Christian Just War Theory; that if the actual principles were applied to an impending war, they would lead Christians back to its original pacifist stance. And so the principles of the CJWT are not taught to the vast majority of Christians.
이 로부터 얼마 후,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 본보기와는 정 반대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정당한 전쟁" 이론 분야의 학자들은 지난 1,700년 동안 기독교가 일으킨 전쟁들 중, CJWT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른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즉,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창했던 원리가 정확하게 적용되었더라면, 기독교는 평화를 수호하는 초기의 모습대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이 CJWT의 원리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지 않다.
So, the blanket condemnation of homicidal religions, especially Christianity, is justified up to the point of acknowledging that the bulk of the Christian church, over the past 17 centuries, has ignored - or become apathetic to - the nonviolent teachings of Jesus (forgiveness 70 X 7, unending mercy, ministering to "the least of these" and the unconditional love of friend and enemy).
따 라서 기독교를 필두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종교들을 비난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올바른 일이되, 지난 1700년 동안 교회가 예수의 반폭력적인 가르침(70x7배로 용서하라, 끊임 없이 자비를 베풀어라, 최하 계층을 보살피고, 친구와 적의 구분 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을 외면해 왔다는 점도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Among the realities that keep the churches silent, of course, are the fear of losing the largesse of state-granted tax-exempt status and the threat that their pro-war, dues-paying members might object or leave if church leaders were to speak out prophetically about the ethics of the Sermon on the Mount and the incompatibility of nationalistic militarism with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교 회가 침묵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 중에는 물론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1) 정부로부터 부여 받은 면세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우려, 2) 예수의 산상수훈(Sermon of the Mount)에 대해 설교하고 군국주의와 예수의 가르침이 상호 모순된다는 점을 강조했을 경우, 열심히 헌금을 내고 있는 호전적인 신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But the Christianity of the first few centuries, when Christians refused to take up the sword, should not be condemned. Rather, critics of Christianity should start challenging the churches to go back to their roots where evil was not allowed to run rampant, but rather was aggressively and courageously resisted using the nonviolent methods of Jesus and his inspired disciples like Tolstoy, Gandhi, Dorothy Day, A. J. Muste, Martin Luther King, the Berrigan brothers, John Dear, Kathy Kelly and a multitude of other courageous prophetic voices.
하 지만 크리스천들이 손에 칼을 쥐기를 거부하던 시절의 초기 기독교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를 비판하는 자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악을 용납하지 않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Tolstoy, Ghandi, Dorothy Day, A.J.Muste, Martin Luther King, Berrigan 형제, John Dear, Kathy Kelly 등)이 가르치던 비폭력 사상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해야 한다.
The major motivation for the legendary civil disobedience of those modern-day prophets was their commitment to Jesus and the way he lived his life as pacifist (not passive) active resistor to evil.
현대판 선지자라 할 수 있는 이 전설적인 인사들의 가장 큰 동기부여는 평화로 악에 대항하자는 예수의 정신과 삶이었다.
The followers of that very real Jesus should be courageously "going to the streets" and saying "NO" wherever and whenever fear and hatred raise their ugly heads and try to provoke violence - no matter if it is coming from the US Congress or the Parliament in London, the Oval Office or # 10 Downing Street, in the Knesset or in the headquarters of Hamas, whether in Tehran or in Baghdad or in the Vatican or in Colorado Springs or in the bowels of the 700 Club - or from within the local parish.
예 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방법은 용기를 내어 "길거리로 나가서", 폭력을 유도하는 공포와 증오의 현장에 가서 "NO"를 외치는 것이다. 폭력을 부추기는 세력이 미국의 국회든, 영국의 의회든, 백악관 집무실이든, 영국의 총리실이든, 이스라엘의 의회든, 하마스의 본부든, 테란이든, 바그다드이든, 바티칸이든, Colorado Springs이든, 700 Club의 수뇌부이든, 아니면 지역 교구이든 말이다.
Jesus, a Nonviolent Leftist
예수, 비폭력적인 좌파
Jesus of the Gospels was an outspoken, nonviolent leftist who tried to reform his authoritarian conservative, dogmatic church but also refused to shut up with his call for justice for the down-trodden - even when his superiors threatened him with serious consequences if he didn't.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권위주의적인 보수층과 교주주의에 빠져 있던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동시에 상부로부터의 경고와 위협을 무시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정의를 외친 비폭력적인 좌파 인사였다.
The economic model of Jesus's early church was socialist, where the resources of the group were shared with the widow and orphans and others who didn't have enough. He would have stood, like the prophet he was, in solidarity with pacifists, socialists, antiwar activists and feminists and surely would have marched in nonviolent antiwar rallies.
초 기 기독교의 경제 모델은 집단의 자산을 미망인들과, 고아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사회주의 모델이었다. 선지자였던 예수는 오늘날의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반전 운동가, 남녀평등주의자와 뜻을 함께 했을 것이고, 반전을 촉구하는 시위대와 함께 행진도 했을 것이다.
Jesus was definitely NOT a punitive, pro-death penalty, pro-militarism conservative. His power came not from the sword but from the power of love.
예수는 가혹하고, 사형제도를 찬성하고, 군국주의를 찬성하는 보수 인사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의 권력은 검이 아니라, 사랑의 힘에서 나왔다.
Jesus would surely have condemned his church's complicity in the ethnic cleansing of Native Americans, the enslavement of black Africans and the segregationist, apartheid policies that were designed by various ruling elites to destroy ethnic or religious minorities.
예수는 특정 인종과 소수 종교를 말살하기 위해 엘리트들이 저지른 아메리카 원주민의 학살, 아프리카 흑인들의 노예화, 인종차별 정책과 이에 동조한 교회를 크게 꾸짖었을 것이다.
And if the leadership of his church had been found guilty of or just complicit with such acts, especially genocide, Jesus would surely have insisted on the formation of an independent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o respectfully hear the testimony of the victims, the survivors and the families of the survivors and allow those victims to face their victimizers. And then Jesus would have insisted upon his church repenting of the sins, whether committed by them or their forefathers.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런 만행(특히 인종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예수는 독립적인 진실규명 위원회를 구성하여 희생자, 생존자, 그리고 가족들의 증언을 듣고, 가해자들과 대질 심문을 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저지른 죄에 대해 회개할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까지 포함).
The power that Jesus utilized was epitomized by the willingness to do the right thing in the crisis situations even if it involved risks to life or liberty. Fear had no power over him or the martyrs of the early church. His power came out of the holy spirit of love, goodness, mercy and forgiveness and his certainty that, by refusing to do acts of violence, he was doing the will of God.
생 명과 자유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올바른 행동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예수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예수와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의 권력은 사랑, 선량함, 자비, 용서, 그리고 비폭력이 곧 하나님의 의지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The practicality of that radical stance resulted in the healing power that Jesus' disciples and apostles exhibited when they started implementing what Jesus had taught and modeled for them.
이처럼 급진적인 사상이 가져온 실용성을 통해 예수의 제자들과 신도들은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아픈 자들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치유의 능력까지 갖게 되었다.
War and violence emanates from an entirely different spirit than the spirit shown by the early church. That spirit is the spirit of the unholy, the spirit of the satanic, the spirit of Cain. The willingness to kill was the spirit that was strongly present in such historic figures as Hitler, Goebbels, Himmler, Eichmann, Stalin, Mussolini (all baptized into pro-war, Constantinian Christian churches).
반 면, 전쟁과 폭력은 초기 기독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정신에서 태어난다. 즉, 불경스러운 정신, 사탄의 정신, 카인(Cain)의 정신에서 악의 싹이 돋아나는 것이다. Hitler, Goebbels, Himmler, Eichmann, Stalin, Mussolini 등과 같은 역사적인 인사들은 살인 충동으로 충만해 있었다 (이들 모두 전쟁을 획책하는 콘스탄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That evil spirit was also present in many saber-rattling militarists throughout history - the most ruthless presidents, Secretaries of Defense, generals, dictators, legislators, gun-running businessmen and trained assassins that have ever lived - from the ancient low-tech, PTSD-afflicted Achilles, who killed up close and personal, looking into the eyes of his victims, to the ultra-modern, high-tech Air Force, Navy, Army and Marines that orchestrate, usually from safe distances, such atrocities as were perpetrated by Christian soldiers against innocent unarmed civilians at Nagasaki, Dresden, My Lai, Baghdad and Fallujah, to name just a few.
칼 을 휘두르기 좋아하는 역사의 수많은 군국주의자들(무자비했던 세계 각국의 대통령, 국방장관, 장군, 독재자, 법률가, 무기 밀매업자, 암살자)에게도 이와 같은 악령이 씌워져 있었다 - PTSD에 시달렸던 고대의 아킬레스(희생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람을 죽이던 시대)에서 최첨단 문명을 자랑하는 오늘날의 공군, 해군, 육군, 그리고 해병대(대부분의 경우 원거리에서 살인을 집행함)에 이르기까지… Nagasaki, Dresden, My Lai, Baghdad, Fallujah 등지에서 무고한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한 크리스천 병사들도…
A Challenge to the Church
교회에 요구한다
It seems to me that the Christian church must start teaching what Jesus taught about violence - that it is forbidden for those who wish to follow him - or our so-called "Christian" nation won't be able to stop the deadly suicidal/homicidal cycle of war that has been bankrupting America, both financially and morally, for decades.
교 회는 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부터 되새겨야 한다 -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지 않을 경우 우리의 "기독교" 국가는 수십 년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미국을 경제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는 전쟁과 살육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Jesus was absolutely right about the satanic nature of killing. The Golden Rule and his warning about the consequences of living by the sword speaks profound truth. According to just those two teachings, we can say that theologically and spiritually, the high-profile pro-war "Christians" that dominate the news are dead wrong.
살 인이 사탄의 역사라는 예수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다. 기독교의 황금률(Golden Rule)과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그의 명언도 우리에게 심오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이 두 가지 가르침만으로도, 오늘날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호전적인 "크리스천들"의 생각은 신학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크게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황금률 관련 링크
http://100.naver.com/100.nhn?docid=795377
That brand of Christianity definitely deserves condemnation. What has been criticized by Christianity's detractors as the norm for Christianity is not the Sermon-on-the-Mount Christianity of Jesus but rather the aberrant "Constantinian Christianity," a religion that espouses an anti-Christic, punitive theology that justifies killing fellow children of God in the name of the one who forbade it 2,000 years ago.
폭 력을 숭배하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비폭력 사상이 아니라, 반 그리스도적이고 2,000년 전에 살인을 금지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을 죽이고 있는 "콘스탄틴 기독교"를 욕하고 있는 것이다.
Church leaders need to repent of their support for (or their silence about) their nation's state-sponsored terrorism and start acting ethically, as if the Sermon on the Mount mattered.
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에서 후원하는 테러리즘에 동조(또는 침묵으로 일관한 행위)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받들어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
The Christian church in America MUST take the lead in this or it is doomed - as doomed as was Germany's dominant Constantinian Christianity of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whose pro-military, nationalist, racist, xenophobic, domination theology permitted torture, genocide and two brutal world wars that ultimately resulted in the suicide of German Christianity, not to mention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nation by its provoked enemies.
미국의 기독교가 반드시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 그러지 않을 경우 20세기 초에 독일을 지배했던 콘스탄틴 기독교처럼, 군국주의, 민족주의, 인종차별을 근간으로 한 왜곡된 신학으로 온갖 고문과 학살을 허용하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독일의 기독교를 궤멸시키고 국가 자체를 주저앉게 했던 전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One wonders what would have happened if every German and Russian and American church had been a real peace church, as the founder envisioned? The real question is, will we learn the lessons of history, or is it already too late?
만약 독일, 러시아, 미국의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행했더라면 이런 참극이 과연 벌어졌을까? 우리는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얻을 수 있을까? 너무 늦기 전에 가능할까?
Gary G. Kohls, MD, is a founding member of Every Church A Peace Church and is a member of a local non-denominational affiliate of ECAPC, the Community of the Third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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