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신화 ; 1만4천 ~ 5천 여년 전우주 행성의 세차운동때 지구별에 살아남은
우리 한 민족의 "마고" 와 유대민족의 "멜키지덱" 이 있었다는 사학자들의 ...
인류 최초의 우리나라 - " 마고지나 "
▶ 동이의 시조 마고
지금의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민족을 구성하게 된 태초의 인종은 역사의 여명기인 황하문명시대黃河文明時代에 동이東夷라는 이름으로 그 문명을 열어갔다. 동이라는 종족이 생겨나기 전에는 구려九黎가 있었고, 구려가 생겨나기 전에는 풍이風夷가 있었다. 풍이가 생겨나기 전에는 마고麻姑가 있었다.
마고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이전에서 12000년 전 사이의 어느 시대에 인류 최초의 문명인으로 우리 조상으로 사셨던 분이다. 마고가 사셨던 그 시대는 천문학자에 따르면, 지구에 기상재해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한 때였다. 당시에 지구가 당한 재해의 원인은 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 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세차운동에 의하여 지구에 사는 생물들이 멸망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이 마고와 멜키지덱이었다. 마고는 발해만에 있는 묘도군도에서 살아남았고, 멜키지덱은 유대의 땅에서 살아남았다.
마고에 대한 기록은 '부도지符都誌'에 실려 있고, 멜키지덱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창세기에 실려 있다.
지구의 생명이 멸망하기 전을 선천이라고 하고, 멸망하여 새로운 문명인이 출현했을 때를 후천이라고 한다. 세차운동의 실체를 몰랐던 당시에 마고는 자손에게 왜 지구가 쓰러져 선천과 후천이 생기는지 그 의혹을 밝히라고 하였고, 그가 떠나온 직녀성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를 함축한 말이 해혹복본解惑復本이다. 그가 그 징표로 제시한 것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긴 신체神體인 천부삼인天符三印이다. 천부삼인을 그대로 거울에 옮긴 것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明斗이다. 명두란 해日와 달月과 북두칠성斗이라는 뜻이다.
마고는 명두를 걸어두는 신당을 역사상 최초로 삼신산의 방장산에 지었는데, 이를 방장方丈이라고 하였고, 방장은 사방 한 장(丈, 10尺, 3.3m) 규모의 전각이었다. 방장이 있는 곳을 소도蘇塗 즉 솟대를 세우는 곳이라고 하였다. 굿을 할 때 쓰는 신대는 방장에 세운 솟대에서 나온 것이다.
무당이 굿을 하기 전에 굿상에 올리는 시루에 한지로 접은 가지 꽃을 붙인 신대를 꽂는 풍습은 마고시대의 방장에서 나온 것이다. 시루는 신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루가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았고,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산을 시루산(증산烝山, 임금님 산이라는 뜻이다)이라고 하였다.
안택굿에서 무당이 가지 꽃이 핀 신대를 꽂은 시루를 들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옛날에 상고시대에 임금이 제관이 되어 굿을 할 때 행했던 의식이 그대로 굿에 남아서 전해 오는 것이다.
안택이라는 말이 지금은 한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굿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상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사택 방위와 동사택 방위를 좌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마고가 세운 초국가 신시의 위치
신시는 의회와 시장의 기능만을 갖춘 나라로, 각 종족이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할 때만 나라로서 의사를 결정하고 시장을 여는 초국가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각 종족의 대표가 참석하는 의회를 화백이라고 하였고, 또한 문물을 배에 싣고 와서, 해변에 당幢(깃발)을 꽂아 놓고 서로 필요한 것을 찾아서 교환하는 것을 시장이라고 하였다.
각 종족의 대표가 삼신산 아래에 와서 함께 모여 하늘에 제를 지내고 시장을 열어 문물을 교환하였다.
요즈음 신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시의 의회기능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화백의회제도였고, 신시의 시장기능은 세금을 바치지 않는 문물교환과 세금을 바치는 문물교환의 2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말한다.
신시가 있었던 곳이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의 세 곳이다. 이 셋을 삼신산이라고 하였다. 사서에 봉래 방장 영주 세 섬은 발해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묘도군도廟島群島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설을 지상에 제일 처음 발표(愛石 1999. 9월호)한 분이 장동균씨九山 張東均(한국애석문화연구소장)이다. 장동균씨는 애석지에 실린 '신시본토기 3 신시의 발생지는 삼신산' 고조선의 뿌리 신시는 바다에서 탄생하였다'는 제목의 글에서 묘도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해도海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바다(편집자 주, 발해)를 건너가기 전에 봉래가 있고, 그 주변으로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등고선이 꾸불꾸불 보이는 곳이 언덕인데, 제일 높은 곳이 해발 439m의 주산이다. 최초로 등장하는 청구(靑丘, 필자 주, 역사서에 기록된 청구는 지금의 탁록이다.
청구라는 지명이 상나라 이후에 탁록으로 바뀌었다) 땅으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이 해도를 분석하기 위해서 수심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그려 넣은 것이다. (필자 주, 장동균씨는 해도에 색칠을 하였다)
진한 갈색은 육지이며, 살색에 가까운 색깔로 칠한 곳은 수심 15m 이하의 개벌이다. 청색은 15m이상으로 수심이 깊은 등주수도登州水道이며, 급류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된 패수浿水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징검다리 같은 발판을 디디고 건너면 수심 3.8m 밖에 안 되는 곶串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장산도가 나타난다. 갈색으로 표시된 곳이 물 밖으로 보이는 섬들이다.
태백산으로 추측이 되는 북장산도 옆에 탱글렁도가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제사를 올리던 장소로 추측이 되고, 탱글렁도 옆으로 청색으로 그려진 곳이 조천지朝天池로 추측되는 연못이다.
섬의 주변으로는 동쪽으로 깊은 바다로 보이는 장산수도長山水道가 있고, 이 곳에는 어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외의 바다는 대부분이 수심이 15m 이내의 낮은 곳이므로 5, 6천년 전에는 간조 때에 모두 물 밖으로 드러나는 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는 8m~10m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추측이다.
묘도군도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은 묘도廟島의 묘廟'사당이라는 문자와 탱그렁도의 탱그렁(하늘)이라는 문자이다. 묘자를 이 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보고, 탱그렁은 단군을 의미하는 문자로 본다.
한국문자학회에 따르면, 묘廟자는 신농국시대에 나라에서 전욱고양이 임명한 제관이었던 중여곤衆艅'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 데에서 생겨난 문자라고 한다. 탱그렁은 몽골족의 천공이나 천상계를 의미하는 탱그리(Tangri)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단군왕검은 중여곤과 혈연관계에 있었다.
묘도군도에서 하늘에 제를 지낸 사당을 의미하는 문자인 묘자가 발견이 되고, 단군을 의미하는 탱그렁이라는 문자가 발견된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그러나 신농국이 생기기 이전에, 신농국의 조상인 고시高矢를 농관農官으로 썼던 한웅천왕이 세운 신시국이 먼저 있었다는 점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묘도군도를 삼신산으로 보았을 때, 삼신산이 신시이므로, 한웅천왕이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국을 세웠다는 기록의 출처가 묘도군도에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묘도군도가 마고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삼신산으로 불린 신성한 땅 신시라고 하더라도 홍수 때마다 황하가 불어나 물에 잠기게 된다면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 주석 -
3) 세차운동이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 지구의 중심에서 보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동북쪽으로 23.5도 기울어져 팽이처럼 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북극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지구는 23.5도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23.5도까지 기우러진다. 이때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
황도북극에서 북극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보고, 반대편에 있는 직녀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본다. 도합 25000년 동안 지구 중력의 회전축은 동북쪽과 서북쪽을 왔다 갔다 한다.
이렇게 회전축의 방향이 변하는 때에 지구가 뒤집어져 천재지변이 일어나 생물이 멸망한다는 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말세나 상법시대이다. '종말론'의 근거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북극성과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는 것을 잡아 주므로 매번 뒤집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자연재해로 지구가 멸망했을 때, 당시에 태평양에 있었던 뮤와 대서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가 덮쳐오는 해일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때 살아남아서 우리 동이의 조상으로 기록된 분이 태평양 쪽에서는 마고이었고, 유태의 조상으로 기록된 분이 대서양 쪽에서는 멜키지덱이었다.
2000년을 시작하는 해의 춘분날인 3월 20일은 북극성을 향하고 있던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성을 향하여 중력의 회전축 이동을 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직녀성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일부 몰상식한 종교가들이 세차운동에 의하여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라고 예언한 날이 2000년 3월 20일이다. 그러나 이날 지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때를 선천先天이라고 하고,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때를 후천後天이라고 한다.
▶ 삼신산과 신시씨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조천석朝天石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조천석은 조천지朝天池(장동균씨는 탱그렁도와 북장산 사이에 있는 바다로 비정)에서 찾아낸 수석壽石이 아닌가 한다.
그가 조천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조천석을 방장산에서 방장에 모신 삼신의 신체로 보았던 때문일 것이다. 조천석을 수석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삼각산 형상의 수석을 삼신산의 모형인 석가산石假山으로 보거나, 삼신의 신체로 볼 수 있다.
수반水盤 가운데 놓여지는 산수경석의 유래가 원지苑池문화에서 발생하였음을 발견하였고, 지당 안에 둥근 섬을 만드는 이유가 삼신산 중에서 한 개의 산을 선택하여 선계仙界를 상징하는 뜻으로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런 삼신산문화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백제시대의 남궁지와 고구려시대의 안학궁의 진주지, 신라시대의 월지 등에 삼신산을 조성하였다는 설명이 있다. 원지 안에 조성하는 섬의 숫자가 세 개로 통일되지 않고, 부여 남궁지는 하나, 경지 월지는 다섯(세 개로 보이지만 실제는 다섯 개임), 평양 안학궁터의 진주지는 네 개로 되어 있다.
중국 진시황의 난지궁 연못에는 봉래산이 조성되었고, 한나라의 태액지에는 봉래, 방장, 영주 등의 삼신산이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장동균)
그렇다면 삼신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숙종 2년인 1675년에 저술한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北崖子는 '태시기太始記'와 '단군기檀君紀'에서 한웅천왕을 신시씨神市氏라고 밝힌다. 따라서 삼신산의 주인에 한웅천왕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천문학에서 찾아야 하는 마고의 신시개천
천문학에서는 우주의 역사를 2000년 단위로 끊어서 2000년마다 한 시대로 보고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사자궁시대, 거해궁시대, 음양궁시대, 금우궁시대, 백양궁시대, 쌍어궁시대, 보병궁시대, 마갈궁시대, 인마궁시대, 천갈궁시대, 천칭궁시대, 쌍여궁시대로 구분하는 12궁시대이다. 이 12궁시대를 천문도로 나타낸 것이 조디악 12궁도이다.
12궁시대 표에 보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14000 년 전~12000 년 전 이다. 이 시대는 사자궁시대로 12간지는 자(子)에 해당한다. 12간지의 자는 시작을 의미한다. 1년으로 치자면 동지에 해당한다. 동지는 겨울의 긴긴 밤을 끝내고 봄이 눈을 뜨는 때로서 신시의 역사를 시작함을 의미한다.
12궁시대는 12간지에서 나온 것으로, 사자궁시대는 자子(쥐)에, 거해궁시대는 해亥(돼지)에, 음양궁시대는 술戌(개)에, 금우궁시대는 유酉(닭)에, 백양궁시대는 신申(원숭이)에, 쌍어궁시대는 미未(양)에, 보명궁시대는 오午(말)에, 마갈궁시대는 사巳(뱀)에, 인마궁시대는 진辰(용)에, 천갈궁시대는 묘卯(토끼)에, 천칭궁시대는 인寅(호랑이)에, 쌍여궁시대는 축丑(소)에 해당한다.
이고선이 쓴 '심당전서心堂全書 단서대강檀書大綱'의 '삼황개국기三皇開國紀'에, 한인천제가 한국桓國을 세운 날을 360 갑자甲子(桓紀 9199년) 상달上月 3일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이 신시神市배달나라를 세운 날도 4321년 갑자(神市紀 5898년) 상달 3일 이라고 하였다.
단군조선의 전신인 단국檀國(청구)을 자오지 한웅(치우천왕)이 세운 날도 신시개천 1261년 갑자 상달 3일이라고 하였다.
단군왕검이 14세에 첫 장가를 든 나라인 웅심국熊心國은 한인천제의 대를 이어오는 나라였고, 단군왕검이 두 번째 장가든 나라인 단국檀國은 그의 비가 된 하백녀의 조부인 4)천일태제天一泰帝의 나라였다.(주, 이고선 선생의 '조선기'는 천일태제를 황조고皇祖考, 지일홍제를 황고皇考라고 하였으나, '한단고기'''부소보소'''금문신고'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하면, 천일태제는 단군왕검의 처조부, 지일홍제는 단군왕검의 장인으로 보아야 합당하다고 생각되어 그리한 것이다)
천일태제는 한국개천 5941년, 신시개천 1621년, 단국개천 361년 되는 해를 갑자개천원년(甲子開天元年) 상달 3일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로 하였다. 한국, 신시, 단국, 배달나라 모두가 왕조를 세운 시대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상달 3일을 나라를 세우는 날로 잡았다는 것은 상달이 달력에서 어느 해 어느 달인가를 볼 줄 아는 천문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각 나라가 나라를 세운 당시에는 자월子月(11월)을 세수歲首(첫 달)로 삼고, 동지 날을 원일元日(첫날)로 잡았다. 이를 보면 동짓달을 시작한 달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1월 상달(지금은 10월을 상달로 한다)을 여러 나라를 거쳐 오면서 수천 년 동안 지켜왔음에도 불구하고 마고의 개천년대와 개천일을 사서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인류역사의 시작을 12간지의 자(子)로 본다면, 이때에 해당하는 12궁 시대는 사자궁시대이다. 사자궁시대는 12000년 이전으로, 인류의 시조인 멜키지덱과 마고시대에 해당한다. 이렇게 역사의 시발을 사자궁시대에서 시작하면, 9199년 이전에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시대는 거해궁시대에 해당하고, 5898년 이전에 신시를 세운 한웅천왕의 시대는 금우궁시대에 해당하고, 4333년 이전에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의 시대는 백양궁시대에 해당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는 쌍어궁시대를 지나서 이제 막 보병궁시대로 들어섰으므로. 현재에서 과거로 12궁시대를 역추적하면 마고시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고시대의 언제 쯤 인류 최초로 세운 신시나라인 삼신나라가 세워졌을까' 그 해답은 한국 신시 조선 등 모든 나라가 상달 동짓날 나라를 세웠으므로, 갑자년 상달 초3일에서 찾아야 한다. 마고가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12000년 전 사람이라면, 그때 갑자년은 12000년 이전이어야 한다. 따라서 12000년 전 상달 초3일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설사 500년의 년차年差가 있다고 해도, 동짓달 동짓날에는 변동이 없으므로, 마고의 개천년대는 12000년 전~12500년 이전인 BC10000년전~BC10500년 이전 상달 3일로 잡아야 한다.
- 주석 -
4) 이고선의 '조선기'에는 단군왕검의 조부를 천일태제 부를 지일홍제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가 모계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부는 처조부로 부는 장인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고 본다.
▶ 인류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
마고가 신시를 세우고 그의 후손인 황궁과 유인과 한인과 한웅의 대를 이어 황제가 역사에 나오기 이전까지 중원 땅을 다스린 인종은 동이東夷 이외엔 어떤 인종도 없었다. 동이가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 문명을 동이문명東夷文明이라고 한다. 동이는 천문을 시작하였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제사를 통하여 인류문화사에 문화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동이문명의 탄생을 역易에서는 지화명이地火明夷라고 말한다. 지화명이란 '땅위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동이'라는 뜻이다. 지화가 바로 문명의 모태가 된다. 땅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이 일을 최초로 한 사람들이 동이이다.
동이의 지화地火가 사국四國을 밝힌다고 했다. 사국은 동이가 인류 최초로 세운 마고지나, 한국, 배달나라, 그리고 조선의 네 나라를 의미한다.
동이문명을.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황화문명이 우리의 조상이 인류 최초로 탄생시킨 동이문명임을 모르고 하화문명夏華文明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잘못 알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황하유역을 포기하고 한반도로 철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민족이동에 있었다. 이는 우리 조상이 하화족과 겨루어 오면서 사실상 진시황 초기에 조선이 멸망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 이후로 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지금의 중국 땅이라는 거대한 땅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 두 번째 이유는 동이가 마고지나'한국'배달나라'조선으로 나라의 이름이 바뀌면서 최초의 나라 이름인 마고지나를 보전保傳해 오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마고지나를 잊어버린 것이다.
▶ 배달나라의 원형 마고지나
이고선이 쓴 '조선기'는 단군왕검이 그의 장인인 지일홍제地一洪帝로부터 배달나라를 인수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때가 BC2333년이다. BC2311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다.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바꾸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불어나서 오가체제五加體制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부여가 건국되고, 이어서 고구려가 건국된다. 이들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선포한 고려가 건국된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면서 여러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하였지만, 단 하나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마고지나라는 나라 이름이었다. 마고지나란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 증거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고려에는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의 이름'과 '백성이 부르는 나라의 이름'이 따로 있었다. 고려는 외교문서에나 나오는 국가명칭이고, 백성이 부르는 진짜 나라 이름은 마고지나였다. 나라에서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부를 때, 백성은 고려라고 부르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고지나는 고려의 백성이 살고 싶어 했던 나라, 현실을 떠나서 찾아가고 싶어 했던 고려 백성의 유토피아였다.
왜, 고려엔 '백성이 부르는 나라 이름'과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 이름'이 각각 달랐을까' 이는 고려의 백성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부르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했던 데에서 비롯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려의 백성이 마고지나라고 부른 나라는 마고가 인류 최초로 세운 신시나라였다. 신시는 그 맥을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으로 이어 오고, 다음에 한웅천왕이 세운 배달나라의 체제로 자리 잡았다가,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으로 이어졌다.
진시황 8년에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백성들은 역사적인 유물이 된 마고지나를 놓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고지나는 언젠가 회복해야 할 고려 사람들의 근원상징根源象徵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원의 속국이었던 시대에, 원은 고려 땅에 정동성征東省을 두어 고려를 다스렸다. 고려의 임금은 종宗에서 왕王으로 격하되었고, 나라의 관리는 두 패로 갈라져 한 패는 고려에 붙고, 다른 한 패는 원에 붙었다.
원에 붙은 자들은 왕을 배반하고 고려를 배반하였다. '고려사' 세가 제 36 충혜왕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원나라에 붙어 종노릇을 하는 이윤'조익청'기철 등이 원나라로 가서 중서성에 왕이 불경스럽다고 모함하였다. 원 황제는 충혜왕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하려고 타적과 별신가 등 사신 6명을 고려로 보냈다.
왕은 백관들을 인솔하고 교외에 나가 원나라에서 도착한 사신들을 영접하였다. 돌연히 사신 타적과 내주 등이 왕을 발길로 차고 포박하였다. 백관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고, 칼에 맞거나 창에 맞은 자가 많았고 2명은 살해당하였다. 타적 등은 왕을 황급히 말에 태워 그곳을 빠져나갔다.
원에 가서 왕을 모함하였던 기철과 홍빈이 왕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던 원나라 사람 고룡보의 명을 받아 정동성의 업무를 보았다.
왕은 원나라에 압송되어, 계양현을 거쳐 악양현으로 귀양가다가 독살당했다. 이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다. 고려 백성들 사이에 아야요阿也謠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阿也 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야야 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
아아 마고의 나라 이제 떠나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고려의 백성이 고려를 고려라 하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하였다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계승된다는 것은 정체성에 내포되는 주술성도 함께 계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고려가 멸망한 고구려에서 나온 국호이므로, 고려가 언젠가는 당나라에게 멸망한 고구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고지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 제주는 삼신나라인 마고지나에서 나온 영주
제주도는 삼신산에서 건너간 섬이다. 그래서 옛 이름이 영주瀛洲이다. 영瀛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에서 갈라져 나간 산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영주산이 새끼를 쳐서 옛 영주가 된 것이다. 옛 영주가 지금의 제주이다.
영주산이 의미를 갖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이전에서 12000년 전 사이의 일이다. 동이의 조상인 마고가 그의 후손과 함께 삼신산에 세운 신시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롯한다.
그가 세운 마고신시 즉 마고의 나라인 마고지나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봉래와 발해만을 잇는 일직선상에 징검다리처럼 일곱 섬이 칠성의 형상으로 늘어서 있는 바다 한가운데였다. 이 곳 묘도군도에 영주로 비정할 수 있는 장산도張山島가 있다.
북쪽에 있는 섬을 북장산도라고 하고, 남쪽에 있는 섬을 남장산도라고 한다. 영주산은 남장산도나 북장산도 두 섬 가운데 한 섬에 있는 산이다. 우리가 남과 북을 북남이라고 하지 않고 남북이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서, 남쪽이 북쪽보다 우선하므로, 남쪽에 있는 남장산도를 영주로 보고자 한다.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인 것은 마고시대 사람들이 이 고장에 건너와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 제주의 옛 이름 두 가지 영주와 탐라
제주도의 옛 이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주이다. 영주는 마고가 다스리던 마고지나의 삼신산인 영주'방장'봉래의 세 산 중의 하나인 영주산에서 퍼져 나온 이름이다. 제주신화에 따르면 삼신이 이 고장의 시조인 고씨 양씨 부씨에게 시집을 옴으로써 비로소 영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신화에 나오는 삼신은 태초의 삼신인 마고 궁희 소희 세 분의 후손이다.
둘째는 탐라耽羅 또는 탐랑耽浪이다. 탐라는 북두칠성의 첫째별인 탐랑성貪狼星이 관장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주星主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성주가 마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마고가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탐랑성을 관장하는 마고가 성주가 된다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 자기의 직계 조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성주상星主床을 차리고 자기 조상과 함께 성주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여기에서 '직녀성이 탐랑성을 관장하는 별'이라는 데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므로, 마고가 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직녀성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천추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마고는 직녀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 ~12000년 이전에 지구 중력의 회전축의 중심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말이 된다.
▶ 신시를 떠나 영주를 세운 마고삼신
신시를 세워 동이의 최고 조상이 된 마고는 후손 중에서 여자 셋을 한 조組로 묶어서 사방으로 시집보냈다. 세 여자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를 마고라고 하고, 두 여자는 각각 궁희와 소희라고 하였다. 이들은 삼신의 상징이고 삼신의 형상이었다.
시집을 갈 마고삼신은 방장에서 삼신제三神祭를 지냈다. 그들이 시집가는 곳에 가지고 가는 것은 오곡의 종자와 삼신의 신표인 천부삼인이었다.
이들은 신시에서 파견한 사자使者를 앞세워 새로운 땅으로 건너갔다. 이는 해양문화의 이동을 의미했다. 그들이 건너간 땅을 영주라고 불렀다.
제주도의 토착어 중에 바리라는 말이 있다. 바리는 발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자로 발發이라고 쓴다. 발은 곧 신神을 신고 걷는 발이다. 즉 하나님을 싣고 다니는 발족發足이라는 말이다. 관자管子는 발發은 동이라고 하였다. 신농神農시대의 문자인 금문金文으로는 신은 곤ㅣ자로 쓰고, 발자는 (주, D자와 유사하게 생겼음)로 쓴다. 신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리라는 말은 우리 민족이 동이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상고시대에 발이 큰 사람을 대인大人이라고 하였다. 대인은 역易에 보면, 하늘에서는 달月을 뜻한다. 달은 여자와 땅을 의미한다. 여자와 땅은 지모신地母神이 된다. 영주에서 지모신은 마고삼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과정을 신화화神話化하여 기록한 것이 제주도의 창세역사創世歷史이다. 마고삼신을 받아들인 영주에서는 마고의 후손인 삼신을 보내주신 진짜 마고를 기억하기 위하여 추모제를 지낸다. 이 제사가 성주星主제사이다.
성주제사는 동이의 조상인 마고에게 드리는 제사이다. 이 제사의 유습이 제주도에는 그대로 남아 전해 온다. 지금도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따로 성주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 BC 14000 - BC 12000은 솟대에 앉은 오리의 시작
성주는 천문에서는 직녀성이다. 직녀성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 이전에는 지구 중력의 회전축을 관장하던 북극성의 지위에 있었던 별이다. 그러니까 쌍여궁雙女宮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직녀성이 북극성의 임무를 수행하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쌍여雙女라는 문자를 분석해 보면, 쌍雙자는 새추'자가 겹쳐 있고, 밑에는 또우又자가 있다. 이 말은 새가 두 마리가 있는데, 여기에 또 한 마리가 더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따라서 새 세 마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도 이 새 세 마리를 마을 입구에 세운 솟대에서 볼 수 있다. 솟대에 앉은 새 세 마리는 두 마리 새에게 한 마리 새가 합류한 모양의 구도를 가지고 있다.
문자로는 쌍여雙女를 의미하고, 이들은 영등바람을 타고 날아온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오리가 된다. 따라서 쌍여궁시대를 바람을 타고 몰려오는 오리의 시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솟대에 앉은 새들이 모두 오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때 삼신을 상징하는 새가 오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리를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새로 정했던 것일까' 그것은 마고삼신이 바람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다는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음력 2월에 영등제를 지내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영등瀛登祭는 영등바람을 맞이하는 바람마지제사이다. 영등바람이 불어와야만 마고가 삼신산에서 영등바람에 실어 보낸 오곡의 종자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다가 눈을 틔기 때문이었다. 바람마지제사가 끝나면 곧이어 나라의 모든 행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춘분마지로 들어간다.
▶ 쌍여궁시대에 동이가 천문학을 시작해
천문에서 쌍여궁시대는 남방주작칠수南方朱雀七宿의 기운이 관장하던 시대였다. 익수翼宿에서 시작하여, 진수軫宿를 거쳐서, 동방창룡칠수의 첫 별자리인 각수角宿에게로 기운이 넘어가던 시대였다. 이 때가 동이라는 민족이 생겨나고, 동이의 문명이 태동하던 시대였음을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마고의 상징을 오리로 썼던 또 다른 이유는 오리를 의미하는 압鴨자를 풀어 보면 거기에서 해답이 나온다. 압鴨자를 파자破字하면 갑甲자와 조鳥자로 나뉜다. 갑조甲鳥는 '세상에 처음 나온 새'라는 의미가 있다. 세상에 새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오리가 제일 먼저 나온 새'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인류의 조상이 되는 마고와 상통하는 말이다. 세상에 나온 '첫 번째 사람'과 '첫 번째 나온 새'가 사람과 새의 시조始祖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고가 '시집가는 마고삼신'을 수행하는 사자에게 오리를 들려 보내면, 오리가 마고의 징표로 통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솟대에 앉힌 세 마리의 오리에는 그 마을 사람들이 마고삼신이 시집가서 낳은 마고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생긴다. 오리가 일종의 족표族表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인류 최초로 출현한 마고를 조상으로 모시는 종족의 족표인 토템이 오리가 되는 것이다. 동쪽으로 날아간 세 마리의 오리를 청동靑東오리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세상에 첫 번으로 나타난 새가 오리였다면, 하늘에 떠 있는 남방주작칠수도 오리일 가능성이 있고, 이들 일곱 별 중에서 날개에 해당하는 익수도 오리의 날개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주작이 오리가 아닌 장닭의 변형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바다로 뻗어 나가려고 했던 마고삼신의 시대를 마감하고, 육지에서 활동을 시작한 다음 세대 사람들, 일테면 해를 숭배하며 해를 종족의 상징물로 쓰기 시작한 한인'한웅'단군 계열과 한인'고시'신농'유망'희화'단군 계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닭을 해마지의 상징으로 보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 마고삼신의 나라 영주 탐라
우리나라의 전국 방방곡곡엔 신화나 설화나 무가나 지명에 마고삼신이 남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흔적은 다른 고장에선 대부분 깊이 파고 들어가야 찾아 낼 수 있으나,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다른 고장에 남아 있는 것과 달리 기록과 구전으로 나타난 것들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이라 쉽게 찾아 진다.
먼저 역사기록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地, 단종端宗 2년 1454년 간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탐라현耽羅縣은 제주도 남쪽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지금 진산鎭山: 한라산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니, 이것이 그 땅이다)
맏이를 양을라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라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 빛 진흙으로 봉인한 목함木函이 동해빈東海濱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돌 함을 여니 쪽빛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망아지'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해西海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계셔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으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가 사시복지射矢卜地하니, 양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했으며, 부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세종 32년(1450년)에 간행한 '영주지瀛洲誌'에 실린 삼성신화三姓神話가 있다. 실린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에 실린 것과 거의 같으나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① 탐라를 영주라고 하였다.
② 세 처녀와 사자가 온 나라 일본국을 동해벽랑국東海碧浪國이라고 하였다.
제주대학의 현용준玄容駿 교수의 '무속신화와 문헌신화'에 자세한 연구가 실려 있으므로, 중복되는 부분은 피하기로 하고, 마고삼신과 관련하여 아직 연구가 안된 부분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국호國號에 관한 것이다. 탐라는 북극성인 탐랑성에서 온 것이고,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탐라는 인류가 아직 대량으로 출현하지 않고 소수의 인종만 살았던 선천시대先天時代부터 지명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주는 동이의 시조인 마고가 삼신산에 신시를 열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이름이므로, 후천시대後天時代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탐라와 영주는 천문에서 선천개천이냐, 후천개천이냐 하는 시대적 차이를 보이는 이름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동해벽랑국은 바다 한가운데에 기암절벽으로 서있는 섬으로서 마고가 살고 있는 산신의 나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해빈東海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동해바다의 어느 해안가'로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되고,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고선李固善이 쓴 '조선기朝鮮紀'에 이와 똑같은 지명이 이미 단군조선시대에 단군왕검이 도읍한 발해만 쪽에 나온다. 평제平帝 구을丘乙 단군 때인 병인 5년(BC2092)여름에 신독身毒(지금의 인도)국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지금의 황해)빈에 닿았다는 기록이다.
세 번째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이라고 한 대목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고기'가 '고려사'에서 영주와 탐라의 출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고기'는 옛 사서史書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고기'의 기록을 옮겨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당시 기록자들이 '고려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저지른 붓장난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기'에 을나乙那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之那가 을나乙那로 곡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 충혜왕조에, 고려의 옛 이름을 마고지나라고 하였다. 마고의 옛 나라라는 뜻이다. 나那는 나라를 의미하므로, 고씨 양씨 부씨가 탐라영주의 시조인 만큼 이들의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을나乙那를 지나之那로 고쳐서, 그 뜻을 나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로 읽으면 고을나는 고지나가 되고, 양을나는 양지나가 되고, 부을나는 부지나가 된다.
네 번째는, 목함과 석함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함函의 의미는 문자로 해석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해'가 들어 있는 상자이다. 또한 목함은 '동쪽으로 가는 배'를 상징하고, 석함은 '서쪽에서 실려 온 귀중한 물건'을 상징한다.
다섯 번째는, 세 신인과 세 처녀의 의미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삼이라는 숫자는 이들이 마고삼신의 자식임을 상징한다.
세 신인은 모흥혈毛興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모毛는 '털이 흰 소의 쇠꼬리'인 모'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모는 무당이 모무'舞(쇠꼬리 춤)를 출 때 들고 추는 쇠꼬리이다. 혈穴은 모'를 꽂는 구멍이다. 흥興은 모를 구멍에 꽂아 일으켜 세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상 말한 것을 정리하면, 모흥혈은 춘분마지굿을 할 때 모를 꽂아 세우는 구멍이다. 그러므로 고'양'부 세 사람이 모를 꽂아 놓고 쇠꼬리 춤을 춘 곳이 모흥혈이 되는 것이다.
▶ 마고시대엔 중원에 오로지 동이만 있었다
마고에서부터 시작한 종족활동이 단군시대로 이어질 때까지 이 시대엔 중원 땅에 인류의 역사를 시작한 종족으로 오로지 동이 이외엔 어떠한 종족도 생겨나지 않았다.
황제가 동이에게 반란을 일으켜 홀로 서기를 시작하면서 후대에 와서 하화족으로 명명된 황제계열 사람들의 종족 이탈이 시작되고 있었을 뿐이다.
천문으로 보면, 동이의 시작은 익수에서 비롯하였다. 익수는 하늘을 나는 많은 날개를 가진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날개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만큼 기운차게 비상한다는 뜻일 것이다. 익수 하나를 보아도 사방으로 뻗어나가려고 했던 당시 사람들의 기상을 추리 할 수 있다. 12진辰 중에서 진辰과 사巳가 자리에 익수가 자리 잡고 있다.
진과 사는 기氣를 나타내는 문자이다. 진은 하늘의 기운을 나타내고, 사는 땅의 기운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늘과 땅에서 공히 동이가 뻗어나가려는 기운이 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마고삼신의 기운이 맹렬하게 태동하고 있었음을 천문도가 보여주고 있다.
이 기운의 방위는 손방巽方이 된다. 손방은 장녀長女의 방위이다. 마고삼신이 동이의 조상으로서 자리 잡은 방위가 손방이고, 마고의 두 딸인 궁희와 소희도 손방에 배속된다. 손巽자엔 땅의 기운이 두 가지가 공존한다. 땅의 음기陰氣가 하늘의 양기陽氣를 만나서 함께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자가 원형이 존재한다면 언제쯤 만들어진 문자로 볼 수 있을까' 그 시대를 마고삼신의 시대로 소급해 가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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