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0 편 / 천 국 [하늘나라 ]
3월 11일 토요일 오후, 예수께서는 펠라에서의 마지막 설교를 하셨다. 이 설교는 그의 대중 사명활동 중에서 특기할만한 것이었는데, 천국에 관한 전체적이면서도 완벽한 논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증여 임무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천국(天國, 하늘나라)"이라는 단어들의 의미와 중요성을 제자들은 물론 사도들도 마음속에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셨다.
천국이라는 그 단어가 이 땅의 왕국들과 현세적인 정부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로부터 충분히 분리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현세적인 왕의 개념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오랫동안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한 세대 동안에 그것을 몰아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키워온 왕국의 개념을 처음에는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않으셨다.
이 안식일 오후에 주(主)는 천국에 관한 가르침을 명백하게 설명하고자 하셨으며 여러 가지 관점에서 그 문제를 다루시면서, 사용되고 있는 그 말의 다른 여러 관념들을 분명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전에 예수께서 하셨던 많은 말씀들을 첨부함으로써, 그리고 이 날 저녁에 토론하는 동안 오직 사도들에게만 주셨던 주의사항들을 삽입함으로써 그 설교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후기 기독교 교회와 관련되는, 그 후에 일어난 천국 개념의 외적 현상에 관해서도 언급을 하려고 한다.
1. 천국의 개념들
예수의 설교를 상술(詳述)함에 있어서, 히브리 경전에는 천국에 대한 이원적(二元的)인 개념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현재의 실체로서, 그리고
2. 미래의 희망으로서 - 메시야가 나타남으로써 그 나라가 충만하게 실현될 때. 이것이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천국 개념이다.
아주 초기부터 예수와 사도들은 이 개념들을 둘 모두 가르쳤다. 염두에 두어야만 될 천국에 대한 다른 두 개념들이 있는,
3. 초자연적으로 기원(起源)되고 기적적으로 세워진 범-세계적 초월적 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후기 개념.
4. 세상이 끝날 때 선이 악을 이기고 성취하는 신성한 왕국이 설립될 것을 꿈꾸도록 하는 페르시아의 가르침들.
예수께서 이 땅에 출현하시기 직전에, 유대인들은 천국에 대한 이 개념들을 뒤섞어 버리고 혼돈을 일으켜서,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 하느님의 권세가 온 땅을 지배하는 영원한 시대, 새로운 세상, 모든 인류가 야훼를 경배하는 시대를 설립하기 위하여 오실 메시야에 대한 종말론적 개념에 사로잡혔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한 이 개념들의 이용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생생하고 절정에 도달한 유대인 그리고 페르시아 종교의 유산을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들을 거쳐 오면서, 잘 납득되기도 하고 잘못 납득되기도 한 천국의 의미는 네 가지의 독특한 개념들을 포옹한다.
1. 유대인들의 개념.
2. 페르시아인 들의 개념
3. 예수의 개인적-경험 개념 - "너희 안에 있는 천국"
4. 기독교 설립자(設立者)들과 전파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찾아낸, 합성되고 혼동된 개념들.
예수께서는 대중들을 가르치실 때에는 "천국(kingdom)"에 대해 시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여러 개념들을 제시하셨지만, 사도들을 가르치실 때에는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있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경험을 포함하셨다. 천국을 언급하실 때, 그의 마지막 말씀은 항상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천국"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세기 동안 혼동을 일으켜온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들에 기인한다.
1. 천국"의 개념을 예수와 그의 사도들에 의하여 다양한 진보적 과정을 거쳐 온 것으로 관찰함으로써 생긴 혼동.
2. 초기 기독교가 유대인의 토양으로부터 이방인의 토양으로 이주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어쩔 수 없이 발생된 혼동.
3. 기독교가 예수의 품성에 대한 중심 개념에 관하여 형태화된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에 내재되어 있었던 혼동 천국 복음이 점점 더 그에 관한 종교로 바뀌어 갔다.
2. 천국에 대한 예수의 개념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이라는 진리와 사람의 형제신분이라는 상호관계 되는 사실의 이원적(二元的) 개념에 중심을 둘뿐만 아니라, 그 개념에서 천국이 출발해야만 한다는 것을 주(主)는 명확하게 하셨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람이 오랫동안 구속 받아온 동물적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동시에 다음과 같은 영적 자유를 누리는 새 생명의 자질을 갖추도록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선포하셨다:
1. 새로운 용기와 증진된 영적 힘 소유. 천국 복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며, 감히 영원한 삶을 바라보도록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2.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가난한 자들에게도 새로운 신뢰와 참된 위안의 메시지를 가져다주었다.
3. 그것은 원래 도덕적 가치관의 새로운 기준이었으며, 인간의 행실을 재는 윤리적 척도였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결과적 새 계층의 이상을 표현한다.
4.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비된 영적인 것의 탁월성을 가르쳤으며, 영적인 실체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초인간적 이상들을 찬양하였다.
5. 이 새로운 복음은 영적 달성을 삶의 참된 목적으로 세웠다. 인간의 삶은 도덕적 가치와 신성한 존엄성을 새로운 자질로 받았다.
6. 예수께서는 영원한 실체들이 이 땅에서의 의로운 분투에 대한 결과(보상)라고 가르치셨다. 이 땅에서 사람의 필사자 체류가 고귀한 운명을 인지(認知)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들을 획득하였다.
7. 인간의 구원은, 구원된 하느님의 아들들이 영원히 경배 드리는 미래의 운명 속에서 실현되고 완성될, 멀리까지 미치는 신성한 목적에 대한 계시라고, 새 복음이 확실하게 제시하였다.
이 가르침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천국에 대한, 확대된 개념을 포함한다. 이 위대한 개념은 세례 요한의 초보적이면서 혼동된 천국에 대한 가르침들 속에는 거의 포옹될 수 없었다.
사도들은 천국에 대한 주(主)의 말씀들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그 후의 왜곡들은, 신약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그 때 잠시 동안만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과 그가 곧 돌아오셔서 힘과 영광 속에서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는 그 신앙 -그가 육신 속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이 집착하였던 바로 그러한 개념- 에 의해, 복음을 기록한 사람들의 개념이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돌아오신다는 개념을 천국의 설립과 결부시키지 않으셨다. 예수의 가르침과 "새 시대"가 일치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여러 세기가 지나갔다.
이 설교를 통하여 크게 노력하신 것은 천국에 대한 개념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개념의 이상(理想)으로 바꾸시려는 시도였다. 주(主)는 따르는 자들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 이루어 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오랫동안 가르치셨으며 이 때 그는 그들에게 보다 실제적인 동의어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대신에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설득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셨다.
예수께서는 왕국, 왕, 그리고 백성들이라는 개념 대신에, 하늘에 있는 가족,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기쁘게 봉사하기에 바쁘며 아버지 하느님께 장엄하면 서도 지능적으로 경배 드리기에 바쁜 자유롭게 된 하느님의 아들들의 개념을 몹시 원하셨다.
사도들은 이 때까지도 천국에 대하여 이중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간주하기를:
1.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그 다음에는 참된 신자들의 가슴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써, 그리고
2. 인종적인 또는 세속적인 현상들에 대한 문제로써; 천국은 장래에, 앞으로 기대되는 어떤 것이라는.
그들은 마치 가루 속의 누룩이나 자라나는 겨자씨처럼,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다가오는 왕국을 기대하였다. 인종적인 또는 세속적인 인식 속에서 다가오는 그 왕국은 갑자기 그리고 호화로운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보다 높은 영적 삶의 본질특성을 실현하는 그들의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과; 영적으로 경험하는 이 실체들은 신성한 확실성과 영원한 위엄의 보다 높은 차원으로 점진적으로 바뀌어간다는 것을 그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이 날 오후에 주(主)는 천국의 이중적인 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을 묘사하심으로써 명백하게 가르치셨다:
첫째,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숭고한 욕구, 사람이 진보된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좋은 열매를 맺는 이타적인 사랑이다.
둘째, 하늘에서의 하느님의 나라는, 믿는 필사자들의 목표인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완전하게 된 곳이며, 하느님의 뜻이 더욱 거룩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 나라에 바로 들어간다고 가르치셨다. 여러 강화들 속에서 그는 그 나라에 신앙으로 들어가기 위한 두 가지 기본 조건을 가르치셨는데:
1. 신앙, 성실성. 어린아이처럼 올 것, 아들관계의 증여를 하나의 선물로 받을 것. 의심 없이, 그리고 아버지의 지혜에 대한 참된 신뢰와 충만한 확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복종할 것.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나라에 들어올 것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열려 있고,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
2. 진리를 갈망함. 의를 향하여 목이 마름, 마음을 바꿈,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동기를 획득함.
예수께서는 죄가 불완전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하지 못하는 의지에 의해 지배된 고의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죄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과 우리 이웃을 용서해 주는 행동에 의해 그러한 용서를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유효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네가 육신 안에서 네 형제를 용서할 때 그로서 너는, 너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의 그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터전을 네 자신의 혼속에 창조한다.
사도 요한이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때까지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핍박의 장본인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개념에 너무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그 말을 거의 버릴 지경이 되었었다. 사도 요한은 "영원한 삶"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생명의 나라"라고 자주 표현하셨다. 또한 "너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서도 자주 언급하셨다. 그러한 경험을 "아버지 하느님과의 가족적인 친교"라고 표현하신 적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왕국이라는 말 대신에 다른 많은 단어를 사용하려 하셨지만 번번이 실패하셨다. 무엇보다도 그가 사용하셨던 것은, 하느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친구들, 믿는 자들의 친교, 사람의 형제신분, 아버지의 양 떼, 하느님의 자녀들, 신도들의 친교, 아버지의 돌보심, 자유롭게 된 하느님의 아들들.
그러나 그는 왕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으셨다. 사교적이고 제도적인 측면들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구체화 되어간 기독교 교회에게 인계되면서 왕국에 대한 이 개념이 영원한 삶에 대한 동경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로마 집단에 의해 비로소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50년 이상이 지난 후였다.
3. 의(義)와의 관계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어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상 앞에서 그토록 자만함으로 과시하려고 하였던 노예근성의 행위들로 인한 그 의를 능가할 수 있는 의를 신앙으로 획득해야만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주려고 항상 노력하셨다.
예수께서는 신앙,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이 천국 문에 들어가는 열쇠라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문으로 들어간 모든 믿는 아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튼튼한 아들로 충만하게 장성한 모습으로 자라가기 위하여 올라가야 할 진보적인 정의(正義)의 계단들이 있다는 것도 가르치셨다.
천국의 의가 달성되었음이 계시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방법을 감안한 경우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가족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값이지만 용서는 너희의 신앙을 들어오는 값으로 받았다는 하느님의 행동이다. 그리고 천국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경험을 내포하며, 아래와 같은 네 가지 단계, 내적인 정의(正義)의 천국 계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1. 하느님의 용서는 사람이 자기 이웃을 용서하는 한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가능하며 개인적으로 경험 되어지는 것이다
2. 사람은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3.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최고의 윤리이다.
4. 그렇게 되면, 도덕적인 행실, 진실 된 의는 그러한 사랑의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진실하고 내적인 종교는 반드시 그리고 점점 더, 사회적인 봉사의 실제적 방법들을 통하여 그 자신을 증거 하는 경향이 명백하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사랑의 봉사로 수고하도록 유도하는 살아있는 종교를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종교의 자리를 윤리로 대치시키지 않으셨다. 종교를 원인으로 윤리를 결과로 가르치셨다.
어떤 행동의 의는 그 동기에 의해 측정되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은 선의 형태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도덕과 윤리에 그렇게 관여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 자체를 확실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만큼 사람에게 외적으로 사랑의 봉사를 하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내적이며 영적인 친교에만 그는 전적으로 관여하셨다. 천국의 종교는 누구도 자신 속에 담을 수 없는 참된 개인적 경험이며 믿는 자들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그 자각이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계율, 형제신분을 증진시키고 확대시키려고 노력하는 형제와 자매들의 봉사를 어쩔 수 없이 실행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천국의 종교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며 그 열매, 결과는 가족적이며 사회적이다. 예수께서는 공동체에 대비하여 개인의 신성함을 항상 강조하셨다. 그러나 주(主)는 사람의 성격이 이타적인 봉사를 통하여 개발된다는 것과, 사람이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도덕적 본성을 나타낸다는 것도 또한 감지하셨다.
천국이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심으로써, 개인을 강조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낡은 사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셨고 그 안에서 참된 사회적 정의(正義)의 새로운 체제로 인도하셨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계층을 세상이 잘 알지 못한 것은 천국 복음의 원칙들을 실천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탁월한 이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게 될 때, 그것은 사회적 물질적 상태가 증진되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증진된 인간관계들과 진보된 영적 달성을 이루면서 다가오는 시대의 특징인, 증진되고 확대된 영적 가치들의 영광 속에서도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4. 천국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한 정확한 정의(正義)를 주신 적이 없다. 한 번은 천국의 한 위상을 강론하시고, 또 다른 때에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하느님 통치하의 형제신분에 대한 다른 측면을 토의하고자 하셨다. 이 안식일 오후 설교 도중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천국의 다섯 가지 상태 또는 신(新)시대에 대하여 언급하셨는데:
1. 믿는 자 각 개인이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하는 영적인 삶의 개인적이고 내적인 경험.
2. 복음을 믿는 자들의 확대되는 형제신분, 믿는 자들 각 개인의 가슴속에서 하느님의 영이 통치함으로써 발생되는 증진된 도덕과 촉진된 윤리의 사회적인 양상들.
3. 이 땅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의 초인간적 형제신분, 하느님의 초인간적인 천국.
4. 하느님의 뜻이 더욱 완전하게 성취될 전망, 증진된 영적 생활 -사람의 다음 시대- 과 관련된 새로운 사회적 계층의 도래를 향한 전진.
5. 충만한 천국, 장차 이 땅에 도래할 빛과 생명의 영적인 시대.
그런 까닭에 우리는 주(主)가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이 다섯 가지 상태 중에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주(主)의 가르침을 검토해야 한다. 점차적으로 바뀌는 사람 의지의 이러한 진행과 그리고 그에 따라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미가엘과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점차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인간의 진화, 사회와 다른 여러 가지의 전 과정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주(主)는 천국 복음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관점을 강조하셨다:
1. 각 개인의 탁월성.
2. 사람의 경험 속에서 결정 요소로서의 의지.
3. 하느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
4. 사랑으로 하는 사람의 봉사(奉仕)에 대한 숭고한 만족들.
5. 품성 속에서 물질적인 것에 대한 영적인 것의 초월성.
이 세상은 천국에 대하여 예수께서 원칙으로 세우신 이 역동적 개념들과 신성한 관념들을 심각하게 또는 진지하게 또는 정직하게 살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너희들은 유란시아에서 천국에 대한 개념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것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된다. 진보적인 진화의 계층은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 둘 모두에서 갑자기 그리고 생각지 않았던 주기적 변화들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라. 육신화 하신 아들로서 증여된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그러한 미지의 기대치 않았던 사건이었다. 천국의 시대적인 징후를 찾고자 할 때, 너희들 자신의 혼 안에 이루어지도록 영향을 주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지 말라.
예수께서 비록 천국의 한 상태를 미래적인 것으로 언급하시고, 많은 경우에 그러한 사건이 세상의 위기의 한 부분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암시하셨을지라도 그리고 언젠가 틀림없이 유란시아로 돌아오시겠다고 여러 번 약속하셨을지라도, 이 두 가지 개념을 결코 연결시키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장차 언젠가 이 땅에 천국을 새롭게 계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언젠가 이 세상에 품성체로써 다시 오시겠다는 것도 약속하셨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이 약속들이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 두 가지 가르침들을 매우 확실하게 연결시켰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천국이 현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미래의 천국에 대한 주(主)의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다시 오시겠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이 약속들이 동일한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고 비약하여 결론을 내렸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주(主)가 천국을 그 충만함으로 그리고 힘과 영광과 함께 세우기 위하여 그가 즉각적으로 두 번째 올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계승되는 믿음을 가진 세대들은, 영감을 주면서 한편 실망이 되는 그 희망을 간직한 채로 이 땅에서 살아오고 있다.
5. 천국에 대한 후일의 관념
천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들을 요약하면서, 천국의 개념(槪念)에 덧붙여진 어떤 차후(此後)의 개념들을 진술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오는 세대에 전개될 것으로서 천국에 대한 예언적(豫言的)인 전망에 관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기독교가 알려지기 시작한 첫 세기 동안 천국에 대한 개념은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그리스 이상주의의 관념, 자연 세계는 영적인 세계의 그림자라는 개념 -현세(現世)는 영원한 세계의 시간적 그림자- 에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 토양으로 옮겨 심겨지는 일을 이룩한 위대한 그 걸음은 천국의 메시야가 교회,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의 활동에서 태동되고, 필로의 개념들과 선과 악에 대한 페르시아 교리들이 그것들에게 첨부되었듯이 예수의 가르침들에 기초를 둔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조직체의 구세주가 되었을 때 이루어졌다.
천국 복음의 가르침 속에 구체화되었던 예수의 개념들과 관념들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가 선포하신 것들을 점차적으로 왜곡시킴에 따라서, 그 실현에 거의 실패하였다. 천국에 대한 주(主)의 개념은 두 가지의 큰 경향들에 의해 눈에 띄게 수정되었다:
1. 유대인 신자들이 그를 메시야로 간주하기를 고집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곧 실제적으로 돌아오셔서 전 세계적인 다소간의 현세적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2. 이방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교리들을 매우 일찍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는데, 그 교리들은 예수께서 교회에 소속된 자녀들의 구세주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점차 인도하였으며, 천국의 순수하게 영적인 형제신분의 초기 개념을 새롭게 제도적으로 대신하였다.
천국의 사회적 부산물로서의 교회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오히려 바람직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교회로 인한 해악은 그것의 실재가 아니라, 천국에 관한 예수의 개념을 거의 완벽하게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바울이 조직한 교회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에 대한 실제적인 대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主)가 가르치신 그 천국이 믿는 자들의 가슴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 기독교 교회는 물론, 땅 위에 있는 다른 모든 종교들, 종족들, 국가들에서도 -모든 개인에 이르기까지- 선포 되어질 것임을 의심하지 말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 하느님과 나누는 사람의 신성한 친교 개념과 개별적인 정의(正義)의 영적인 관념은 예수의 품성을 구세주-창조주, 그리고 사회화(社會化)된 종교적 공동체의 영적인 우두머리로 여기는 신화적 개념 속으로 점차 잠겨버렸다. 형식화되고 조직화된 교회가 개별적으로 영이 지배하는 천국의 형제신분을 이런 식으로 대치해 버렸다.
교회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필연적이며 유용한 사회적 성과였으며 천국의 가르침에 대한 이 사회적 반작용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또 그대로 사신 참다운 천국의 영적 개념을 너무도 완전히 대치해 버렸다는 사실에 그 비극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천국은 이스라엘 공동체였으며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기독교 교회였다. 예수께 있어서 그 천국은,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전심으로 행할 것을 선포하고, 그리하여 사람의 영적인 형제신분의 일원이 된 각 개인들의 모임 전체였다.
주(主)는 천국 복음이 퍼져나감에 따라서 어떤 사회적 결과들이 세상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셨지만 그러나 그러한 모든 바람직한 사회적 현상들이 신자들 각자의 이 내적(內的)인 개인적 경험, 모든 신자들 속에 있으면서 그들을 활성화하는 신성한 영과 가지는 순수하게 영적인 동료관계와 교제에서 나오는, 무의식적이고 필연적인 부산물, 또는 자연스러운 열매들이기를 그는 바라셨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회적 조직 또는 교회가 참된 영적 천국의 진보를 뒤따르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 예식을 행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진리를 사랑하는 혼, 의를 위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은 영적 천국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가르치셨으며 사도들은 같은 시간에, 신자는 세례라는 외적인 예식을 통하여 제자들의 사회적인 조직 안으로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쳤다.
예수를 직접 따랐던 자들이 각각의 믿는 자에 대한 영의 지배와 인도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가슴속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그의 개념을 실현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실패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천국에 대한 주(主)의 가르침 대신에 가시적인 사회적 조직, 기독교 교회를 점차 조성해 감으로써, 그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없어지지 않도록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대치 계획을 완수하였을 때, 천국의 실제에 관한 주(主)의 가르침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인식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천국을 미래적인 것으로 설정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지위가 안정 되자마자 곧, 천국은 기독교가 절정에 이를 때, 그리스도가 두 번째로 오시는 때에 실체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식으로 천국이 하나의 시대적인 개념, 미래에 도래한다는 개념, 그리고 지고자의 성자(聖者)들에 대한 최종적인 구속의 관념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그리고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 천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내포되었던 아버지-아들의 개념을 일반적으로 잃어버렸으며, 반면에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의 잘 조직된 사회적 친교로 대치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주로 사회적인 형제신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영적 형제신분에 대한 예수의 개념과 이상을 실질적으로 갈아 치웠다.
예수의 이상적인 개념은 크게 실패하였지만, 주(主)의 개인적인 삶과 가르침의 기초 위에, 영원한 삶에 대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개념을 덧붙이고, 영적인 것에 대비된 현세적인 것에 대한 필로의 교리를 첨부시켜서, 바울은 유란시아에 존재하였던 것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간 단체를 세워 나갔다,
예수의 개념은 세상의 고등 종교들 속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바울의 기독교 교회는, 예수께서 천국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의도하셨던 상태, 그리고 앞으로 확실히 그렇게 될 상태의 사회화되고 인간화된 그림자이다.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은 영원한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개인에서 교회로 옮겼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천국에 있는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 믿는 자 각 개인의 형님이 되시기 보다는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셨다. 바울과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예수 자신과 믿는 자 각 개인에 관계된 예수의 모든 영적 의미들을, 믿는 자들 무리로서의 교회에 적용하였으며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들은 믿는 자 각 개인의 가슴속에 있는 신성한 천국에 대한 예수의 개념에 치명적(致命的)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는 큰 낭패를 경험하였는데, 그것은 신비한 힘들과 특권들, 오직 예수와 그의 믿는 영적 형제들 사이에서만 경험되고 실행될 수 있는 힘들, 그리고 특권들에 대한 소유권을 교회가 감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의 회원이 천국에서의 친교를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으며, 하나는 영적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사회적이다.
조만 간에 세례요한 보다 더 위대한 다른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선포하면서 - 천국은 믿는 자의 가슴속에서 지배하시고 초월하시는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선포하셨던, 예수의 고상한 영적 개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함.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눈에 보이는 교회 또는 그리스도의 예상되는 재림과 관계없이, 이 모든 일들을 하면서 일어날 것이다.
이제는 미가엘이 이 땅에 머무른 사실성에 대하여 사회-철학적 신앙체계를 창조하려 했던 그의 초기 추종자들의 업적을 무효로 만드는 그러한 수정된 선언, 예수의 실제적인 가르침들이 다시 회복되어야만 한다. 짧은 시간 동안에, 예수에 관한 이 이야기를 가르치는 것이 예수의 천국의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거의 대부분 대체하였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역사 종교가 예수께서 그 속에서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관념과 영적 이상들을 미래에 대한 인간의 가장 고상한 희망 -영원한 삶- 과 조화시키셨던 그 가르침을 대신하여 들어섰다. 그리고 그것이 천국복음이었다.
몇 세기도 못 되어서, 그의 가르침들에 대한 기록들을 연구하던 생도들이 그토록 많은 이교들과 분파들로 나뉜 것은 순전히 예수의 복음이 너무 다방면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이러한 비참한 분열은 주(主)의 비길 데 없이 뛰어난 삶의 신성한 단일성에 대한 주(主)의 여러 가지의 가르침들을 분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예수를 참되게 믿는 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영적으로 분열되지 않은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양한 지적 이해와 해석, 심지어는 사회화의 변화 단계들을 가질 수 있지만, 영적인 형제신분의 결여는 용서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난을 받는다.
오류를 범하지 마라!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언제나 열매를 맺히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영원한 본성이 있다. 예수께서 생각하셨던 천국은 이 땅에서 많이 실패하였으며 한동안, 현세적인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그러나 이 교회는 오직 방해 받는 영적 천국의 애벌레와 같은 단계라는 것과, 그것을 이 물질적인 시대를 지나 주(主)의 가르침이 개발을 위한 충만한 기회를 즐길 수 있는 보다 영적인 시대로 옮겨줄 것이라는 것을 너희는 꼭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일명 기독교 교회는 그 안에서 천국에 대한 예수의 개념이 현재 잠들어 있는 고치가 된다. 신성한 형제신분의 그 나라는 아직도 살아있으며, 나비가 눈에 덜 띄는 변형 단계의 창조체를 거쳐서 결국에는 분명히 아름답게 변화되듯이, 결국에는 그리고 반드시 이 긴 동면에서 깨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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