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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닉 스 저 널 !

+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피닉스 저널 제 27권, pp. 19-75 에서 발췌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또는 균형의 법칙) 이해

 

I. 창조의 법칙의 가장 높은 계율이란 :

앎의 지혜를 성취하라. 이것이 너희로 하여금 창조의 법칙을 현명하게 따르게 할 수 있도록.

이는 ‘진실’이 너희에게 보여짐을 바라고 요구함을 의미하느니라. 그리하여 너희는, 자신과 또 타인들에 관련한 모든 정보, 행동 그리고 행실이 하나님과 창조에 의해 주어진 균형의 법칙에 어긋나는지의 여부를 식별하고 판단할만한 능력을 발전시켜야만 하느니라. 이것은 또한 의미하노라. 어떤 정보가 너희의 주의에 끌렸을 때, 너희는 너희 안에 계신 ‘아버지’께,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너희에게 밝혀 주실 것을 여쭈어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너희는 아버지께서 너희 앞에 둔 모든 정보와 상황들 속에서 너희가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확인을 행해 주실 것을 요구하여야만 하느니라. 이것은 또한, 너희가 ‘진실의 앎의 지혜를 성취’ 하기 위해서는, 너희의 변질된 자아 안에 존재하는 공포, 냉담 그리고 무지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결심을 가져야함을 의미하노라.

 

II. 하나님의 법칙의 가장 높은 계율이란 :

너희는 하나님을 인류의 통치자로서 경배하여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 분의 법칙을 따라야 하노라. 이는 그 분이 “지혜의 왕”이시기 때문이니라.

제 1. 너희는 너희 앞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신들도 가져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리고 모든 것을 관장하는 ‘창조의 법칙’ (또는 ‘하나의 법칙’이라고도 불리우는)을 따라야만 하느니라.

이는, 이 행성에서의 너희 영혼의 존재와 너희의 삶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함을 의미하노라. 너희는 너희 안에 계신 ‘그 분의 성스러운 현존’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이에 경의를 표해야만 하노라. 왜냐하면,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이 놀라운 신비의 끝없는 전개 속에서 빛과 사랑과 삶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서, 너희가 하나님과 창조를 위해 어떤 봉사를 해야 하는지에 관한 그 분의 안내와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오직 ‘그 분의 성스러운 은총’이 있기 때문이니라. 달리 말하자면, 너희는 창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하나됨’ 속에 너희가 항상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또 이해하게 될 것이니라.

이제, ‘하나의 법칙’을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너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창조물은, ‘하나의 신’에 대한 반영이며 또 그 중요성에 있어서, 같고 동등하다는 것이니라. 오직 ‘존재하는 모든, 그 하나’의 ‘표현’에 있어서, 각각이 능력과 자질과 실체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니라. 어쩌면 너희 자신들의 “견해”에도 상반되겠으나, 너희 ‘인간’ (보다 높은 우주적 인류)이라 할지라도, ‘하나’ 속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 바위, 새, 또는 그 어떤 다른 존재물과 창조물에 비교하더라도, 그 중요성에 있어서 보다 우수하다거나 열등하지 ‘않’노라. 너희는 단지 ‘창조’의 끝없는 전개의 ‘기쁨’을 확장하고 경험하기 위한, ‘성스러운 아버지’의 움직이는 운반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라. 너희도 보겠거니와,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노라. ‘모든 것’은 모두 ‘창조’의 ‘하나’의 위대한 원천으로부터 왔고, 모두는 다시 이 ‘하나’의 원천 속으로 돌아가리라.

제 2. 너희는 너희들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서는 아니되며, 거짓된 상징들을 신들로서 숭배하지 말지어다. 그리하면, 너희는 사탄의 손아귀에 권능을 주게 되느니라.

이것은 너희가 너희의 ‘신’으로서 경배하기 위한, ‘어떠한’ 물질적 형태의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노라. 어떤 사찰도 교회도 신위도 십자가도, 여기서 경배하거나 또는 이를 위해 경배할, 장소나 상징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니라. 어떤 성직자도 목사도 랍비도, 또는 너희와 신(하나님) 사이의 대표자인 것마냥 행동할지도 모를 ‘어떤 다른 인간’도 필요치 않음을 의미하노라. 너희는, 너희들 ‘각각’이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너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찰’을 바로 너희 몸에 지니고 다님을 보게 되느니라! ‘너희’가 바로 사찰이자 교회이니라. 그리하여, 바로 이 진실을 너희들 마음에 새기면, 너희들 삶의 여행 속에서 너희가 하나님을 ‘어디로’ 모셔 가는지에 대해, 스스로 아마 자문해 보게 될 것이니라.

제 3. 너희는 주 하나님을 너희의 모든 마음과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사랑하여야 하느니라. (너희는 너희자신을 하나님처럼, 그리고 하나님을 너희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느니라.)

이는, 우리 주 하나님께서, 삶이 전개되는 그 분의 왕국 속에서 너희가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야말로, 놀랍고도 경이로운 사랑임을, 그리스도의 ‘하나’의 의식이자 그 분의 무한성의 바퀴 속에서, 너희가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노라. 너희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그 분 앞에서의 창조의 ‘기쁨’과 그분의 ‘사랑’의 반영일 뿐이니라. 너희는 창조의 무한성 속에서의, 그 분의 공동 창조자이며, ‘영원한 하나’의 신비의 표현들이 전개됨 속에서 나타나는 ‘그 분의’ 기쁨에 넘친 자아발견의 공동 창조자이니라.

그러하니, 너희가 너희 자신과 타인을 경멸할 때, 너희는 너희 자신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한, 바로 ‘영원한 삶의 영혼’ 그 자체를 경멸하는 것이니라. 너희는 보게 될지어다. ‘우리의’ 위대한 중심 태양, ‘하나’의 영원한 빛은 너희를 부르고 있노라 : ‘나는 빛이고, 나는 기쁨이고, 나는 사랑이고, 나는 진실이고, 나는 모험이며, 나는 존재하는 나 자신이니라... 그리고 너희 또한 그러하노라! 존재의 영원을 향한 너희의 입장권은 너희 자신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 속에 존재하는 삶의 성스러운 영혼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니라!’

제 4.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사용해서는 아니되며, 거짓에 대한 맹세로서 이를 사용해서도 아니 되느니라.

이것은, 너희가 너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타인을 ‘비난’하거나 저주해서는 아니됨을 의미하노라. 너희는 너희 자신과 타인에 대한, 스스로의 잘못과 위반행위들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느니라. 그리고 너희가 타인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또 그에 대해 분개하며 그를 책망할 때, 너희는, ‘너희 자신들 속’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 속’에도 ‘영원한 삶’의 불꽃으로서 존재하는 너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또 그 분에 대해 분개하고 그 분을 책망하는 행동임을 알지어다. 그리하여, 너희가 무책임과 부인의 비난을 외부로 터뜨릴 때, ‘하나’ 자체에 대한 최초의 위반행위를 범한 당사자인 ‘너희’가 (이러한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될 ‘때까지’, 그 비난은 너희 자신에게로 되돌아 갈 것이니라.

또한, 너희는 ‘너희의 성스러운 아버지’의 이름으로 너희 자신이나 타인들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기만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지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완전한 사실임을 맹세합니다.’라고 말할 때, 너희는 그것이 진정으로 진실된 선언이어야만 함을 ‘알아야’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너희는 너희 자신의 변질된 자아를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에 불경을 행한 셈이 될 것이니라.

허나 이것이, 전제정 속에서의 불법적인 재판정에 임해, 진실을 말함으로써 ‘너희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야 될 경우까지를 의미하지는 ‘않’느니라. 이 경우에 있어서 (너희가 (실제로) 직면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감각을 이용해야 하고, 그 (특정한) 상황에서 ‘그 분의’ 안내와 보호를 요구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좋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너희는, 항상 너희가 필요로하는 안내와 보호를 너희에게 선사하는, ‘너희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힘을 신뢰’하여야만 하는 것이니라.

제 5. 하나님의 “날”을 기억하고, 이를 성스럽게 준수하라.

(하나님과 창조의 왕국 속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날들이니라.)

“소위” 기독교의 성경 안에서는, 이 법칙이 “A”라는 날로 해석되었고, ‘인간들’에 의해 선택되었던 그 날이 ‘일요일’이라 불리었고, 또한 “안식일”이라 불렸노라. 이 날은 인간들이 말하기를 어떤 일도 행해져서는 ‘아니’되며, 이 날이 하나님의 날이기에, 너희는 ‘그들의’ 교회로 가서 기도하고 회개하며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알려졌도다. 이것이 옳지 않음을 우리는 너희에게 이야기해야만 하겠노라,

왜냐하면 하나님과 창조의 왕국의 ‘모든’ 날들이 바로 ‘하나님의 날들’이기 때문이니라. 이는 너희가 ‘창조의 모든 것 속에 내재한 신성하고도 성스러운 하나의 현존’에 대한 경의로서 ‘모든’ 날들을 성스러운 날들로서 준수해야 함을 의미하노라. ‘매일’, 너희는 너희들의 기도의 일부로서, ‘너희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풍요와 지혜와 ‘삶’의 모든 축복들에 대해, 하나님과 창조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또 이를 인정해야 하느니라.

이것이야말로 기도와 명상의 진정한 목적이자 ‘힘’임을 기억하라. ‘기도’란 너희 안에 계신 아버지께, 그 분에 대한 봉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너희가 무엇을 알아야 될 것인지에 대한 안내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서, 내 뜻이 아닌 아버지 당신의 뜻이 행해질 수 있도록” 부탁하는 것이니라. 그리한 후, ‘명상’이란, ‘그 분에 대한’ 봉사를 지속하기 위해, 너희 안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말씀을 ‘듣는’ (정보를 ‘받는’) 것이니라. 그리하면 마침내, ‘너희’ ‘모두’는 끝없는 명상의 상태이자 너희 안에 계신 신성한 아버지와 늘 함께 있는 (다양한 참여 또는 공유)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니라.

제 6. 너희는 너희 아버지, 어머니께 경의를 표해야 하느니라.

이 경이로운 법칙은 너무나 자주, 단지 글자그대로의 의미로만 이해되어 왔노라. 너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이곳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분들께, 너희가 경의를 표해야만 하는 것은 사실이니라. 그런데, ‘꼭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생명체들에게도 너희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니라.’ 이것은, 아기이자 또 아이로서 너희가, 그 시초부터 신체적인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께 또 다른 것들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부모”—아버지와 어머니로 정의되는 것, 또는 제삼의 것을 생산해 내는 어떤 유기체, 또는 원천, 원인—가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 따른는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물들’ 가운데 하나인, 너희를 위한 교사와 수호자가 되는 것을 동시에 선택하는 것이니라. 그들에겐 또한 (그들이 이 사실을 알건 모르건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너희가(자녀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으며, 또 생애의 나머지 나날들을 ‘신성한 하나님’을 위한 봉사 속에서 지속해 나갈 수 있을만한 도구를 너희에게(자녀들에게) 제공하는 책임이 위탁되는 것이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보다 영적으로 고양된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모든’ 존재들에게 다 생식의 책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니라.

이제 이 법칙의 다른 목적과 의미가 있다면, 너희는 ‘창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아버지, 어머니의 섭리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이니라. 하나의 아주 경이로운 예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양육하고 그들의 삶을 유지시키며, 어머니의 “섭리”를 대표하는 ‘이’ 사랑스러운 ‘어머니 지구’에 대해, 너희는 경의를 표해야만 하느니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하나됨’ 속에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의 씨앗을 발현케 하는 ‘아버지 하나님’께도 너희는 경의를 표해야만 하느니라. 물론 하나님은 ‘조화와 균형과 움직임’ 속의 아버지/어머니 섭리, 바로 그 자체이며, ‘신성한 창조의 모든 부분들 속에서의 아버지/어머니 단일체와 균형’이 바로 하나님에게 존재하느니라.

제 7. 너희는 너희의 동료, 인간을 살해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소위”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이 법칙이 단지 “살인하지 말라”라고만 나와 있고, 이는 오해와 (잘못된) 해석의 여지를 남기노라. 이 법칙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너희가 다른 인간을 물리적으로 살해해서는 아니되는 것만이 아니라, 너희가 ‘너희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인 다른 인간의 죽음을 ‘바라는’ 것조차 해서는 아니됨을 의미하노라.

이 법칙은, 만약 너희의 삶에 위협이 가해졌을 때, 너희가 너희 자신이나 너희의 가족을 ‘방어’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것은 ‘자살행위’이고, 이는 ‘자기 살해’로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스스로가 가치없게 느껴진다거나 계속 ‘살아나갈 수가 없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결코 자살을 선택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는 너희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생명력에 대한 불경이기 때문이니라. 오직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만이 삶의 진행에 있어 물리적인 종결을 결정할 수 있느니라. 그 순간은, 너희의 목적과 임무가 완수되었을 때만 오게될 것이며, 그리하여, 너희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과 과정이 침범되지 않을 것이니라. 자살한 영혼이 갖게 될 ‘후회’는, 삶의 흐름이 종결되기 ‘전’, 변질된 자아가 고통에 대한 환상 속에서 인식하는 것보다, 자살행위가 완성된 ‘후에’ 종종 훨씬 더 ‘크게’ 느껴 지노라.

너희들 가운데, 스스로 “페미니스트(여권주의자)”라거나 “낙태 옹호론자”라고 칭하는, 실제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살해 찬성론자’들은 이 점은 기억하라 : ‘어떤 예기치 못한 임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가 임신했다 함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운반체가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너희들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성적 행위 때문에 낙태를 ‘선택’한다면, 너희가 이를 어떻게 볼지라도 이것은 ‘살해’이니라. 너희들 각각은, 너희의 “자유 의지”에 따라, 모든 너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행위들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이 주어졌음을 기억하라. ......

그렇다면, ‘만약’ 한 여자가 그녀의 의지에 반해,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강간’을 당하게 되고, 이에 임신하게 된다면, 그 때, 그녀는 그녀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 태아를 지우기를 원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해 여쭈어 보아야만 하느니라. 그리하여, ‘그녀’의 “변질된” 자아의 선택이나 뜻이 아닌, ‘그녀 안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실현되도록 해야 하느니라. 대개 유산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라. ‘다른 어느 누구도’ 그녀를 위해 이 결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녀 안에 계신 아버지만이 할 수 있노라!’

제 8. 너희는 간음을 범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남자와 여자간의 결혼을 통한 유대는, 오직 양자가 법에 따라 조화롭게 결혼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있으며 또한 정신적 역량이 있을 때에만 허락되어져야 한다.” (주 : 여기서의 법은 ‘하나님의 법’을 가리키노라.) (피닉스 저널 익스프레스 1&2, 페이지 34-40)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혹은 남편이 수태를 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혼의 사유가 되지 아니한다. 이에 대해 아내나 남편이 다른 견해를 갖거나 다른 행동을 해도 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혼의 유일한 이유는 간음, 즉 하나의 가족 단위의 구성원들의 삶과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고 위험에 처하게 하는 행위가 발생했을 경우만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간음 행위로 인해 이혼하게 되었다면, 그는 거세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육체적 욕망에만 반응하여 모든 책임있는 행위를 방기하였기에, 삶과 이에 따른 법에 있어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인용의 끝)

진실의 하나님의 왕국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로서 함께 살 목적으로, 이 둘 사이에서 행해지는 신성한 ‘결합의 맹세’는 실제로 가장 신중하게 행해 지느니라. 왜냐하면, ‘(남은) 삶 전체동안’, ‘이 둘의 각각에 내재하시는 아버지’에 대해 행해지는 서약이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인간 생활상의 법적 계약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계약이니라.

이것이 이혼에 대한 납득할만한 사유이니라. 그 이유란 너의 반려자가 ‘너’와 ‘자기자신’과의 서약을 어겼을 뿐만이 아니라, 간음 행위를 통해, 그(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서약도 함께 파기했다는 것이니라.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행위를 통해서, 그는 그의 가정에 적그리스도를 초대했기 때문이니라. 물론, 간음한 반려자와 이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에 관한 선택은, 궁극에 있어, ‘너희 안에 내재하신 아버지’에 의해 행해질 것이니라.

제 9. 도둑질하지 말지어다. (물질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그리고 이 법칙은 또한, 너희가 너희 자신의 실제 동기나 의도에 관해 상대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타인의 신뢰나 선의를 훔쳐서도 아니됨을 의미하느니라. 악의적인 ‘거짓말’과 ‘절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니라.

여기 거짓말과 도둑질의 여러가지 형태들에 관한 몇가지 예들이 있노라 : 만약 한 남자가 처녀인 한 여자에게,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또 결혼하길 원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가 그녀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은 단지 성적 관계일 뿐이라면, 그는 그녀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선의 속에 그와 사랑에 “빠지고”, 또한 그의 “거짓된” 약속의 덫에 빠져, 결혼의 맹세 이전에 육체적인 “그들간의 사랑”을 표하기를 요구하는 그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고, 그런 연후에, 그가 그녀를 버린다면, 그는 자신의 욕정적이고 이기적인 의도를 위해, 본질적으로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순수와 그녀의 순결을 ‘훔친’ 것이니라. 비록 그 여자가 그와의 성적 관계로의 발전을 현명하게 거부한다손 치더라도, 그 때문에 그녀 자신이 그로부터 거절되었다고 여긴다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그의 죄는 여전하고, ‘이는 그녀를 정서적으로 훔친 격이니라.’

(정서적(감정적)인 절도의 또 다른) 예를 들자면 : 한 국가의 통치자가 젊은이들을 먼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것 역시 ‘살인’을 수반한다.)터에 보내고, 그들에게, “제군들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조국을 수호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병사들은 이 거짓말을 믿느니라. 그런 후,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 (단지) 그들이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있을 뿐이며, 그들이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은 부유한 회교군주들과 그들의 유전과 돈 뿐이지, 정작 자신들의 조국의 자유가 ‘아님’을, 공포 속에서 깨닫게 되느니라. 그들이(병사들이) 신뢰했던 자(들)(통치자들)에게 ‘속았으며’, 단지 ‘악’을 행하기 위해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바로 ‘그들의 순수성’이 도둑질 당한 때이니라.

제 10. 너희는 이웃이 소유한 것을 탐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 법칙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이나 자신에 대한 가치감 부족로 인하여, 다른 이가 가진 어떤 것들, 가령, 돈이나, 새 차, 또는 능력이나 재능을 갖게 되길 바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니라. 그리고 타인이 가진 이러한 “대상”들을 갈망하는 것에 더하여, 너희가 소망한다고 느끼는 어떤 것들, 그렇지만 바로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과 자신에 대한 가치감 부족으로 인하여 창조해 낼 수는 없었던, 이 어떤 것들을 이룬 사람에 대해서 ‘너희는’ 화를 내서도 아니 되느니라. (“내재한 적그리스도 식별”을 참조하라.)

너희는 끊임없이 이 상상된 “부족함”을 만들어 낼 것이고, 탐하고 부러워하는 감정들, 종종 다양한 “자기 학대”의 형태들, 즉, 화, 죄의식, 비관주의, 질투 그리고 침울등으로 이어지는 감정들의 영향으로 인해 마침내 너희들은 소진되고 말 것이니라.

제 11. 너희는 타인의 자유의지 위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두거나 강요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불간섭의 원칙으로도 불리운다.)

이 법칙은 하나님에 의해 제시되었고, 각 개별적인 주체의 자유의지와 영적 성숙이 ‘내재한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침범될 수 없다는 것이며, 자신들의 권능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적들에 의한 것(침범)일 경우 특히 그러하도다. 이것은 각 개체가 가진 ‘하나님이 부여한’ 보호기능이며, 이로 인해 ‘하나’를 향한 (개체들의) 개별적인 신적 잠재력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공정성이 존재하게 되느니라.

이제 너희들은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으리라, “이 행성에 대한, 엄청난 ‘사탄’의 영향은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허락되어지는가?” 그 이유는 이러하도다. 심지어 “사탄들”이나 하나님의 적들이라도 단지 이들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주어진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단지 그들의 “적대적인” 창조물들에게 조차도 그들의 신성하고 성스러운 빛과 신적 잠재력에 어울릴만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니라.

그러나, 그들 행동의 “한계성”으로 인해, 즉, ‘하나’로부터의 이기적인 분리로 인해, 그들의 현실과 경험의 장은 역시 하나님에 의해 “한정”되어 있노라.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묘사되는, 1차원과 5차원 사이에서의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에만 묶여 있노라. ...... 그러나 그들에게도 ‘모든 것의 하나됨’에 존재하는 진실의 빛을 발견할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니라. ......

예를 들어 : 너희 안에 내재하는 적그리스도의 속삭임을 느낄 때, 너희는 ‘신성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또는 예수 그리스도 사난다의 이름으로 모든 어둠의 존재들과 적들이, 너희를 둘러싼 공간으로부터 당장 떠날 것을 명령’할 수 있느니라! 그러면 그들은 ‘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너희들의 에너지 장 주변부에 “떠돌아 다닐 수 있고”, 너희의 보호막에 취약점이 생길 때를 기다릴 수 있노라. 하나님의 사랑, 보호, 안내, 힘, 지혜, 완전성 그리고 용기의 “백색 빛”의 방패를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 있느니라. 그러하므로, 너희는 너희 안에 계신 아버지께, ‘아버지의 뜻’에 봉사하기 위해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너희에게 제시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하여야만 하느니라. ......

이제 너희들의 자비로운 형제들인, “천상의 군단들”이 너희를 돕기 위해 보내어진 이유는, 너희들 중 많은 이들이 너희들 스스로에 의해 부여된 무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왔기 때문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께 그 분의 ‘신성한 보호’와 조력을 요구했기에,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들은 여기에 보내졌노라.

제 12. 너희는 타인을 판단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렇지만, 너희는 하나님과 창조의 균형의 법칙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와 행동들에 대해서는 현명하게 판단하여야만 하느니라.

……

‘임마누엘’은 현명하게 사람들에게 대답했다 : “너 자신이 잘못 판단되지 않으려면, (타인을) 잘못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그렇게 너희도 판단될 것이며, 너희가 어떤 조치를 취하든, 그렇게 너희에게도 조치가 취해지리라. 그러하므로, 창조로부터 온 자연의 법칙의 논리에 따라 판단하라. 왜냐하면 이것만이 유일하게 옳고 정확하기 때문이니라.”

(인용 :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 (피닉스 저널 제 2권.))

씌여진 바 그대로,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타인이 자신보다 못하거나 낫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 타인이, 너희의 것과는 다른 피부색, 다른 인종, 다른 신조 또는 다른 성 (또는 다른 행성(출신))을 가졌기 때문이라서라면, 특히 그러하도다. 그러나 이 점을 주의깊게 이해하라, 너희는, 너희가 아는 누군가의 행위와 행동들이—여기엔 너희 자신의 행위와 행동들 역시 포함하여—‘삶’에 반하는지, 즉, ‘창조’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균형”을 유지하는 법칙들에 어긋나는지의 여부를 현명하게 판단하여야만 하노라. 그리하여 너희는 모든 너희의 형제, 자매들을 ‘하나’의 동등한 개체들로서 경의를 표해야 하지만, 너희가 알기로 균형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행위나 행동들이 너희의 영역에서 계속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관용하거나 혹는 “허락”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제 13. 너희가 뿌린대로 너희는 거두리라.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라고도 불리운다.

카르마의 정의가 암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느니라. 물론 그러하다. 너희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그 결과가 따르노라. 그러나 너희는 이 생애에 아니면 다음 생애에라도 (행한 행동에 대한) “되갚음”을 받도록 운명지워져 있으며, 너희들 영혼에 의해 진실로 그 교훈이 얻어지지 않는 한은, 이러한 “되갚음”으로부터의 해방은 고려되지 않느니라. 이 점을 기억하라 : ‘어떤 순간이라도’, 자신의 행동의 결과와 ‘잘못’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인정을 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에 대한 용서를 통해’, 그는 ‘타인에게, 자기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행한 과오’의 반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느니라.

예를 들어서, 수백만명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었던 “히틀러”라 불리웠던 자가, 그의 임종 직전에,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저질렀던 자신의 과오들에 대해 진정으로 인정하고 이해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모든 상황은 가능하노라! 친구들!) 자신의 삶의 마지막인 “죽음” 직전의 순간에, 그가 자신안에 내재하신 하나님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고, 이어서 그는, ‘오직 아버지에 대한’ 봉사만을 위해,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위탁하기로 결심했다고 해 보자.

이제 ‘카르마’를 믿는 사람들은, 히틀러의 영혼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독재자의 손아귀 아래에서 최소한 백만번의 죽음은 당하여야만 할 것이라고, 다시말해, 적어도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것과 같은 정도의 박해에 처해질 운명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니라. 그리고 만약 “히틀러”가 자신의 과오 앞에 직면하기를 거부한다면, 의심할나위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의 ‘스스로에 대한’ 판결은 보다 가혹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니라.

그렇지만, 그의 이해 수준에 따라, 그가 교훈을 얻은 정도에 따라, 그의 “되갚음”은, 다음 환생에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서’ 그는 자신의 동료들의 “영적” 굶주림 상태를 극복해내는 것을 돕는데, 그의 삶 전부를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느니라. 너희들 생각에,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봉사자가 다시금 ‘그 분의’ 진실과 사랑과 빛의 양떼 속으로 합류하는 것을 반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보느냐?

너희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면, 심지어 히틀러의 증오의 “희생자들”마저도 그러한 희생됨을 선택했었다는 것이니라. 어떤 이들이 항상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경배하고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의 균형아래 살아가며,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희생자들”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이상 ‘히틀러’와 같은 “희생을 가하는 자들”조차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니라. ......

제 14. 너희은 아버지 하나님와 너희 안에 계신 하나에 대한 봉사를 위한 모든 서약들에 있어서 경건해야 하느니라.

너희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서약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너희에게 펼쳐보이는 이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을 ‘현명하게’ 이해하고 복종하는 것이니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봉사로써, 너희 자신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 속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니라. 단지,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을 이해하고 따르라.’ 이에 대한 서약이 너희들에게 어려운 것이라면, 서약은 더이상 필요 없느니라.

‘너희는 지금 너희 앞에 법칙들을 가지고 있고’, 더이상의 무지와 오해에 대한 주장을 할 수는 없노라. ‘알겠느냐?!’ ‘너희의 신성하고 성스러운 신성을 지금 요구하라!’ ‘우리는 모두 하나이니라!’ ‘(너희에게 서약이 필요한) 때는, 너희 앞에, 알고 소유할 진실이 존재하는 바로 지금이니라!’

……

너희의 개인적인 권능은 너희 영혼의 성실성과 직접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느니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너희의 약속의 말 또는 서약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 때, 너희는 너희 스스로와 너희의 동료들과 ‘하나님’을 불경하는 것이며, 또한 “권능을 잃게”되며, 그리하여 사탄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니라. ...... ‘어떤’ 약속이나 서약도 너희가 ‘그 말을 입 밖에 내기’ ‘전에’ 대단히 주의하여야 함을 생각하라. 너희가 너희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만한 ‘확신이’ 없다면, 어떤 미래에 대한 “약속”도 하여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이 행성에서 너희에게 요구되는 어떠한 약속, 맹세 또는 서약이라도 너희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확실히 하라함은, (반드시) 너희가 ‘(약속의) 말’을 입 밖에 내기 전이어야 함을 ‘의미하느니라’.

제 15. 너희 종들의 책임있고 균형잡힌 생식을 위해서, 너희는 하나님의 지혜에 복종하여야만 하느니라.

이제, 너희가 “성적 결합”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희 종의 생식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신성하고’ ‘경건한’ “행위”이니라. 하나님은 각각의 주어진 행성 체계에 따라, 특히 종들의 균형잡힌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사이에서 행해지는 ‘이 신성한 결합’을 창조하였느니라. 한때, 각각의 파트너 안에 내재하신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헌신을 가지고 행해졌던 이 “경건하고” “성스러운” 행위가, 오늘날 소위 이 “타락한” 것들 또는 ‘신성’에 대한 적들에 의해 완전히 왜곡되고 악의적으로 바뀌었노라.

그리하여 오늘날, 소위 “타고난 권리”라고 불리워지는 이 성교행위가, 종종 어떠한 견책도 없는 가운데, 각각의 성별에 있어 ‘많은’ 파트너들을 가지고서, 책임있는 생식과 ‘사랑’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이 행해지고 있노라. 우리와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너희들에 대해 얼마나 비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줄 아느냐!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이 ‘한가지’에 대한 남용이 너희 종들을 거의 파멸 직전으로까지 몰고 갔노라! ......

이제부터는 어떤 오해도 ‘없도록’ 하라. 아래의 행위들은 특별히 그리고 부인할 수 없게,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에 반하고 어긋나는 행위들이니라’ :

1. 둘 또는 그 이상의 남자들 간에 행해지는 어떠한 동성간의 성행위도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2. 둘 또는 그 이상의 여자들 간에 행해지는 어떠한 동성간의 성행위도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3. 둘 또는 그 이상의 남자들과 여자들 간에 행해지는 어떠한 양성간의 성행위도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4. 남성이건 여성이건 어떠한 사람들 간에 행해지는 어떠한 항문 성교라도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5. 어떤 인간에 의해서건, 동물을 상대로 행해지는 어떠한 성행위(수간)도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6. 같은 직계 가족 내부의 가까운 관계 사이에서 행해지는 어떠한 성행위(근친상간), 예를 들어 : 아들과 딸, 아버지와 딸, 아저씨과 질녀, 아주머니와 조카, 사촌과 사촌, 어머니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녀 등의 사이에서 행해지는 성행위는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7. 성인(남자 또는 여자)과 아동 사이에서 행해지는 어떠한 성행위도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8. 매춘—남자이건 여자이건, 상응하는 보수와의 교환을 조건으로 타인에게 자기 자신을 성관계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행위—은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9. 어느 누구에 의해서건, 스스로에 의해서이건, 타인들에 의해서이건, 어떠한 형태의 가학적 혹은 피학적 성행위(행태)는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10. 어떤 관음증적 행위 (성적 물건이나 행위를 봄으로서 성적으로 흥분되는 것) 또는 포르노 그라피적(성적으로 노골적이고 음란한) 매체들, 즉, 영화, 잡지, 책, “예술작품” 그리고 기구를 취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느니라.

성적인 생각, 말, 그리고 행위들에 대한 몰두와 타락은 최면적으로 ‘과도한 심취’를 불러일으키며, 또한 ‘하나의 생명의 영혼’의 (수준을) 치명적으로 격하시키느니라! ‘어떤 정의에 의하더라도 이것은 사랑이 아니니라.’ 너희 앞에 놓인 그리고 너희 안에 있는 이 ‘진실’을 보지 못하겠느냐? 너희가 죽어 없어질 신체를 너머,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너희들의 이 성적으로 과도한 집착은 ‘멈춰져야만 하느니라!’

자위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 쾌락의 성행위이고, ‘또한’ 대부분의 너희, 짝을 이룬 남녀들이 함께 “성교”하며, 이를 “사랑을 나눈다” 라고 부를 때의 행위이기도 하느니라.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후자의 경우) 너희는 너희 파트너와의 ‘상호간의’ 자위행위를 “공유”하는 것이니라. 상호간의 자위행위는 ‘생식을 찬미하는 신성한 성적 결합은 아니니라’.

아이에 의해서건 성인에 의해서건, 절제된 채 또는 이따금씩 사적으로 행해지는 자위행위는, 이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해롭거나 혹은 생명에 ‘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위행위는 또한 자기 학대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 경우엔 이것이 ‘내재한 하나님의 영혼’에 가장 해로운 것이 되느니라. 다음을 부모들은 기억하라. 자녀에 대한 “교육과정”에 있어서, 자녀가 자신의 생식기에 대해 두려움이나 경멸감을 갖도록 길러지거나, 또는 자신의 성적 환상이나 자위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도록 교육된다면, 이것 또한 아이에게 대단히 해로울 수 있느니라.

자녀 또한 자신의 개인적 책임감에 대해서 배워야만 하고, 생식에 관한 문제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법칙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자녀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환상에 대해 두려움, 부끄러움,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든다면, 실제적으로는 오히려 자녀를 성적으로 ‘과도한 집착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이니라. 만약 아이가 끊임없이 “성적으로 자극적인” 매체에 노출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그의 ‘창의적인’ 잠재력이 ‘부모님과 선생님들’에 의해 격려되고, 북돋워지고, 지원된다면, 아이는 초기의 성적 환상이후에 곧 이에 대한 관심을 잃을 것이니라.

보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아이들과 어른들은 이에 많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며, 서서히 어떤 종류의 성적 환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잃을 것이니라. 만약 성적인 감정들로부터 초월하게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또한 진정한 영혼의 ‘이해’와 앎에 의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된다면, 이는 그 영혼에게 있어서 훨씬 건강한 일이니라.

성교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본능적인’ 갈망이나 욕구가 아니며, 너희가, 너희 속에 내재한 하나님을 ‘알고’ ‘찬미하기’ 위한, 또 ‘영원히 전개되는 삶의 확장과 모험을 (하나님과) 공동창조하기 위한’, 너희 자신의 ‘창의적이고’ 북돋워진 욕구인 것이니라! ‘생식’을 위한 성적 행위를 통해 남자와 여자가 자신들의 창의적인 잠재력을 경험하는, 진정으로 사랑에 바탕한 ‘신성한 결합’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는 새로운 생명체와’ ‘(남녀간에) 공유되는 하나됨의 선물에 대한’, ‘신성하고 사랑스러운 축복과 헌신에 (기초한) 결합’으로서 창조된 것이니라. ......

너희들의 창의적인 잠재력의 타락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건지워졌으며, 틀지워졌노라’. ‘너희들은 단지 거짓을 진실인 줄로만 알았고, “성교”에 대한 욕구에 중독되어 왔느니라.’ 너희의 ‘성적’ 욕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너희는 믿지 못하겠느냐? 오늘 너희 주변을 둘러보라. 너희들의 잡지, TV, 영화 뿐만 아니라 광고 매체들도 모두,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섹스 어필”한 것인지에 대한 거짓된 “이미지들”을 통해, 너희들을 조건지우고 틀지우는 방식으로, ‘너희에게 (성적) 욕망을 창조해 내고 있느니라’. ......

이러한 ‘성적 욕망’이란, 실제로 너희 스스로에 의해 부과된 ‘신체적’, 성적 ‘행위’의 “한계”와 범주로부터 탈출하고자 비명을 질러대는, 너희 자신들의 ‘완수되지 못한’ 창의적 잠재력임을 인정하라. ...... 이러한 성적 행위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너희의 창의적이고 영적인 (능력의) 발현을’, 한정시키고, 대체시키며 또한 몰개성화시키고 있느니라. 너희가 진실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할 때, 너희의 창의적이고 영적인 능력의 전개는, 더이상, 어리석으며, 진실된 영적 성취없는 “성적 행위”의 반복에 의해, ‘좌절되거나 한계지워지지’ 않을 것이니라.

이러한 설명이, 너희 자신들과 ‘하나님’에 의해, 너희들의 모든 성적 활동이 ‘당장에’ ‘멈춰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느냐? 성적 활동을 멈추는 것이, ‘진정한’ 이해와, 생식에 대한 욕구 및 이러한 “중독”에 대한 초연으로부터 자유를 느끼게 됨에 따라, ‘기쁨’을 갖고 행하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일 경우‘만’이라면, 그리하여라. (그렇지만) 대부분의 너희들, 특히 “성적 행위”가 중독이 되어버린 성인들은, 이 문제를 이에 걸맞게 다루도록 해야만 하느니라.

알콜 중독자가 자신을 술집으로부터 멀리하고, 자신의 집에서 술을 치우듯이, 가급적이면 너희들이 있는 곳 주위에, “유혹물”을 치우도록 하여라. ...... 너희가 미혼이건, 결혼을 했건, “성적 행위”에 중독성을 띠는 상황에서, 이를 “꼭 해소해야만 할 경우라면”, 악을 완화시키는 대안으로서, 이따금씩의 자위행위를 사용하여라. 만약 너희가 행복하게 결혼을 했고, 양쪽이 모두 일부일처에 바탕한, 성행위로서의 상호간의 자위행위에 대한 너희들의 중독을 “즐겼다면”, 양쪽 파트너 모두 이러한 중독이 떠나갈 수 있도록, (조금씩) 초연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니라.

제 16. 너희가 타인들로부터 대접받고 싶은 것만큼, 너희도 타인들을 대접해야만 하느니라. “황금율”이라고도 불리운다.

너희가 내재한 하나님의 영혼을 경배한다면, 타인들로부터 너희 자신이 진실로 어떻게 다루어지길 원하는지를 자문해 보도록 하라.

여기 너희를 위한 출발점을 제시하겠노라 : 존중을 갖고, 경의를 갖고, 영예롭게, 가치롭게, 열정적으로, 참을성을 가지고, 관용과 이해를 가지고,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친절과 예의를 가지고, 배려심을 갖고, 감사함을 갖고, 관대함을 갖고, 대화 내용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갖고, 이해심을 갖고, 정직과 성실성을 갖고, 신뢰를 갖고, 우애를 가지며 조화를 갖고서 (타인을 대하여라.)

그렇다면, 너희는 타인들을 위에 묘사된 대로 대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어찌 너희가 그리 대접받기를 바랄 수 있느냐? 너희는 너희 스스로에게라도 위에 묘사된 방식대로 대하느냐? 너희가 너희자신조차 경배하지 않을진대, 어찌 너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배와 존경을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성실성과 친절 그리고 관용을 갖고서 영예롭게 타인들을 대하여라, 그리고 상대도 너희를 같은 방식으로 대해 주기를 기대하거라. 만약 그들이 같은 존중감을 가지고 너희를 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주의를 요구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너희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라, 그리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나도록 하여라.

제 17. 사탄은 (하나님의 적들은) 그들 악의 표시를 항상 갖고 있느니라. (그들의 열매를 보면, 그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니라.)

사탄의 가장 뚜렷한 “표시” 중의 한가지는 그들의 ‘위선’이니라.

그리하여 너희는, 위선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니라. 어떤 자들이건, 그들의 영적인 부, 독실성 그리고 풍요로움을 주장하며, 단지 그들이 이러이러한 종교에 속해있기 때문에, 또는 그들이 어떤 인종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선택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위선자들이니라.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어떤 것을 믿노라고 외부로 이야기하는 것과 그들이 실제로 “비밀스럽게”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아주 종종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니라.

심지어 “모세”라고 불리웠던 자가 살았던 시기에도 이런 일은 일어 났느니라.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그들에게) 제시하였을 때, 종교적/국가의 통치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느니라. 그 이유는 : ‘그들이’,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의 ‘집행자들’이자 스스로 임명된 ‘창조주들’인 것마냥 행동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니라. 너희도 알다시피, 그들은, 이러한 “법칙들”의 주의깊은 조작과 해석을 통해서(예를 들어, 경전들로부터 “환생”에 관한 언급들을 삭제함으로써), 그들이 통치하던 백성들을 ‘상대로’, 보다 효과적인 통치와 징벌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음을 발견하였느니라.

다시 말해, ‘그들은’ 내재한 아버지 ‘하나님’과 백성들 가운데 개입하려 (서 있으려) 하였으며, 이는 백성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들이(백성들이) 이들 교활하고 기만적인 “통치자들”의 자비아래에만 남겨지게 만들었으니라. 이러한 악의적인 사기꾼들은 아직도 너희 가운데 있으며, 그들의 욕심, 배신 그리고 조작등을 통해서,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들 세상 대부분을 사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지구물리학적으로도 통치하고 있느니라.

제 18. 너희는 하나님의 존재인 다른 인간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범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 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너희는, 무력이나 공포를 수단으로 하여, ‘정당한’ 보상을 행함도 없이, 다른 인간을, 그들의 의지에 반해, 그들을 통제하고 감금하고 사용하고 조작하는 방식으로, 그들이 너희들을 위해 어떤 봉사나 노동을 하게 만들도록, ‘명령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니라. 이 법칙은 또한 다른 사람이 마치 ‘너희의’ 소유물인 것처럼 인간을 ‘사거나 팔’ 수도 없음을 의미하노라. 여기엔 ‘너희들의 아이들도’ 포함되느니라.

아기나 아이들은 “시험관”을 통해서나 또는 “대리”모의 출산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니라. 만약 한 쌍의 남녀가 신체적으로 자녀를 가질 수 없는 경우라면, 그 때 그들에겐 다음 선택이 있노라 : 그들은 집없는 고아나 돌봐지지 않는 아이를 ‘입양’할 수 있으며, 또는 아예 부모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버려진 아이나 부모없는 고아를 ‘입양’하는 것은, 역량있고 배려깊은 한 쌍의 남녀가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럽고도’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이니라. 모든 남녀들이 다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이는 지금도 그러하노라!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벌이 아닌 것이니라.

이는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어떤 사랑스런 한 쌍의 남녀가, 생식행위는 이번 생애에 있어서 그들에게 주어진 기능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책임일 따름이니라. 그럼에도 그들이 자녀를 갖기를 원한다면, 그때 그들은 다른 어느 누구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 중의 하나를 돌보고 양육하기를 받아들임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지를 이해하여야만 하느니라!

인간이 소위 “유전적” 우수성이 존재한다는 감정을 가질 때, 그 ‘인간’의 마음 속에는, 자신과는 다른 종이나 다른 피부색깔을 가진 인간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노예화시키고 싶어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니라. ......

“현존하는 사탄의 권능이”, 그들과는 ‘다른’ 문화나 피부색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인간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갖게 되는, 편견을 ‘만들어 내며’ 또한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는 발견치 못하겠느냐?

세상 전체에 걸쳐, 너희의 언론매체와 정부정책들을 통하여, 인종적 소요, 갈등 그리고 편견의 씨앗이 특별히 심어지고, 길러지고, 그리하여 증오와 분개라는 이 쓰디쓴 열매가 맺어지도록 허락되고,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너희 인간이 ‘하나로 뭉쳐지지’ 못하도록 조작되는 것이니라! 너희를 분리된 채 유지시킴으로 인해, 그리고 다양한 단체들의 압력을 너희 사이에 만들어 냄으로 인해, ‘그들은’ 너희를 서로간의 전쟁으로 몰아넣고, 그러는 사이 ‘그들은’ 너희들 ‘모두’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향한 그들의 계획들을 수행하고 있노라.

우리의 창조주 아톤과 ‘창조’의 지혜와 진실의 신성한 빛을 위한 봉사를 행하며, 우리는 :

Sananda / Lord Michael / Germain / Druthea . 사난다 / 주 미카엘 / 저메인 / 드루셔 이니라.

 

내재하는 적그리스도(하나님에 반하는 것)를 식별하는 방법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위와 행동들을, 아래 제시되는 단서들에 따라 검토해 보라 :

1. 생각이나 감정에 있어서 열등감이나 우등감

타인에 비해 자신이 열등하다거나 우수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이 양 감정들이 동시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양날의 검과 같이 종종 나타날 것이니라. 예를 들어 : 어떤 행위나 일의 수행에 있어서 스스로가 열등하다고 느끼는 자는, ‘자기자신의’ 기준에서 볼 때 우수하게 일을 행함에 실패했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느낄지 모를 것이다. 그 자의 ‘변질된 자아’가 존재하는 어떤 곳에서, 적그리스도는 그 자의 (일의) 수행 수준을 어쩌면 그 자의 실제적인 능력 너머에 두고 있는 것이니라. 그러면 그는, 자신이 (분명) 가졌다고 믿도록 주어진, 타인을 능가할만한, 이 정당한 우수성을 달성하기 위해 싸우게 되는 것이니라. ......

그리하여, 남보다 우수하다고 느끼기를 요구하는 내재하는 적그리스도에 의해 꾸짖어진 자는, 열등함을 느끼고 싶지 않은 자신의 감정, 종종 스스로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거부로 전환되기도 하는 이 감정을 드러내게 될 것이니라.

2. 적그리스도는 너희에게서 “지금”을 또는 현재의 순간을 훔쳐가느니라.

적그리스도는 너희의 변질된 자아를 ‘과거에 대한 죄의식에 고착화’시키거나 ‘미래에 대한 공포에 고착화’시키느니라. ......

너희가 후회와 자기연민을 갖고 이미 행한 경험들을 계속 다시 경험하며, 스스로의 과거 속에서 뒤척일 때, 너희는 현재의 순간에서 보다 바람직한 환경의 변화를 만들고, 창조해 내는 일을 할 수가 없느니라. 바로 이러한 연유로 너희 중 많은 이들이, 모든 과거의 감정적, 물리적, 사고, 말, 행동들에 대한 ‘용서’와 ‘해방’이라는, 위대한 지혜의 말씀들을 들어오기도 했던 것이니라. 자기자신도 용서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용서해야 하느니라.

(그렇지만 이것이 경험의 교훈들로부터 오는 진실 속에서, 너희가 앎의 지혜를 얻어야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애초에 경험이라는 것을 만들어낼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니라. (경험을 통하여) ‘진실’에 대한 인식이 자라게 되느니라.)

과거에 대한 집착에 관련한 마찬가지의 규칙이, “현재”를 살고 만들어 나가는 대신에,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 속에서만 끝없이 다시 살며, 셀수없이 많은 시간을 이에 허비해 버리는 자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니라. 이와 관련한 적절한 경구는 다음과 같다. “과거를 돌아보되, 응시하지 말지어다.”

……

이제 미래에 대한 공포에의 집착은 대부분은 인류에게 커다란 장애물이니라. 두려움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창조주로부터 분리시키는 중요한 매개물이니라. 공포는 적그리스도의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다. 창조의 가장 높은 계율이 “너희가 창조의 법칙을 현명하게 따를 수 있도록 앎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인 이상, 너희들과 하나님과의 ‘불멸의’ 연결성을 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너희가 모든 것들으로부터 진실을 인식하여야 함은 마땅하고, (결국) 이러한 인식은 너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어떤 공포도 쫓아버릴 것이니라.

불멸의 영혼으로서 하나님의 일부인 너희들이야말로 너희 운명의 ‘주인들’이기 때문이니라. 너희도 알겠거니와, 공포는 감각을 마비시키고, 단지 자기 자신이 ‘하나’의 일부이기 보다는, 스스로가 창조주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느니라. ......

3. 적그리스도는 너희에게 “이것은 너희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느니라.

내재한 적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실제로 말하는 것은, 너희들의 현실에서 나타난 경험들에 대해, 너희에겐 책임이 없다는 것이니라. 내재한 적그리스도의 영향으로 인한, 이 거짓된 믿음은 너희로 하여금 타인들을 ‘비난’하게 만들고, 현존하는 경험을 만들어낸 ‘너희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을 지지않게 만드느니라.

이러한 진실에 대해서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저를 화나게 만들거나 저에게서 무언가를 훔쳐가는 자의 자유의지를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이러한 행위나 행동들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있습니까?”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그들의’ 게임 속, “대상이 된” 책임과 너희 자신을 ‘희생자’가 되게 한 책임이 ‘있노라’. 너희는 ‘모든’ 상황에 있어서 너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선택하느니라. ‘하나’의 법칙을 기억하느냐? ‘그들’ 속에 내재하는 적그리스도는, ‘너희’가 너희 안에 내재토록 허용한 너희 자신의 적그리스도와 같은 적그리스도이니라. ......

여기 이것은 하톤에 의해 제시된 가장 놀라운 기도문 중의 일부이니라. 너희가 타인의 적그리스도의 드라마 속으로 꾀어질 수도 있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너희가 매일의 하나님과의 회합을 가질 때, 기억하면 도움이 될 것이니라. “아버지시여, 제가 아무도 판단치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성스러운 현존’에 반하는 행동이 주어졌을 때는, 제가 이를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저를 통하여 ‘당신의’ 뜻이 항상 현현토록 허락해 주십시오.”

……

너희가 이 점을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너희는 주로 너희의 “변질된” 자아와 함께, 너희 현실의 범주 안에서, ‘모든것들’을 무의식적으로 현현시키고 있느니라. 이러한 사실과 관련한 한가지 멋진 일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이것이 깨달아졌을 때, 그 자는 ‘자신의 변질된 자아를, 자신에게 내재한 사랑스럽고 신성한 하나님께 넘겨드림을 통하여’, 그리하여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들 안에서의 자신의 모든 창조에 균형을 가져옴을 통하여, 진실로 균형잡힌 채로 나타나는 현실의 의식적인 창조자가 될 수 있느니라.

4. 적그리스도는 자기 학대를 부추기느니라.

……

물론 이제, 너희는 자기 학대는 과거의 죄(잘못) 때문에 부추겨진다는 점을 알고 있노라. 우리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는, 이 변질된 자아의 무가치감(열등감/우등감)은 스스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비판, 욕심, 욕망, 질투, 시기, 죄책감, 자기의심, 침울, 절망감, 화, 증오, 분개, 조급성, 이러한 것들은 좌절과 병 그리고 질환들을 야기하고 이것은 다시 신체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느니라. 자기 학대는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을 믿은 ‘원인’에 대한 ‘결과’이니라. 이것은 환생의 거듭 속에서도 계속될 수 있으며, 이 불쌍한 불멸의 영혼은 환생의 바퀴 속에 스스로 갇혀버리게 되느니라. ...... 그리고는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에 대한 벌이 내려지기만을 바라느니라. 이 자가 단지 “과거”에 대한 용서와 해방의 힘과 중요성을 이해하기만 하면, 그리고 하나님과 창조에 의해 정해진 법칙들에 따르기만 하면, 그는 즉각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이니라.

5. 적그리스도는 균형을 위해 제시된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을 깨뜨리도록 부추기노라.

예를 들어, 하나님의 법칙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것이 있고, 이것은 행동으로 뿐만 아니라, 너희의 ‘생각’으로도 하나님의 존재인 다른 인간의 죽음을 바라서는 아니된다는 의미이니라. (하지만) 이 규칙이,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을 때, 너희가 너희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느니라. 왜냐하면 자살은 또한 하나님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도 의미할 것이니라. 즉,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 가운데 하나를 담는 운반체가 되는 것이기도 한, 임신을 함으로 인해, 그리고는 또 ‘너희의’ 무책임한 성행위 때문에 낙태를 하게 될 때, 너희가 이를 어떻게 볼지라도 이는 여전히 ‘살해’인 셈이 되느니라. “개인적인 책임”을 기억하라! 분명, 부정하고 욕망에 찬 성적 행위들에는, 그럴 수만 있다면 바라고 싶지 않겠지만, (그에 따른) 많은 결과들이 존재하느니라. 임신과 질병은, 그렇지 않기 보다는 훨씬 더 자주 발생하는 두가지 명백한 결과들이니라.

6. 적그리스도는 너희의 욕망에 따라 너희를 지배하느니라.

……

물질 세계에서 너희가 여러가지 것들과 “소유”에 대해 갖는 욕망은, 단지 물질계에서의 물리적으로 나타내어지는 “것들” 즉, TV나 집, 자동차나 돈 뿐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욕망들, 말하자면, 성적 정복, 결혼, 자녀, 우정, 수용, 인정 그리고 존경같은 것도 포함되느니라. 내재한 적그리스도는 너희로 하여금 항상, 더 많고, 더 크고, 더 나은 것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너희 외부의 거짓된 약속을 추구하도록 만들 것이니라. 그리하여 불쌍한 영혼은, 그가 충족시키고자하는 욕구 달성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하여, 자신이 수행해 낼 수 없는 일의 쳇바퀴 위로 감히 뛰어들고, 이 영혼은 더 많은 어떤 것, 자신의 범위 너머에 있는...... 더 많고, 더 크고, 더 나은 것들을 (계속적으로) 갈망하게 되느니라.

거짓된 약속은 결코 충분해 질 수가 없으며, 이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갈구하는, 자신의 내재한 창조주의 불멸의 불꽃을 인정하고 여기에 다시 연결되고자하는 바램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이 ‘거짓된 약속’은 방해하느니라. 마침내, 적그리스도는 너희가 처한 문제를 잊어버리기를 권할 것이고, 유흥과 휴식 그리고 약간의 술과 마약에 취해 보길 부추기면서, 너희가 이렇게 행동해도 될만하다고, 이제는 이렇게 할만한 여유도 있노라고 속삭일 것이니라.... 그리고 머지않아 이 가련한 하나님의 일부는 중독과 비탄의 어둠 속에 (영영) 가려질 것이니라.

그러므로, 물질적인 세상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너희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한 핵심은, 너희 자신을,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감정적인 것도 포함하여 “여러가지 것들”에 구속시키는 집착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는 것, 즉 이러한 것들로부터 초연해져야 하느니라. 감정적으로 초연해지기 위해서, 너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행해지는, 모든 가능한 잘못들을 용서하고 해방시켜야만(4번을 보라.) 하느니라.

이는 너희가 어떤 관심 또는 연민 또는 사랑—너희는 명백히 하나님의 모든 존재와 창조물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져야만 하느니라—(이것이 ‘하나’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의 정수이니라) —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치 너희 몸 위에 걸쳐진 젖은 털옷처럼 너희 신체의 진동수를 낮추는, 모든 환상과 감정들로부터 초연해져야함을 말하느니라.

7. 이제 너희 중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이 물어볼 것이기에, (함께) 생각해 볼 한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노라.

“비록 제가 제 안에 있는 적그리스도를 떨쳐버리더라도 나머지 전 인류가 그러기를 거부한다면, 그러한 제 행동이 이 세상에 무슨 차이를 만들어 내겠습니까?”

‘차이를 만든다!’ 다시한번 이야기하는데, ‘하나의 법칙’을 기억하는가? 인류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의 부분으로서 모두 연결되어 있느니라. 너희에게 보여지는 이 세상은, 너희 각각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들의 ‘직접적인’ 반영이니라. 너희 각각은 집단 의식 집합의 일부분들이며, 이는 너희 각각이 전체에 있어서 너희의 부분에 해당하는 만큼의 책임이 있다는 걸 의미하노라. 예를 들어서, 이 놀라운 행성의 대기와 바다와 육지에 존재하는 오염과 ‘너희’ 각자가 자신들 안에 가지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오염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각각이 내재한 적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떨쳐버린다면, 너희는 본질적으로 집단 의식이 가진 질병의 일정 부분을 치료하는 셈이 되느니라. 자신의 의지를 행함으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 속에서의 ‘진실’의 지혜와 앎에 ‘커다란’ 차이를 만드는 것이니라. 너희는 집단의식 속에서, 문제의 일부가 되기 보다는 어둠의 오물덩어리를 치유하는 해결책의 일부가 되는 것이니라. 너희가 보겠거니와, 그때 너희는, 너희 안에 계신 아버지의 지혜와 진실의 빛을 지니고 다닐 것이며, 타인들은 이에 끌리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의 영혼이 갖는 기쁨, 그 자체이며, ‘너희’는 이를 그들에게 제공하는 운반체가 되는 것이니라. ‘너희의’ 사랑과 진실과 빛의 등불은, ‘창조와 빛의 신성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부름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이해’라는 신성한 불꽃을 당기게 될지도 모를 것이니라! 아멘.

피닉스 저널 제 27권, “PHOENIX OPERATOR-OWNER MANUAL” pp. 19-75 에서 발췌.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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