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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얘기들 !

★ 자본주의 , 민주주의 시스템의 오류

 

마르쿠제를 억압한 자본주의 시스템

 

마르쿠제는 억압을 규정하면서 비판과 개혁으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근본 주장이었다. 즉 Oppression을 Repression으로 재규정했다는 것이다.⑶

oppression과 repression의 번역된 단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말하면 압제(oppression)를 억압(repression)으로 재규정하였다고 번역 할 수 있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oppression은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물적으로 현저히 표현되는 정치적인 압제를 말하고 repression은 아무도 물리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확연히 드러날 만큼 나타나게 억압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구체화되어 드러나지 않는 근본적인 억압을 말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처럼 일본인 우리민족에게 각종 규제를 가하고 투옥, 고문 등의 방법으로 억압하고 물리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oppression이라고 할 수 있겠고, repression은 눈에 보이거나 법이나 규칙으로 나타나지 않는 불편함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입시제도에서 시험을 쳐서 점수가 제일 높은 사람들만 뽑는다고 하면 성적이 낮지만 다른 다양한 능력을 가졌거나 인격이 더 훌륭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기회를 잃게 된다.

이것은 제도가 가져다주는 간접적인 억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가 이런 억압(repression)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억압을 담고 사는 사람들을 ‘일차원의 인간(One-Dimensional Man)’에서 철저히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우선 마르쿠제는 기본적으로는 역사적인 유물론의 마르크스와 입장을 같이하였다. 즉 자본주의가 시장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패턴을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영구한 법칙으로 고착화 시켜 버렸다고 주장한 것처럼 마르쿠제는 프로이드도 이미 만들어진 쾌락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필요성을 비판 없이 받아 들여 영구히 고착시켜 버렸다고 주장하였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가 필요이상의 본능과 쾌락에 대한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 억압을 마르크스의 ‘잉여가치(surplus value)’와 대칭되는 ‘잉여억압(surplus repression)’ 이라고 지칭하였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탐욕스럽고 적대적인 사회로 규정짓고 아담 스미스의 노동의 분업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생산이라는 것이 더욱 더 소외 적으로 발전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부활시키고 말았다.

결국 그는 인류에게 현대의 풍요를 가져다준 생산력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부정하면서 무덤 속의 마르크스를 부활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실존 이론은 마르쿠제에게 노동이 성숙된 개인의 실존을 확인 시켜주기는 하지만 노동 속에서는 쾌락이 중지되고 고통이 있다고 보았다. 드디어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는 더 높은 차원의 쾌락이 있다고 보았고 자신이 그것을 이끌어 내는 산파의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프로이드는 『문명과 그 불만』에서 세계대전과 같은 역사적 경험을 반성해 볼때 인간에게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면 인간간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신념을 '근거 없는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도 성적 욕구와 공격본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격렬한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마르쿠제는 문화와 문명이 원시적 인간본능, 잠재의식의 충동과 이 충동의 억제에 뿌리박고 있다는 프로이드의 명제를 빌려 현대사회가 인간의 에로스가 억압된 사회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마르쿠제는 그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자본주의가 문화적으로 풍부한 실존 형태의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생산을 제공하기 때문에 마땅히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속에는 다양한 면에서의 개인의 창의성이 딜레탕트(dilettante)적인 혹은 문화적인 이상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관능적인 에너지가 불쾌한 노동을 위하여 절제되어야하고 다만 생식 본능으로만 전적으로 사용될 것을 강조 받고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마르쿠제의 '억압’에 대한 비판은 가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그의 천재성 속에서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마르쿠제는 자본주의의 비판을 성공의 기준을 부정하고 성공한 자본주의의 질서에 대항할 이유를 찾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행복은 단순한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자유와 만족의 실질적인 구가에 있다고 하였다. 노동 자체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노동의 목적성이 시장의 세력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부과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행복하고 만족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없다고 피력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그의 저서『일차원적인 인간(One -Dimensional Man)』에서 잘 피력되어 있다.

마르쿠제는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가 사실은 전체주의적이고 국민을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발간 후 100년이 넘게 지나도록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가 폭력 없는 전체주의이며 그 속에 속한 노예들은 너무나 행복해서 자신들을 죄고 있는 굴레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에 의해 세뇌된 허위적인 욕구가 ’일차원적 인간‘을 지배하고 있지만 실상은 자본주의를 벗어난 더욱 더 문화적인 경계에 있어서 우위를 점령하고 있는 세력들 즉 대기업을 포함한 우월한 생산주체들과의 관계에 의해 통제 당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참 욕구가 추구하는 것이고 생존의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그리고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참 욕구가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허위 욕구는 자본주의 생산구조의 억압 속에서 사회적 의무나 이해관계에 의해 부과된 부담 지워진 것들이라고 하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의 모든 노동자 계층은 사회에 의해 제시된 제도와 이해관계에 의해 조정당하여 평화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일차원적 인간‘은 결국 무언의 강요에 의하여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무지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허위의 욕구를 추구하는 유형의 인간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강요된 전체주의의 부속품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마르쿠제는 서구 민주주의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치와 닮았다고 보았다. 서구 사회에서나 나치 독일에서나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욕구는 진정 그들의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들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어서 그들이 노예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나치가 만든 청년조직, 여성조직, 그리고 노동조직과

같은 히틀러 친위조직들이 앞에서 언급한 허위적 욕구를 주입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생산을 통제하는 기구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직업, 기술, 그리고 개인의 욕망까지 결정하기 때문에 전체주의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르쿠제는 상업세력이 국민들을 조정하는 것을 마취 상태(anesthetization)라고 보았고 이 상태에서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마르쿠제의 비 마르크스적 전제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을 마르크스에게서 시작 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노동자 계층은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에 혁명을 일으키는 세력이 아니라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 계층 내의 혁명적인 동력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생산수단은 엄청난 양의 생산력을 가지고 재화, 용역, 노동 그리고 레크리에이션의 획기적인 향상을 가져왔고 이것이 복지국가로 발전하게 되면서 혁명의 가능성을 붕괴시켰다는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의 문화적 다원주의가 사상의 차이를 용인하면서 사회적 관용이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공존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바로 무관심이라고 주장했다. 이 무관심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일차원적 인간』은 자본주의의 불충분함에 대한 언급이기는 하나 자본주의를 대체할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쿠제는 결국 시장집중적인 경제가 시장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인즈의 예언처럼 자본주의가 엄청난 양의 생산력을 가지고 등장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개인은 자유를 잃을 것이고 생산의 중앙 집중적 통제만이 개인의 자율을 보장 할 것이라고 믿었다. 마르쿠제는 생산성이 높은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믿지 않았다. ‘일차원적 인간’은 욕구를 조종당하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사회와 체제를 반대하는 영향력 있는 지식인 세력이 제거 되어 혁신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노동을 경제적인 활동만이 아닌 인간실존의 선천적 범주라고 간주하였다. 인간에게 노동은 자신이 완성 되어가는 인간의 자기창조 혹은 자기대상화 하는 행동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역사적이 되고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그의 결정적인 입장을 얻는 것은 단지 노동 속에서 뿐이지 그 이전의 어떤 것 속에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에 있어서 노동은 모든 사회적 형태와 무관한 인간실존의 조건이고 모든 활동성의 기초이며 인류의 보편적 본성을 발전시키는 수단이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현존하는 체제의 부정성인 노동으로 인한 노동자의 소외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이해한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를 헤겔적으로 변형시켜 역사의 흐름 올바른 비판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1920~30년대 일어난 스페인 내란이나 모스크바의 숙청 작업과 같은 세계의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파시즘의 집권은 마르크스가 주장하고 마르쿠제가 이해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그이성'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마르쿠제는 무척 궁금했을 것이고 회의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사회가 의미있게 변화하는 것을 가로막는 심리학적 장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프로이드에서 찾기 시작했다.

 

마르쿠제가 남긴 것

마르쿠제는 신좌파(New Left)와 그 명맥을 같이 하였다. 신좌파의 등장은 또한 신우파(New Right)의 등장과 시기를 비슷하게 하였다. 마르쿠제의 신좌파적 명성은 1964년에 시작하여 1968년에 최고를 이루었고 70년 중반에 소멸하게 된다. 이는 월남전의 과정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4년에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베트남 전쟁이 불붙기 시작하여 68년에 가장 치열하였고 미국 또한 이 시절은 월남전에 대한 국수적인 입장이 파견된 미군들 사이에서도 팽배하였던 시기이다.

미국도 전쟁이 끝나고 강제 징병이 종료되자 반전 운동도 점차 사라지고 사이공시가 호치민시로 바뀌고 그 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찬미했던 배부른 미국의 대학생들도 점차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 국민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벗어나려는 보트피플이 세상의 바다를 떠돌게 되자 공산주의의 승리의 결과가 그리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마르쿠제의 담론은 서서히 세상의 언저리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마르쿠제의 비판은 젊은 신지식인들에게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이었다.마르쿠제의 기여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그의 담론이 서서히 객관적으로 제도화가 되기 이르렀다는 것이다. 마르쿠제의‘해방에 관한 에세이’출간 후에는 미국이사회학 협회가 주관하는 학술회의에서는 항상 ‘억압’, ‘지배’, ‘해방’ 같은 주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계급의 착취와 같은 사회적 불평등 인종차별 그리고 성 차별 같은 것도 논의하게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문학 사회학 그리고 문화 연구에서 한 분야로 자리 잡게 된 개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차원적 인간』이 출간 된 후 노동의 창의성과 정보 산업과 엔트테인먼트 산업에서는 창의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치가 점점 더 강조되었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케인즈처럼 가시적인 제도상의 해결책은 제공하지 못했다. 그는 제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광범위한 노동 분업 없이 노동의 자기표현이 가능한 사회를 상상하였고 그 사회의 경제 조직은 중앙집중화된 전체적인 계획을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즉 경제 구조는 기술적인 향상을 바탕으로 전체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결정을 허용하고 개인 간의 차이를 수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제도적인 혹은 정치적인 해결책 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하이에크와는 크게 다른 점이 보인다. 하이에크의 필요성은 여기서 더 극명하게 대두되고 있다.

 

출처 :© 남병직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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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Jerry Muller, 'The mind and the Market; Capitaliism in Western Thought', 2003

⑷마르쿠제는 전체주의를 언급할 때 나치와 소련연방을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서구 사회를 겨냥하여 한말이고 다만 그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나치와 소련을 언급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