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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 얘기들 !

풍요한 사회의 위기

풍요한 사회의 위기

마르쿠제의 반란(1)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탄생하여 생산의 수단이 대형화가 되면서 현대사회는 새로운 풍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케인즈와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거대한 생산성을 이룰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는 1919년의 서아프리카 프린시프 섬에서 관측된 개기일식을 계기로 현대는 근대와 구분 되면서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날 관측된 일식은 반세기 동안 세상을 지배해온 직선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기초로 하는 뉴턴의 물리학과 갈릴레오 버전의 절대시간의 3차원의 종말을 고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또한 러시아 혁명의 등장으로 인류의 마르크스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던 무렵이기도 하다. 이 당시만해도 사회주의의 사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시장경제의 사상이 얼마나 큰 기여를 인류에게 할 수 있을지를 아는 사람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장경제가 어떤 걸 할 수 있는 지를 혹은 사회주의가 할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본 사람들이 그 당시만 해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제리 뮬러(Jerry Muller)의 저서 ‘The Mind and The Market’에서 언급된 '새로운 풍요(The New Affluence)는 2차 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굳이 케인즈와 슘페터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는 혁신적인 대량생산의 과제를 훌륭하게 이룩하였다. 드디어 1958년에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John J.Galbraith) 의 저서의 제목인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는 이제 미국과 서구 유럽사회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좌파와 우파의 경계를 점차 희석하고 있었다. 어떤 나라는 자본주의가 이룬 대량 생산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가하면 어떤 나라는 파시즘의 쓰라린 기억으로 인해 외면당한 급진적 우파와 경제적 번영으로 대중의 지지를 잃은 급진적 좌파가 서로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경우 50년대 까지 찰리 체플린과 저명한 핵물리학자 등을 포함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거나 처벌하였다. 이제 이데올로기는 드디어 그 종말을 고하고 있는 듯 했다.

마르쿠제의 비판

그러나 이 당시 자본주의는 오히려 사형 선고의 순간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본주의에 대한 수없는 추궁 중 가장 심했던 것은 바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태계 독일인 마르쿠제에

의한 것이었다.

마르쿠제는 1898년 베를린의 한 부유한 사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집안이었으나 그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를 지낼 정도로 유대의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종교적이기 보다는 문화를 종교로 대신했던 만큼 어린 마르쿠제에게도 문화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고를 습득하는 성장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쿠제는 그의 생애에 두 세계 대전을 경험하는데 그에게 이 전쟁들은 사상의 급진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시절을 수년 동안 보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게오르그 루카치와 하이데거에 의해 좌파와 우파의

비판이 비교적 공평하게 진행되고 있던 나라였다. 루카치의『역사와 계급의식』저서는 마르쿠제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불만과 불평을 가진 계급들을 소극성과 어리석음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가능성이라고 믿는 부류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루카치를 마르쿠제는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마르쿠제는 짧은 시장경제 활동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로부터 베를린의 고서점을 물려주었을 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그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어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가서 하이데거에게 사사 하게 된다.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의 실존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찾았다. 그는 역사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계적 과학론에 반대하여 주관적 관념론과 인간주의적인 입장을 택했다.

그는 전체적 인간의 자아실현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하여 인간일반의 입장에서 비판했다. 반자본주의적 혁명운동이 계급투쟁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서 시작된다고 그는 본 것이다. 마르크스의사적 유물론은 사적 소유를 생산관계나 소유관계의 한 유형으로 본다. 사적 유물론에 의하면 생산자를 생산수단과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분리시킨 사적소유 형태가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으로 분열시킨다.

이로 인해 계급투쟁이 발생하고 사회전체의 발전을 가져온다. 따라서 혁명은 바로 이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불일치에서 오는 계급투쟁이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실존적 입장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에 의식의 차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주관적 관념론으로 진화한 것이다.

마르쿠제는 변증법의 핵심 주장을 변화의 원동력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이는 마르크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변증법은 인식의 능력이고 인식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는데,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물들 속에는 그 스스로 부정성이 존재하는데 사물은 바로 이 부정성에 의해 자기 모순적이 되고스스로 대립하게 되어 자신 속에 내제하는 모순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던 이유도 이러한 변증법적인 변화와 발전이 그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존 자체가 변증법이고 실존의 모든 상태는 그 상태가 변하고 형성되는 가운데 사물이 다른 상태로 바뀌고 다시 스스로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서 이해된다. 사물들 속에 존재하는 부정성에 의하여 모든 사물은 자기 모순적이 되고 스스로 대립되고 그 사물들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그 속에 존재한다.

헤겔은 사물의 모순성이 바로 사물의 진리와 본질이라고 판단 한다. 즉 모순은 모든 운동과 삶의 근원이며 모든 실제는 자기 모순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순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고 모순은 당연히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며 이는

오직 사유하는 주체만이 할 수 있다. 즉 사유는 존재의 잠재성을 인식하고 부정성을 극복하여 실제에 내재하고 있는 잠재성의 실현함으로써 진리에 도달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마르쿠제는 사물의 실재성은 그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고. 스스로 다른 것과 종합이 되는 전적으로 동적인 것이다. 그는 변증법적 형태는 부정적인 것에 의해 침투된 세계이며,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과 다른 세계이고, 그 속에서 반대와 모순이 진보적인의 법칙을 구성하는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고 이 모든 동적인 움직임에 의해 세계의 참된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와 마르쿠제의 망명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의 지도아래 철학과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논문이 완성되던 1932년경에 독일이 급속도로 우경화되고 있었고 드디어 그 이듬해 1933년 히틀러는 수상으로 임명되고 34년 국민투표를 통해 나치정부를 수립하게 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유태계 좌파 지식인인 마르쿠제에게 독일 어느 대학도 자리를 주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마르크스의 사상의 연구기관인 "프랑크프루트 사회연구기관’에 관심을 두었고 결국 그들과 합류를 하였다. 마르쿠제가 그 기관에 합류하자 그 당사 소장이었던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머지 않아 곧 국가사회당이 집권할 것을 확신했고 모든 기관의 재산을 스스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제네바에 지점을 열고 그 책임자로 마르쿠제를 임명한다.

그리고 호르크하이머는 계속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 대학과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영국과의 협상은 자유주의자 하이에크에 의해 결렬되고 마르쿠제는 미국으로 최종 망명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자 1934년 7월에 마르쿠제는 뉴욕에 도착하여 신청을 하고 컬럼비아대학 근처에 새로운 연구소를 신설하여 이주를 하게 된다.

아이러나하게도 하이에크는 영국으로 가는 마르쿠제는 막을 수 있었으나 자신의 망명지이기도한 미국으로 마르쿠제의 진출은 막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그 당시만 해도 사상과 이념에 대해 나이브(naive)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자 미국 정부는 본국의 군대가 독일로 진격했을 때 현지에서 필요한 독일에 대해 정보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미국정부는 독일 출신이고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귀화한 배신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연히 마르쿠제가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는 범주에 속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르쿠제와 그가 운영하는 사회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이 새로 창설된 미국의 정보기관인 전략사무국(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에 일을 하게 되었다. 마르쿠제는 히틀러가 대중적 지지를 얻은 것에 대해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다. 특히 독일의 파시즘이 민간부문의 경제가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국익에 위배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독점적 자본주의의 태도를 고수하였는 데도 불구하고 정권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마르쿠제는 OSS가 해체되자 국무성으로 옮겨서 전쟁 후 5년간을 유럽의 핵심 분석자로 일을 하였다. 이를 두고 하버드 대학의 역사학자이자 교수인 스튜어트 휴스는 통렬히 비판을 하였다. 휴스는 마르쿠제를 너무나 명확하게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였고 미국 국무성의 정책은 모순 덩어리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마치 한국의 강정구가 국정원에서 핵심으로 일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면 될 것 이다.

마르쿠제는 국무성을 떠나서 대학으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그는 브랜다이스대학을 정년퇴임을 한 후에 University of California at San Diego⑵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적인 직위였던 것이다.

글쓴이 :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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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3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첫째는 빛이 중력장에서 휜다는 인데 이것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1882-1944)이 확인해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휜다는 증거를 일식 때 확인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일식이 일어나면 태양 둘레를 지나는 빛이 1.745초만큼 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예언을 확인하기 위해 에딩턴은 1919년 일식이 일어나는 아프리카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5월 29일 일식에 의해 나타난 별의 사진을 찍어 반년 전의 위치와 비교했다. 그 결과 태양에 가까운 별일수록 빛이 많이 휜다는 사실과 아인슈타인의 계산이 정확했음을 증명하였다. 드디어 1919년 11월 6일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는 합동으로 회의를 열고 에딩턴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맞았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런던 타임스는‘과학의 혁명-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제목으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대서특필했다.

캘리포니아 대학은 캠퍼스가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 샌디에고(San Diego)에 있는 대학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을 말한다. 이것 말고 도 UC Davis, UC Riverside, UC Berkeley 등 많은 대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