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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모음 !

『 神 의 세 계 』


세계






- 神 의 세계 -

종교적 신의 세계

들어가기전에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태초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했다는데

유일신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는가?

여호와 하느님과 유대교

하느님과 기독교

알라신(하느님)과 이슬람교

유일신의 이단들과 하느님

유대교는 왜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코란과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유일신 종교들의 갈등과 반목

3대 종교들의 삼색(三色) 하나님?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 하는가?

유일 신관에서 또 하나의 유일 신관!!

오늘날 종교들의 실상과 올바른 종교관

참다운 종교관에서 올바른 신앙생활

끝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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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기 전에-

보통사람으로서 '신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하니 한편으로는 무모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여러 선지자들이 신의 세계를 논술한 것들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거나 환상 속에서 신의 세계를 왕래하면서 보고들은 것을 후대인 들이 기록한 것이다. 후대인 들은 그들을 선지자라 일컬었으며 그들이 남겨놓은 글 또는 말을 기록한 것을 성서 또는 경전이라 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 기록을 근거로 종교를 창설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신의 세계를 계시 받고 그리고 보고 들었다는 것이 제마다 다르니 우리 보통사람으로서는 혼돈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서로가 유일신을 주장하며 네 신은 가짜 신이고 내신은 진짜 신이니 하면서 죽이고 죽는 차마 말로서는 입에 오르내릴 수 없는 사건들이 수 없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오늘날까지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 신의 계시라는 것을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알 길이 없게되고 믿을 수가 없게된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유일신이라는 것은 한갓 말장난에 불과하고 거짓말이 될 뿐이다. 내가 참이기 때문에 너는 거짓이 되는 오늘날 종교의 독선과 배타성은 의식 있는 종교인이라면 분명 지양되어야 할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에 영계를 가본 것도 아니고 직접 계시도 받아 보지 못한 필자지만 유일신계열의 종교경전에 근거하여 그들이 기록해 놓은 그것들을 예거하면서 감히 <신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다음 순서에 따라 그들 종교의 진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 태초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했다는데
오늘의 인간들은 하느님을 변조하고 있다
* 유일신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는가?
* 여호와하느님과 유대교

* 하느님과 기독교
* 알라신(하느님)과 이슬람교
* 유일신의 이단들과 하느님

* 유대교는 왜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1). 구약성서의 유대교와 기독교
2). 신약성서의 기독교와 유대교

* 코란과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1). 이슬람교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2).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슬람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3). 오늘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 유일신 종교들의 갈등과 반목

* 3대종교들의 삼색(三色)하나님?
1) 유대교의 하나님
2) 기독교의 하나님
3)이슬람교의 하나님(알라)

* 하나님은 살아있는가?
1) 삼대종교 하나님의 공통점
2) 삼대종교 하나님의 차이점
3) 삼대종교의 신관에 대한 결론

* 유일신의 신관에서 새로 나온 유일신
1) 삼대종교 유일신의 메시아는 누구인가?

2) 유일신 종교들의 유일신 예언자는?

* 오늘날 종교들의 실상과 올바른 종교관
1) 물질만능에서 인간의 범죄
2) 종교의 본질과 목적
3) 물은 물일뿐이다

* 참다운 종교관에서 올바른 신앙생활
1) 참다운 종교관
2) 올바른 신앙생활

* 끝맺는 말

*참고한 경전은 1985년 8월 15일 성서교재간행사 발행 관주 주석성경(신구약전
서)과 이슬람 국제출판국 발행 한글번역본에 의하였음을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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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신의 세계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인성과 신성을 살펴보겠다. 인성을 두고 그 본성 자체가 착하냐 아니면 악하냐하는 구구한 논쟁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명문화된 것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다. 다른 논자 중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학자들도 있었으나 대개의 유교문화권에 있는 국가들은 맹자의 성선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즉 하늘이 명부 한 것이 성이므로 그 본성에 있어서의 인성사단(人性四端=仁 義 禮 智)논을 근거로 하여 인성을 순선무악(純善無惡) 한 것이라 했다. 그러한 인성이 육식(六識=眼·耳·鼻·舌·身·意)으로부터 사물에 접해졌을 때 칠정(七情=喜·怒·哀·樂·愛·惡·辱)에 얽매어 착하게도 될 수 있고 악하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기독교와 불교는 인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규명도 필요할 것이다.

먼저 불교는 심즉불(心卽佛=마음이 곧 부처다)이라 했다. 부처가 착하다 혹은 악하다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가 인간의 본성을 선량하게 보고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원래 부처였던 인간들의 본성이 육도(六道=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중생으로 윤회하면서 인과에 얽매여 혹은 좋은 인연에서, 혹은 좋지 못한 인연에서 나타나는 그 결과가 좋거나 아니면 좋지 못하게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심성이 착하게 또는 나쁘게 보일 뿐 그 근본 마음은 부처였기에 각성(覺性)만 하게 되면 모두 성불(成佛)할 수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가 인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인간창조부터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청조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그리고 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생령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행위언약 즉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한 것을 어기고 마침내 뱀의 꾀임으로 인하여 선악과를 따먹게됨에 하나님은 그것을 정죄하여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하였다.

그 정죄로 말미암아 인간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원죄를 가지게 되었고 그의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 그 자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죄인이 되어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인간창조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듭나라느니 구원을 받아야한다느니 하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로 보아 기독교 역시 본래의 사람 즉 죄인이 되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심성은 선(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계 삼대 종교인 불교, 유교, 기독교는 성선설(性善說)을 교리로 하고 있다. 다만 육식에서 칠정으로 나타날 때에 악하게도 되고 착하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인과에 연유된 결과로 악하게도 되고 착하게도 되며, 또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의 행위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원죄로서 유전되었을 뿐 본죄여하에 따라 악하게 될 수 있고 착하게도 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 모두가 그 본성, 인간본래의 심성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 종교의 교리에 따라 방법은 다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인성이 이처럼 성선 이었다고 한다면 신성(神性)은 어떠한가? 혹자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이미 죽은지 오래다는 등 구구한 억측들을 말한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신성(神性)에 있어서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논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신성의 선악여부에 대해서 한번 논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신관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고 나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첫째 서양문화권에서 유일신 논자들은 오직 한 분만을 신이라 하고 그 외의 신들은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동양문화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신론주의자들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신을 인정하고 숭배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유일신론 계열의 종교에서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애굽기 20:3) 이 말씀은 하느님 스스로가 유일신을 부정하고 자기 외에도 신이 있다는 즉 다신(多神)을 인정한 것이며 다만 여호와 하느님 당신만을 섬길 뿐 나 외에 다른 신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대로의 빈부귀천이 있고 위계질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면서 본론으로 들어가 신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선 기독교의 신 즉 하느님(하나님)부터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에서부터 여러 가지 행사에 이르기까지 희생(犧牲=제사 때 바치는 제물-소 되지 등 생물)을 바치지 않을 때가 없다. 이로 미루어 혹자는 신의 식성이 육식성인가 아니면 잡식성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이 피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피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 노아의 홍수사건을 읽다보면 인간도 아닌 하느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가혹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당신이 사랑하여 만든 인간인데 비록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겨우 종자만 남겨놓고 그렇게 참혹하게 살생을 할 수가 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기왕에 그렇게 참혹하게 말살하려면 아예 전멸시키고 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의롭고 완전하고 죄 없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원죄 있는 인간의 씨를 남겨서 중생이니 구원이니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그로 말미암아 죽이고 죽게 하며, 당신의 아들까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 가도록 했는지 창조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 을 뿐이다.

노아 때의 살생의 경관을 한번 상상해 보라! 물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익사하는 인간들과 그(원죄)와는 아무상관도 없는 모든 동물들도 죽임을 당했다. 우리 속담의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맞는다는 격으로 동물들조차 겨우 종자만 남겨놓고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입장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기에 역지사지를 해보아도 '차마'하는 생각이 들며 신의 세계와 그들의 심사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임을 깨닫게 된다.

행위언약을 위반했다고 해서 다른 창조물과 달리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든 사람을 한번의 충고도 없이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수 있었을까? 원죄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그 자손 대대로 유전하게 한 창조자 하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뿐인가? 노아 홍수 이후에도 바벨탑사건과 소돔성의 멸망 같은 비참한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동안 유일신을 놓고 분파가 되고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으로 갈라져서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되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으로서 그러한 것들을 그렇게 방치했다는 것이 당신 한 분을 섬기면서 섬김을 경쟁이라도 시키려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민의 어버이가 되신다는 하느님이 그것들을 보고도 방치했다는 것에 사랑의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공(陶工)들이 도자기작품을 잘못 만들었을 때에 냉정하게 부숴 버리고 다시 만드는 것은 보았어도 사람 밥그릇으로 만들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개밥그릇으로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전지전능하시다'라는 하느님도 인간창조에 있어서 실패작임을 후회하셨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6=6-7)

유일신이라는 하느님이 이와 같은데 다른 신들은 어떠한지 한번 살펴보자. 토속신앙으로 서낭제나 산신제, 심지어 무당굿에서도 희생은 있게 마련이다. 어떠한 곳이든지 신을 섬기는데는 희생이 수반된다. 그런데 왜 그들의 제사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하는가? 신들이 희생을 좋아해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인가?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선악에서 과연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선악에 관한 결론의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선악은 천륜과 인륜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천륜과 인륜 이전에는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이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서 어디에서나 선악의 판단이 다 똑같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을 선악으로 논 하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선이라면 죄의식을 느끼지 않지만 악이라면 죄의식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웃 나라 일본의 풍속을 예를 들어보면 일본 사람들은 사촌과 혼인을 해도 아무런 도덕적 또는 양심적 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동성동본만 되어도 법적(지금은 다르지만)으로도 그렇거니와 윤리적으로도 혼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양심적으로 가책을 받는다. 도덕과 윤리 면에서 본다면 동서고금을 통해 선과 악, 유죄와 무죄에 혼돈을 일으킬 것이 너무나 많다.

요즈음 TV 프로그램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자나 치타 등 육식동물들이 광활한 초야 한편에서 초식동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면서 새끼를 돌보며 혹은 암수가 짝짓기를 위하여 사랑을 나누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한참 보다보면 육식동물들은 이들 초식동무들의 울대를 물고 숨통을 끊으려하고 초식동물들은 발버둥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그 광경은 보는 사람에게는 목불인견일지 모르지만 울대를 물린 나이 어린 사슴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이고, 사자나 치타의 입장에서 보면 식량을 구해 주린 창자에 허기를 면하고 새끼들을 먹어 살리려는 생존의 한 방식인 것이다. 만약 육식동물들이 그렇게 사냥을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하면서 역지사지해보면 각자의 입장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생명체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하는가하면 도대체 선과 악에 있어서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까지가 악인가 하는 점이다. 사슴 편에서 본다면 제가 살겠다고 남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은 악이라 해야할 것이요, 사자나 치타 편에서 본다면 먹고살려니 할 수 없지 않느냐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그렇게 강식약육(强食弱肉)으로 대어(大魚)는 중어식(中魚食)하고 중어(中魚)는 소어식(小魚食)으로 창조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렇게 잔인 무도한 창조자를 우리 인간들이 존경하고 숭앙해야하는가 하는 의문에 먼저 빠지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신의세계에서는 희생과 비정한 심성의 선악관념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관념과는 다르단 말인가? 마치 속세의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같이 그 입장에 따라서 말이다. 역대 성현들은 인애와 자비 그리고 사랑을 외쳐 왔다.

실화인지 야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노자와 공자가 이런 대화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하루는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삼강오륜과 인·의·예·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이 세상을 태평하게 하려면 이와 같이 인륜과 도덕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자문을 했다. 그랬더니 노자 가로대 "가서 잘 해보시오"하고는 공자가 돌아간 다음에 혼자말로 "저 사람 또 죄인 많이 만들겠군!"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이 있기에 죄가 성립되고 윤리가 있기에 도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갓난아기의 행동이 순진하다든지 심성이 착하다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 아기의 행동을 도덕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갓난아기의 행동은 심성 그대로일 뿐 인간이 정해놓은 윤리에 속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악은 윤리이전의 것이기에 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신에게는 인륜이 아닌 신륜(神倫)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신의 세계에서 신의 윤리라는 것이 없다면 그 또한 영계가 존재할 수 없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란 질서를 말하는 것이기에 어떠한 부류에서나 사회생활(공동생활)에 있어서는 질서가 없을 수 없다.

심지어 일반 동물에 있어서도 질서는 있다. 하물며 영계에서 위계질서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 역시 선악은 존재할 것이다. 다만 그곳의 선악이 우리 인간들의 선악과는 차원이 다를 수도 있고 관점이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의 선이 그곳의 악이 되고 그곳의 선이 이곳의 악이 된다면 이것은 크나큰 착오를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신에게 선을 베풀려면 사람은 악을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이 희생을 좋아한다면 사람은 살생을 해야하고 그 살생된 희생을 놓고 신에게 복을 빌어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한 생명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선악으로 볼 때에 결코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한 생명을 죽여야하니 어찌 잔인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신의 농간에서 자승자박하는 셈이 되고 만다.

선악하고는 무관한 것이지만 신에게 묻고 싶다. '그대들은 왜 그렇게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는가?'하고. 절에 가면 무슨 제 무슨 제 하면서 바라춤에 목탁소리, 요령소리, 종소리, 거기에다 염불소리, 장삼 가사바람에 깜박거리는 촛불, 향에서 나오는 연기, 절을 십 배 백 배 하면서 무엇인가 중얼대는 축원소리, 한참 듣다보면 그야말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진다.

다음은 교회로 한번 가보자. 교회에서 가장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부흥집회에 참석해보면 시끄럽고 요란하기가 절에서 제 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처음에는 피아노 오르간 정도로 찬송가를 부르다가 조금 지나면 징이 등장하고 때에 따라서는 꽹과리와 북이 등장할 때도 있다. 거기에 '쉬알라 쉬알라 쑷쑷 랄랄라'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까지 합창을 해놓으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뿐만 아니라 회개의 눈물인지 참회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아수라장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두 손들고 엉덩방아까지 찧어대면 이것은 금상첨화라 해야할지 아니면 설상가상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뿐인가. 목사님의 성경 말씀은 부흥회장을 숙연하게 만들고 신도들의 엉덩방아를 더욱더 높여준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하는 이 한 구절로 헌금독촉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교회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다음은 무당 굿하는 곳으로 가보자. 해괴망측한 탱화에 너저분한 천 조각으로 요란하게 꾸며놓은 굿마당에 들어서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이 섬뜩해진다.

무당은 천왕대신, 지왕대신, 무슨 대신하면서 온갖 잡신을 다 불러댄다. 꽹과리, 징, 북 할 것 없이 마구 두들겨 대면서 땅이 꺼져라 하고 뛰어댄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주문을 외면서 중얼거린다. 굿하러 간 사람은 잡고 있던 삿대가 흔들리면서 신이 내린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절을 하면서 소원성취를 빌어댄다.

옆에 앉아 한참 있다보면 진짜 정신이 나가버린다. 신들이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좋아한다면 그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것도 신성(神性)에 관계가 있는 것인지, 있다면 신의 성선(性善)에서인지, 아니면 성악(性惡)에서인지도 알고 싶다. 인간들은 사람에 따라 혹은 때에 따라 시끄러운 것을 또는 조용한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아무튼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참으로 불가해한 것이 신성이다. 인간들은 신을 전지전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신성은 과연 능선능악(能善能惡)으로 종횡 무진한 것인지 그 본성을 밝히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신에 대한 희생과 찬양 등 인간의 행위들이 범죄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고, 구원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은 한갓 구두선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악을 범했든 선을 행했든 상관없이 그들이 비는 소원이 성취된다면 신들은 선신(善神)이 아니라 악신(惡神)이 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방기하고 있으니 신들 또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의세계는 없는 것과같다. 무신(無神)의 세계에서 유신(有神)을 믿는 종교 또한 허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은 사기행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 태초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했다는데 -

태초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했다는데
오늘의 인간들은 하느님을 변조하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되어있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그리고 다섯째 날에 와서 천지창조를 마치셨다. 그 다음 여섯째 날에 와서 동물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북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렇게 하여 천지만물이 창조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창조됨에 이 세상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게되었다 라고 성경 첫머리에서 창세기는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교고전인 시경(詩經)에는 "하늘은 만민을 낳으셨나니 만물에는 하늘의 법칙이 있나이다. 만민은 변치 않는 본성을 지녔나니, 아름다운 덕을 좋아 하도다(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彛 好是懿德)"라고 하였다. 또 "상제시여! 위대하시나이다. 아래로 백성을 다스리나니 당신을 두려워하오나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삶이여 하늘은 만민을 낳으셨나이다(蕩蕩上帝 下民之酸 疾威上帝 其明多酸 天生烝民)"라고 하늘의 인간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행위언약을 어기고 마침내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해서 원죄를 짓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목적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은 오간 데 없어졌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나오면서부터 하나님은 한 낱 기복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은 기복의 구걸자가 되었다.

이처럼 인간이 타락하면서 생긴 기복신앙 때문에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미끼삼아 치부를 일삼기도 한다. 급기야 오늘에 와서는 하나님을 변조(變造)하다못해 일신상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아들을 못 낳는 것도 하나님의 탓이요, 길을 가다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린다. 또한 교회라는 집단을 이용하여 상품거래의 매개처로 활용하기도 하고 거대한 교회당회장을 세속 사람들의 개인재산상속 하듯이 부자(父子)상속하며 세습을 하는 부끄러운 오늘의 종교현실이다.

2001년 1월 6일자 KBS 저녁뉴스는 2003년경에는 유전자 조작으로 성별, 성격, 체격, 체력 등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기를 출산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보도를 전했다. 이와 같은 첨단과학의 시대에 살면서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맹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러한 신앙을 올바른 믿음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어느 날 필자가 목격한 사실이기에 오늘의 신앙현실을 경고하는 심정에서 여기에 옮겨본다.

1982년이나 1983년경으로 생각이 되는데 필자가 시골에서 양토장(養 場)을 경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같은 마을에 양토업을 하는 착실한 한 가정이 있었다. 그 집 부부는 신도 백여 명이 되는 자그마한 시골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있었는데 그 집 내외가 다 집사직분으로 남편은 교회에서 많은 봉사활동도하고 내외가 매일 다같이 새벽기도를 다니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집 부인은 항상 잠이 부족해 피로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여름이면 더운 대낮을 피해 아침 일찍이 산으로 들로 풀 베러 나갔다가 낮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는 잠시동안 오수를 즐기면서 피로를 풀었다. 당연히 양토장 청소라던가 종토 교미 등 자질구레한 내부 일은 부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남편은 항상 '오전 선선할 때 종토 교미를 시켜 놓아야합니다'라고 부인에게 말하고는 풀을 베러 나갔다. 으레 잘 했으리라 믿고 있었지만 풀 베고 돌아와서 때로는 확인도 했다. 그때마다 부인은 예! 라고 하기에 남편은 안심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매일매일 거듭되는 집안일 하랴, 토끼 밥 주랴 하다보니 새벽기도 갔다온 피로에 잠시만 쉬었다가 한다는 것이 깜박하고 졸게 되었고 그만 아침나절 선선한 시간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미루다보니 토끼교미를 시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상의 이야기로도 이 댁의 토끼 번식상태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토끼의 생리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토끼는 30일마다 주기적으로 약 3일정도 발정(교비가능)이 오는데 제일 적정 일이 발정 후 2일정도가 된다. 그 시기를 놓쳐버리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하기에 가히 매일이다시피 암놈의 발정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여름철 한낮에 더울 때에는 수놈이 움직이지를 않기에 오전 중에 교미를 시켜야 하는데 그것도 가장 적절한 새참 때가 아니면 배가 불러도 안되고 너무 시장해도 이놈의 수놈이 움직이지를 안는다. 이와 같이 암수모두가 생리에 유별난 수백 마리의 토끼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집 남편은 부인이 잘하고 있으려니 생각했고 또 열심히 새벽기도까지 했으니 하나님의 은총으로 잘 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토끼번식은 잘되질 않았고 양토장은 점점 망해 가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 남편생각으로는 이렇게 양토장이 망해 가는 것이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라 믿고 새벽기도에 주일마다 철야기도를 하곤 했으나 하나님의 시련은 고사하고 양토사업은 점점 더 망해갔고 결국은 그 곳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정말 불쌍하고 한심한 믿음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어다보면 한심하기가 마치 예수당시 성전 안에서의 비둘기 장수와 돈 바꾸는 행상들의 행세와 같은 우상숭배의 시대가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고, 종말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갖게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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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신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는가? -

유일신 신앙을 하는 종교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하나님, 알라신)이 지금도 만사를 주관하시고 매사에 역사 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유일신을 신앙하는 종교인들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각각 신의 호칭과 개념, 개성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무엇으로, 어떻게 해서 유일신을 정의하는지, 그 종교지도자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 코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말하는 유일신은 야훼하느님, 여호와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나 알라신이라는 칭호로 각각 다르게 불려지지만 오직 한 분인 그분이다. 따라서 그 대상은 같은 신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유일신은 각자 종교를 창시한 선지자에 따라 그 개념과 신성(神性)에 있어서 관점과 해석이 다르다.

이들 종교에서는 각자 자기가 섬기는 신이 유일신이며 다른 사람이 섬기는 신은 가짜 유일신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네들의 경전 외에는 위경(僞經) 즉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유일신 종교들은 유일신파장이 천파만파로 내려오면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하는 이 계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자의 관점과 해석으로 경전의 조작설을 주장하며 심지어는 사탄운운까지 하고 마침내 자기네끼리 성전(聖戰)이라는 허울을 내세워 죽이고 죽는 사태가 지금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유일신이라는 말은 정당한가? 또 유일신은 전지전능한가? 그리고 유일신을 주장하는 그들 종교는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 필연코 글자 그대로 유일신일진데 이처럼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진짜 유일신을 섬기는 한 종교만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러한 능력을 보여 주지 않은 신을 어떻게 전지전능한 유일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유일신이 지금도 살아서 만사를 주관하고 역사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자의 말처럼 '신은 이미 죽은지 오래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늘의 유일신 종교현실은 그들 우두머리들의 조작에 의한 하나님의 변조행각이라고 해도 가혹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의문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불신만을 조장하면서 헤어나올 수 없는 시궁창으로 빠져만 들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필자는 유일신 신앙의 종교들의 경전을 비교분석 하고 고증으로 고찰하면서 유일신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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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하느님과 유대교 -

유대교를 알려면 그 시발점이며 동시에 중심점이 되는 '출애굽'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앞서 그 배경인 창세기를 알아보자, '태초에 하느님이 육일간의 이 천지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렇게 해서 주야가 생기고 바다와 육지가 생기면서 시간과 공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하느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자기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오늘날 인간들의 시조이다.

이렇게 이뤄진 우주삼라만상을 그것을 다스리라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하느님의 저주 속에 인간에게는 원죄라는 유전형벌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인간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그의 아들 형제들은 서로 죽이고 죽는 골육살상이 벌어졌다. 그렇게 저주받은 인류는 여러 자손들이 번성함에 그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하는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여호와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새 세계를 위한 준비로서 일어난 것이 물의심판으로 노아의 방주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노아의 아내와 아들 및 자부 그리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 각기 암 수 한 쌍씩을 방주에서 목숨을 구하고 홍수가 끝난 다음에 방주에서 나와 새 세상이 펼쳐졌다. 그러나 노아와 하느님과의 언약을 노아의 후손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음에 죄악이 창궐하게 되고 마침내 바밸탑 사건이 일어나고 그 다음으로 유황과 불의 비로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하였다.

이러한 역경을 넘기면서 노아로부터 10대에 해당되는 아브라함에 이르러 그의 자손 중에(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이슬람교를 받드는 아랍족들의 조상이라함)부인이 낳은 이삭은 리브가라는 친척 처녀를 아내로 삼고 그 사이에서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얻었다. 이들 쌍둥이 중에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면서 외사촌 자매와 그들의 몸종들에게서 모두 열두 명의 아들을 얻었으니 이들이 소위 말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들이다 이들 이삭의 가족들은 흉년을 만나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이주하여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이 이집트에 정착한 이후 400년이 흘러오면서 그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 당하는 것을 야훼 신은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서 구출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이집트 왕 바로가 그 인력을 그냥 내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모세는 야훼 신의 능력으로 열 가지 재앙을 보인 후 히브리인들과 함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흥해를 건넜지만 야훼 신이 지정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곧장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때 이미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시내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받아오기도 하고 그후에 야훼 신과 맺은 언약을 통해 자신들이야말로 야훼 신이 택한 백성이라는 이른바 '언약궤'가 야훼 신의 함께 하심과 언약의 상징으로 주어졌다. 이처럼 출애굽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법, 새로운 민족, 새로운 자의식, 새로운 신관, 새로운 종교를 제공한 최고의 중요한 사건이다

이렇게 해서 여호와하느님은 이들을 선택하고 구원하셨다. 이 때 선택되어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종교가 유대교이다. 그들의 경전은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구약성경을 말한다. 그들의 유일신 사상에서 신은 오직 한 분밖에 없고 다른 신들은 다 우상이며 그 신들을 섬기는 것이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 예언자들은 다만 여호와하느님의 말씀 그 율법의 계약만이 유일의 소망으로 이 계약의 말씀은 현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 메시아를 보내어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세계를 이룩할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믿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는 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저들을 불행에서 구원하여 모든 불의와 악을 제거하고 부귀와 자유,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는 신념에 신비적이고 종말적이며 내세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유대교의 양대 지배층에 속하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분류되면서 전자는 극단의 쇄국주의자들로 대중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법사들로서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며 그것을 전통적으로 해석하여 천사와 부활을 믿어 왔는데 그들 율법주의는 종교의 경화를 초래하여 결국 형식화된 종교로 전락되고 있었다.

후자인 사두개파는 하나의 귀족 당으로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고 모세의 5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전통을 부인하여 내세나 부활을 오경 외의 것으로 배척하면서 그들이 당시의 정치, 종교, 사회적인 기구에서 백성을 착취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한 양대 계파의 와중에서 대부분의 백성들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마치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이 불쌍한 무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약속된 대망의 메시아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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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과 기독교 -

정치, 경제, 사상, 종교적으로 불안한 가운데에서 유대교 일반교도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그 시기에 약속된 대망의 메시아가 오셨다. 그러나 오신 그분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그런 분이 아니었다. 그 오신 분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는 새로운 종교가 또 하나 생겼으니 바로 오늘의 기독교이다. 유대교의 구원관 즉 메시아사상은 메시아는 고난받는 분이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대적을 물리치고 최후의 심판이 내리면서 유대의 구세주로서 여호와하느님이 지배하는 세계가 이 땅에 왕국을 세워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나팔을 울리면서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유대의 구세주 왕으로 오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한갓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난 천민의 아들이 메시아로 오시었으니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 전도를 시작으로 온갖 기적을 일으켰고, 그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말 한마디로 살아서 일어나게 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게 하였고 수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그 중 오병이어(五餠二魚=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은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는 기적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를 사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赦)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중풍병자에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다.

그리고 위선자를 책망하시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라 하시고 "저희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하는 것일 뿐 가식이며 나아가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하시고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하였다.

또 예수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이와 같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핍박하면서 군중들은 그를 따르고 민심은 소요해지니 그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궤계(詭計)로 잡아죽이려고 의논을 하였다. 그 때에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가롯 유다가 은 삼십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기로 하고 그 기회를 찾았다.

그 때 마침 유월절 첫날 식사 날이라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이 시작되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하시고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 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고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謝禮)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言約)의 피니라"하셨다. 그것이 마지막 만찬이 되어 오늘 날 기독교의 성찬예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화체설, 영감설, 기념설 등으로 교파마다 이설이 분분하다.

그리고 감람산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때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하시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잠시 후에

두 번째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기도를 마치고 얼마 후에 유다로 하여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부터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를 잡으려할 때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한 성경(히브리어성경=구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 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하시고 잡혀감에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다.

이로서 예수는 예정된 것대로 십자가에서 공생애를 끝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 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모든 일의 증인이라"하시고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하시고 승천하셨다. 이로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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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신(하느님)과 이슬람교 -

A. D. 570년 메카에서 태어난 모하메드는 유복자였다. 6세 때에 그의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다가 25세에 15세 연상의 거부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하였다. 그 당시 아랍 왕국에는 기독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동방 정교회는 히자즈의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은자들로 대표되었고, 유대교 신자들은 알 메디나, 예멘, 아랍 공화국, 그 밖의 곳에서 강세를 보였다. 모하메드가 삶의 어떤 시기에 탈무드적인 원천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흡수했고 모종의 기독교리와 접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러한 그가 나이 약 40세가 될 때(A. D. 610)부터 천사 가브리엘에 의하여 23년간 타계(A. D. 633)할 때까지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시(수라)받은 것을 모은 것이 오늘의 이슬람교 코란(큐란)이 그것이다. 코란의 가장 초기 계시들은 개념의 현저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알라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도덕적 반응을 촉구하고, 심판의 날을 예언하며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 등 처음 보기에는 대단히 감각적인 것 같은 낙원의 즐거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메카에서의 모하메드에 대한 반응은 미미하였다. 그는 동향인들에게 참된 하나님을 가르치고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 경고했으나 거부당한 예언자에 불과했다. A. D, 622년, 모하메드는 추종자 약 200여명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 곳 주민들과 순례자들이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이고 그를 초대함으로 이러한 도피(헤지라)는 모하메드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이슬람교의 기원이 되었다. 그는 곧 메디나에서 정치가, 입법자, 재판관으로 즉 새로운 신정(神政) 정치의 대변인뿐만 아니라 행정관이 되었다.

모하메드는 메카 후기와 메디나 초기의 이슬람법에서 유대교도나 기독교 및 일신교도에 대해 종교상의 관용을 베풀었다. 모하메드는 자기에게 계시된 것이 자기 이전의 일신교 예언자들에게 내려진 계시를 확인하는 것이라 믿었기에 유대교도를 계시 받은 경전의 백성으로 생각하고 유대교의 제도를 채택하였다. 메디나 초기에는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토록 하고 유대교의 1월 10일(속죄일) 단식 일의 종교행사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대교는 정치적으로는 이에 동의하는 듯 했으나 모하메드가 진정으로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이며 예언자인가 하는 점에서는 그들의 성서해석을 통해 모하메드를 인정치 않으려 했다.

유대교로부터 거부를 받은 모하메드는 유대교에 반격을 가하였다. 예배방향을 아브라함이 세운 카바신전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이슬람교를 아랍의 전통 위에 확립시켜 세계적 종교를 이룩하려는 것이고 유대교와의 결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코란에 강조되어 계시된 내용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신전을 건설하여 이를 알라께 봉납했고, 그 자손(아랍인) 가운데 한 사도가 나오길 간청했다는 것이었다. 모하메드가 일어난 것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도 기독교도 아닌 하니프(순수한 종교의 신도, 순수한 일신교도)이며 그의 신앙은 이슬람이었다. 모하메드의 가르침도 아브라함이 믿는 일신교의 부활이라 하였으며 코란은 그 계시가 모세나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순수한 아브라함의 종교복원으로서의 이슬람의 성격은 모하메드의 구약성서에 관한 역사적 객관적 지식에서 도출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코란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본래 옳은 성전을 잘못해석하고 그 일부를 조작하거나, 감추었다고 비난함으로서 유대교의 정통적 해석에 의거한 비난을 다른 차원에서 되받아 쳤다.

모하메드는 소위 한다꾸(참호)전투라 하여 627년 3월에 시작된 쿠라이쉬 부족과의 우후드 전투에서 여러 차례나 곤혹을 치렀으나 그와 그 움마를 지상에서 말살할 수 없었다. 쿠라이쉬 부족연합군은 다시 7천 5백 명의 부족 연합군으로 메디나 대 포위작전을 행했으나 모하메드의 3천여 군사의 참호를 못 넘고 작전이 실패하자 결국 메카로 돌아가게 되었다. 연합군이 철수하자 모하메드는 곧 유대교도인 꾸라이쉬 부족을 처형하였다.

(서기) 630년 1월, 이슬람 군은 카바신전의 우상과 메카시내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여 이교(異敎)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모하메드가 아랍의 유력한 쿠라이쉬 부족을 정복하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부족이 메디나에 사절을 보내 맹약을 맺었고 이슬람교를 수용하였다. 그후 632년 모하메드는 순례를 마치고 수개월 후 세상을 떴다. 이 때의 순례가 선례가 되어 그 순례양식이 오늘날에도 답습되고 있다.

신흥세력인 이슬람은 정략적이고 영토확장을 꾀해왔던 서구세계의 공세로부터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이 자기방위를 하면서 근접하는 그들의 방위선을 확장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교도들은 프랑스 침공을 감행하여 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 이래로 그리스도교도는 12세기에 걸쳐 이슬람을 증오하고 비난하고 공격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일신교이지만 크리스트교가 걷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 믿었기 때문에 두 종교는 신앙의 시대에 있어서 완전히 상반되었다. 즉, 한쪽이 내면적인 신앙임에 비해서 한쪽은 보편적인 운동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트교가 정교분리(政敎分離)주의라면 이슬람교는 신정주의(神政主義)이다.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태복음 22: 21)는 말로써 통치권과 종교를 분리하고 있는데 반해 코란은 '...너희가 사람들 가운데에 정의로써 판단하여 신뢰받을 수 있는 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을 주어라.'(코란: 4-59 =주: 무슬림은 국가의 우두머리와 행정을 위임받을 사람을 선출할 때에는 직책에 가장 적합한 자에게 투표하라고 국민에게 명하고 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이슬람은 통치권이 종교를 떠나서 성립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신정주의란 무엇인가?.

첫째, 이슬람 정치 이론의 기본 원칙은 유일신관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모하메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 국가의 본질과 성격은 세속적인 대 주권의 원칙에 절대성을 주지 않고 신의 주권 원칙에 입각한다. 국가를 운용 통치하는 자는 갈리프(신의 대리인)로 존재한다.

셋째, 이슬람 국가의 목적은 예언자 모하메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건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서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의 뜻에 걸맞은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데 있다.

넷째, 이슬람 국가의 통치목표는 보다 공동체적이다. 모든 행위는 개인차원이 아닌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사회 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다섯째,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 국가 내에서의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는 전체 공동체로서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

그러나 이슬람교라고 해서 이단 종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라비아의 원시이슬람은 다른 여러 민족을 정복하면서 많은 종교와 사상에 부딪쳤다. 그리고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몇 개의 이단적 유사 파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약간의 이단적 유사 파라 하더라도 '코란'없는 이슬람은 있을 수 없으며 순나(모하메드의 언행)에 따르지 않는 이슬람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최종의 종교였으며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 아닌 정교일치의 단일유기체였고, 또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문화적 총체운동으로 반 외세, 반 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 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었다.

근세에 들어와서 2차대전이 끝나고 1947년 유엔이 아랍인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고 이듬해인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무슬림형제단은 당시 폭발직전의 아랍대중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극단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 반제국주의와 반 이스라엘타도를 외치며 그들과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한 극렬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8년 말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들의 지도자인 아산알반나마저 암살되었다. 이제 형제단은 지하로 숨어들면서 극단주의의 상징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들을 급진적 원리주의자라고 부른다. 오늘의 이슬람세계는 이미 12억이라는 인구를 가진 문화덩어리이자 이슬람국가로서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만도 55개국에 달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이슬람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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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신의 이단들과 하느님 -

모든 종교들이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일신 종교들이 유독 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예거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다. 이 종교들은 모두 오직 한 분이신 그 분을 믿고 같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각자 정통을 자처하다보니 나 외에는 모두가 다 이단이라고 하며 이천여 년을 지나오면서도 아직까지 그 싸움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같은 그분을 섬기는 유일신 사상에서 이루어진 종교라면서 시대가 다르고, 종교 창시자가 다르고, 교리의 일부가 다르고, 그들의 지역적 여건에 윤리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가 정통과 이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편협한 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 종교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하기로 하고 우선 국내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단종파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단종파비판』(異端宗派批判-朴英官 博士 著)이라는 책자에 의하면 "본서에서 취급된 이단종파들을 다음 몇 가지 신학적인 전제로부터 비판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첫째, 성경을 가감(加減)하면 이단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66권으로 된 하나의 책이고 완전영감(完全靈感)된 것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경 자체가 자증(自證)하고 성경의 내적인 역사로 입증된다. 역사적 기독교회는 초대교회(初代敎會)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가감(加減)하면 기독교회의 이단으로 엄단하여 왔다. 왜냐하면 성경 외에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제한하거나 부인하면 이단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 자기의 백성을 택하셨고,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 인격적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제일원리(第一原理)요, 주제(主題)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요, 구원의 방편이며, 구속의 사역을 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기독교회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증거한 유일한 유형교회이며 백성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에서 벗어나면 기독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定罪) 하였던 것이다.

셋째. 지금도 계속적 계시(Revelation)와 영감을 주장하면 이단이다.

우리는 이미 계시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으며 그것으로 신앙생활에 충족함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더 이상의 계시와 영감을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이제는 주어진 계시를 성령의 조명(lllumination)을 통해서 깨닫게 하고 자기의 백성들에게 역사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계시와 영감을 직접 받는다고 하면 기독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 할 것이다.

넷째. 비윤리적(非倫理的)이요, 반사회적(反社會的)이고, 반국가적(反國家的)인 집단은 이단이다.

역사적 기독교회는 이 땅 위에서 성경적인 윤리와 도덕을 가지며, 더 나아가서 일반 은총에 의한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가져 그들에 대한 철저한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앙적 원리를 주장하면서 퇴폐적이고 세속적이며 부도덕한 윤리를 조장하거나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거나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은 신앙집단은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다섯째. 혹세무민을 주장하면 이단이다.

역사적 기독교회는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성경적인 올바른 종말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들을 미혹하여 천재지변과 말세적 징조를 강조하여 성도들과 백성들을 유혹하는 혹세무민의 원리를 부르짖는 집단을 기독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한다.

대부분의 이단종파들은 잘못된 종말론에서 출발하여 비성경적 종말론에서 꽃이 피고 끝내는 혹세무민의 종말론에서 말썽을 빚어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규정으로 이단을 정죄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기독교회의 이단이 본서에서 취급된 이단종파만이 아니고 누구든지 전술한 전제조건에 저촉되면 이단이며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그리고 그 밖의 기독교회에 속할지라도 그가 이상의 윤리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해당하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본서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이단종파들은 약 40여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 이단종파들의 창시자들이 개신교 목사들이 아니면 장로라는 것이 주목하게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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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교는 왜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

1). 구약성서의 유대교와 기독교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히부리어성서(구약성서)를 계승하였는데 유대교는 신약성서를 왜 수용하지 아니하고 이단으로 규정하였는가?, 이것을 기독교 입장에서 본다면 한마디로 유대교라는 썩어 가는 고목에 기독교라는 새싹이 돋아나서 썩은 가지는 잘라버리고 새 가지에서 뿌리를 북돋아 새롭고 아름다운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일 게다. 그런가하면 유대교 입장에서 본다면 선택된 과실이 열릴 때만 기다리고 있는데 난대 없이 색깔이 다른 새싹이 돋아나서 이 새싹이야말로 진짜 좋은 과실이 열리는 것이라면서 그 가지는 썩었으니 잘라버려야 한다하니 유대교로서는 자기가 썩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새싹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잘림에만 원한을 품는 것과 같은 것이 유대교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의 구원관에서 본다면 현세에 국한될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 때에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어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세계를 이룩할 것으로 그들은 믿고 있었다. 그러한 구원관에서 정치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는 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저들을 불행에서 구원하여 모든 불의와 악을 제거하고 부귀와 자유,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고 믿었던 것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이 세상을 구원하려왔다는 메시아 예수 그는 그렇지가 않았으니 그를 이단 중에 이단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단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금도 천년왕국을 세울 메시아를 기다리고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서 유다로 하여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로부터 파송 된 큰 무리들에게 잡힐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였다고 신약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6: 56). '선지자들의 글'이란 구약성서를 말하는 것으로 그 선지서 중에서도 이사야 53장을 예수가 잡혀가는 예언으로 신학자들은 주석을 달고 있다. 그 중에서 몇 절을 여기에 옮겨본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 4-5)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이사야: 53: 12)

이와 같이 기독교는 구약성경의 선지서를 비롯해서 구약 39권(46권)각 권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나타나지 않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당시의 유대교는 극단의 쇄국주의자들로 대중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법사들인 그들은 엄격히 율법을 준수하며 그것을 전통적으로 해석하여 천사와 부활을 믿어 왔는데 이들은 유대교의 청교도적 존재였다. 그러나 지나친 율법주의는 종교의 경화를 초래하여 결국 형식화된 종교로 전락시키고 말았으니 그들이 바로 바리새파이다.

그러한 반면 한편으로는 하나의 귀족 당으로서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고 모세의 5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전통을 부인하여 내세나 부활을 5경외의 것으로 배척하고 다만 모든 사회적 현상과 정치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만 급급하고 어떠한 변화도 그들 주위에서 생기는 것을 거부하고 당시의 정치 종교 사회적인 기구에서 백성을 착취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사두개파는 그들이 바라지도 않던 선지자라는 예수를 인정할 리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다. 유대교는 크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그리고 적게는 수많은 파벌이 갈라지면서 사회가 불안해질 때 일반 민중들 중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시작되면서 이방인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되니 그리스도인은 유대그리스도인과 이방인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기독교기틀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됨에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믿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 유대교나 기독교 모두가 로마의 종교박해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주후 3백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기독교는 박해의 시기가 끝났고 유대교는 여전히 박해받는 종교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렇게 됨에 여러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에서 기독교회로 옮겨왔으며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몫이 남겨져 있지 않다고 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기독교와 유대교는 갈등을 증폭시켜왔다. 스스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 기독교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갖는 유대인에 대하여 아무런 형제애를 느끼지 못해왔다.

그 동안 많은 유대인의 대학살과 오늘날의 이스라엘 독립은 이스라엘에 대한 전통적인 부정적 견해를 수정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그 동안의 반목과 불신을 종식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인식할 때가 온 것이다.

신약성서의 기독교와 유대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는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수백 년간이나 이민족의 지배하에 독립을 잃은 유태인들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 줄 구세주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렸고, 이 때 예수가 나타난 것이다. 예수는 유태교의 율법과 예언을 따르면서도 유태교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신은 민족, 국가, 계급,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 대해 평등한 구제의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신 앞에서의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고 모든 인간이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즉 고대중국의 대동사상과 같이 세계동포사상을 내세웠다.

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인 유태교의 사제와 율법학자들은 그가 민중을 오도하는 자로 미워하게 되고 민중들 역시 그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약속할 뿐 유태인들의 현실적 해방과 번영을 외면하는 점에 실망하여, 그를 오히려 로마 관헌에 고발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였음을 확신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교단을 조직하여 그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전도와 순교는 그리스도교를 세계적 종교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본래 외래종교에 대해서 관용하던 로마는 그리스도교도들이 황제숭배를 우상숭배라 하여 반대하자 네로 황제이래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하층시민 노예뿐만이 아니라 상류층에도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종과 함께 칙령으로 공인하기에 이르면서 종교 자유를 얻게되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다른 종교를 금하였다.

그리스도 탄생이 기독교의 기원이며 서기의 기원이 되고 카톨릭의 기원이다. 이렇게 성립된 기독교는 대략 다음과 같이 변천하여 왔다.

첫째 고대 교회(1~604년)는 교회 창설부터 311년까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참혹하게 박해하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함으로써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둘째 392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를 이루게 된다.

셋째 중세기(605~1500년)에는 1054년에 콘스탄틴의 총주교가 천주교회의 교황 권을 거부하여 동방 정교회(東方 正敎會 그리스 정교회 Greek Orthodox Chuech)를 세움으로써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와 1차 분열이 되었다.

넷째 근 세기(1500~1965년)에는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를 가르치던 신학자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츠빙글리와 칼뱅 등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교황 권에 반대하고 이탈하여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를 세우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2차 분열이 된다. 그리고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가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왕비와 이혼하고 새 왕비를 맞으려 교황에게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교황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거절과 상관없이 새 왕비를 맞아들인 다음 로마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성공회가 그것이다

다섯째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교회의 현대세계에 대한 적응을 목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종교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교황이 소집하는 전 세계의 천주교 주교들의 회합 1962~1965)를 소집하였다. 교회는 안으로 자각과 밖으로 개방을 목표로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적응-개혁과 쇄신)란 담대한 표어로써 카톨릭 교회를 화해와 공존의 방향으로 돌리는 혁명적인 교회 쇄신을 단행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인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지 않다는 것,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 금서 목록을 철폐한다는 것, 힌두교와 불교 등 세계 여러 종교와 대화의 관계를 가지자는 것 등을 공식적인 교회입장으로 채택한 것이 오늘날 세계와 대화 중에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여섯째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베드로가 첫째 교황에 임명된 후,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264대에 걸쳐 천주교회는 사도들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세계 천주교 현황
그리스도교 신자 수 : 18억9천365만6천명중 천주교신자 수 : 10억5백만 명(세계인구 58억 명의 17.3%, 1995년 UN연감).

요즈음 로마카톨릭 교황은 8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종교 화해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중앙일보 2001년 5월 8일자 9면에는 <종교화해 평화 기원> 이라는 제목 아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80)가 로마 카톨릭 수장으로는 사상 처음 6일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이슬람사원(모스크)을 방문한 뒤 다음날 골란고원으로 향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바티칸 측은 이날 "이슬람교와 유대교, 이슬람 국가들과 이스라엘간의 분쟁이 계속되는 유혈의 땅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골란고원을 찾는다" 고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교황은 6일 다마스쿠스의 오마야드 이슬람사원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제 우리 종교 공동체를 갈등이 아닌 대화의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고 두 종교의 화해를 강조했다.

우리 나라 천주교와 개신교도 `부처님 오신날` (5월 1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鄭鎭奭)대주교는 조계종 정대(正大)총무원장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의 은덕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미치기를 기원한다"며 "불교와 천주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 왔으며, 새로운 천년기에도 우리 종교계와 종교인들이 세상의 평화와 인간 구원을 위해 더욱 노력하자" 고 말했다. 한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 김동완)는 메시지에서 "불교가 지난 1천5백년간 한민족에게 희망을 주어온 것 같이 새 천년대 부처님 오신날도 밝은 등불로 세상을 환히 밝혀 주기를 기대한다"며 "평화통일과 인간성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모든 종교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카톨릭과 불교의 만남으로 중앙일보 4월 30일자 17면에는 <부처님 오신 날 특별한 만남> 을 주제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에 있는 봉은사에서 혜조(慧照.42.서울 성북동 청룡암) 스님과 양(梁)비안네(60.서울 포교 베네딕토회 성남분원)수녀가 만나 대화한 내용이 소개됐다. 절을 찾은 비안네 수녀가 합장한 뒤 성불하라고 인사하자 혜조 스님도 합장하며 반갑게 맞았다.

비안네 수녀가 이 절을 찾은 이유는 두 가지다. 부처님 오신 날과 이날을 기념해 봉은사에서 열린 `전통 등 전시회` 에 출품한 혜조 스님의 작품이 최우수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세상을 비추고 희망을 주는 것이 모든 종교가 해야 할 일이라는 점에 공감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가 온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생각하고 화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유독 유대교 정통파 유대인만이 아직도 선민사상을 고집하고 있다. 지금도 궁극적으로는 메시아가 와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왕국을 세워야 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타성 때문에 중동지역에서는 오늘도 쉴 사이 없이 살상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갈등과 유혈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지 유대교인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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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란과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

이슬람교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슬람교 코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천사들이 일러 "오 마리!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아들의 기쁜 소식을 네게 주시노라. 아기의 이름은 마리의 아들 메시아 예수이리니 이 세상과 다음에 오는 세상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들로부터 영광되리라".(코란=3:46) 이에 마리가 답하여 가로되 "주여! 남자가 제게 손을 대지 아니 하였는데 제가 어찌 아들을 가지오리까?" 하니 그가 일러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만드시니 사물을 정하실 때 그것이 있으라 하시니 그것이 있노라".(코란=3:48) 이와 같이 코란은 예수의 탄생을 인간이 아닌 하나님(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가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1:28-31)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슬람교는 또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의 모든 선지자를 인정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 노아와 그리고 방주, 모세와 아브라함, 이스라엘민족의 선민사상 등 구약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대부분 수용하고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두 가지 예를 든다면 코란은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나의 지시가 내려 땅의 샘들이 물을 품어낼 때까지 내가 이르기를 "그 안으로 모든 종류의 두 마리 암컷과 수컷을 싣고 그리고 이미 말씀을 그르친 자들을 제외하고 너희의 가족과 믿는 자들을 태우라" 라고 말하였으며 그리고 소수를 제외하고는 믿음으로 그와 함께 사는 자들이 없었노라.(코란=11 : 41)

코란 23장 28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에게 이와 같은 계시를 내려보냈느니라. "내 계시에 따라 내 눈 밑에서 방주를 만들라 내 명령이 내리고 땅의 샘물이 용솟음 쳐 나오면 너는 방주 속에 암수 한 쌍씩 모든 종류대로 실어라 이미 말씀이 도달하였던 자들은 제외하라 그리고 나쁜 짓을 한 자들에 대해서는 나에게 말하지 말라 저들은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니라"

구약성경 창세기 22장 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번제할 것을 명함에 아브라함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할 때 창세기=22 : 12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내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을 코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그와 함께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말하기를 "오 나의 아들아! 너를 제물로 바치는 꿈을 꾸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였을 때 아들이 말하기를 "오 아버지! 명령받으신 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인내하는 자라는 것을 아시게 되오리다" 하였노라. 주님의 뜻에 따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땅에 이마를 대고 엎드리게 하였을 때 내가 그를 불러 "오 아브라함아! 네가 꿈을 완전케 하였노라" 이와 같이 나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보답하느니라. 그것은 실로 분명한 시험이었노라"(코란=37:103-107)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슬람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교는 예수를 독생자로 인정하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면서 기독교를 유일신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또한 모하메드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고 코란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슬람교를 유일신종교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셋 종교가 다 유일신신앙종교라 하면서 독선과 배타적 망상으로 정통시비에서 그 유일신을 변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교는 선민사상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려 오시리라는 것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더벅머리 총각이 나타나 하나님을 보려거든 나를 보라는 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이나 하고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치부(恥部)나 들추어내고 모독적인 발언을 하고 기적을 행하며 사회적 혼란이나 일으키고 있으니 자신들의 위치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는 극형을 가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 역시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은 하되 기독교가 말하는 우리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부활승천 하신 것과 삼위일체 교리로 저 높은 곳에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 놓은 예수는 부정하였다. 단지 이슬람교를 창설한 마호메트와 같이 선지자로서의 동격인 인간이라고 인정했을 뿐이다. 이에 기독교가 그것을 수용할 리 만무하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자, 유대교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유대교를 인정을 하면서 히브리어성경 즉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유대교가 예수를 한낱 선지자로 인정할 뿐 구세주 내지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이단 내지는 배교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또한 이슬람교를 인정하지는 않은데 비해 이슬람교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뿐 많은 부분을 위경(僞經)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예수의 부활이라든가 승천 같은 것을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호와 야훼를 믿는 유대교나, 여호와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나,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교 모두가 유일신 사상에서 창조주 오직 한 분이신 그 분을 믿는 종교집단이다. 먼저 되고 나중 되었을 뿐 또 명칭만 다를 뿐이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 삼대종교는 그 한 분, 그분을 믿는 종교이면서 나름대로 자기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하다보니 그분이 어떤 분인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성경을 읽다보면 처음의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비롯해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로 등장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 또는 이삭의 조왕(조王)신으로 개인의 수호신에 불과해진다. 그러다 부족 신으로 발전하여 족속간의 분쟁에서 이스라엘 민족 신으로 이 세상을 피바다로 얼룩지게 만들고 만다.

오늘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지난 9. 11(2001, 9, 11) 미국의 테러사건으로 시작된 참사는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미국의 보복전쟁이 시작되어 많은 물질과 인명살상이 있었다. 이러한 참상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에 세계인구의 과반수(이슬람교 약13억·기독교 약18억)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 유일신 종교들의 분쟁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가장 많은 믿음을 공유한 종교이다. 두 종교가 공유하는 역사적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자그마한 무리를 이끌고 중동 지방을 떠돌던 아브라함은 팔순이 넘도록 후사가 없었다. 그의 부인 사라는 그의 몸종 하갈로 하여금 남편의 씨를 받게 했다. 아브라함은 86세에 이집트 여인 하갈의 몸에서 아들을 얻게 되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했다.

그로부터 14년 후, 100세가 되던 해에 아브라함은 사라로부터 아들 이삭을 얻었다. 사라는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를 내쫓으라고 아브라함을 졸랐고 아브라함은 하갈 모자에게 약간의 양식과 식수를 주어 그곳을 떠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헤어져 살면서 그 자손들이 번성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예수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성서를 들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가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들 이스마엘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슬렘들이 아니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하마드가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 퍼져 살던 무다르계 부족 출신으로서, 모슬렘들은 무다르 부족이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믿고 있는데 비해 비모슬렘들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창세기에 세 번씩이나 언급된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성스러운 약속의 주인공이고, 무하마드가 그의 후예이며, 이슬람의 출현으로 그 성약이 이루어졌다고 모슬렘들은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크리스트교와 이슬람이 갈등하고 반목하는 일차적 원인은 신학적 이견 때문이다. 크리스트교의 삼위일체교리를 코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성자·성령 3위가 계시다”는 교리는 하느님의 유일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수태와 치유의 능력 등 갖가지 이적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무하마드와 같은 '하느님의 예언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슬람교인들은 크리스트교인들이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신약성경)를 잘못 이해하거나 곡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느님의 예언자인 예수를 신격화하고 교회의 성직자나 신학자들의 견해를 절대화하는 일종의 우상숭배 행위라고 단정한다.

그런가하면 크리스트교가 이슬람을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유대교가 크리스트교의 출현으로 그러했듯이 크리스트교는 이슬람의 출현으로 빛을 잃게 되었으며, 이슬람의 교리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그 주역은 이슬람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코란은 강제적인 개종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무하마드의 언행을 담은 하디스에서도 이슬람의 창시자는 ‘성서의 백성'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지 말라는 말을 누차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대들에게) 내려보내신 성서를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대들을 정의롭게 대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주이며 (동시에) 그대들의 주님이십니다.”(꾸란 42장 15절)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이슬람 세계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은 '아흘 알-키탑' 즉 하느님이 계시한 성서를 지닌 백성으로서 종교적 자율권과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인지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변화바람이 불게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세계에서 이슬람에 대한 반목과 갈등의 장막이 걷히기 시작했는데 종교적인 냉전 분위기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카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였다. 이어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측에서도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웁살라 대회를 시작으로 모슬렘들과의 대화를 위한 노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바티칸공의회가 채택한‘비 크리스트교에 관한 선언’중 이슬람에 관한 내용 중에“교회는 또한 무슬림 들을 존경하고 있다”라는 말로 시작한 이 선언은 두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을 확인하면서 사회정의와 윤리적 선을 촉진시키는데 함께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이처럼 크리스트교와 이슬람은 뿌리가 같고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충돌을 빚어왔으며 최근에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해 9. 11(2001, 9, 11)테러사건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양대 종교간의 갈등과 반목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지 그들의 움직임을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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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신 종교들의 갈등과 반목 -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이들 모두가 유일신종교로서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다. 앞에서 대략적 설명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교는 선민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믿는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천년왕국을 세울 때는 선민인 자신들(유대교)로 하여금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창세 이후 육 천년(?)이 지나간 지금까지도 그 믿음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속박된 신앙의 눈으로 기독교가 올바로 보일 리가 있으며 이슬람교가 올바로 보일 리가 없다. 우선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오직 한 분이라 믿고 있는 유대교로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신 자체를 수용할 수 없을 것이고, 다음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예수가 하느님의 성육신(成肉身)이라면 선택된 자신들(대제사장 장로 서기관 등)로 하여금 왕국을 건설해야함에도 그와는 반대로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설(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등)로 핍박을 하고 다니면서 온갖 기적으로 민중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당시의 집권세도가로 있는 그들로서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였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잡힐 때에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태복음 : 26=53-54).

그리고 마태복음 : 26= 56절에는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선지자들의 글이란 구약 성경을 말한 것으로 예수의 말 대로라면 유대교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은 성경도 볼 수 없는 문맹자였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성경해석은 이현령(耳縣鈴) 비현령(鼻懸鈴)식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는 말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진리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지금의 세계에서 이슬람은 가장 완고한 형태의 일신주의로 남아 있다. 십자군 전쟁이나 식민주의 전체주의와 같은 서구 문명의 최악의 죄악들도, 그 뿌리는 일신주의 적 사고방식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일신주의에서 솟아나는 배타적 편협성은 중세 후기의 종교 전쟁들을 거치면서 많이 소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후 정교 분리로 인해 다원주의가 더욱 힘을 얻게 되면서 서방에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나라 건설에 있어서 정교일체가 그들의 교리이기에 흔히 말하기를 이슬람교라기보다 이슬람국가로 부른다.

이처럼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교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적 삶과 정치적 생활을 분리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으로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사회에서든, 아니면 인도처럼 힌두교도가 다수이고 이슬람교도가 소수인 사회에서든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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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종교들의 삼색(三色) 하나님? -

이들 3대 종교들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혹자들은 계시로, 혹은 환상으로 또 현몽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만나 보기도하고 대화도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계시, 환상, 현몽 등이 과연 하느님과의 계시, 환상, 현몽인지 필자는 그 경지에 가보지 못했기에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이에 필자는 그들의 경전을 통해서 나름대로 유추해 보려 한다. 먼저 유대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유대교의 하나님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바와 같이 유대교 경전인 히브리어 성경(구약성경)에는 여호와하느님은 한 개인의 수호신에서 한 부족의 수호신으로 다시 한 민족신으로 성장되어왔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등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함으로 그들 이스라엘 민족 외에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잔혹한 신이었다. 여기 구약성경 몇 구절을 옮겨본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에 대한 원죄는 그렇다 하더라도 손수 흙으로 빚어만든 자기형상을 닮은 사람을 위시하여 모든 피조물을 종자만 남겨놓고 싹 쓸어버리는 여호와하나님이다. 그뿐인가. 바벨탑 이야기만 해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창세기=11 ; 6-8)

다음으로 십계명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전제한 다음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있게 말라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을 첫째와 둘째 계명으로 말씀하시고 만약 이 계명을 어길 때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하였다.

인간이기에 살다보면 잘못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호와하나님은 용서가 없다. 그것도 당사자만이 아니라 요즘말로 연좌제 형벌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그의 아들과 손자는 그야말로 청천벼락이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구약성경을 보다보면 위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다.

레위기 20장에서 이교도의 풍속에 대해 여호와하나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암몬 족속의 신)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2-5)

다음은 자기백성밖에 모르는 여호와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야훼하나님이 그들을 구출하기로 장정하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보고 애굽으로 내려가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구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모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이적의 지팡이'를 들고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서 바로 왕을 만난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했으니 그들을 놓아 보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왕은 그 중요한 인력을 선 듯 놓아줄 수가 없었다. 바로 왕은 여호와가 누구인지는 내가 알 수 없으나 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거절한다. 이에 하나님께 모세가 사실대로 고한즉 하나님은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하고는 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한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다.

첫째 재앙으로 물이 피가 되게 한다. 출애굽기 7장 20-2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하수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사람들은 하수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하수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둘째 재앙으로 개구리 소동, 셋째 재앙으로 이의 습격, 넷째 재앙으로 파리 떼 소동, 다섯째 재앙으로 병들어 죽는 가축, 여섯째 재앙으로 전국에 퍼진 독종, 일곱째 재앙으로 우박. 여덟째 재앙으로 메뚜기 소동, 아홉째 재앙으로 온 땅을 덮은 흑암, 마지막 열째 재앙으로 장자의 죽음을 선포한다.

출애굽기 12장 29-3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 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에서 제외된다. 그들에게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으면 내가 그 피를 볼 때 너희를 넘어가라 하였다)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每人)이 어린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설주와 안방에 바르고...........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이와 같이 그 참담한 그 날을 크나큰 명절로 오늘날까지 행사하는 유월절(踰月節)의 유래가 이러하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하며.............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여호와하나님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이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이들이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하여 바로의 군대를 광야로 끌어내는 유인작전을 쓰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내보낸 것을 후회하게 한다. 그래서 바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하게 한다. 그리고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기적적으로 홍해가 양쪽으로 갈라짐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처럼 건넜다.

그 뒤를 쫓던 애굽 군대가 바다 가운데 이르렀을 때, 물이 다시 합쳐져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기 위해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명을 구하고 애굽인에 속했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무조건 죽임을 당해야하는 이런 극단의 인종차별적인 것이 과연 사랑과 공평의 하나님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 만민의 하나님이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뿐인가. 가나안 정복이야기를 보다보면 더욱 잔인해진다. 그 참혹한 양상의 대략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안 되는 거리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40년이라는 세월을 시내 광야에서 헤매다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게 된다. 요단강 너머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老幼)와 우양(牛羊)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고 여호수아 6장 2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성안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죽여 여호와하나님께 희생의 재물로 바치고 결국은 그 성마저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여호수아 군대는 이렇게 하나님의 비호를 받으며 어느 때는 도망가는 적군에게 우박을 퍼붓기도 하고 태양과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무르게 해서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기도 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골짜지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에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여호수아 10장 12-14절)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온갖 규례를 만들어 이민족 이교도에 대해서 그 규례를 조금이라도 어겼을 때에는 그들을 죽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버렸다. 이처럼 편협하고 일방적인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한 종교의 신화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오늘날 이 대명천지 하에서 문자그대로 믿으라면서 흔히들 말하는"종교중독에 빠져놓으면 아편중독보다 더하다"는 식으로 이것이 바로 전지 전능한 하나님이라 한다면 뾰쪽한 첨탑 위에 세워놓은 피뢰침에도 꼼짝못하는 하느님은 요즈음 하느님이라서 그렇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 때에 멍청이가 되어버린 그들 맹신 자들은 그래도 아멘만 연발할 것인가?.

2)기독교의 하느님
기독교는 히브리어성경을 구약이라 하고 4복음서와 예수제자들의 남긴 기록들을 모은 것을 신약이라 하여 신, 구약을 통틀어 성경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의 히브리어성경을 인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예수는 히브리어성경 즉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첫머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이렇게 해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하였다.

그러나 누가복음 3장 23절에는 마태복음에 언급된 예수의 족보와는 달리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열거했다. 그 족보에 나타난 사람은 모두 77명으로 우리들이 말하는 족보세대로 따지자면 하나님이 예수의 76대조가 되시고 예수는 하나님의 77세손이 되는 셈이다. 꿈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 내용들을 기록한지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77세손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 이때 헤롯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B C. 37년에 이스라엘의 분봉 왕이 되었고 나이 70이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에게서 이 땅의 목자가 탄생했다는 말을 듣고 왕위에 대한 의구심에서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예수 탄생에 대한 대가로 철없는 많은 어린아이들을 죽게 했을까? 구원하려 보내는 독생자는 그 많은 생명을 죽여야만 구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면 기독교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신약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서 말했듯이 신약성경은 예수의 출생으로부터 공생애 3년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부활하여 승천하기까지와 그의 사도들의 서신이 기록되어있다. 구약성경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 같은 구절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신관)에 대해서 성경 몇 구절을 인용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아볼까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一點一劃)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 : 17-20절).

다시 말해서 예수는 구약성경(여호와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려왔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2장 23절에서 27절에 보면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대인 전승을 살펴보면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행위중의 하나가 수확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삭을 자르는 것을 수확의 일부분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하고 질문을 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乏絶)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陳設餠)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하니 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런가하면 마태복음 23장 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다. 이렇게 외식하는 그들을 나무라며 33절에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다. 예수생애에 이와 같이 극렬한 어조로 나무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같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외식행위를 비방하면서 갈릴리 전도 길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시면서 문둥병을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온갖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믿고 기다리던 구세주는 아니 오고 지금까지 내려오던 율법해석을 달리하면서 자기들을 핍박하고 기적을 행하는 예수의 행적과 이에 민심마저 이완해 가자 당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유대인들 중에는 십계명중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한 계명을 어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부모를 위해 재물을 쓰는 것이 아까웠을 때에 그것을 쓰지 않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고르반'이라 선언만 하면 부모를 위해 재물을 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고르반이란 헬라어로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이라는 뜻이다. 즉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지 않으려고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고르반'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본 예수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 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패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마가복음 7장 8-13절)............하시고,

이와 같이 예수는 유대교의 잘못된 신관 즉 하느님보기를 유대인들과 달리함으로서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에 신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예수의 언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예수의 열두 제자중 한사람인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가 잡히실 때 예수와 같이 있던 자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그때 예수는 그 사람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러 함이니라.(마태복음 26장 52-56절)

이에 앞서 그들에게 잡혀갈 것을 미리 알고는 겟세마네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장 39절). 그리고 두 번째 기도에서"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장 42절). 그리고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전에 크게 소리지르기를"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장 46절)라 했다.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16장 27-28절을 보면 예수재림을 예고하고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였다. 어느 날 필자와 어느 장로와의 대담에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그 일화를 잠깐 소개한다.

위의 마태복음 16장 27-28절을 인용하면서 필자가 말하기를 "성경을 문자 적으로만 해석을 하다보면 이와 같이 모순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도 요즈음 성직자들이 2000년 전에 그것도 한 지역에서 그리고 한 민족을 단위로 써 놓은 것을 오늘날 세계화의 물결이 넘쳐나는 과학문명시대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一點一劃)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이 한 구절을 놓고 교인들을 맹신의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주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했더니 그 장로 말씀하시기를 "그런 말씀 마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때 그 사람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 땅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알 수가 있습니까"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더 이상의 대화가 될 수 없기에 한번 크게 웃음으로 화답하고 말았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기를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하였다. 이에 요한 복음 14장 9-14절에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아무튼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성경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즉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곳이 별로 없다.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공생애 3년과 부활승천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왔다가 하나님을 대변하다가 재림을 약속하고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한 민족의 하느님, 독선적 하느님, 배타적 하나님은 아니었다. 사랑의 하나님, 만민의 하나님이었다. 아울러 기독교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지만 그 안에는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라는 삼위가 존재하고 있어서 이 삼위는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즉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을 하실 수 있으며 성령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삼위의 신적 본질은 분할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사전에 기록 된 삼위일체에 대해 간략한 해설이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삼위일체라는 명문구절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신을 '우리'라는 복수 인칭대명사로 나타냈으며 삼위로 언급된 구절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즉 삼위인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존재와 본질이 각각 분할된 삼신(三神)이 아니라 그 본질과 존재는 일체이다. 따라서 창조와 율법수여 그리고 성육신(成肉身), 속죄사역과 중생(重生)및 성화(聖化) 사역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개별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은 별도의 인격이지만 본질상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삼위일체에 대한 명문구절이 없는데도 기독교의 교리로 선정된 것은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 회에서이다. 로마황제 콘스탄틴의 휘하에 있던 공의 원들의 투표에 의해 여러 가지 신학설을 다 제치고 정통교리로 채택되었다. 다음 장에서 이야기가 이어지겠지만 삼위일체교리로 예수를 신격화함으로서 그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천 육백여 년이 흘러오면서 각양각색의 신학적 해석이 나오고 있다.

견해와 주장에 따라 성자 즉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은 하나 성부 즉 하나님과 동격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으로 수많은 교파가 분열되었고 이단시비가 제기되어 갈등과 반목이 야기되었으며 그 시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3) 이슬람교의 하나님(알라)
이슬람교 하나님(알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마드에 대하여 우선 살펴보고 본론으로 들어갈까 한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하마드는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의 꾸라이쉬족(族)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6세 때 죽었다. 삼촌 집에서 양육됐고 25세 때 40세 부자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40세부터 알라(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다가 632년에 숨졌다.

무하마드의 조상 꾸라이쉬족이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것에서 유일신 뿌리를 찾다보면 유대교, 기독교가 같은 조상을 모신 유일신종교로 한 뿌리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 16장을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본처인 사라가 여종 하갈로 하여금 자식을 얻게 하여 난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그리고 나중에 본처인 사라가 자식을 낳게됨에 그 아들이 이삭이다. 이렇게 본처인 사라가 자식을 낳게 되자 그는 먼저 난 서자(庶子)인 이스마엘 모자를 쫓아내었다. 그렇게 해서 쫓겨간 이스마엘이 아랍인의 조상이 됐고, 나중에 본처에서 난 적자(嫡子)인 이삭은 유태인의 조상이 됐다.

그리고 이삭을 낳게 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 함에 아브라함 생각에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며 구십 세가 된 아내가 어찌 생산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고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고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했다.

그런가하면 창세기 17장 20-21절에 보면 이스마엘에 대한 축복이 나오는데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衆多)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또 21장 17절과 18절에는 하갈아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의 부르짖음을 다 들었노라 어서 일어나 네 아이 이스마엘을 잘 돌봐주고 보호해 주어라 그로 하여 내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등으로 말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생겨난 두 형제들이 후대에 이르러 왜 서로가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민족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과연 그들의 하나님(알라)은 어떤 분인지 '코란'과 '하디스'(Hadith=전승)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코란과 하디스란 무엇인가?.

코란은 기독교의 신구약성경처럼 아브라함이나 모세 혹은 예수의 행적이나 어록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란'의 말뜻은 '읽는다'는 뜻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알라(하나님)가 무하마드에게 계시한 말을 읽었다는 것이며 그가 죽은 후 12년이 지나 제3대째의 후계자에 의해서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하디스란 무하마드의 언행 및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종교예식과 일상생활 세칙을 담고있다.

코란 2장48절에서 54절은 이스라엘 선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내가 너희에게 준 은혜와 내가 그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너희를 선택하였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너희가 보는 앞에서 내가 너희를 위해 바다를 가르고 너희를 구하였으며 또 파라오의 백성들을 수장시켰던 때를 항상 기억하라...........그리고 내가 모세에게 너희가 지켜 올바르게 인도될 수 있는 성서와 식안을 준 때를 기억하라".하였다. 이와 같이 히브리경전(구약성경)을 인정하고 여호와하나님을 그들의 알라와 같은 유일신으로 하고 있다.

코란 2장 114절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심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 같은 성서를 읽는 동안 유대인은 '기독교인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라고 하니라 심지어 이들은 자기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이야기하였노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다툼에 대하여 부활의 날에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니라"하였다.

위의 구절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알라(하나님)는 인간 범죄를 사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 처벌하는 존재로 보인다. 요즈음 말로 말하자면 함정수사를 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에게 구원을 청할 것이며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다음 2장 191절에 보면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라 ..........192절에는........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싸움을 걸때에는 맞서 싸우라. 이것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보복이니라. 194절에는 그리고 박해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위한 종교가 자유로이 공언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 4장 90절에는 "..............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길로 들어올 때까지 그들로부터 친구를 취하지 말라. 그리고 만약 그들이 도망하면 그들을 포로로 하여 너희가 보는 대로 살해하라........"

이뿐만 아니라 코란 4장 92절, 102절. 9장 29절, 38-39절, 73절 등 많은 곳에서 싸우고 살해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싸우다가 죽으면 많은 상을 줄 것이며 보잘것없는 이 세상보다 저 세상의 즐거움과 낙원으로 영생을 보장하겠다고 하였다. 이런 것이 과연 자비로운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코란의 하나님(알라)은 자기편이 아니면 무조건 싸우고 살해하라고 한다. 그러나 2장 193절에 자애로운 하나님으로 표현된 것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싸움을 단념할 경우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고로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니라" 하였다.

9장 23절을 한번 살펴보자. "오. 너희 믿는 자들아! 너희의 아버지들과 형제들이 믿지 아니하고자 한다면 그들을 벗으로 삼지 말라. 그리고 누구든 너희 가운데로부터 그들과 벗하는 자가 있다면 죄인이 곧 그들이니라" 29절는 "............진실한 종교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이 스스로 세금을 납부하고 그들이 복종할 때까지 싸워라" 이 구절들에서는 비록 부모형제라도 알라를 믿지 않으면 벗으로 삼지 말라했다. 천륜 부재의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종교의 이름으로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혼란스럽다.

다음 9장 38절 ."...........너희는 죽음 이후의 세계보다 현세의 생명에서 더욱 만족하느냐? 그러나 현세의 생명의 기쁨이란 죽임 이후의 세계와 비교할 때 거의 없느니라". 하고는 39절 "너희가 싸우러 나아가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징벌로서 너희를 벌하실 것이며 너희 대신에 다른 자들을 선택하시며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께 아무런 해악도 행하지 못하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위로 완전한 권능을 가지고 계시노라". 이렇게 공갈과 협박을 일삼는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창조주 유일신이다.

코란 3장 170절과 171절을 보면 9. 11(2001 9. 11)태러사건과 요즈음 중동지역의 자살테러사건의 진의를 알만도 하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할 자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정녕코 이들은 그들의 주님과 함께 살아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노라. 하나님께서 자비로써 그들에게 주신 것으로 기뻐하라................"

"그러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도록 하여 현세의 생명을 내세를 위해 바치도록 하라. 그리고 누구든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자는 죽임을 당하든 혹은 승리를 얻든 지간에 내가 곧 그에게 커다란 상을 주리라"(코란 4장 75절). 또 78절에는 ".........현세에서의 혜택은 거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더욱 나으리라. 또한 너희는 조금도 잘못 인도되지 아니하니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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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 하는가? -

이 장에서는 삼대종교 즉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경전을 통해 본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겠다. 그들의 하나님은 때와 장소에 따라 혹은 형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유일신하나님이라기보다는 삼원 삼색의 하나님처럼 보인다. 그들 하나님의 공통점과 이질점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 살펴보고 오늘날 이들 삼대종교간의 갈등과 반목의 원인을 분석해보자.

1) 삼대종교 하나님에 대한 공통점
삼대종교의 신관에 있어서 칭호의 차이는 있어도 유일신이라는 것
전지전능하다는 것
창조주라는 것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인간의 화복을 주관하고있다는 것
하나님은 선지자 또는 예언자를 통해 계시한다는 것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때에 그들의 믿음에 따라 심판한다는 것
구약성경을 성전으로 인용한다는 것
서로가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형제)들이라는 것

2) 삼대종교 하나님에 대한 차이점
유대교의 야훼하나님은 자신들만의 민족적 하나님으로, 선택되지 못한 이방인들이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에 선택된 민족인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다는 것

기독교의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주후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로마황제 콘스탄틴의 휘하에 있던 공의원들의 투표에 의해 여러 가지 신학 설을 제치고 삼위일체교리를 정통교리로 채택함으로 예수를 신격화하였고, 예수의 신앙과 삶을 따르는 것에서 나아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동격이라는 것.

이슬람교의 알라(하나님)는 그들이 말하듯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코란 10장 3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코란은 하나님 이외에 누구에 의해서도 변경되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역으로 이 코란은 그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충족시키며 하나님의 율법을 해설하는 것이니라, 여기에는 추호의 의혹도 없으며 이 코란은 온 세상의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니라".

그리고 코란 5장 19절에는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이르나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의 선택된 백성들이요' 너희는 말하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분께서 너희의 죄로 하여 너희를 벌하시느냐? 보라! 너희는 다만 그분께서 창조하신 자들 가운데의 인간일 뿐이다......................"

코란 4장 172절에서는 "오, 성서의 백성들아! 너희의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말 것이며 하나님께 진실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진실로 메시아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의 사도였을 뿐이며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을 충족시키심이었으며 그분으로부터의 자비였노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믿으며 '그분들은 세 분이오'라고 말하지 말라. 단념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으리라. 실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니 그분께서 아들을 두셨다함은 그분의 성스러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로 지상과 천상의 모든 것이 속하노라............."

3) 삼대종교의 신관에 대한 결론
결론적으로 이들 삼대종교들은 같은 유일신을 섬기면서도 자기들이 섬기는 신만이 유일신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며 자기들만이 유일신의 정통(적자=嫡子)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진정한 유일 신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 외의 유일신 종교는 조작된 경전의 해석으로 다 이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는 그들대로 선민사상에 얽매어 언젠가는 하나님이 자기네들을 구원하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현재까지도 메시아의 대망, 즉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메시아 관을 보면 메시아는 단 한번 오는데 메시아가 오면 세상의 불의가 없어지고 가난과 고통, 불화가 사라지는 그런 평화의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그러한 세상이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그들의 메시아관에 따르면 예수나 무하마드는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같은 유일신 종교라 해도 한 종교적 인격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메시아로는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단으로 매도하고 적대시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들 나름대로 유대교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선민사상은 잘못된 신관으로 그들의 형식적 율법주의를 거부하고 민족, 국가, 계급, 신분을 초월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구원의 신으로 인간을 구원하려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이 예수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오신 하나님이 보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었다. 예수는 타락해 가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을 보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하면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다. 민심이 동요하고 자신들의 과오가 드러나자 장로들이 불안한 나머지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된 것이 다 선지자들이 구약에서 말한 구속사역(救贖使役)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려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 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26 : 55-56)

이슬람교에서는 유대교, 기독교와는 달리 무하마드는 하나님의 마지막 사도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다 인정하고 신약의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할 뿐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 이라든가 하나님의 아들 등을 언급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경전을 조작한 것으로 오늘의 성경은 위경(僞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삼위 운운하면서 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치 인간들이 자식을 낳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운운하는 것은 유일신을 모독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코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실로 메시아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의 사도였을 뿐이며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을 충족시키심이었으며 그분으로부터의 자비였노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믿으며 '그분들은 세 분이오' 라고 말하지 말라, 단념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으리라, 실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니 그분께서 아들을 두셨다함은 그분의 성스러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4 : 172) 이장 외에도 5 : 73. 76 등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모세 오경이나 사복음서, 사도행전 등 서신과 코란에 언급되어 있는 것들이 과연 유일신하나님의 참뜻인가 하는 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이들 세 곳에 나오는 유일신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라 삼색삼신(三色三神)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으로는 설명이 안돼는 일들이 허다하다.

여호와하나님은 한 인간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서 이스라엘 한 민족의 하나님으로 그들 선민 외에는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잔혹한 행동으로 살육을 일삼으면서 유대교라는 종교가 형성되었다. 다음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만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성육신으로 인간에 태어나서 인간의 속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음으로써 구속사역을 마치고 성령을 내려보냈으며 언젠가 재림하여 심판을 약속하고는 승천함으로써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겨났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그 내려보낸 성령을 구실 삼고 약속한 재림을 미끼삼아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재산들이 약취되었는가? 뿐만 아니라 글자 한자 어구 하나를 놓고 내가 옳으니 네가 틀렸느니 하면서 이단시비로 수많은 분파가 생겨났다. 그들의 반목은 마침내 독선과 아집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원수의 여호와, 원망의 야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두 번, 세 번 변신으로도 모자라서 무하마드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사(聖使=알라가 보낸 사람)라는 이름으로 114장에 이르는 계시를 그가 죽을 때까지 23년간 내려보내 이슬람교라기보다 이슬람국가라는 것이 더 통칭될 수 있을 정도로 정교일치(政敎一致)를 외치면서 마침내 종교를 가장한 공동체라는 미명아래 온 세계를 이슬람 화하려하고 있다.

그들이 정교일치를 주장하고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코란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 전반을 망라하기에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는다. 만약 성과 속을 구별할 경우 정신생활이 물질생활에 종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이 커버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한 것은 그만한 사유가 있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성지라 하여 그곳을 향해 기도를 했다. 그러다가 유태교인 및 기독교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630년 메카를 점령함에 그곳에 있는 커버 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했다.

모든 이슬람교인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메카로 순례를 하고 와야 한다. 전승에 의하면 메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자리잡아 살던 곳이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하느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 예배하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곳 커버신전에 있는 흑석(黑石=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커버신전을 건립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아브라함에게 알려준 돌로서 처음에는 너무나 희고 빛나 메카를 찾는 순례자들이 그 빛을 보고 찾아왔다)동남쪽에 있는 모퉁이에 입맞추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잠잠'이라는 우물물을 받아온다. 옛날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 목말라하는 아들을 위해 헤매면서 발버둥치고 있을 때 이스마엘의 발 아래에서 물이 솟아나 우물이 되었다는 곳이 '잠잠'이다

참고로 오늘날 우리 나라에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은 6·25 때 터키군의 파병으로 알려졌다. 최초의 모스크는 오일쇼크 때인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 현재는 전국 5곳에 사원이 있으며, 신도는 주로 이슬람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근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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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 신관에서 또 하나의 유일 신관!! -

1) 삼대종교 유일신의 메시아는 누구인가?
유대교는 지금도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 또한 예수승천이후 이천 년이 흘러간 지금까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태복음 16 : 27-28)

그런가하면 코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하마드는 너희 사람의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도이며 예언자들의 봉인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느니라"(코란 33 : 41)

여기서 주석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예언자들의 봉인이니라"는 것은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예언자 또는 예언자들의 장식물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이차적으로 마지막 예언자를 의미한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신의 웃지 못할 또 하나의 일이 생겨나고 있다.

2)유일신 종교들의 유일신 예언자는?
유대교인들이
유대교이후의 예언자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선택된 자기들만을 구원하려오는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듯이 기독교 또한 성육신 하신 하느님 아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릴 뿐 기독교 이후의 예언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한부 종말론은 수많은 예수의 재림 또는 재림을 예고하여 많은 선량한 신도들을 희생시키고 많은 물질적 손실을 끼쳤고 사회적 질서를 허무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그러니까 서기 610년경에 창시된 이슬람교 창시자 무하마드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마지막 예언자였다면 그가 바로 유대교가 고대하는 구세주의 예언자가 되어야할 것이요,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재림의 예언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은 그들의 유일신 종교관에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또 하나의 유일신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 이슬람 중에서 바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44년 5월 23일에 페르시아의 도시인 쉬라즈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사명을 선언하였으니 마치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비해 사람들을 준비시킨 것처럼 바하올라를 위한 길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고 하였다. 바하올라에 의해 바하이교가 탄생하였다.

바하이교 창시자 바하올라는 이란의 대신인, 누르주 출신 미르자 압바스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정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을 뿐, 정규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3세가 되던 해에 그의 박식은 이미 세상에 알려졌으며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고 해결하는 능력을 보였다. 20세가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 관례에 의해 왕실은 바하올라에게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할 것을 명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바하올라가 27세 되던 해에 바압이 사명을 선언한 새로운 종교에 입신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유력하고 용감한 제창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와 광신적인 이슬람 성직자들이 바압과 그 신도들을 박해할 때 바하올라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바하올라는 토굴 감옥에 약 150명의 살인범, 강도범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기묘한 상태에서 또렷하고 분명한 말씀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진실로 짐은 그대를 그대 자신과 그대의 붓으로 하여 승리토록 하리라".

바하올라의 명성은 곧 바그다드와 그 밖에 이라크의 여러 도시에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축복을 받고자 하였기 때문에 귀양살이하는 그의 처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바압의 신도들이 바하올라를 만나러 페르시아와 기타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현시자들은 다른 모든 인간들과 구별되는 존재이며 그들의 지위는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 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밤 바하올라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처소를 나와 쿠르디스탄이라는 산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산중에서 바하올라는 2년간 은거하며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조그만 동굴 속에 기거하면서 극히 간소한 식사로 생활하였다. 근방에 거주하는 이들은 그가 누군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떠 오른 보름달처럼 바하올라의 빛은 전 쿠르디스탄 지방을 비쳐 모든 이들이 이 이름 없는 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하올라의 거처를 알 수 없어 상심하고 있던 바그다드의 가족과 친지들은 어떤 이름 모를 성인이 쿠르디스탄에 거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바하올라의 아들 압돌바하는 이 성인이 곧 사랑하는 아버지임을 직감하고 사람을 보내어, 가족 뿐 아니라 바압의 신도들 모두 바하올라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으니 속히 돌아오시기를 간청하였다. 이리하여 2년간의 기도와 명상 기간 후 바하올라는 마침내 다시 바그다드로 향하였으며 그로 인한 바압의 신도들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바하올라가 바그다드로 돌아오자 이슬람 지도자들은 다시금 모략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 정부는 터키 제국의 당국자들과 결탁하여 바하올라를 또 다른 장소로 유배시키기로 하였다. 일련의 교섭 끝에 터키 정부는 바하올라를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하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바압의 신도들은 바하올라의 처소로 몰려가 물러가지 않으므로 가족은 부득이 12일간 그 주위에 천막을 치고 지냈다.

그 역사적인 첫 날 바하올라는 그 장소에 모여있는 신도들에게 자신이 바로 바압이 예언한 '하느님께서 나타내실 이'이며 '장차 오실 분'임을 선포하였다. 이 때가 1863년 4월 21일로 바압의 선언이 있은 지 19년째였다. 이 중대한 선언이 있었던 장소는 이후 레즈완(낙원) 정원이라 불리웠고, 그 이름대로 바하이들은 이 12일의 기간을 레즈완 축제라 하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바하올라는 그 당시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린 왕들과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왕 중의 왕이신 분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유명한 서한을 보냈다. 바하올라는 감옥 안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 세계평화와 형제애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그를 이단으로 매도하는 나라들이 대항했음에도 장차 도래할 새로운 세계질서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종신형의 죄인으로 악카에 유형 되었으며 바하올라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목숨을 바친 신도도 많았다. 바하올라는 악카에 도착하자 비탄에 빠져있는 신도들에게 "걱정하지 말라. 9년 후에 옥문이 열리고, 내가 저 카멜산 위에 천막을 치리라"고 약속하였다. 실로 9년만에 불가사의하게도 바하올라는 아직 죄수의 신분인 채 옥문을 나올 수 있었고, 카멜산 상에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바하올라의 위대한 인격의 매력이 주위의 모든 사람을 친구로 만들었으므로 감옥 문을 나와도 아무도 말 한마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창시된 바하올라의 바하이교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있다
첫째, 하느님은 오직 한 분으로 예배 방법이나 이름에 상관없이 창조주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둘째, 종교의 융합에 있어서 세상의 어떤 종교이든 창시자들의 목적은 모두 똑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서 하느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이 "선택받은 분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각 종교는 각자의 독특한 성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들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다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돕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셋째, 인류의 융합으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 가족의 구성원들을 모두 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모든 종류의 편견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하올라께서는 우리에게 인류는 하나요 지구는 그 집이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융합의 시대입니다.

바하이들은 바하이 신앙을 가진 이들을 바하이라고 합니다. 바하이 신앙은 독립적인 종교로서 현재 기독교 다음으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전 세계에 약 600만 명의 바하이들이 235개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100여년 동안 전 세계의 바하이 공동체는 민족과 인종간의 편견을 없애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뜻을 같이 하는 단체들과 협력하여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하이 신앙의 핵심은 인류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는 확신입니다. 바하이 신앙의 창시자인 바하올라는 "세계는 한 나라요, 인류는 그 국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하올라는 인류에게 자신의 의지를 점진적으로 계시하는 오직 한 분의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한 분 참되신 하느님의 사자들(모세, 부처, 크리쉬나, 예수, 모하멧, 조로아스터)이 모든 위대한 종교를 일으켜 세웠으며 그 역사적 과정은 인류의 정신적인 성숙 단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하이들이 믿는 것은 이 시대가 당면한 도덕적, 정신적인 도전들에 관해 인류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기 위한 분으로서 바하올라가 하느님이 보내신 가장 최근의 사자라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바하이교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바하이교는 이처럼 새로운 유일신교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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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종교들의 실상과 올바른 종교관 -

1) 물질만능에서 인간의 범죄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되면서 오늘날은 물질만능시대가 되어버렸다. 과학의 발달은 온갖 문명의 이기가 탄생시키며 인간생활에 보다 유익한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익한 혜택에 반비례하여 전통사회의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면서 부도덕한 사회악의 창궐과 갖가지 형태의 인간범죄가 늘어났다.

우선 심령측면에서 살펴보자. 과거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자들은 종교가 원시시대에는 직업적 종교계급이 대중을 억누르려고 하는 세력획득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그후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하층 계급의 불만과 불평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천국이라는 미래 행복을 약속하여 주는 방편에 불과하다 하여 종교를 오직 물질에 입각하여 정의하였다. 그리고 종교인들이 미래행복약속에 눈이 어두워 멍청이가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유물론자들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교단융성에 급급하여 종교본연의 교리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신자들을 물질적 획득이나 육신의 안락을 위한 기복적 신앙으로 유도하고 신의 맹종자 또는 배타적 이기주의자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신앙으로 결집된 신자들은 황금만능시대에 버금가는 집단화 세력화를 이루고 있다. 어쩌면 멍청이 맹신자를 만드는 첫 번째 집단이 종교지도자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지금도 성직자로서 또는 수행자로서 종교본연의 신념을 다하면서 묵묵히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종교인이나 신앙인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만연되어가고 있는 황금만능사상에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그리고 유권무죄(有權無罪) 무권유죄(無權有罪)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횡행하고 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위법을 하면서 교묘히 법망을 피해 가는 사람은 잘난 사람이고 순진한 준법자는 바보 취급을 당하는 세상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준법투쟁이라면서 법을 지키는 것으로 투쟁방법을 삼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률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종교계의 교인수가 무려 불교가 천만이상 기독교가 천만이상이라 한다. 기타종교를 합치면 우리 나라 국민과반수 이상이 종교인 또는 신앙인이다. 특히 정관계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종교든 교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 상당수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부패해 가는 우리사회와 종교현실을 보면서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궁금하다.

2) 종교의 본질과 목적
이미 삼문일도론과 종교들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모든 종교는 그 본질이 무엇이며 그 기본(基本)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 그 종교의 성립요소가 정립된다. 이들 종교의 본질을 크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자아(自我)의 발현(發現)으로 자의식(自意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둘 째: 절대자(絶對者)에 의한 즉 타자(他者)에 의한 신앙으로 타의식(他意識)에서 이루어지는 것,

셋 째: 자기초월(自己超越)의 경험으로 자타합일의식(自他合一意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본질에 대한 관점에 따라 그 종교의 인간관(人間觀)이 정하여지고 그 인간관에 따라 그 종교의 기본이 정립되게 된다. 즉 인간존재란 무엇이냐 하는 정의에 따라서 그 종교의 신앙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과거를 중심 삼아 인과응보를 들어 해탈성불(發心으로 過去를 깨달음=覺)하라했다. 그런가 하면 유교는 현재를 중심 삼아 정심수신(誠心으로 現在를 닦음=修)하라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미래를 중심 삼아 구원신앙(信心으로 未來를 믿음=信)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제다, 오늘이다, 또 내일이다 하는 것은 다만 시간에 집착된 관념일 뿐 현재는 원인도 되고 과정도 되고 결과도 된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둘이 아니요 셋도 아니다. 결국 종교의 최종목적은 인간완성에 있는 것이다. 어느 한계를 넘어서 시공을 초월하게 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3) 물은 물일뿐이다
종교의 본질과 목적이 이러할진대 올바른 종교관, 올바른 신앙관을 가진 종교인이라면 이교도와의 교리분쟁이라든가 윤리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의 자비와 인애, 사랑이 있다면 말이다. 이교도 사이에서도 그러할진대 같은 하나님을 신앙하고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섬기면서 서로가 죽이고 죽으며 원수 대하듯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청정옹달샘 물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젖소가 마시면 젖이 된다. 이와 같이 종교 또한 종교인 즉 그들의 신앙에 따라 정교가 될 수도 있고 사교가 될 수도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히 한번 생각해보자. 2001년 미국의 9. 11 테러사태이후 많은 희생이 벌어지면서 그들 종교전쟁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 말인가. 아마 아무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지금 현재도 역사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은 물일뿐이다.

물은 물일뿐인 그 청정옹달샘 물을 요즈음 과학자들이 온갖 화학작용을 일으켜 물의 본질을 변질시키고 있다. 물질적 세계에서는 과학적 응용작용으로 인간생활에 편익을 줄 수 있어도 심령의 세계에서는 인위적 조작으로 종교의 본질과 그 목적을 변조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요즈음 일부 종교인들은 옹달샘 물을 마시는 독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만약 지금 이 땅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예수님 전도당시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 말씀하셨듯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 : 33)" 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오늘날 종교현실을 생각해 보면 그 창조된 인간들은 하느님을 변조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된다.

창세기 6장 6, 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지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느님 스스로가 인간을 비롯해서 동물창조를 실패작임을 자인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역시 유한적 능력과 과오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그것이 순리다. 옛말에 수심고로(水尋古路)라는 말이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순리이기에 아무리 막아서 역류를 해도 결국은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 : 6)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다음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이때에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등 계명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했다. 그리고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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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다운 종교관에서 올바른 신앙생활 -

1) 참다운 종교관
앞에서 종교본질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바가 있다. 종교의 본질이 자의식(自意識)과 타의식(他意識) 그리고 자타합일의식(自他合一意識)에서 이루어지고 그 순화과정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인과를 벗어나 영생을 얻으므로 태평성세를 이루려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종교관에서 찾아야만 참다운 종교생활에서 올바른 신앙 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는 것과 같이 공간적으로 전생과 금생 그리고 내생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종교이든 창시자들의 목적은 앞에서 언급한바 그들의 종교관은 모두 똑같은 것이다. 다만 시공 속에서 그 과정을 논하였기에 각 종교는 각기 독특한 성격을 논한 거처럼 보이지만 산정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산하가 한눈에 들어옴에 그 물줄기와 산굽이는 달라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처럼 그들 경전들을 하께 놓고 살펴보면 같은 목적 하에서 편찬한 상중하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편에서는 과거의 전생을 논술했는가하면 중편에서는 현재 이 세상을 서술했고 하편에서는 미래에 닦아올 내생을 엮었을 뿐이다 앞에서 제시한 도표와 같이 어느 한계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을 때에는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라는 시간적 한계가 없는 것이고 과거다 현재다 미래다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을 때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이루어지고 모든 신앙이 바라는 영생이 그것이다. 모든 종교의 추구하는바가 그렇고 모든 신앙이 목적하는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직업적 종교인들은 내 것은 진리이면서 정도일 뿐 네 것은 사이비이며 사도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 신도들을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멍청이를 만들고 있다.

그러한 사유를 그들의 경전에서 수천 년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문자 적으로만 해석을 하고 자기 붓 대롱으로 별 하나만을 바라보고는 그 별만이 하늘에 있는 별이라 믿는데 연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서로가 자기 것 외에는 이단이면서 유일신에 대한 모독이요 사탄의 행태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유일신 신앙에서 같은 조상을 성기면서도 그러한 모순덩어리의 교리로 혹세무민하고 있으니 타종교에 대해서야 재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유일신종교들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창조주 하느님은 시간을 삼 단계(과거 현재 미래)로 그리고 공간을 삼 단계(전생 금생 내생)로 만들어 놓았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인간창조 또한 열 개의 수족도 길고 짧게 만들었다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열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각각의 역할과 분담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각각의 개체적 역할을 하면서도 공존하듯이 모든 종교(물론 사교는 제외해야하지만)는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종말론적인 감언이설로 혹세무민을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한창 일할 나이인 젊은이들에게 성경의 특정구절을 인용하면서 천당 가는 티켓구입요금만을 높이려하고 있다.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10)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천 년 전 속담에 호랑이 단배 피우던 때의 이야기다 그 때의 국가형태는 종교국가로 존재하고 있을 때이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십일조는 국가에 내는 세금과 같은 것 이였다

종교창시자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들 나름대로의 그 시대의 때와 장소에 필요한 것을 설파한 것이다 그러한 것을 후인들이 자기들의 편의대로 기록정리 하여놓은 것이 오늘의 경전이다 이천여 년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길거리에서나 지하철 안에서 성경 들고 한다는 소리가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하면서 예수와 기독교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예수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와 신앙은 우상숭배요 사탄의 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그들은 지옥행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말하듯이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과 기독교는 그들이 말하는 구세주가 될 수도 없으며 진정한 종교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갓 조앙신에 불과할 것이요 그들의 종교는 토속신앙으로 한갓 부족신관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나라의 이야기가 된다 한국에 카톨릭이 들어온 것이 겨우 200여 년에 불과하고 개신교가 들어온 것이 100여 년에 불고하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100년 혹은 200년 전 우리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지고 그들이 말하는 천만 명이 넘어선다는 오늘의 기독교신자만이 천당을 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천당에 간다는 천만신도 중에는 거지발싸개보다도 못한 양두구육 삯꾼들도 있을 것인데 그들도 일단은 예수를 믿었으니 천당에 가는지 묻고싶다.

혹자가 필자에게 묻기를 "선생은 어느 종교를 믿습니까?"하고 질문을 받을 때가 가끔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절에 가면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르고, 교회나 성당에 가면 기독교를 믿고 예수님을 따르며, 또 성균관이나 향교에 가면 유교를 믿고 공자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혹자에게 "그런데 선생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십니까?"하고 물으면 그 혹자 왈 "저는 교회에 나가면서 우리 구세주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 절에 가면 불교를 교회나 성당엘 가면 예수님을 성균관이나 향교에 가면 공자를 믿는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종교학을 하는 것이지 신앙이랄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하고 반문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절에서 부처를 교회에서 예수를 성균관에서 공자를 따를 뿐 그분들을 저 높은 곳에 올려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하질 않습니다. 다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힘쓸 뿐입니다. 선생들처럼 길가다 넘어져도 주님의 탓.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도 주님의 탓. 무엇하나 주님의 탓 아닌 것이 없으니 선생들처럼 주님을 좁쌀처럼 조무래기로 생각한다던가 한갓 수호신쯤으로 생각하면서 우상숭배는 하질 안 한답니다 다만 하느님이 보내주신 그분들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깨닫고 닦으면서 영생의 길을 나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 혹자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막스물러는"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공자 같은 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봐?quot;라고 합니다 이 세상 삼라만상에는 가지각색으로 제 기능을 하면서 제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선생께서도 그 노란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보라보세요 그렇게 했을 때만이 세상만물이 제대로 보일 겁니다

그리고 노랑색안경을 씌워준 그 목사님도 노랑색안경을 쓰고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만약 노랑색안경을 쓰고있질 않으면 삯꾼이요 그렇지 않으면 멍청일 것입니다" 그래서 유물론자들은 이렇게 말을 한답니다. "종교가 피지배계급에게 내세의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 해서 그들을 멍청하게 만들어 버린다"라고 말입니다

유일신종교라면서 소위 삼위일체라는 교리로 그를 반대하는 수많은 배교자를 만들고 이단시비와 파벌 싸움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그 유일신종교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태러로 온 인류를 피로 물들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교리에 대해서 알아보자."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신)으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세 위격들 가운데서 각각 구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라고 성경사전은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사도신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같은 유일신종교인 이슬람의 코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셋 중의 세 번째 분이십니다 라고 하는 자들은 실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니 하나님은 실로 오직 한 분이시니라...........(5 : 74) 또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는 다만 하나의 사도였으니 그와 같은 사도들은 그의 전에 정녕 지나가 버렸노라............(5 : 76) 그리고 4장 172절에" 오 성서의 백성들아! 너희의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말 것이며 하나님께 진실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진실로 메시아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의 사도였을 뿐이며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을 충족시키심이었으며 그 분으로부터의 자비였노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믿으며 그분들은 세분이오라고 말하지 말라 단념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으리라 실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니 그분께서 아들을 두셨다함은 그분의 성스러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그들의 신학적 해석이 어떻든 간에 3위라는 위격을 논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하나님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어휘 하나만으로도 이미 둘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들어갈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하나님만을 신봉하는 유일신 종교로서 코란에 기록된 것을 본다면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가 아니라 다신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어느 한쪽은 가짜 유일신교가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보다보면 어는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렇다고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끝으로 한가지만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대개의 기독교신자들이 오늘의 인간 출생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출생한다고 믿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지금 출생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출생한다면 한마디로 하나님은 죄인제조공장장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가며 구속사역을 할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을 정하여 그때부터 죄 없는 의인을 창조하면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인간을 이간질하는 싸움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독실한 신자일수록 지금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다고 믿고 있으니 그래서 그들을 멍청이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은 죄인제조공장장도 아니오 인간을 이간질하는 싸움꾼도 아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은 우주공간에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그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의해 개는 개새끼를 낳고 고양이과 동물은 고양이과 동물을 낳으며 사람은 사람의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주야와 계절 또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자전과 공전은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창조된 것만은 말이다. 이러한 논리 정연한 것마저 노란 색안경을 씌워 놓고 이 세상에는 노란 색뿐이니 노란 색이 아닌 것은 환상이며 우상이니 믿으면 안 된다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멍청이가 아니라 정신병자를 만들고 있다한다면 너무 심한 소리일지 몰라도 사실이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한다 말인가? 그러한 말이 너무 심한 말이라면 필자로서는 이런 말을 하고자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고 침묵을 지켜라(不可說 不可思議)>종교 지도자들이여! 오늘날과 같은 대명천지 하에서 불가사의한 것을 사의한 것처럼 혹세무민하지 말지어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이 시대는 이천 년 전 호랑이 단배 피우던 때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일컬어 "다원주의 시대"라 한다 지금은 한 지구촌의 시대로 하나의 문화, 하나의 생각, 하나의 가치관, 하나의 생활양식, 하나의 종교만이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아니며 그러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문화, 서로 다른 생각, 나름대로의 가치관, 색다른 생활양식, 각이 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라는 뜻이다.

이러한 다원주의 시대에서 다종교 사회에 살면서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 그들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함양한다는 것은 온 인류의 평화로운 삶의 전제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종교 간의 대화를 증진시키고 갈등을 해소한다고 해서 어느 종교는 존재해야하고 어느 종교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논술한 "삼문일도론"에 근거하여 본다면 나름대로의 종교는 공존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해서 마치 종교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태고 기독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종교들의 전유물의 신이 아니다 창세기를 보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삼라만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들의 유일신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있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요 하나님의 창조이념에 위배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화 있을 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 가고자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누가복음 11 :52) 그들이야말로 지옥문이 환하게 보일 것이다.

2) 올바른 신앙생활
시간이 삼 단계가 있고 공간이
삼 단계가 있다 그런가하면 그 시간과 공간에서 사계절이 있게 되고 거기서 만물이 성장에서 결실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도 자연법칙에 따라 출생에서 성장으로 그리고 장년에서 노년으로 거기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계절에 따라 삼라만상이 나름대로 일이 있는 것과 같이 인간 역시 출생에서 성장기에는 성장에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할 것이고 장년기에는 장년에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할 것이며 노년기에는 노년에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3, 4월 파종할 시기에 재대로 파종하지 못했다면 그 씨앗이 재대로 자랄 수 없는 것과 같이 한창 배우고 자라야할 때에 배우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했다면 그 아이는 육체적으로 제대로 성장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제대로의 기능을 못할 것이다

배울 것을 제대로 배우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고 자랐다 하더라도 곡식이 결실기에 장마를 만나 제대로 결실을 못하는 것처럼 인간 또한 주위여건을 잘못 만나 인간으로서의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면 장마철에 제대로 익지 못한 곡식이 추수할 것이 없는 것처럼 인간 또한 인생결실은 쭉정이 결실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들의 종교창시자들로 하여금 인간일생에 따른 그때그때에 필요 적절한 신앙생활을 하게하고 있다 이것을 필자는 삼문일도론(三門一道論)으로 밝힌 것이다.

"삼문일도 론과 종교들"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한바 있기에 여기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개략적 서술만을 하고자한다 이 우주창조구성이 시공 속에서 삼라만상은 생멸(生滅)을 반복하면서 삼 단계(과거와 전생. 현재와 금생. 미래와 내생)의 시공이 거듭되고 있다

이러한 시공 속에서 모든 종교창시자는 과거와 전생 아니면 현재와 금생이거나 미래와 내생을 설파하고 있다 이 세상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나왔고 앞으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종교가 나올지라도 이 삼 단계로 된 시공을 논할 뿐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또한 종교이다. 그것을 삼문일도 론에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교들 중에서 이 삼 단계를 논한 대표적인 종교로서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를 예를 들어 언급한 것이다.

불교는 과거와 전생을 논술하면서 과거를 각성(覺性)하라 했다 그리고 유교는 현재와 금생을 논술하면서 현세를 수도(修道)하라 했다 기독교는 미래와 내생을 논술하면서 내생을 신앙(信仰)하라 했다 과거를 알아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을 말한다.

과거를 모르면서 오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오늘의 현재가 없다면 무엇으로 미래를 알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내생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과거를 깨달았을 때만이 오늘의 할 일을 알 수 있게되고 오늘을 잘 닦음으로서 내일의 믿음에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원리 속에서 신앙을 가질 때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어느 때인가 필자가 며칠 동안 어는 기도원에서 보고 느낀 바를 여기에 옮겨본다. 그때가 I M F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4, 50대 노숙자가 많을 때였었다. 그 기도원에 저녁 예배시간이면 7, 8백여 명의 신도들이 모이는데 그중 과반수가 이들 4, 50대들이었다, 그때 그들의 기도주문은 어떻게 하든지 직장을 갖게 해달라는 하나님에 대한 갈구였다. 개중에는 남편의 직장을 안정되게 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뿐인가 요즈음 선거철이면 또 입학시기가 되면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은 교회가 아니면 절간이다 그러다 보니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라고 꾀나 장사가 잘되는 모양이다 요즈음 커지는 것은 절간이요 대형교회 뿐이니 말이다. 과연 이러한 종교현실들이 진정한 종교의 종교관이라 할 수 있으며 올바른 신앙의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겠는가? 허구에 찬 맹신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백 몇 십 년 전 미국 시골 어는 교회의 이야기다 교회의 높고 뾰족한 첨탑 때문에 벼락이 떨어지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 그 교회의 신도들은 하나님이 이 교회에 죄인이 있음을 보고 진노하셔서 이처럼 벼락을 내리시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모든 교인이 모여 기도하면서 '아간'을 찾아내어 아골 골짜기로 데려 가거나 회개시키는 일을 계속해 왔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죄만 있으면 용하게도 벼락을 내려 보내는 전지전능 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 후 어는 날에 누가 와서 뾰족탑 위에다 피뢰침을 설치해주고 갔다. 그러자 분명 교인 중에 '아간'이 있는데도 벼락이 떨어지는 일이 없어졌다. 이제 교인들은 하나님이 그 자그마한 피뢰침에도 꼼짝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한 분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피뢰침의 원리를 모르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제한된 지식에 따라 하나님을 그들 임의대로 생각하고 어느 때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었다가 또 어느 때는 피뢰침에도 꼼짝 못하는 무력한 하나님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에 따라 변조되는 하나님이 아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종교 신앙의 현실은 어떠한 가 우리 속담에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로 일이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편이다, 이러다 보니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일이 잘되면 내 탓이요 잘못되면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게된다 그래서 상대를 미워하는 것도 하나님의 탓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유일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왜곡된 신앙에서 일어나는 현실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 주님의 뜻을 업고 나오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이 된 신들의 전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종교전쟁이며 그들이 말하는 허울 좋은 성전(聖戰)이라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 들은 이러한 자기우상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맹신에서 앞에서 예거한 것처럼 피뢰침 하나에서 하나님이 전지전능도 되었다가 무력한 하나님으로 자기들의 제한된 식견으로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내종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라는 배타적 신앙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을 이야기 하다 보니 기복신앙에 대해서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복신앙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천당이든 극락이든 그곳에 가기 위해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그들의 행위심사가 올발라야 한다. 예를 들어 남을 도와주든지 헌금을 내든지 무슨 좋은 일을 하든지 그것이 모두 내가 천당이나 극락에 가기 위한 것이고 그곳에서 얻을 복락을 위한 투자라는 생각에서 한다면 그것은 자기중심주의에서 한갓 욕심에 불과한 것이다 천당이나 극락이 결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안일 것이고 또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그러한 곳이 천당이나 극락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종교를 갖게 되는 것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필자가 인도에서 태어났으면 힌두교 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란에서 태어났으면 이슬람교 인이 되었을 것이고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면 카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주어진 여건에 따라 그들의 신앙도 달라지 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이슬람교를 믿든 종교의 본질을 알고 그들의 적성에 맞추어 믿을 때만이 올바른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유교가 의식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불교의"각성(覺性)"이나 기독교의"회개(悔改)"와 유교의 "격물(格物)"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의식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전환을 하려면 성장기에는 각성을 해야한다 우선 사색에서 자기를 찾고 거기서 자기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지기(知己)요 각성(覺性)이다 그리고 나서야 인간으로서의 바탕이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기에 사회적 여건에 따라 순응하며 자기를 이길 줄 알아야한다 이것이 극기(克己)요 수신(修身)이다 그래야 만이 격물(格物)에서 중도를 배우고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헌신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 할 일 다 했다 생각되면 그런 다음에는 저 세상을 향하여 회개하고 반성하며 이 세상의 마지막 봉사와 헌신을 하면서 자기를 길러야한다 이것이 양기(養己)요 거기서 구원(救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 세상을 향할 때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될 것이며 오늘이면 어떠하며 내일이면 어떠하냐. 이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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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맺는 말 -

우리나라에 그 수많은 종교 신앙생활인 들은 맹종의 신앙, 기복의 신앙, 세력획득의 신앙, 이기주의의 집단화신앙(공동체운운)등으로 유도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안일 것이다. 그러한 신앙생활의 종교적 역기능으로 이 사회를 선도해야할 종교가 사회악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2003년 6월 20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00명중 54명꼴로 종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한다.

17일 문화관광부가 지난 1999년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를 토대로 만든 ‘도표로 본 한국의 종교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교인구 비율은 53.6%에 이르렀다. 비종교인 비율은 46.4%이었다. 종교별 인구비율을 보면 불교가 26.3%로 가장 신도가 많았다. 그 다음으로는 개신교 18.6%, 천주교 7.0%, 유교 0.7%, 기타 1.1% 등의 순이었다.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지난 1985년 42.6%에서 1995년 50.7%로 상승한 뒤 1999년53.6%로 다시 올랐다한다.

그런데도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사회윤리와 도덕은 허물어져가고 사회악은 점점 더 창궐해 가는 현실이니 한심하다하지 안을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우리나라 종교지도자들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이다. 그들이 과연 진정한 종교관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인도하고 선도하였는가하고 말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오늘의 신앙인 들이 가져야할 아주 원초적인 신앙심을 그들 스스로는 알고 있으면서 천당 문 앞에서 그들은 십일조를 노략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한다.

첫째 영육(靈肉)이 병존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는가?
둘째 영의 세계가 있어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는가?
셋째 인과응보(因果應報)로 하여금 반듯이 과보(果報)가 형성된다는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는가?.

이 삼대신앙심이 없으면서 어느 종교의 신도라던가 어느 종교는 구원이 있고 어느 종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양두구육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종교라는 허울을 쓰고 자기진신을 자기 스스로가 사기 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모든 세포조직에 의해서 생활하다가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세력획득의 수단과 이기주의의 집단화에 목적이 있는 부류들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절이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니까 요행을 바라며 기도를 하는 척하고 있다. 그러다가 코끼리 뒷걸음질 하다가 쥐잡기로 50% 확률에 걸려 어쩌다 맞으면 무엇이 있기는 있는가보다 하면서 기복신앙에 스스로 지옥문턱에 턱거리 하러 가는 한심한 사람이 되고 만다.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남을 속이기 전에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한다.(無自欺)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면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어 종용히 도에 맞나니 그것이 성인이니라(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하였다. 사람의 용모가 다 다르듯이 개성 또한 다 다르다. 또 습성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풍토에 따라 다르다. 뿐만 아니라 성장과정에 따라 개개인이 다 다르다. 그래서 오늘날에 있어서 세상은 다원화되고 있다. 그것이 자연 순리인 것이다. 그 자연 순리를 역행하면서 내 것만이 우리 것만이 한다면 그것은 순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고 마는 것이 된다.

연합 뉴스에 올라온 이라크 전 소식이 있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이라크戰> 후세인, 대독연설로 `聖戰 촉구(종합) - 연합 뉴스(2003/04/02 08:40)

(바그다드.=연합뉴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1일 자신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미군 주도하의 연합군에 대항해 지하드(聖戰)을 벌일 것을 이라크 국민과 "영광스런 우리(아랍)민족의 아들들"에 촉구하면서 이라크가 침략군에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후세인 대통령은 이날 저녁 모하마드 사이드 알-사하프 공보장관이 이라크 국영TV에 출연해 대독한 대국민 연설에서 "침략자들이 현재 믿음의 성채에 대해 벌이고 있는 침략은 종교, 부(富), 국민, 명예, 영혼, 그리고 이슬람 땅에 대한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후세인 대통령은 "이것이 바로 지하드(聖戰)가 의무인 이유이며 순교자들은 하늘에서 보상을 받게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형제들이여, 기회를 잡아라."라고 촉구했다.

그는 또 이라크가 결국 영미 연합군을 압도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고 싸워라. 그들은 사악한 침략자들이다. 당신들은 승리할 것이고 저들은 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연합군이 최근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던 남부지역 전투에 언급, "움 카스르, 바스라, 니네베, 나시리야에서 당신의 형제, 아들이 했던 것처럼 침략자들과 싸워라"라고 촉구하면서 "모든 장소에서 그들과 싸우고 이슬람 땅에서 물러갈 때까지 숨쉴 틈도 주지 말라"라고 촉구했다.

<이라크戰> "아랍인 3천명이상 자폭공격 준비"-연합 뉴스(2003/04/02 02:02)

(바그다드=연합뉴스) 3천명 이상의 아랍인 자원자들이 이라크 내에서 미. 영 연합군에 대한 자살공격을 감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타하 야신 라마단 이라크 부통령이 1일 말했다.

라마단 부통령은 이날 바그다드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랍 국가들로부터 6천명이상의 자원자들이 이라크에 도착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이들중 절반이상이 폭탄을 장착하고 있으며 향후 며칠내에 그들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될 것"이라면서 "이는 우리가 아랍인들에게 요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코란에서 한 구절을 옮겨본다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도록 하여 현세의 생명을 내세를 위해 바치도록 하라 그리고 누구든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자는 죽임을 당하든 혹은 승리를 얻든 지간에 내가 곧 그에게 커다란 상을 주리라"(4 : 75)

"................현세에서의 혜택은 거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더욱 나으리라 또한 너희는 조금도 잘못 인도되지 아니하니라."(4 : 78)

앞에 연합뉴스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라크대통령 후세인은 이와 같은 코란구절에 근거하여 자살공격대 아랍인 자원자들이 3천명 이상이나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라신은 후세인의 손을 들어주질 않았다 개전 이후 한 달도 못되어 지나 4월 16일 미국대통령 부시는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다. 일설에 의하면 미국대통령 부시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에 성경 위에 손을 얻고 기도를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은 여호와하나님이 이기고 알라신은 패하고 말았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지를 않는다. 이번 싸움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이라크가 폐한 것은 여호와도 알라도 아니다. 다만 미국이 현대무기를 가지고 힘의 논리에서이긴 것뿐이다 성경에서나 코란에서는 틀림없이 유일신이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여호와 신과 알라 신을 유일신이라 말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입씨름에 지나지 않은 말이 되고 말았다

직업종교인들이여! 그대들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無自欺) 여기 성경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그대들에게 증거 할까한다. 하느님이 인간창조를 창세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니라"(창세기 2 : 18) 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세기 2 : 22-23)

그 때 그 시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 계시운운 하면서 적어놓은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리면 안 되고 어느 것은 송두리째 틀려도 그대들이 하는 일에 충족만 되면 된단 말인가?, 창세기 인간창조 이념으로 본다면 오늘날의 남녀평등을 하느님을 들먹이면서 말이나 할 수 있을 것이며 말라기 3장 10절을 들먹이며 십일조를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또 예수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마가복음 2 : 27) 그럼에도 안식일을 어기면 마치 큰 죄나 짓는 것 같이 신도들을 위협하고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지켜야할 윤리마저 버리게 하고 속칭 호로 자식을 만들고 있는 목자들은 각성해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 인륜을 따르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다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인륜을 저버리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계율을 따르는 사람이라 해야할 것이다.

필자는 결코 안티 기독교이거나 안티 이슬람교가 아니다 또 안티 유일신 자도 아니다 다만 하느님의 참뜻이 무엇이며 역대 성현들의 설교이념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들 스스로가 알면서 그러는지 몰라서 그러는지 답답하다 못해 오늘의 종교현실에서 회의를 금할 수 없다. 상대가 있어야 비교가 되고 비교가 되어야 발전이 있게 되고 발전이 있어야 정도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예수를 알려면 부처를 보고 부처를 알려면 예수를 보라. 그리고 공자를 본받아라. 그들 모드가 이 세상에서 착한 일하고 다음 세상 좋은 곳에 태어나서 영생하라는 것밖에는 다른 소리한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이 세상에 왔던 곳이 다르고 왔던 시대가 다르다보니, 이 세상을 논하고 저 세상을 설파한 것이 다를 뿐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바와 같이 그들의 경전을 한곳에 모아놓으면 일장(一章) 이장(二章) 삼장(三章)으로 된 한 권의 책자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쪼록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자연그대로를 보아라. 자연은 형형색색 수만 가지의 만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수레바퀴가 굴러가듯이 수 십억 년을 굴러왔고 앞으로도 수없이 굴러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이신론(理神論)자도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올바른 종교관에서 올바른 신앙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재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질말고 또 멍청이 맹신자를 만들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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