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노무현의 마지막 경고
2009년 05월 25일 (월) 08:44 미디어스
[미디어스]2004년 4월15일 오후 6시. 17대 총선 출구조사 결과가 스크린에 점멸하는 순간, 나는 환호했다.152석이라는, 18년만의 집권 다수당이 된 노란풍선 때문이 아니었다.사상 최초 원내 진입, 절차적 정당성을 거쳐 법적인 민중의 대표 자리를 얻어낸 민주노동당 때문이었다.누군가는 자유당-보수당 양당 구도에서 노동당이 자유당을 밀어내고 한 자리를 차지했던 영국처럼, 10년 안에 우리도 보수 열린우리당, 진보 민주노동당 구도에 한나라당은 극우 소수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란 섣부른 전망까지 내놨다.하지만, 기쁨을 누리기보다 맘 구석에 숨어있는 찜찜함을 되뇌는데 더 익숙한 나는, 이게 과연 진정한 진보적 시대 물결일까, 의심했다.한국 사회의 견고한 보수-관료주의 기득권층이 이를 용인할 것인가. 진보적 시대 물결이라기 보단,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탄핵이란 제도가 정작 민중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치러지면서,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이유에 부합한 일시적 반발심 아니었을까. 그래서 되레 눈길은 권영길이 아니라, 노무현에게 쏠렸다.역시 그랬다.노무현은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공권력에 휘둘려 자살하고, 미국의 패권주의 논리에 고스란히 굴복해 이라크에 파병하고, 신자유주의 물결을 피할 수 없다는 재계와 관료들의 하소연에 한·미 FTA를 시도했으며, 부안과 평택에선 국익이란 논리로 토착민들의 보습 댈 땅을 앗아갔다.그리고 4년 뒤, 온 나라에 삽질 경영학을 펼치고 있는 권위주의 경제학의 화신이 절차적 정당성을 거쳐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 노무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한 나는, 설마 와병중인 또 다른 노 전 대통령이겠지, 했다.아니었다.그리고 종일, 왠지 모르게 우.울.했.다.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그저 죽음의 무게에만 눈길을 주며 눈물만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그렇게 자존심 강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쉽게 갔을까, 라고 안타까움으로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다.검찰의 목조르기 수사를 탓하는 사람도 있었다.반대로 수사에서 얼마나 더 나올 게 많았으면 죽음으로 묻고 가려하나, 라며 말초적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시.정.잡.배.도 있었다.노무현은 여전히 죽음까지 이.기.적.이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도 찾지 못한 채 우울했다.그래서 일부는 봉하 마을로 향했고, 일부는 광화문에서 여전히 산성 같은 벽을 쌓고 있는 경찰 앞에서 오열했고, 일부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밀주의 두통으로 혼란을 잠재웠고, 일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망연한 주말을 보냈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다.78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며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이 사실을 통보한 택배회사에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물연대 박종태 광주지부장의 죽음, 경찰특공대의 토끼몰이 진압에 내몰려 불에 타 죽은 5명의 용산 철거민들의 목숨,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전용철, 홍덕표씨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은 같은 비중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 사람의 죽음 값은 모두 같다, 라고. 그럴지도 모른다.적어도 앞의 소외 계층이 숨졌을 때 우리가 느꼈던 아픔 값과 노무현의 죽음이 내미는 아픔 값이, 하나의 개별적 인간의 슬픈 종말에 대한 감정의 절대량으로서 다르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하지만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를 좀 더 우울하게 하는 이유에, 절차적 정당성을 지닌, 그래서 민중이 한 시대의 절대 권력으로 선택한 대.통.령.이란 자리를 지낸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또 애와 증의 대상이었던 인간 노무현으로서 몇 가지 덧붙여진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실험을 한 대통령이었다.그는 2002년 민주당 상임고문 시절,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며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한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외쳤다.그랬다.노무현 정권 당시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에서 권위주의가 모습을, 적어도 잠시나마 감췄다.지금은 권력의 주구로 환원한 검찰을, 대통령이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권위로 내리찍었으면 됐을 검찰을, 그것도 새파란 소장검사들과, 그는 개혁을 얘기하며 토론으로 맞장 떴다.“대통령이 체통도 없이 시끄럽다”며 그들 스스로도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내세웠던 일부 언론을 통해 전파된 목소리로, 국민들이 하나같이 그를 껌처럼 씹어대도, 지금처럼 사정 권력을 총동원해 입막음하지 않았다.비단 현 정권의 잘못 때문에 그가 상대적으로 빛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대통령을 헌정 역사상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신기하면서도, 친근했다. ‘인간’ 노무현은 마치 축구선수 박지성을 바라보는 우리네 인식과 비슷하다.박지성은 차범근이나 박찬호처럼, 뛰어난 신체 조건이나 감각을 지닌 선수가 아니다.그는 경기장에서 뛰고 또 뛰고 또 뛴다.헤질 데로 헤진 박지성의 발이 온 국민을 감동시킨 적이 있는 것처럼, 인간 노무현은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릴 정도의 우직한 근성으로 온갖 모순과 맞붙었다.질 줄 알면서도 몇 차례나 경상도에서 ‘호남 정당’ 깃발을 꽂고 출마한 그는, 질 줄 알면서도 유비의 인정과 대의에 끌려 절대권력 조조와 맞섰다 결국 작은 별로 지고만 제갈량과 같은 호감을, 우리에게 줬다.그는 진정한 좌파적 정치인이 여전히 발붙이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진보적이라는 레테르를 안고 견고한 벽과 맞서 싸운 일종의 대.표.선.수.였다.그가 절규하며 내뱉었던 말처럼,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했던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맞섰던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했.”던 한국 사회에서 저런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라며 모두가 신기해했다.그래서 우리는, 권력의 공포가 준 아비투스에 길들여진 우리 스스로에겐 ‘밥그릇의 문제’라느니, ‘공고한 현실의 한계’라느니 따위의 위선적 변명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싸움판에서 비켜선 채, 우리를 대신해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는, 인간이자 정치인인 노무현을 대표선수 자격으로만 응원했고, 그 응원의 무게만큼이나 그의 실정에 반비례적으로 실망했다. 한 인간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그 인간의 파편적인 시대 일반에만 집중하며 가장 동시대적인 그의 삶의 일부만을 평가하게 되지만, 한 인간이 죽으면 우리는 전체를 한꺼번에 조망하는 망원적 시야로 그의 삶을 차분히 반추한다.그런 면에서 노무현의 죽음은 최근 6년 동안의 실망만으로 평가되기엔 부족한 점이 있다.결국 63년 동안 ‘바보’였던 노.무.현.이란 개인의 죽음은 여전히 비루하게나마 살아남고 있는 자들에게 일말의 경고장을 준 셈이다.대표선수에게만 책임을 떠맡기고 나 스스로는 굴종하며 살아온 현실의 삶, 그 삶이 하나하나 모여 노무현에게 떠맡긴 책임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건 아닐까. 그 죄책감의 뒤안길에서 우리가 그저 눈물만 닦고 있기엔, 그 눈물이 너무 무기력하기만 하고 가식적이기만 한 건 아닐까. 노무현이란 사람의 죽음이 주는 무게감이 조금 덜어지는 순간, 조만간 밀어닥칠 죽음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정치적 수사를 그저 멍하게 우울증에만 빠져있는 채 맞이한다면 곧 또 다른 ‘노무현’이 파생되진 않을까. 노무현이라는 ‘실험적’ 인물이 죽음으로 말하고자 한 건, 결국 그가 애써 싸워왔던 대상, 5년 동안 잠복됐다 다시 창궐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견고한 기득권 장벽이라는 가.족.력.에 익숙해진 우리를 깨우치는 마.지.막. 외침 아니었을까. 정치적으로 내몰리면 늘 ‘좌빨’이라는 치명적 화기로 무장한 채 편을 갈라 물타기를 시도하는 견고한 보수적 정치 지형, 5년 동안 자리보전의 눈치 보기에만 전념한 채 개혁적 시도를 사사건건 발목 잡는 복지부동 관료주의, 내 지역 출신의 정치인이 당선되면 내 지역 땅값이 오르고 돈줄이 술술 풀린다고 믿는 지리멸렬한 지역주의, 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선 남의 자식은 철저하게 짓밟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고집스런 가족주의, 개인적 치부를 위해선 주변의 처절한 삶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주택 수집가들의 완고한 이기주의란 한국 사회의 가족력. 정의와 상식이란 이름을 지난하게도 배반해온 그 가족력을 다시 한 번 떨쳐낼 수 있는 실.험.이라도 해보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나 혼자만의 환청일까. |
'미스터 클린의 죽음'..美언론, 盧 전 대통령 삶 조명
2009년 05월 25일 (월) 04:13 노컷뉴스
[노 前대통령의 삶, 향후 정치적 파장 분석기사 이어져...] [워싱턴=CBS 박종률 특파원] 의 주요 신문들이 24일(현지시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한국 내 추모 분위기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 내용을 상세히 전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삶과 향후 정치적 파장등을 집중 하고 나섰다. 워싱턴타임스(WT)는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한국이 국가적 충격에 빠졌다"면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직접 애도성명을 발표했고, 임시분향소가 마련된 봉하마을과 서울등지에는 추모물결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워싱턴타임스는 "노 전 대통령이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받았지만 부패에 얽힌 한국 사회에서 '미스터 클린(Mr. Clean)'으로 존경을 받아온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한국인들(The Koreans)'의 저자인 마이클 브린(Michael Breen)은 WT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부패한 사람들은 부패와 함께 살아갈 수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잘못된 일을 했다는 사실과 타협할 수 없는 개혁운동가였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WT는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향후 정치적 파장과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반대했던 보수 언론과 정치권에 역풍이 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추모객이 촛불을 밝히고 있는 사진을 국제면에 크게 싣고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 권력에 오르기까지의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역정과 재임 기간의 공과(功過)를 상세히 소개했다. 포스트는 또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은 개인적인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관련된 데 대국민 사과를 했으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는등 커다란 심적 고통에 시달렸다고 전했다. 타임스(NYT)는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추방과 암살, 투옥을 당한 적이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는 처음"이라면서 "노 전 대통령 가족이 받고 있는 혐의는 대기업 재벌들로부터 막대한 비자금을 모았던 전직 대통령들의 부패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이라고 보도했다. NYT는 "한국의 현 정부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보복수사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치적 의도로 비춰지면서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려 했던 노 전 대통령은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불거진 긴장국면은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임시분향소에서는 반정부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도 있고, 한승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권 인사들이 조문을 제지 당하기도 했다고 NYT는 덧붙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훼손되는등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정치적 파장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
1200만표부터 14줄까지, 숫자로 본 노무현
2009년 05월 25일 (월) 11:22 머니투데이
[머니투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역경과 반전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고 봉하에서 태어나 봉하에서 자신의 죽음까지 선택했다.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인권 였던 그가 정계에 발을 내디딘 것은 88년 13대 총선이었다.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당시 신군부의 핵심으로 여권의 거물이었던 민정당 허삼수 의원을 꺾으면서였다. 당시 그의 필승 전략은 후보 단일화였다. 허삼수 의원에 대적하기 위해 현역 의원이던 한석봉씨(신민당)와 단일화를 엮어내며 야권 표 분열을 막아낸 것이다. 등원 후 5공 비리 청문회 등을 거치며 스타 의원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등장과 달리 곧 비주류의 길을 택했다. 90년 3당 합당에 반발해 민자당 행을 포기하며 꼬마 민주당을 택했고 지역감정의 벽에 막혀 92년 14대 총선(부산 동구)과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15대 총선(종로 출마), 2000년 16대 총선(부산 동구)까지 줄줄이 낙선으로 귀결됐다. 98년 보궐선거에서 종로에서 당선되기도 했지만 사실상 그의 발길은 계속 부산에 머물렀다. 연이은 패배를 통해 담금질된 그는 지역감정에 맞서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승리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차별화된 득표력도 인정받았다. 그가 16대 총선과 부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각각 기록한 득표율은 35.69%와 37.58%였다. 97년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권유받은 그는 정권교체를 목표로 뛰었고 DJ 당선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영남 출신 정치인이 호남 기반 당에 입당하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이었고 당에서 여전히 비주류였지만, 그는 뚜렷한 정치적 소신을 무기로 마침내 2002년 당내 경선과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단일화 등을 거치며 1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득표수는 1201만4277표(48.9%)로 역대 대선 사상 최다 득표였고 이 기록은 사상 최고의 압도적 표차였다는 이명박 현 대통령의 17대 대선 득표수(1149만2389만표)를 압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재임 시에도 그는 비주류로서의 삶은 지속됐다. 2004년 3월12일 탄핵안 표결을 통해 총 투표수 195표 중 가 193표, 부 2표로 탄핵됐고 2개월간 직무가 정지되기도 했다. 또 10분의 1발언도 그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2003년 대검 중앙수사부가 여야 대선 자금과 관련한 전면수사에 나서자 당시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쓴 것의 10분의 1 이상 썼다면 대통령직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지지율 면에서도 천당과 지옥을 맛보기도 했다. 출범초 지지도는 80%에 육박할 정도였지만 경제 , 측근비리, 대선자금 수사, 행정수도 이전 공방, 파병 논란, 한.미 FTA 추진 과정 등을 거치며 20%대 초중반까지 떨어지는 인기 하락도 겪어야 했다. 집값 급등과 서민 경제 악화 등도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에는 주가(코스피지수)가 2004.22포인트까지 치솟기도 해 사상 처음으로 지수 2000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퇴임 후에는 그는 자신의 고향인 봉하로 돌아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뒀지만 청와대 기록물 유출 사건에 이어 박연차 사건으로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위기에 몰렸다. 4월30일 350여㎞의 버스 여정 끝에 검찰에 소환된 그는 13시간의 마라톤 조사를 받은 끝에 5월1일 다시 봉하 사저로 돌아왔다. 20여 일의 침잠 끝에 그가 택한 것은 죽음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5시21분에 유서 작성을 시작해 5시44분에 최종 작성(5시26분에 1차 저장)을 마쳤다. 23분만에 14줄의 유서를 작성한 것이다. 63세의 삶을 마감한 23분이었고 그 뒤 노 전 대통령은 봉화산 부엉이바위에 올라 바위 아래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이 시각이 오전 6시 45분이었다. 유서 작성을 마친 뒤 꼭 1시간 뒤였다. |
배성민|사진=이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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