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란 [the Koran]
개 요
유일신론을 강조했고 고유의 엄격한 종교의례를 발전시켰다. 이 종교 안에서 여러 종파와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지역마다 문화적·종교적으로 큰 편차를 보이지만 모든 신도들은 공통된 신앙으로 묶여 있고 단일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슬람의 기본 가르침은 〈코란〉에 있다. 이슬람교도(Muslim)들은 〈코란〉이 태초의 신의 말씀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알라의 명을 받아 문맹(文盲)인 예언자 마호메트라는 복사기를 통해 한 자, 한 획도 빠짐없이 그대로 인류에게 전달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신성한 절대신의 말씀을 운율에 맞추어 낭송하는 것은 그리스도교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나 중들이 불경을 읽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또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이슬람 성전 건물 안 벽에 우상이나 다른 그림을 새기는 것이 금기사항이었으므로 그곳에 〈코란〉 구절을 새겨넣는 것을 크게 선호하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들이 읽고 있는 〈코란〉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사망(632)한 지 20년이 지난 제3대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Uthmān:644~656 재위) 때에 완성된 것이다. 이때 양피지, 가죽, 야자나무 껍질, 나무 조각 및 낙타의 몸 등 여러 군데 흩어져 씌어 있는 〈코란〉 구절을 모아 비단과 파피루스에 다시 수록하여 기본경전으로 만든 것이다.
〈코란〉은 114장 6,200여 절로 나누어져 있고 가장 긴 장(章)은 오늘날의 인쇄체로도 30여 쪽이 되지만 짧은 것은 불과 3, 4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랍어로 장은 수라(Sura), 절(節)은 아야(Aya)라고 부른다. 각 장의 배열은 마호메트가 20여 년 동안 받은 계시 순이 아니며 제1장을 제외하고 대체로 가장 긴 장에서 짧은 장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그 짜임새가 낯선 〈코란〉은 각 장마다 독특한 이름이 있는데, 그 내용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제2장은 암소의 장(surat al-baqr)이라고 부르는데, 암소에 관한 것은 총 286절 가운데 몇 절에 불과하다.
그 이름도 예언자 모세가 절대신의 명을 받아 살인자를 찾기 위해 암소 1마리를 죽인 데서 나왔다고 한다(2:73). 메카 초기의 계시는 주로 인간의 내면적인 것, 즉 절대신과의 관계와 임박한 최후의 심판 등을 다룬 내용이며 그 문체는 시의 운율로 되어 있지만 산문체이다. 반면 메디나에서 받은 계시는 주로 인간의 외면적인 것이어서 그 내용은 움마의 행정과 그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 많으며 서술적인 문체이다. 또 메디나 계시는 〈구약성서〉 또는 〈신약성서〉에서 유래한 이야기나 일화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알맹이는 변형된 것이 많다.
〈코란〉은 아랍어 기록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랍 문학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하여 그에 버금 가는 아랍 문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고대 아랍 문학의 특징인 심취적 요소를 수준 높게 다듬어놓은 모형이어서 오늘날까지 아랍어가 분열되지 않게 막아준 파수꾼 역할을 했다. '코란'이란 말은 아랍어 동사 '읽다'(qa raa⁾a)에서 나온 파생어로 '읽는 것', 즉 '독경'(讀經)을 뜻한다. 예언자가 받은 첫번째 계시 96장 제1절도 '읽어라'로 시작된다. 〈코란〉의 어휘 하나하나는 이슬람교도에게 모두 신성한 것이고 절대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법률을 도출(導出)해야 올바른 이슬람 성법(聖法 Shari'a)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슬람교도들은 예언자 생존시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통치수단으로 성법이 전제되어야 했다.
성법의 필요성은 〈코란〉의 해석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해석학(tafsir)이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타프시르). 그래서 특정한 구절의 해설을 확정시켜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 여건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해설이 권위를 가지게 된 예도 허다하다. 유명한 해설서로는 타바리(839~923), 자마흐샤리(1075~1145), 파흐룻 딘 알라지(1210 죽음)의 것이 있으며, 최근 것으로는 마호메트 아브두(1848~1905)와 그의 제자 리시드 리다(1935 죽음)의 해설서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수니파의 것이다. 시아파의 해설에는 투시(11세기)의 것이 명성이 높으며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이븐 알 아라비(1240 죽음)의 것이 주목을 끌고 있다.
하디스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말씀과 관행을 기록한 것으로 〈코란〉에 버금가는 권위로 간주되며 이슬람 역사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그 연구는 이슬람의 양상(樣相)과 기풍을 이해하는 지침이 된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회상은 즉시 체계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하디스의 본격적인 발전은 느리고 고르지 못했으며 체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사후 1세기까지의 전승은 이슬람 공동체의 형성과 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공동체 결속의 틀이 되었다.
사후 2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디스의 체계화는 더 촉진되고 그것이 공동체와 맺는 결속은 더욱 견고해졌다. 즉 하디스의 형식은 마호메트 개인에 관한 것으로, 그의 교우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문장으로 다듬어 간추린 것이다. 하디스의 자료들이 방대해지고 날조되기까지 하자 이를 분류·편집할 필요가 있게 되었고 마호메트 사후 3세기에 수니 이슬람교도들은 6가지의 권위있는 하디스를 편찬했다.
하디스는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연결고리, 즉 이스나드(isnad)와 그 내용의 진위를 가리는 마튼(matn:진수)으로 나누어진다. 즉 하디스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나는 A로부터 들었는데, A는 B로부터, B는 C로부터, C는 D로부터, D는 예언자의 말씀을 E(그는 예언자의 교우였음)로부터 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결고리를 이스나드라고 한다. 이 연결고리가 하디스의 출처를 밝혀준다. 하디스는 이스나드와 마튼을 기준으로 신빙도가 높은지 또는 미흡한지에 따라 건전(sahih)·좋음(hasan)·약함(daif)의 3가지로 구분된다.
하디스 편찬자 가운데 가장 저명한 알 부하리(810~870)는 16년간의 노고 끝에 완벽한 이스나드를 갖춘 7,397개의 하디스를 모았다. 그중에서 이스나드가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순수한 것은 총 2,762개가 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60만 개 이상의 돌아다니는 하디스를, 알 부하리가 3,450가지의 이야기를 모아 97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에 버금 갈 정도로 유명한 하디스 편찬자로는 무슬림 이븐 알 하자지(817~875)이 있다. 이밖에도 이슬람력 3세기에 많은 하디스 전집이 편찬되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하디스는 이슬람 초기부터 서로 달랐다.
시아파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완전무결성을 수니파와 마찬가지로 믿었지만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와 그의 자손 가운데서 선정되는 이맘들의 특별한 역할과 기능 또한 믿었다. 시아파의 하디스는 쿨라이니(939 죽음)의 것이 유명하다.
■5가지 기둥
예언자의 사후 수십 년 동안에 이슬람 공동체에는 신자가 지켜야 할 준수사항이 확정되었다. 이것을 '이슬람의 기둥'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앙의 증언, 예배, 종교적 헌납, 단식 및 순례이다. 하와리즈파는 이 5가지에 성전(聖戰)을 추가해 6가지를 기둥으로 간주한다. 신앙의 고백은 '신의 유일성과 마호메트는 신이 보낸 이'임을 증언한 것이다(→ 샤하다). 예배는 하루 5번 행하는데 해뜰 무렵, 정오, 오후 4시경, 해질 무렵, 잠자기 전에 올린다(→ 살라트). 예배는 혼자서 할 수 있으나 이슬람 성전에서 하는 것을 장려한다. 금요일 정오에는 집단예배를 각 지역 중앙 이슬람 성전에서 본다. 예배 전에 손·발·얼굴을 씻으며 메카를 향한다. 종교적 헌납은 자카트라고 하는데, 〈코란〉에 그 헌납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천수답의 경우에는 10%,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5%, 현금과 귀금속을 1년간 보관하는 경우 2.5%를 징수한다. 이슬람교도들의 정치적·종교적 힘이 약화된 이후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의 이 종교적 헌납은 강제성을 띠지 않고 개인의 양심에 따라 바치게 되어 있다.
단식은 이슬람력 9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 매일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먹는 것, 마시는 것, 피우는 것 및 성적 욕구를 자제한다(→ 사움). 그러나 해가 진 후 다시 정상생활로 돌아온다. 병자·임신부·여행자는 그 기간만큼 다른 날에 단식을 행한다. 미성년자는 단식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신체 건강한 이슬람교도들은 가능한 한 일생에 1번 이상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하즈). 순례는 이슬람력으로 12월 7일부터 10일 사이의 기간에 행하며 많이 할수록 더 좋다. 순례자는 우선 신성한 직6면체의 바윗돌인 카바를 7번 돌고 난 후 그 옆의 조그마한 검은 돌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쓰다듬는다. 그 다음 메카에서 미나를 거쳐 아라파트 평원으로 가며, 끝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즈다리파에서 밤을 보내면서 소·염소 등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순례는 끝난다.
이슬람교도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곳은 메카의 카바이다. 아브라함이 만든 이곳을 천국의 기쁨과 힘이 닫는 곳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다음은 메디나의 예언자 성전이다. 3번째로 성스러운 곳은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한 예루살렘이다. 시아파에는 이밖에도 다른 순례지가 있는데, 즉 이라크의 카르발라와 이란의 메셰드이다. 일반적으로 보통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수피 성인들을 따르고 있는데, 그들이 죽으면 그 무덤도 성지가 된다. 그 좋은 예가 바그다드의 알 카디르 알 질라니의 무덤인데 해마다 전세계의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이 곳을 방문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 성전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한다. 예언자의 시대나 초기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성전은 공동체의 중심이었으며 그 관리는 국가의 책임이었다. 이슬람력은 예언자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622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는 태음력이다. 축제일에는 라마단 달의 종말을 축하하는 단식 종료제(Id al-Fitr)와 순례의 종결을 기념하는 순례제(Id al-Adha)가 있다(→ 이드 알 피트르, 이드 알 아드하). 또 예언자가 하늘로 승천한 날과 최후의 심판일을 축일로 한다. 시아파는 예언자의 외손자인 후세인의 순교일인 무하람(첫째 달)의 10일을 제삿날로 삼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성인의 죽음을 기리는 날이 많은데, 이는 성인이 죽음과 더불어 정신생활의 절정에 도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7세기 후반 이슬람 전통신학과 다른 학문, 즉 아랍 어학, 〈코란〉 해설, 하디스 편찬, 법학 및 연대기의 발달과정을 서로 분리해서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슬람 신학은 계시의 사실성과 그 배경을 확인하고 이슬람교도들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또 이슬람 공동체의 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8세기 전반기에 신학은 신의 유일성, 정의 및 다른 속성을 비롯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내세에 관련된 의문이 제기되어 전문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했다. 그래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므로 신학의 명칭도 칼람(대학)으로 통하게 되었다.
이슬람 신학이 그 모양을 처음 나타냈을 때에는 그리스도교·유대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힌두교·불교 등에 관한 신학과 철학서의 번역을 통해 또는 여러 종교의 많은 신학자들간의 논쟁을 통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를 비롯한 이란과 인도의 종교사상도 간접적이지만 격을 가리지 않고 소개되었다. 9세기 전반부에 신학자들이 방대한 번역작업을 착수했기 때문에 많은 사상적 전문용어가 아랍어에 유입됨에 따라 철학과 종교 및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비주의는 이슬람교도들이 신과의 체험을 통해 신의 사랑을 직접 찾으려는 믿음과 관행의 한 측면이다. 수피라는 용어는 아랍어로 양털이라는 뜻의 'suf'에서 유래된 말로 초기 이슬람 수도자들이 양털로 된 옷을 입고 다닌 데서 나왔다. 이 수도자들은 아랍어로 파키르(faqir), 페르시아어로 데르비시(dervish)로 알려졌는데 그 뜻은 가난한 사람이다. 이슬람 신비주의는 발전과정에 따라 몇 가지 단계로 나뉘는데 첫째, 초기 금욕주의 단계, 둘째, 신과의 사랑을 찬미하는 고전적 단계, 셋째, 수피들의 형제적 우호관계를 다짐하는 종단의 단계로 나뉜다(→ 우애조합). 그러나 이러한 구분과 관계없이 이슬람 신비주의의 역사는 신비주의자 개인의 신비적 체험에 크게 의존한다.
이슬람 문학에 끼친 수피 사상의 가장 큰 공헌은 아랍어·페르시아어·터키어로 지어진 매력적인 서정시이다. 수피 사상은 시에 관심을 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녀 사랑에 관련된 시는 대부분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간과 아름다운 젊음을 노래한 것이다. 인도 이슬람교도들의 신비주의적 노래 가사에는 "영혼은 사랑을 주고 싶은 아내이며 신은 사랑의 대상인 남편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다. 사나이·아타르·루미의 페르시아어 작품은 수세기 동안 시인들에게 신비적 생각과 표현을 제공한 원천이 되었다. 또 신에 대한 찬미는 수피 시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의 대중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신비로움을 전달해야 했으므로 각 지역의 민족, 지역 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신비주의자는 신의 지혜가 담긴 〈코란〉에서 주로 그들의 전문 용어를 인용하여 사용하며 심오한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최후 심판 날의 무서움을 읊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도 신을 사랑한다는 구절도 찾아내어 신비주의적 사랑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들은 또한 종교법을 엄격히 준수할 목적으로 예언자의 생활태도와 행동양식을 모방하는 데서 행동의 근간을 찾았다. 수피는 신에게 한 치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려고, 아무리 작은 이기심일지라도 버리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정화하여 자신의 의도와 행동에서 절대적 순수성(ikhlas)을 찾는다. 또 절대신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하며 심지어 내일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경으로 생각한다. 즉 신에게 접근하여 궁극적으로 합일하는 길은 금욕생활, 즉 자기 정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깨달음).
수도의 길은 개인의 참회에서 시작된다. 절대 유일신에게 접근하려고 작정한 초심자는 도사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즉 도사가 수도원에서 초심자에게 엄격한 금욕적 관행을 훈련시키면 초심자는 철저히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인내와 감사는 수도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참회보다 더 높은 단계이다. 즉 빛과 밝음을 찾아가는 수도의 길은 영지(靈知 gnosis), 즉 신과 인간의 사랑 단계에서 절정에 이른다. 정통 수니파는 이 점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들의 절대신에 대한 사랑은 순종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의 길의 최종 목적지는 절대신에게 들어가 자기 소멸(fana⁾)하며 완전히 합일(合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신비주의자는 합일에서 수도의 길이 끝나지 않고 절대신 속에서 다시 여행하여 남는다(baga⁾)고 보았다. 최초의 수도원은 페르시아인 헤이르(1049 죽음)가 만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종단은 12세기 아브드 알 카디르 알 질라니(1166 죽음)가 세웠으며 거의 전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었고 바그다드에 있는 그의 무덤은 지금도 순례객들의 성지이다.
13세기에 이르러 전 이슬람 세계에 매우 큰 종단들이 설립되었다. 이 종단들은 선교활동에 이바지했으며, 또 종종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했다. 예를 들면 1781년에 북아프리카에서 만들어진 티자니야 종단은 그들의 영향력을 세네갈과 나이지리아까지 확대시켰고, 19세기초에 시작된 사누시야 종단은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리비아 왕국을 건설했다. 자아 실현의 방법을 매개로 수피 사상은 신플라톤 철학, 헬레니즘, 영지주의(Gnosticism)와 결합하여 신지주의의 체계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신지주의는 1191년 시리아에서 처형당한 페르시아인 앗 수라와르디에 의해 조명(照明 ishraq) 철학으로 발전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스페인 태생의 이븐 알 아라비가 존재의 단일성을 내세워 이성보다 신비적 직관을 우위에 두었다.
이슬람에서 철학의 기원과 착상은 신학과 차이가 있다. 철학은 비종교적 학문 이론과 더불어 발전하는 데 비해 이슬람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신학과 별개의 것이나 철학에서 이러한 부분은 있을 수 없다. 이슬람교도들의 철학적 관심은 9세기경 신학의 생성 단계에서 나타났다. 즉 그 기원은 그리스어·파흘리비어·산스크리트로 된 철학과 학술 서적이 9세기 중엽까지는 아랍어로 대량 번역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학문 분야는 자연과학·수학·형이상학·윤리학·정치학 등 광범위했다. 최초의 이슬람교도 철학자 알 킨디는 무타질라(mu⁽tazila)의 융성기인 9세기 전반에 바그다드에서 살았다.
그의 저서는 그가 인도의 수학과 그리스의 철학에 식견을 갖추었음을 보여주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서와는 친숙하지 못한 것 같고, 또 접근방법도 미숙한 것처럼 보였다. 알 라지는 9~10세기에 무타질라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창조된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불완전성과 악의 책임을 절대신에게 돌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창조론의 발전에 전념했다. 결국 알 킨디와 알 라지는 철학과 이슬람을 갈라놓고 있는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이 간격을 메우는 데 공헌한 이가 알 파라비(9~10세기)이다. 그는 철학을 이슬람의 틀에 맞게 다시 짜서 이 철학적 틀에 따라 논리학·물리학·수학·형이상학 및 정치학을 체계화시켰다. 특히 정치학의 연구 대상은 행복의 탐구와 공동체에서 행복의 실현에 두었다(→ 정치철학).
11세기초에 크게 활약한 철학자 이븐 시나는 알 파라비의 저서에서 몇 가지 영감을 받았다. 즉 창조·형태·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보다 계시 종교의 교의에 더 가깝고, 또 플라티누스를 비롯한 신플라톤 학파의 교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견해와 계시 종교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서 철학은 창조나 내세의 보답과 응징의 문제에는 종교의 가르침에 반드시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세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문제에 파고들어 본질과 실존을 구분했다. 즉 실존한다는 사실은 실존물의 본질에서 추론 또는 설명될 수 없으며, 형식과 질료는 그 자체가 우주의 움직임이나 실존물의 점진적 실현에 상호작용·반작용하지 못하며 그 기원일 수 없다고 논했다. 따라서 실존은 동인(動因 agent-cause)의 덕을 입어 본질에 추가 또는 부가되는 것이다. 즉 원인이 곧 실존 개물이며 또 그 결과와 병존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북서 아프리카에서는 12세기 전까지 이슬람 신학과 철학,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소홀한 반면 의학·약물학·수학·천문학·논리학 등에 대한 관심은 컸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와서 파라비, 이븐 시나, 가잘리의 저작이 알려지면서 철학도 발달했다. 서부 이슬람 철학은 이븐 밧자, 이븐 투파일을 거쳐 이븐 루슈드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븐 투파일보다 젊은 이븐 루슈드는 철학과 이슬람 공동체의 관계 정립에 뛰어났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추구가 이슬람 율법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슬람 신조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혜의 으뜸인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한 결혼을 신학자들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법 해석에 맞출 필요가 없다고 그는 논했다. 즉 신법 자체가 철학자에게 직접 그 해석을 최선의 방법으로 추구하도록 그 권위를 위임했기 때문에 신학자는 이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철학과 부조리〉는 가잘리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서부 이슬람 철학 문헌은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유럽 중세철학의 발전과 현대철학의 출현에 공헌했다(→ 히크마). 동부와 서부 이슬람 철학은 이슬람 전통주의의 부활과 새 지혜의 출현에 의해 압도되어 고립되었다. 전통주의의 대표격인 이븐 타이미야(1328 죽음)는 사소한 변혁에도 반대하여 철학적·신학적·법학적 논의를 전개하여 독실한 선조들의 믿음과 관행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선조들은 곧 예언자 마호메트와 그 교우들을 의미하고 그때는 철학이 없었으므로 철학도 변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미 이성 철학은 알 가잘리의 〈철학의 부조리〉라는 저서로 큰 타격을 입어오던 차였다. 즉 이슬람 이성철학은 지하로 들어가서 한동안 지내다 새 옷을 갈아 입고 새 지혜란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새 지혜는 곧 이슬람 신학, 그리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 학파, 중근동의 신비주의 및 고대 이란의 빛 개념 등이 결합된 것이다. 새 지혜의 첫 주창자는 앗 수라와르디(1191 죽음)이다. 그는 새 지혜를 조명철학이라 불렀다.
최초의 새 지혜학자 앗 수라와르디는 이븐 시나가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과 우연, 가능성과 현실성 및 질료와 형상 등을 구분한 것을 단지 이성에 의한 구분이라고 혹평했다. 그대신 그는 빛과 어둠으로 불리는 실존과 그것의 부정에 대한 관념에 관심을 두었다.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비당파적 태도는 다른 무슬림 철학자나 신비주의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혜의 특징이 되었다. 앗 수라와르디보다 새 지혜의 발전에 더 큰 영향을 끼친 이가 이븐 알 아라비(1204 죽음)이다. 그의 교설은 존재의 단일성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진리인 절대 유일자와 그의 현현(顯現)인 창조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븐 알 알라비 이후 새 지혜는 동부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븐 시나와 앗 수라와르디, 이븐 알 아라비의 저서에 대한 주석이 널리 행해졌으며, 또 뛰어난 시들을 보급하여 문학교육이 이루어졌다. 12명의 이맘파를 국교로 삼은 이란은 17세기에 문학과 과학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미르 다마드(1631 죽음)와 그의 제자 물라 사드라(1640 죽음)는 이스파한 학파를 대표했으며, 역사와 철학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으로 폭넓은 저작 활동을 했다. 이들의 저서에는 철학, 신학 및 신비주의가 갈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절대 유일신 알라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이슬람의 교리이다. 따라서 이슬람 법은 이슬람 공동체에 내린 알라의 계명을 표현한 것이고, 이슬람 신앙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체계인 것이다. 이를 샤리아라 하는데 본래의 뜻은 '물 마시는 곳으로 이끄는 길'이다. 샤리아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보면 9세기말에 다수의 이슬람 법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샤리아와 서구법 사이에는 2가지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우선 샤리아의 범위가 더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샤리아는 한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절대신과 인간 양심과의 관계도 포괄하고 있다. 2번째 샤리아는 서구법과는 달리 절대신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마호메트 사후의 사회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샤리아는 변형되지 않는 것이다. 이슬람 법학에서는 법을 형성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를 조정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사회통제).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지도 아래 이슬람의 기본적 행동양식을 토대로 622년 메디나에서 창립되었다. 그러나 〈코란〉은 총 114장 가운데 단지 80여 장만이 아랍인의 관습과 규율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포괄적인 법률체계가 아니다. 마호메트 생존시 법률 문제는 〈코란〉의 일반적 규정에 의해서 해결했으며 사후에는 칼리프가 이를 승계했다. 661년 우마이야 왕조 수립과 함께 수도가 다마스쿠스로 옮겨간 후 법의 차원이 보다 넓어져 카디라는 재판관 제도가 활용되고, 또 로마-비잔틴 법과 페르시아-사산 왕조 법의 요소와 기능이 점령지에서 이슬람 법체계로 흡수되었다(→ 사법부).
8세기 중엽에 아바스 왕조(750~1258)의 등장과 함께 샤리아의 적절한 시행 여부가 논의되자 법학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나타난 법학파가 생기게 되었다. 수니파는 4개의 법학파로 갈라졌다. 즉 아부 하니파(767 죽음)의 하나피야, 말리크 이븐 아나스(759 죽음)의 말리키야, 샤피이(820 죽음)의 샤피이파, 아흐마드 이븐 한발(885 죽음)의 하나빌라이다. 이들 네 법학파의 신학체계는 예언자와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순나(관행)였으므로 그 추종자를 수니라고 불렀다. 단지 각 파는 자기 파의 법률 해석이 최선이지만 타파의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특히 샤피이는 〈코란〉에 언급되지 않은 분야에서는 개인 의견을 선호하는 법학자와 예언자의 선례를 존중해야 한다는 법학자 사이의 논쟁을 포용했다. 즉 〈코란〉과 예언자의 관행인 순나를 법원으로 삼고 법학자의 개인 의견인 라이(ray)도 그 적용 한계를 명확히 했다. 그후 〈코란〉과 순나의 구절에서 유추한 키야스(quyas)와 법학자들의 합의점인 이즈마(ijma)가 법원으로 추가되었다. 이밖에도 시아파·이바디파는 수니파의 법체계와 비슷하나 각각 독자적 법체계를 마련했다. 각 법학파의 추종자 분포상황을 보면 하나피야는 중동과 인도 대륙, 말리키야는 북·서·중앙 아프리카, 샤피이파는 동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하나빌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시아파는 이란을 비롯해 인도와 동아프리카의 시아 공동체, 이바디파는 잔지바르, 우만, 알제리의 일부에 분포되어 있다.
전통적 이슬람법은 형법·상거래법·가족법·상속법 등으로 나누어진다. 살인·폭력 등의 범법자를 피해자가 받은 만큼 똑같이 보복함으로써 벌하지만 피해자의 가족이 보복 대신에 보상금을 지불하는 해결방식에 동의할 경우 그렇게도 허용된다(→ 범죄).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면 배교 행위와 노상 강도는 사형하고, 절도는 손을 절단하며, 혼외 정사의 당사자가 기혼일 경우 돌로 쳐 죽이나 미혼자일 경우에는 100대의 곤장질을 한다. 가족관계는 가부장제로 아버지는 딸의 결혼시 계약의 권리를 가진다(→ 여성). 부부관계에서 남편은 한번에 최대한 4명의 부인과 결혼할 수 있으나 부양할 책임이 있다(→ 복혼제). 부인은 가정문제나 사회문제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또 남편이 이혼을 원할 경우 비교적 용이하나 아내가 원할 경우는 그 반대이다. 유언에 의한 상속은 부동산의 1/3로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2/3는 법에 규정된 상속자에게 주어진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상속상의 차이점은 수니파는 부계 친척을 중심으로 하나 시아파는 부계와 모계 친척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19세기 이슬람 사회는 서구의 영향으로 민법·상법·형법 등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구화). 샤리아의 형법과 민법이 대부분 이슬람 국가에서 폐지되고 변화에 맞게 유럽형 세속법으로 개정했다. 또한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많은 국가에서 샤리아법의 적용에 법정의 기소와 증거를 규정해 놓도록 법제화했다.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샤리아는 상황변화, 특히 도시의 급속한 인구증가와 여성해방운동으로 그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결과 1926년 터키에서는 샤리아 법을 전면 폐지하고 그대신 스위스식 가족법을 채택했다. 이집트의 가족법은 1920년과 1931년에 개정되었고, 시리아와 튀니지에서도 일부다처제와 이혼에 관련된 법이 각각 1953, 1957년에 개정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코란〉과 순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진행되어 1961년 이슬람 가족법령이 공포되었다.
이슬람에서는 결혼을 정상으로 보고 경제적 궁핍에 의한 독신을 예외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 가족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코란〉은 수도원의 독신생활을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여자를 악으로 간주하고 보통 독신생활을 하고 있다. 부부관계는 의복과 같이 몸에 맞아 상호 사랑과 자비로 이루어지는 것을 권장한다. 부모에 대한 효행,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를 강조했다.
이슬람은 종교생활과 일상 세속생활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는 종교국가로 정의된다. 수니파·하와리즈파·시아파 사이에는 통치자 개념에 각기 상이한 점이 있다. 수니 할리파는 예언자의 후계자로서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로마 교황의 직능과는 달라서 교리의 정의와 입법권도 그에게는 없다. 그는 단지 이슬람 법의 집행과 이슬람 공동체의 일반적 이익에 봉사할 따름이다. 이론상으로는 그 자신도 이슬람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어서 필요할 경우에는 폐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니 정치이론은 사회여건의 산물이다.
즉 역사 발전에 따른 사실을 합리화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수니파는 통치권을 예언자의 사위 알리의 후손에게만 속해야 한다는 시아파의 정통성 주장과 통치권은 심지어 에티오피아 노예에게도 줄 수 있다는 하와리즈파의 민주적 주장 사이에서 중간적 입장을 취한다. 즉 칼리프는 쿠라이시족(예언자의 부족) 출신자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우마이야 왕조(661~750)와 아바스 왕조(750~1258)의 할리파 가문이 쿠라이시 부족 출신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나아가서 부당한 통치자에 대한 반란권을 주장하는 시아파의 극단론적 견해와는 달리 수니파 통치자는 일정한 자격을 구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사소한 과오로 통치자의 지위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차츰 수니 정치론은 경직화 또는 정형화되어갔다. 단 하루의 혼란은 30년간의 독재보다 더 나쁘다는 정치적 주장을 나오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는 절대적 전제 군주가 될 수 없었다. 즉 그는 이슬람 성법인 샤리아 아래 있어야만 했다. 이슬람 율법학자들도 줄곧 정치적 귄위 위에 샤리아의 주권을 받들어왔기 때문이다.
법과 교리의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는 문화적으로 보면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성은 이슬람의 팽창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또 이슬람 영역의 확대는 대체로 두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첫번째는 7, 8세기에 아랍인의 정복, 즉 무력에 의한 것인데 그 예가 이란이다. 2번째는 12, 13세기의 이슬람 신비주의자, 즉 수피들의 선교활동에 의한 것이며, 그 예가 인도네시아이다. 이란은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정복된 지 300년 후에 비록 그 문화와 언어는 회복했지만 이슬람의 영향이 너무 심대하여 이슬람 이전과 이후의 이란은 동질적 요소와 이질적 요소가 반반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란은 17세기에 이르러 절대 다수가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개종하여 종교적으로는 독자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은 수피들에 의해 평화적으로 개종되었다. 따라서 그 개종은 진척도도 매우 느렸으며 또 17, 18세기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그 전통적 관행이 상당히 남게 되었다. 특히 선교 일선에 나선 수피들은 현지인과 접촉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관행과도 적당히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현상은 이슬람의 변두리지역인 인도, 파키스탄, 중앙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중부지역에도 대체로 같다. 이슬람 상인들 역시 이슬람 세계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19, 20세기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정책으로 인해 이슬람의 정치적인 힘이 상실되었지만, 이슬람 공동체라는 의식은 점점 더 강해져서 2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이슬람인들이 그들의 정치적인 독립과 주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金定慰 옮김
출 처 :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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