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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모음 !

한민족의 뿌리와 신앙...


 

 

한민족뿌리 신앙

 


우리의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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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구나 다 1) 하화족의 저작으로 알고 있는 '역경'을 동이의 저작인 동이의 '역경'으로 되돌려 놓아 제자리를 찾게 한다면 이 일이 가능할까' 필자는 이 일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역경'이 하화족의 저작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경'이 하화족의 저작이 아님을 밝히기 위하여서는 '역경' 64쾌를 설명하는 단사彖辭, 상사象辭와 효사爻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사辭에 숨어 있는 비밀들을 풀어내기만 한다면 그 일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들 사를 읽으면서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 해온 사에 대한 해석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사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사가 나오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찾아서 해석을 해야 하는 데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만약 지금이라도 사를 쓰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추리하여 찾아내서 제대로만 해석을 한다면 이해가 가능하다.


사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사에 쓰이는 문자들이 숨기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찾아서 읽어야 한다. 지금 해석해 놓은 의미와는 다른 본래의 의미를 찾아서 다른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사에 쓰이는 문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어 다시 읽어내지 못하면 '역경'은 영원히 하화족의 저작으로 남고 만다. '역경'을 동이의 저작으로 되돌려 제자리를 찾게 하려면 이 작업을 해야만 한다.


그런대 왜 '역경'이 동이의 저작에서 하화족의 저작으로 감쪽같이 둔갑을 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동이와 하화족의 조상이 같고 문화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이태리의 석학 자코모 박사가 지적했듯이 2) 인류 최초로 문명을 가진 민족은 동이였다. 동이는 황하유역에서 문명을 열었다. 이 동이에서 하화족이 나왔다. 그리고 하화족이 동이를 동이가 있던 중원에서 북방으로 밀어내었다. 때문에 동이의 저작은 고스란히 하화족의 차지가 되었고, 하화족은 동이의 저작을 대를 물려가며 개작을 시도하여 명실상부하게 하화족의 저작으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저작을 속속들이 하화족의 소산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변조하고 개작한 저작의 구석구석에 변조하지 못한 잔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역경'이 그러하였다. '역경'이야 말로 하화족의 위대한 실패작으로 남았다.


우리가 '역경'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도움을 받아야 할 학문이 있다. 문자학과 역사라는 학문이다. 문자학은 사라진 또는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찾아내는데 필요한 학문이다. 또한 '역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에도 필요한 학문이다. 새로이 찾아낸 상고시대의 역사와 문자학의 도움을 받아서 '역경'의 효사를 해석하면 '역경'을 동이의 저작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 이제부터 그 작업을 해 보려고 한다.


'마고에서 단군왕검까지'는 사라진 또는 잃어버린 우리의 상고시대 역사를 대부분 문자학의 힘을 빌리고, 우리 사학계에서 위서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단고기'와 '부도지', 아직 번역본이 출판되지 않은 '조선기'와 '진주소씨晉州蘇氏 족보서문', 중국측의 사료 등에서 자료를 뽑고, 우리의 천문과 무속자료 등을 활용하여 복원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한 이유는 우리 상고사의 실체를 형상화 하자는 의도와 '역경'해석의 자료로 쓰고자 하자는 의도가 복합된 것이다.


주 석

1) 하화족은 동이에서 나온 종족이다. 동이는 최초로 세상에 나온 민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이는 '동쪽에서 일어난 춘분의 기'라는 뜻이다. 하화는 '춘분의 기가 발전하여 하지의 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화족은 동이의 치우천왕, 유망,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던 삼조시대三祖時代에 황제가 치우천왕과 유망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패자가 됨으로써 동이로부터 이탈하여 생겨났다. 하화족은 근세에 와서 한족漢族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중국민족으로 불린다.

2)1994년에 사단법인 한배달에서는 '천부경' 연구논문 30여 편을 실어 '天符經 硏究'를 발간하였다. '천부경 연구' 편집후기에는 자코모 박사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글학자이신 한갑수 선생이 발표하신 바에 따르면, 1971년 당시에 주 이태리대사 문덕주 대사로부터 주선을 받아서 이태리 정부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이태리 관광장관이며 세계적인 대석학인 자코모 박사로부터 ‘솟대’를 비롯한 11가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를 설명해 주자 자코모 박사가 두 시간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 후 “Korea 당신 나라가 세계에서 단독으로 선진국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나라가 확실히 세계에서 절대자를 모신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태인과 희랍사람이 아니라 한국이 단독으로 최고 선진국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나의 학설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유일신은 7가지 속성을 가지는데, 홍명희 소설에 나오는 민족기도 세 가지를 합치니까 7가지 속성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유일신의 7가지 속성이란 첫째 태초 이전에 계셨고, 둘째 창조주이시고, 셋째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존재이시고, 넷째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다섯째 무소불능이시고, 여섯째 안 계시는 곳이 없고, 일곱째 유일하시다는 것이랍니다.


둘째 이유는 절대자를 존경하는 종교다운 종교를 가진 최초의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7가지 속성을 가진 절대자 하나님을 옛 그리스도가 태어나 알려주기 4000년 전(BC4000)에 먼저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문화를 최초로 싹트게 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문화란 사회생활에서 학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데, 나일강변의 고대 이집트인보다 1세기 반에서 2세기 정도 앞서, 한국 사람들이 황하연안에서 인류문화를 싹틔웠다는 점입니다.


넷째는 처음으로 음력을 만든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음력은 BC2357년에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 정확도나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양력을 능가하고 있으며, 실제로는 지금까지 1/100의 오차도 없었고, 양력이 수차례에 걸쳐 수정을 반복하는 반면, 음력은 한 번도 고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코모 박사는 그 당시 황하유역에는 중국 사람(필자 주, 화하족)이란 있지도 않았고, 오직 한국사람(필자 주, 동이)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민족(필자 주, 동이)이 세계 최초의 문화민족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http://www.hollykim.com ARTIST - YONG GWAN KIM

 


 

인류역사의 흐름 (동양편)


1. 마고 시대 ⇛ 2. 황궁 시대 ⇛ 3. 환인 시대 ⇛ 4. 환웅 시대 ⇛ 5. 복희 시대 ⇛

6. 신농 시대 7. 삼조 시대 ⇛ 8. 홍제 전욱 소호의 시대 ⇛ 9. 단군왕검 시대 ⇛



1. 마고시대


동이의 시조 마고


지금의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민족을 구성하게 된 태초의 인종은 역사의 여명기인 황하문명시대黃河文明時代에 동이東夷라는 이름으로 그 문명을 열어갔다. 동이라는 종족이 생겨나기 전에는 구려九黎가 있었고, 구려가 생겨나기 전에는 풍이風夷가 있었다. 풍이가 생겨나기 전에는 마고麻姑가 있었다.


마고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이전에서 12000년 전 사이의 어느 시대에 인류 최초의 문명인으로 우리 조상으로 사셨던 분이다. 마고가 사셨던 그 시대는 천문학자에 따르면, 지구에 기상재해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한 때였다. 당시에 지구가 당한 재해의 원인은 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 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세차운동에 의하여 지구에 사는 생물들이 멸망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이 마고 멜키지덱 이었다.

마고발해만에 있는 묘도군도에서 살아남았고, 멜키지덱 유대의 에서 살아남았다.


마고에 대한 기록은 '부도지符都誌' 실려 있고, 멜키지덱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창세기 실려 있다.


지구의 생명이 멸망하기 전을 선천이라고 하고, 멸망하여 새로운 문명인이 출현했을 때를 후천이라고 한다. 세차운동의 실체를 몰랐던 당시에 마고는 자손에게 왜 지구가 쓰러져 선천과 후천이 생기는지 그 의혹을 밝히라고 하였고, 그가 떠나온 직녀성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를 함축한 말이 해혹복본解惑復本이다. 그가 그 징표로 제시한 것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긴 신체神體인 천부삼인天符三印이다. 천부삼인을 그대로 거울에 옮긴 것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明斗이다. 명두란 해日와 달月과 북두칠성斗이라는 뜻이다.


마고는 명두를 걸어두는 신당을 역사상 최초로 삼신산의 방장산에 지었는데, 이를 방장方丈이라고 하였고, 방장은 사방 한 장(丈, 10尺, 3.3m) 규모의 전각이었다. 방장이 있는 곳을 소도蘇塗 즉 솟대를 세우는 곳이라고 하였다. 굿을 할 때 쓰는 신대는 방장에 세운 솟대에서 나온 것이다.


무당이 굿을 하기 전에 굿상에 올리는 시루에 한지로 접은 가지 꽃을 붙인 신대를 꽂는 풍습은 마고시대의 방장에서 나온 것이다. 시루는 신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루가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았고,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산을 시루산(증산烝山, 임금님 산이라는 뜻이다)이라고 하였다.

안택굿에서 무당이 가지 꽃이 핀 신대를 꽂은 시루를 들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옛날에 상고시대에 임금이 제관이 되어 굿을 할 때 행했던 의식이 그대로 굿에 남아서 전해 오는 것이다. 안택이라는 말이 지금은 한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굿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상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사택 방위와 동사택 방위를 좌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고가 세운 초국가 신시의 위치


신시는 의회와 시장의 기능만을 갖춘 나라로, 각 종족이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할 때만 나라로서 의사를 결정하고 시장을 여는 초국가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각 종족의 대표가 참석하는 의회를 화백이라고 하였고, 또한 문물을 배에 싣고 와서, 해변에 당幢(깃발)을 꽂아 놓고서로 필요한 것을 찾아서 교환하는 것을 시장이라고 하였다.


각 종족의 대표가 삼신산 아래에 와서 함께 모여 하늘에 제를 지내고 시장을 열어 문물을 교환하였다. 요즈음 신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시의 의회기능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화백의회제도였고, 신시의 시장기능은 세금을 바치지 않는 문물교환과 세금을 바치는 문물교환의 2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말한다.


신시가 있었던 곳이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의 세 곳이다. 이 셋을 삼신산이라고 하였다. 사서에 봉래 방장 영주 세 섬은 발해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묘도군도廟島群島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설을 지상에 제일 처음 발표(愛石 1999. 9월호)한 분이 장동균씨九山 張東均(한국애석문화연구소장)이다. 장동균씨는 애석지에 실린 '신시본토기 3 신시의 발생지는 삼신산' 고조선의 뿌리 신시는 바다에서 탄생하였다'는 제목의 글에서 묘도군도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해도海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바다(편집자 주, 발해)를 건너가기 전에 봉래가 있고, 그 주변으로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등고선이 꾸불꾸불 보이는 곳이 언덕인데, 제일 높은 곳이 해발 439m의 주산이다. 최초로 등장하는 청구(靑丘, 필자 주, 역사서에 기록된 청구는 지금의 탁록이다. 청구라는 지명이 상나라 이후에 탁록으로 바뀌었다) 땅으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이 해도를 분석하기 위해서 수심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그려 넣은 것이다. (필자 주, 장동균씨는 해도에 색칠을 하였다)


진한 갈색은 육지이며, 살색에 가까운 색깔로 칠한 곳은 수심 15m 이하의 개벌이다. 청색은 15m이상으로 수심이 깊은 등주수도登州水道이며, 급류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된 패수浿水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징검다리 같은 발판을 디디고 건너면 수심 3.8m 밖에 안 되는 곶串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장산도가 나타난다. 갈색으로 표시된 곳이 물 밖으로 보이는 섬들이다. 태백산으로 추측이 되는 북장산도 옆에 탱글렁도가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제사를 올리던 장소로 추측이 되고, 탱글렁도 옆으로 청색으로 그려진 곳이 조천지朝天池로 추측되는 연못이다.


섬의 주변으로는 동쪽으로 깊은 바다로 보이는 장산수도長山水道가 있고, 이곳에는 어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외의 바다는 대부분이 수심이 15m 이내의 낮은 곳이므로 5, 6천 년 전에는 간조 때에 모두 물 밖으로 드러나는 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는 8m~10m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추측이다.

묘도군도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은 묘도廟島의 묘廟'사당이라는 문자와 탱그렁도의 탱그렁(하늘)이라는 문자이다. 묘자를 이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보고, 탱그렁은 단군을 의미하는 문자로 본다. 한국문자 학회에 따르면, 묘廟자는 신농국시대에 나라에서 전욱고양이 임명한 제관이었던 중여곤衆艅'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 데에서 생겨난 문자라고 한다. 탱그렁은 몽골족의 천공이나 천상계를 의미하는 탱그리(Tangri)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단군왕검은 중여곤과 혈연관계에 있었다.


묘도군도에서 하늘에 제를 지낸 사당을 의미하는 문자인 묘자가 발견이 되고, 단군을 의미하는 탱그렁이라는 문자가 발견된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그러나 신농국이 생기기 이전에, 신농국의 조상인 고시高矢를 농관農官으로 썼던 한웅천왕이 세운 신시국이 먼저 있었다는 점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묘도군도를 삼신산으로 보았을 때, 삼신산이 신시이므로, 한웅천왕이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 국을 세웠다는 기록의 출처가 묘도군도에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묘도군도가 마고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삼신산으로 불린 신성한 땅 신시라고 하더라도 홍수 때마다 황하가 불어나 물에 잠기게 된다면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주 석

3) 세차운동이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 지구의 중심에서 보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동북쪽으로 23.5도 기울어져 팽이처럼 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북극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지구는 23.5도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23.5도까지 기우러진다. 이때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 황도북극에서 북극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보고, 반대편에 있는 직녀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본다. 도합 25000년 동안 지구 중력의 회전축은 동북쪽과 서북쪽을 왔다 갔다 한다.


이렇게 회전축의 방향이 변하는 때에 지구가 뒤집어져 천재지변이 일어나 생물이 멸망한다는 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말세나 상법시대이다. '종말론'의 근거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북극성과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는 것을 잡아 주므로 매번 뒤집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자연재해로 지구가 멸망했을 때, 당시에 태평양에 있었던 뮤와 대서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가 덮쳐오는 해일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때 살아남아서 우리 동이의 조상으로 기록된 분이 태평양 쪽에서는 마고이었고, 유태의 조상으로 기록된 분이 대서양 쪽에서는 멜키지덱이었다.


2000년을 시작하는 해의 춘분날인 3월 20일은 북극성을 향하고 있던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성을 향하여 중력의 회전축 이동을 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직녀성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일부 몰상식한 종교가들이 세차운동에 의하여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라고 예언한 날이 2000년 3월 20일이다. 그러나 이날 지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때를 선천先天이라고 하고,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때를 후천後天이라고 한다.


마고시대 2

삼신산과 신시 씨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조천석朝天石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조천석은 조천지朝天池(장동균씨는 탱그렁도와 북장산 사이에 있는 바다로 비정)에서 찾아낸 수석壽石이 아닌가 한다. 그가 조천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조천석을 방장산에서 방장에 모신 삼신의 신체로 보았던 때문일 것이다. 조천석을 수석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삼각산 형상의 수석을 삼신산의 모형인 석가산石假山으로 보거나, 삼신의 신체로 볼 수 있다.


수반水盤 가운데 놓여지는 산수경석의 유래가 원지苑池문화에서 발생하였음을 발견하였고, 지당 안에 둥근 섬을 만드는 이유가 삼신산 중에서 한 개의 산을 선택하여 선계仙界를 상징하는 뜻으로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런 삼신산문화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백제시대의 남궁지와 고구려시대의 안학궁의 진주지, 신라시대의 월지 등에 삼신산을 조성하였다는 설명이 있다. 원지 안에 조성하는 섬의 숫자가 세 개로 통일되지 않고, 부여 남궁지는 하나, 경지 월지는 다섯(세 개로 보이지만 실제는 다섯 개임), 평양 안학궁터의 진주지는 네 개로 되어 있다. 중국 진시황의 난지궁 연못에는 봉래산이 조성되었고, 한나라의 태액지에는 봉래, 방장, 영주 등의 삼신산이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장동균)


그렇다면 삼신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숙종 2년인 1675년에 저술한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北崖子는 '태시기太始記'와 '단군기檀君紀'에서 한웅천왕을 신시씨神市氏라고 밝힌다. 따라서 삼신산의 주인에 한웅천왕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문학에서 찾아야하는 마고의 신시개천


천문학에서는 우주의 역사를 2000년 단위로 끊어서 2000년마다 한 시대로 보고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사자궁시대, 거해궁시대, 음양궁시대, 금우궁시대, 백양궁시대, 쌍어궁시대, 보병궁시대, 마갈궁시대, 인마궁시대, 천갈궁시대, 천칭궁시대, 쌍여궁시대 구분하는 12궁 시대이다. 이 12궁 시대를 천문도로 나타낸 것이 조디악 12궁도이다.


12궁 시대 표에 보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14000 년 전~12000 년 전 이다. 이 시대는 사자궁시대로 12간지는 자(子)에 해당한다. 12간지의 자는 시작을 의미한다. 1년으로 치자면 동지에 해당한다. 동지는 겨울의 긴긴 밤을 끝내고 봄이 눈을 뜨는 때로서 신시의 역사를 시작함을 의미한다.


12궁 시대는 12간지에서 나온 것으로, 사자궁시대는 자子(쥐)에, 거해궁시대는 해亥(돼지)에, 음양궁 시대는 술戌(개)에, 금우궁시대는 유酉(닭)에, 백양궁시대는 신申(원숭이)에, 쌍어궁시대는 미未(양)에, 보명궁 시대는 오午(말)에, 마갈궁시대는 사巳(뱀)에, 인마궁시대는 진辰(용)에, 천갈궁시대는 묘卯(토끼)에, 천칭궁시대는 인寅(호랑이)에, 쌍여궁 시대는 축丑(소)에 해당한다.


이고선이 쓴 '심당전서心堂全書 단서대강檀書大綱'의 '삼황개국기三皇開國紀'에, 한인천제가 한국桓國을 세운 날을 360 갑자甲子(桓紀 9199년) 상달上月 3일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이 신시神市배달나라를 세운 날도 4321년 갑자(神市紀 5898년) 상달 3일 이라고 하였다. 단군조선의 전신인 단국檀國(청구)을 자오지 한웅(치우천왕)이 세운 날도 신시개천 1261년 갑자 상달 3일이라고 하였다.


단군왕검이 14세에 첫 장가를 든 나라인 웅심국熊心國은 한인천제의 대를 이어오는 나라였고, 단군왕검이 두 번째 장가든 나라인 단국檀國은 그의 비가 된 하백녀의 조부인 4)천일태제天一泰帝의 나라였다.(주, 이고선 선생의 '조선기'는 천일태제를 황조고皇祖考, 지일홍제를 황고皇考라고 하였으나, '한단고기'''부소보소'''금문신고'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하면, 천일태제는 단군왕검의 처조부, 지일홍제는 단군왕검의 장인으로 보아야 합당하다고 생각되어 그리한 것이다)


천일태제는 한국개천 5941년, 신시개천 1621년, 단국개천 361년 되는 해를 갑자개천원년(甲子開天元年) 상달 3일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로 하였다. 한국, 신시, 단국, 배달나라 모두가 왕조를 세운 시대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상달 3일을 나라를 세우는 날로 잡았다는 것은 상달이 달력에서 어느 해 어느 달인가를 볼 줄 아는 천문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각 나라가 나라를 세운 당시에는 자월子月(11월)을 세수歲首(첫 달)로 삼고, 동지 날을 원일元日(첫날)로 잡았다. 이를 보면 동짓달을 시작한 달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1월 상달(지금은 10월을 상달로 한다)을 여러 나라를 거쳐 오면서 수천 년 동안 지켜왔음에도 불구하고 마고의 개천 년대와 개천일을 사서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인류역사의 시작을 12간지의 자(子)로 본다면, 이때에 해당하는 12궁 시대는 사자궁시대이다. 사자궁시대는 12000년 이전으로, 인류의 시조인 멜키지덱과 마고시대에 해당한다. 이렇게 역사의 시발을 사자궁시대에서 시작하면, 9199년 이전에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시대는 거해궁시대에 해당하고, 5898년 이전에 신시를 세운 한웅천왕의 시대는 금우궁시대에 해당하고, 4333년 이전에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의 시대는 백양궁시대에 해당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는 쌍어궁시대를 지나서 이제 막 보병궁시대로 들어섰으므로. 현재에서 과거로 12궁시대를 역추적하면 마고시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고시대의 언제 쯤 인류 최초로 세운 신시나라인 삼신나라가 세워졌을까' 그 해답은 한국 신시 조선 등 모든 나라가 상달 동짓날 나라를 세웠으므로, 갑자년 상달 초3일에서 찾아야 한다. 마고가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12000년 전 사람이라면, 그때 갑자년은 12000년 이전이어야 한다. 따라서 12000년 전 상달 초3일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설사 500년의 년차年差가 있다고 해도, 동짓달 동짓날에는 변동이 없으므로, 마고의 개천 년대는 12000년 전~12500년 이전인 BC10000년 전~BC10500년 이전 상달 3일로 잡아야 한다.

주 석

4) 이고선의 '조선기'에는 단군왕검의 조부를 천일태제 부를 지일홍제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가 모계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부는 처조부로 부는 장인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고 본다.


마고시대 3

인류 최초의 나라 마고지나


마고가 신시를 세우고 그의 후손인 황궁과 유인과 한인과 한웅의 대를 이어 황제가 역사에 나오기 이전까지 중원 땅을 다스린 인종은 동이東夷 이외엔 어떤 인종도 없었다. 동이가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 문명을 동이문명東夷文明이라고 한다. 동이는 천문을 시작하였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제사를 통하여 인류문화사에 문화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동이문명의 탄생을 역易에서는 지화명이地火明夷라고 말한다.


지화명이란 '땅위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동이'라는 뜻이다. 지화가 바로 문명의 모태가 된다. 땅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이 일을 최초로 한 사람들이 동이이다. 동이의 지화地火가 사국四國을 밝힌다고 했다. 사국은 동이가 인류 최초로 세운 마고지나, 한국, 배달나라, 그리고 조선의 네 나라를 의미한다.


동이문명을.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황화문명이 우리의 조상이 인류 최초로 탄생시킨 동이문명임을 모르고 하화문명夏華文明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잘못 알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황하유역을 포기하고 한반도로 철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민족이동에 있었다. 이는 우리 조상이 하화족과 겨루어 오면서 사실상 진시황 초기에 조선이 멸망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 이후로 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지금의 중국 땅이라는 거대한 땅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 두 번째 이유는 동이가 마고지나'한국'배달나라'조선으로 나라의 이름이 바뀌면서 최초의 나라 이름인 마고지나를 보전保傳해 오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마고지나를 잊어버린 것이다.



배달나라의 원형 마고지나


이고선이 쓴 '조선기'는 단군왕검이 그의 장인인 지일홍제地一洪帝로부터 배달나라를 인수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때가 BC2333년이다. BC2311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다.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바꾸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불어나서 오가체제五加體制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부여가 건국되고, 이어서 고구려가 건국된다. 이들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선포한 고려가 건국된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면서 여러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하였지만, 단 하나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마고지나라는 나라 이름이었다. 마고지나란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 증거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고려에는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의 이름'과 '백성이 부르는 나라의 이름'이 따로 있었다. 고려는 외교문서에나 나오는 국가명칭이고, 백성이 부르는 진짜 나라 이름은 마고지나였다. 나라에서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부를 때, 백성은 고려라고 부르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고지나는 고려의 백성이 살고 싶어 했던 나라, 현실을 떠나서 찾아가고 싶어 했던 고려 백성의 유토피아였다.

왜, 고려엔 '백성이 부르는 나라 이름'과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 이름'이 각각 달랐을까' 이는 고려의 백성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부르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했던 데에서 비롯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려의 백성이 마고지나라고 부른 나라는 마고가 인류 최초로 세운 신시나라였다. 신시는 그 맥을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으로 이어 오고, 다음에 한웅천왕이 세운 배달나라의 체제로 자리 잡았다가,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으로 이어졌다. 진시황 8년에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백성들은 역사적인 유물이 된 마고지나를 놓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고지나는 언젠가 회복해야 할 고려 사람들의 근원상징根源象徵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원의 속국이었던 시대에, 원은 고려 땅에 정동성征東省을 두어 고려를 다스렸다. 고려의 임금은 종宗에서 왕王으로 격하되었고, 나라의 관리는 두 패로 갈라져 한 패는 고려에 붙고, 다른 한 패는 원에 붙었다. 원에 붙은 자들은 왕을 배반하고 고려를 배반하였다. '고려사' 세가 제 36 충혜왕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원나라에 붙어 종노릇을 하는 이윤'조익청'기철 등이 원나라로 가서 중서성에 왕이 불경스럽다고 모함하였다. 원 황제는 충혜왕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하려고 타적과 별신가 등 사신 6명을 고려로 보냈다.


왕은 백관들을 인솔하고 교외에 나가 원나라에서 도착한 사신들을 영접하였다. 돌연히 사신 타적과 내주 등이 왕을 발길로 차고 포박하였다. 백관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고, 칼에 맞거나 창에 맞은 자가 많았고 2명은 살해당하였다. 타적 등은 왕을 황급히 말에 태워 그곳을 빠져나갔다.


원에 가서 왕을 모함하였던 기철과 홍빈이 왕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던 원나라 사람 고룡보의 명을 받아 정동성의 업무를 보았다. 왕은 원나라에 압송되어, 계양현을 거쳐 악양현으로 귀양 가다가 독살 당했다. 이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다. 고려 백성들 사이에 아야요阿也謠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阿也 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야야 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

아아 마고의 나라 이제 떠나가면 언제 돌아 오려나.


고려의 백성이 고려를 고려라 하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하였다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계승된다는 것은 정체성에 내포되는 주술성도 함께 계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고려가 멸망한 고구려에서 나온 국호이므로, 고려가 언젠가는 당나라에게 멸망한 고구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고지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제주는 삼신나라인 마고지나에서 나온 영주


제주도는 삼신산에서 건너간 섬이다. 그래서 옛 이름이 영주瀛洲이다. 영瀛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에서 갈라져 나간 산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영주산이 새끼를 쳐서 옛 영주가 된 것이다. 옛 영주가 지금의 제주이다.

영주산이 의미를 갖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이전에서 12000년 전 사이의 일이다. 동이의 조상인 마고가 그의 후손과 함께 삼신산에 세운 신시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롯한다.


그가 세운 마고신시 즉 마고의 나라인 마고지나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봉래와 발해만을 잇는 일직선상에 징검다리처럼 일곱 섬이 칠성의 형상으로 늘어서 있는 바다 한가운데였다. 이 곳 묘도군도에 영주로 비정할 수 있는 장산도張山島가 있다.


북쪽에 있는 섬을 북장산도라고 하고, 남쪽에 있는 섬을 남장산도라고 한다. 영주산은 남장산도나 북장산도 두 섬 가운데 한 섬에 있는 산이다. 우리가 남과 북을 북남이라고 하지 않고 남북이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서, 남쪽이 북쪽보다 우선하므로, 남쪽에 있는 남장산도를 영주로 보고자 한다.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인 것은 마고시대 사람들이 이 고장에 건너와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제주의 옛 이름은 두 가지 영주와 탐라


제주도의 옛 이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주이다. 영주는 마고가 다스리던 마고지나의 삼신산인 영주'방장'봉래의 세 산 중의 하나인 영주산에서 퍼져 나온 이름이다. 제주신화에 따르면 삼신이 이 고장의 시조인 고씨 양씨 부씨에게 시집을 옴으로써 비로소 영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신화에 나오는 삼신은 태초의 삼신인 마고 궁희 소희 세 분의 후손이다.


둘째는 탐라耽羅 또는 탐랑耽浪이다. 탐라는 북두칠성의 첫째별인 탐랑성貪狼星이 관장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주星主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성주가 마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마고가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탐랑성을 관장하는 마고가 성주가 된다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 자기의 직계 조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성주상星主床을 차리고 자기 조상과 함께 성주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여기에서 '직녀성이 탐랑성을 관장하는 별'이라는 데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므로, 마고가 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직녀성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천추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마고는 직녀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 ~12000년 이전에 지구 중력의 회전축의 중심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말이 된다.

마고시대 4

신시를 떠나 영주를 세운 마고삼신


신시를 세워 동이의 최고 조상이 된 마고는 후손 중에서 여자 셋을 한 조組로 묶어서 사방으로 시집보냈다. 세 여자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를 마고라고 하고, 두 여자는 각각 궁희와 소희라고 하였다. 이들은 삼신의 상징이고 삼신의 형상이었다.


시집을 갈 마고삼신은 방장에서 삼신제三神祭를 지냈다. 그들이 시집가는 곳에 가지고 가는 것은 오곡의 종자와 삼신의 신표인 천부삼인이었다. 이들은 신시에서 파견한 사자使者를 앞세워 새로운 땅으로 건너갔다. 이는 해양문화의 이동을 의미했다. 그들이 건너간 땅을 영주라고 불렀다.


제주도의 토착어 중에 바리라는 말이 있다. 바리는 발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자로 발發이라고 쓴다. 발은 곧 신神을 신고 걷는 발이다. 즉 하나님을 싣고 다니는 발족發足이라는 말이다. 관자管子는 발發은 동이라고 하였다. 신농神農시대의 문자인 금문金文으로는 신은 곤ㅣ자로 쓰고, 발자는 ?맛米? 쓴다. 신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리라는 말은 우리 민족이 동이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상고시대에 발이 큰 사람을 대인大人이라고 하였다. 대인은 역易에 보면, 하늘에서는 달月을 뜻한다. 달은 여자와 땅을 의미한다. 여자와 땅은 지모신地母神이 된다. 영주에서 지모신은 마고삼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과정을 신화화神話化하여 기록한 것이 제주도의 창세역사創世歷史이다. 마고삼신을 받아들인 영주에서는 마고의 후손인 삼신을 보내주신 진짜 마고를 기억하기 위하여 추모제를 지낸다. 이 제사가 성주星主제사이다.


성주제사는 동이의 조상인 마고에게 드리는 제사이다. 이 제사의 유습이 제주도에는 그대로 남아 전해 온다. 지금도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따로 성주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BC 14,000 ~ 12,000년은 솟대에 앉은 오리의 시작


성주는 천문에서는 직녀성이다. 직녀성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 이전에는 지구 중력의 회전축을 관장하던 북극성의 지위에 있었던 별이다. 그러니까 쌍여궁雙女宮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직녀성이 북극성의 임무를 수행하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쌍여雙女라는 문자를 분석해 보면, 쌍雙자는 새추'자가 겹쳐 있고, 밑에는 또우又자가 있다. 이 말은 새가 두 마리가 있는데, 여기에 또 한 마리가 더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따라서 새 세 마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도 이 새 세 마리를 마을 입구에 세운 솟대에서 볼 수 있다. 솟대에 앉은 새 세 마리는 두 마리 새에게 한 마리 새가 합류한 모양의 구도를 가지고 있다. 문자로는 쌍여雙女를 의미하고, 이들은 영등바람을 타고 날아온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오리가 된다. 따라서 쌍여궁시대를 바람을 타고 몰려오는 오리의 시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솟대에 앉은 새들이 모두 오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때 삼신을 상징하는 새가 오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리를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새로 정했던 것일까' 그것은 마고삼신이 바람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다는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음력 2월에 영등제를 지내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영등瀛登祭는 영등바람을 맞이하는 바람마지제사이다. 영등바람이 불어와야만 마고가 삼신산에서 영등바람에 실어 보낸 오곡의 종자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다가 눈을 틔기 때문이었다. 바람마지제사가 끝나면 곧이어 나라의 모든 행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춘분마지로 들어간다.

쌍여궁 시대에 동이가 천문학을 시작


천문에서 쌍여궁 시대는 남방주작칠수南方朱雀七宿의 기운이 관장하던 시대였다. 익수翼宿에서 시작하여, 진수軫宿를 거쳐서, 동방창룡칠수의 첫 별자리인 각수角宿에게로 기운이 넘어가던 시대였다. 이때가 동이라는 민족이 생겨나고, 동이의 문명이 태동하던 시대였음을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마고의 상징을 오리로 썼던 또 다른 이유는 오리를 의미하는 압鴨자를 풀어 보면 거기에서 해답이 나온다. 압鴨자를 파자破字하면 갑甲자와 조鳥자로 나뉜다. 갑조甲鳥는 '세상에 처음 나온 새'라는 의미가 있다. 세상에 새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오리가 제일 먼저 나온 새'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인류의 조상이 되는 마고와 상통하는 말이다. 세상에 나온 '첫 번째 사람'과 '첫 번째 나온 새'가 사람과 새의 시조始祖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고가 '시집가는 마고삼신'을 수행하는 사자에게 오리를 들려 보내면, 오리가 마고의 징표로 통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솟대에 앉힌 세 마리의 오리에는 그 마을 사람들이 마고삼신이 시집가서 낳은 마고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생긴다. 오리가 일종의 족표族表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인류 최초로 출현한 마고를 조상으로 모시는 종족의 족표인 토템이 오리가 되는 것이다. 동쪽으로 날아간 세 마리의 오리를 청동靑東오리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세상에 첫 번으로 나타난 새가 오리였다면, 하늘에 떠 있는 남방주작칠수도 오리일 가능성이 있고, 이들 일곱 별 중에서 날개에 해당하는 익수도 오리의 날개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주작이 오리가 아닌 장 닭의 변형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바다로 뻗어 나가려고 했던 마고삼신의 시대를 마감하고, 육지에서 활동을 시작한 다음 세대 사람들, 일테면 해를 숭배하며 해를 종족의 상징물로 쓰기 시작한 한인'한웅'단군 계열과 한인'고시'신농'유망'희화'단군 계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닭을 해마지의 상징으로 보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마고시대 5

마고삼신의 나라 영주 탐라


우리나라의 전국 방방곡곡엔 신화나 설화나 무가나 지명에 마고삼신이 남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흔적은 다른 고장에선 대부분 깊이 파고 들어가야 찾아 낼 수 있으나,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다른 고장에 남아 있는 것과 달리 기록과 구전으로 나타난 것들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이라 쉽게 찾아 진다.


먼저 역사기록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地, 단종端宗 2년 1454년 간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탐라현耽羅縣은 제주도 남쪽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지금 진산鎭山: 한라산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니, 이것이 그 땅이다) 맏이를 양을 라 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 라 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 나夫乙那라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 빛 진흙으로 봉인한 목함木函이 동해빈東海濱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쪽빛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망아지'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해西海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계셔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으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가 사시복지射矢卜地하니, 양을 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했으며, 부을 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세종 32년(1450년)에 간행한 '영주지瀛洲誌'에 실린 삼성신화三姓神話가 있다. 실린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에 실린 것과 거의 같으나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① 탐라를 영주라고 하였다.

② 세 처녀와 사자가 온 나라 일본국을 동해벽랑 국 東海碧浪國 이라고 하였다.


제주대학의 현 용준玄容駿 교수의 '무속신화와 문헌신화'에 자세한 연구가 실려 있으므로, 중복되는 부분은 피하기로 하고, 마고삼신과 관련하여 아직 연구가 안된 부분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국호國號에 관한 것이다. 탐라는 북극성인 탐랑 성에서 온 것이고,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탐라는 인류가 아직 대량으로 출현하지 않고 소수의 인종만 살았던 선천시대先天時代부터 지명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주는 동이의 시조인 마고가 삼신산에 신시를 열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이름이므로, 후천시대後天時代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탐라와 영주는 천문에서 선천개천이냐, 후천개천이냐 하는 시대적 차이를 보이는 이름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동해벽랑국은 바다 한가운데에 기암절벽으로 서있는 섬으로서 마고가 살고 있는 산신의 나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해빈東海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동해바다의 어느 해안가'로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되고,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고선李固善이 쓴 '조선기朝鮮紀'에 이와 똑같은 지명이 이미 단군조선시대에 단군왕검이 도읍한 발해만 쪽에 나온다. 평제平帝 구을丘乙 단군 때인 병인 5년(BC2092)여름에 신독身毒(지금의 인도)국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지금의 황해)빈에 닿았다는 기록이다.


세 번째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이라고 한 대목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고기'가 '고려사'에서 영주와 탐라의 출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고기'는 옛 사서史書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고기'의 기록을 옮겨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당시 기록자들이 '고려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저지른 붓장난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기'에 을나乙那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之那가 을나乙那로 곡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 충혜왕조에, 고려의 옛 이름을 마고지나라고 하였다. 마고의 옛 나라라는 뜻이다. 나那는 나라를 의미하므로, 고씨 양씨 부씨가 탐라영주의 시조인 만큼 이들의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을나乙那를 지나之那로 고쳐서, 그 뜻을 나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로 읽으면 고을나는 고지나가 되고, 양을나는 양지나가 되고, 부을나는 부지나가 된다.


네 번째는, 목함과 석함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함函의 의미는 문자로 해석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해'가 들어 있는 상자이다. 또한 목함은 '동쪽으로 가는 배'를 상징하고, 석함은 '서쪽에서 실려 온 귀중한 물건'을 상징한다.


다섯 번째는, 세 신인과 세 처녀의 의미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삼이라는 숫자는 이들이 마고삼신의 자식임을 상징한다.


세 신인은 모흥혈毛興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모毛는 '털이 흰 소의 쇠꼬리'인 모'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모는 무당이 모무'舞(쇠꼬리 춤)를 출 때 들고 추는 쇠꼬리이다. 혈穴은 모'를 꽂는 구멍이다. 흥興은 모를 구멍에 꽂아 일으켜 세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상 말한 것을 정리하면, 모흥혈은 춘분마지 굿을 할 때 모를 꽂아 세우는 구멍이다. 그러므로 고'양'부 세 사람이 모를 꽂아 놓고 쇠꼬리 춤을 춘 곳이 모흥혈이 되는 것이다.



마고시대에는 오로지 중원에 동이만 있었다.


마고에서부터 시작한 종족활동이 단군시대로 이어질 때까지 이 시대엔 중원 땅에 인류의 역사를 시작한 종족으로 오로지 동이 이외엔 어떠한 종족도 생겨나지 않았다. 황제가 동이에게 반란을 일으켜 홀로 서기를 시작하면서 후대에 와서 하화 족으로 명명된 황제계열 사람들의 종족 이탈이 시작되고 있었을 뿐이다.


천문으로 보면, 동이의 시작은 익수에서 비롯하였다. 익수는 하늘을 나는 많은 날개를 가진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날개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만큼 기운차게 비상한다는 뜻일 것이다. 익수 하나를 보아도 사방으로 뻗어나가려고 했던 당시 사람들의 기상을 추리 할 수 있다. 12진辰 중에서 진辰과 사巳가 자리에 익수가 자리 잡고 있다.

진과 사는 기氣를 나타내는 문자이다. 진은 하늘의 기운을 나타내고, 사는 땅의 기운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늘과 땅에서 공히 동이가 뻗어나가려는 기운이 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마고삼신의 기운이 맹렬하게 태동하고 있었음을 천문도가 보여주고 있다.


이 기운의 방위는 손방巽方이 된다. 손방은 장녀長女의 방위이다. 마고삼신이 동이의 조상으로서 자리 잡은 방위가 손방이고, 마고의 두 딸인 궁희와 소희도 손방에 배속된다. 손巽자엔 땅의 기운이 두 가지가 공존한다. 땅의 음기陰氣가 하늘의 양기陽氣를 만나서 함께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자가 원형이 존재한다면 언제쯤 만들어진 문자로 볼 수 있을까' 그 시대를 마고삼신의 시대로 소급해 가야 할 것으로 본다.


http://www.hollykim.com ARTIST - YONG GWAN KIM



2. 황궁시대


세 마리의 오리시대를 지나서 세발달린 까마귀 시대로


직녀성의 시대가 끝나고 천추성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후천시대가 왔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인데, 12궁도의 12지 중에서 자(쥐)에 배속된 사자궁시대에 해당한다. 영해박씨의 문중비서인 '부도지'에, 궁희와 소희의 뒤를 이어서 네 천인과 네 천녀가 태어나는 기록이 있다.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천부를 받들어 지키며 선천을 계승하였다. 성안의 사방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피리)을 쌓아 놓고 소리를 만드니, 첫째는 황궁씨요, 둘째는 백소씨요, 셋째는 청궁씨요, 넷째는 흑소씨였다.


마고성에 살던 사람들은 선천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선천은 마고시대이므로 황궁의 시대는 후천의 시대가 된다. 이 시대를 주도하여 이끌어간 분이 황궁黃穹이다. 황궁시대는 삼족오시대였다. 밤을 대표하는 직녀성시대, 즉 마고삼신의 시대를 상징하는 오리의 시대가 끝나고, 낮을 관장하는 까마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왕궁시대에 천추성시대를 시작하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까마귀 삼족오를 보면,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오리와 황궁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까마귀의 발이 셋인 것은 이 까마귀가 삼신인 오리에게서 태어난 새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리 다음으로 세상에 나온 새가 발이 셋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라는 뜻이다. 까마귀의 몸이 까만 것은 아직도 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도지'에 보면 황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황궁씨가 천부天符를 신표로 나누어주고 … 제족諸族이 나누어 살 것을 명했다. 이에 청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황궁시대에 황궁의 주도로 직녀성의 마고성에 살던 모든 종족이 마고성의 동서남북 네 문을 통하여 뿔뿔이 흩어져 지구로 우주이민을 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고성이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오염이 심각해지자 청정을 회복하면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지구로 떠난다. 그는 오로지 마고가 지시한 해혹복본解惑復本을 일념으로 살았다. 해혹복본은 마고성이 청정해지면 직녀성시대로 돌아가라는 마고의 지시였다.


삼족 오시대의 의미


삼족오시대三足烏時代는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시대이고, 삼태극三太極의 시대이고, 음양조화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우주에서 황궁黃穹, 즉 黃宮이라는 공간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황궁은 천지만물의 중심이다. 앞과 뒤의 중간점인 가운데가 황궁이고, 상중하의 중간점인 가운데가 황궁이다. 우주에서 상원 중원 하원의 중심인 중원이 황궁이다. 소리에도 양의 소리와 음의 소리가 있고, 이들 소리 사이에 중간 소리가 있다. 우주 만물에 중궁中宮, 黃宮이 있다는 인식은 상고시대 인간들의 사고에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직녀성이 음이라면 천추성은 양이다. 이 음과 양의 중간지대가 있다. 여기가 황이다. 이는 삼 태극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흑이 직녀성이라면 적은 천추성이다. 직녀성과 천추성의 중간 지대가 황이다.


황黃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을 때는 중심이 되지만, 순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하면 조화를 낳는다. 황이 회전함으로 해서 음양에 조화가 일어난다. 삼태극의 황이 음양이 조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삼족오는 우리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다. 오회분 4호묘와 각저총에 그려진 삼족오와 덕화리1호분에 그려진 삼족오는 우리 역사에 있었던 황궁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는 아직도 직녀성의 영향이 남아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밤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까마귀를 택하게 된 것이고, 그의 발이 셋인 것은 아직도 오리 세 마리시대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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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환인시대

제사를 지내는 유인시대


'부도지' 제 10장 서두에 '황궁씨의 장자 유인有因씨'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황궁씨가 장자 유인씨를 낳았다'는 의미와 '황궁씨가 유인씨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유인씨는 한인桓因씨를 낳는다. 그래서 유인씨는 황궁씨와 한인씨 사이에 다리를 이어 주는 분이 된다.유인씨의 인因자를 보면, 인자는 원인'까닭'유래'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문자는 나라국口자 안에 큰대大자가 들어 있는 문자이다.

나라국자 안에 쓰였던 큰대大자는 원래 어길위韋자로 쓰였던 문자였다. 어길위韋자는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9~1993)의 해석에 따르면, 요즈음 말로 쿠데타를 의미한다.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면서 생겨난 문자이다.


이 문자는 둘레'둘러싸다'사냥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因자에 들어 있는 큰대大자는 순임금으로 볼 수 있고, 위圍자는 순임금의 나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의미를 정리하면 인因자는 순임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나라가 된다. 이 나라가 위圍라는 문자를 탄생시켰다. 순임금은 인因자가 의미하는 고전적인 국가에 쿠데타를 일으켜 위圍자가 의미하는 새로운 시대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인因자와 위圍자에서 상고시대에 있었던 제사풍습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나라국'자는 제사를 지내는 방구단方丘壇을 의미한다. 단군조선시대에는 방구단을 쌓고, 이 위에 북진北辰(북극성)과 칠요七耀(북두칠성)를 표시하고, 전물奠物을 올려 제사지냈다. 이렇게 하여 국도國都를 정했는데, 이를 부도符都라고 하였다. 이 부도가 왕검성王儉城이다. 따라서 왕검성에서 부도를 도출해 내고, 부도에서 방구단을 도출해 내고, 방구단에서 인因자를 도출해 낼 수 있으므로, 결국 인因자와 왕검성이라는 문자가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환인 천제시대는 태양시대


역易의 수뢰준水雷屯괘 초구효初九爻에서는 천부를 반한磐桓이라고 한다. 반한이란 고인돌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자이고, 한국桓國에 있는 고인돌, 즉 한국의 천부에 해당하는 돌이므로, 한국의 천부가 있는 곳이라면 부도가 되고, 그 곳이 부도라면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반한磐桓은 고인돌, 즉 제단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인桓因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 승국 선생은 한인천제가 나라를 세운 때를 지금으로부터 9200년 이전으로 보는데, 나라의 역사는 3301년이고, 일곱 분의 천제가 다스리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삼성기전三聖記全' 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파나류波奈留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 국이라고 한다. 그 땅은 넓어 남북이 5만 리이고, 동서가 2만여 리이며,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나누어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구매여국, 사납아국, 선비국(혹은 치위국 또는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7세에 전하여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파나류산은 천산으로 볼 수 있는 산이다. 부도지에 '황궁씨가 천산주天山洲에 도착했다'고 했으니, 여기를 말함인 듯하다. 황궁씨의 시대는 천문에서 삼족오시대이다. 이 시대를 12궁도에서 사자궁시대라고 하였다. 기간은 약 2000년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이전에서 10000년 전 사이가 된다. 이 시대에 그는 천부삼인과 삼신사상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렸다.


그의 시대가 끝나면서, 황궁씨가 다음 세대인 유인시대에게 천부삼인을 전했다. 유인시대가 세상을 다스린 기간이 1천년이었다. 그러니까 사자궁 다음 시대인 거해궁巨蟹宮시대의 2000년 중 절반에 해당하는 1천년이 유인씨시대가 되는 것이다. 해는 의미로 볼 때 게로 읽어지지만, 음으로 읽으면 해로 읽어 진다. 따라서 거해궁시대는 태양의 시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이다.


'부도지'에 따르면, 이 시대에 유인씨는 '사람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끊어서 마찰을 일으켜 불을 일으켜 밝게 비춰 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이때가 인류문명에서 불을 발견한 시대이다. 이 시대를 수인燧人씨시대라고도 한다. 백성이 불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해서 수인이라고 하였다. '사물기원事物紀源'에 따르면, '수인씨가 칼을 만들었는데, 이 것이 칼의 기원이다.'라고 하였다.

유인씨(수인씨)의 시대를 불을 이용하게 된 거해궁시대의 1천년으로 본다면, 칼을 발명한 거해궁시대 1천년으로 볼 수도 있다.


거해巨蟹라는 말은 칼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해蟹자에 칼도刀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칼을 발명했다. 당시의 칼은 돌을 연마하여 만든 칼이었다. 이 칼을 가지고 쇠뿔을 떠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칼을 발명하기 전에는 칼 대신 무엇을 썼을까' 거대한 게를 잡아서 집게발을 띠어내어 칼로 쓰지 않았을까' 그래서 천문에서 칼을 쓰기 시작한 시대를 거해라는 말로 나타냈는지도 모른다.


거해궁巨蟹宮이라는 문자에서 해蟹자를 보면, '소의 뿔을 해체하는 벌레'라는 의미가 있다. 각角은 뿔이고, 도刀는 칼이고, 우牛는 소이다. 충'은 벌레이다. 벌레는 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칼을 잡은 사람이 사巳씨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한인천제가 사씨에게서 나온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12궁도에서의 거해는 소를 잡기 위하여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게蟹 형상의 별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헤라클레스가 괴물 뱀 히드라와 싸울 때, 헤라 여신이 히드라를 도우라고 괴물 게를 보낸다. 그러나 괴물 게는 헤라클레스의 발에 밟혀 죽는다. 헤라 여신은 괴물 게를 불쌍히 여겨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게자리는 황도 12궁 가운데에서 네 번째 별자리로 그리스 시대에는 하지夏至(6월 21일경)에 태양이 이 별자리를 지나갔다. 하지는 천구 위에서 태양이 가장 북쪽에 머무르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태양의 북회귀선北回歸線(태양이 천구 위에서 최북단에 머무르는 적위赤位로 +23½˚)이 쌍둥이자리로 옮겨갔고, 태양은 해마다 7월 하순과 8월 초순에 이 별자리를 지나간다. (쉽게 찾는 우리 별자리 이태형)


신화시대에 게는 태양이 지나가는 황도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거대한 가위를 가지고 탱양의 불 수레가 황도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는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이 탄 불 수레가 미친 듯이 다가왔을 때 그냥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로마신화)

이 시대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태양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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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환웅시대

“천부” 로 사유의 기틀을 세운 환웅천황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시대가 왔다. 지금으로부터 5898년 이전에 한웅천왕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므로, 천문에서 12궁도로 보면 금우궁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 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황소가 12궁도에서 금우金牛로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금우궁시대에 출현한 걸출한 인물인 한웅천왕은 이름을 배달거발 이라고 하였다. 배달거발은 '배다른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마 배다른 사람들 가운데에서 발이 큰 사람을 뽑아서 천왕을 세우고 한웅천왕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웅桓雄의 웅雄자는 웅熊자로 통하는 문자이다.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는 문자이다. '해와 칠성을 숭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인천제에게서 물려받은 한웅의 한桓자는 나무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나타낸 문자이다. 우리말로 크다'하나라는 의미를 가진 문자이지만, 중국 한자로는 빛날 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 문자에 '태양을 숭상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한인천제시대와 한웅천왕시대는 공히 태양을 숭상하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桓자에 웅雄자가 붙음으로써 태양을 숭상하는 이외에도 북두칠성을 함께 숭상했다는 의미가 도출되어 이 시대에는 태양과 칠성을 함께 숭상했던 시대로 보게 된다.


한인천제의 시대가 해를 숭배했던 시대, 한웅천왕의 시대가 해와 칠성을 숭상했던 시대이므로 이 시대에 칠성숭배가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웅천왕은 천부의 이치를 깊이 상고하여 사유思惟의 틀을 세우고, 천부에서 철학과 종교와 학문과 사회제도를 찾아내었다. 그가 믿기 힘든 일을 한 것이다.



환웅천황시대에 문자로 기록하여 전한 “ 천부경”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쓰기 시작한 시대가 한웅천왕시대이다.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우리나라의 문자로 옛날부터 전해오는 암각문자가 있다고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이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렸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최초의 문자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웅천왕시대엔 한인천제 때 완성한 '천부경'이 구전되고 있었다. 한웅천왕은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鹿圖문자로 기록하라고 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후대에 와서 신라 말에 최치원이 묘향산에서 바위에 새긴 '천부경'을 발견하여 한자로 번역하니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천부경'이다.


'천부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구조와 특성과 우주가 생성하고 운행하는 이치를 최초로 문자화 한 기록이다. 우리 민족의 사유의 주체성은 '천부경'에서 나온다. 일석삼극一析三極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에서 셋이 갈라져 나온다는 뜻이다. 1이 하나님이라면 3은 삼신이다. 우주의 단면을 자르면 삼태극이 되는 것도 일석삼극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천문에서 하나의 하늘을 삼원으로 나누게 되는 것도 이 원리에서 비롯하였다. '천부경'의 중심사상은 천지인天地人사상이다. 천지인사상은 후대에 와서 인내천人乃天사상을 낳는다. 단군조선을 삼조선으로 나누게 되는 것도 그 이치가 일석삼극에서 나온다. 일석삼극의 사유체계는 단군왕검시대에 와서 발전하여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의 사유체계를 낳는다. 운삼사성환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철학적 성과를 낳는다. 원형이정의 원리에서 춘하추동 사계가 나온다. 이는 운삼사성환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웅천왕은 이 외에도 '천부경'을 풀어서 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지어 백성을 가르쳤다. 단군조선시대에도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쳤다.(단군세기 11대 도해단군) 역의 천풍구天風'괘에는 다음과 같은 효사가 있다.


象曰 天下有風' 以施命誥四方 상왈 천하유풍고 이시명고사방


상에 이르기를, 세상에 풍이風夷 출신의 구가 있어, '삼일신고'를 사방에 가르치도록 명한다고 하였다.


구'자는 여女자와 후后자가 결합하여 만든 문자인데, 한웅천왕시대에 신시배달나라에 있었던 당시의 여자 제후를 이르는 말인 듯하다. 풍이 족에 여자제후가 있는데 그가 한웅천왕의 명을 받들어 사방에 '삼일신고'를 펼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구는 모계사회에서 있었음직한 관직 이름이다.


'삼일신고'는 총 366자로 만들어진 경전인데, 제 1장이 허공虛空의 장이고, 제 2장이 일신一神의 장이고, 제 3장은 천궁天宮의 장이고, 제 4장은 세계世界의 장이고, 제 5장은 인물人物의 장이다. '삼일신고'는 '천부경'을 풀어 쓴 것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은 천문의 이치에서 한역 8괘를 만들었다. 이를 가르치기 위하여 윷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후대에 와서 '천부경' 81자에서 '태현경' 81괘가 나오고, 노자의 '도덕경' 81장이 나왔다. '태현경'과 '도덕경'의 근원이 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천부경'이 유교와 도교의 정수를 뽑아서 누군가 만든 것이라는 헛소리를 한다.



환웅천황이 선포하고 시행한 “태백진교”


한웅천왕은 마고가 정착하여 삼신을 세상에 알린 태백산에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와서('삼성기전' 하편) 배달나라를 세웠다. 태백진교太白眞敎를 선포하고 이를 국가의 이념으로 하였다. 마고시대에 삼신사상이 나온 이래 이를 발전시킨 것이 태백진교이다. 태백진교는 '천부경'을 기초로 한다. 태백진교는 우리 민족이 지상에서 최초로 갖게 된 종교의 이름으로써 삼신종교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 두 번째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의 일이다. 불교가 2500년 전, 기독교가 2000년 전에 세상에 나온 것과 비교하면 태백진교의 출현 시기는 불교의 2배가 넘고, 기독교의 거의 세 배가 된다.


태백진교는 천부天符에 근원을 두고, 지구가 자전自轉하는 이치에 합치하도록 하고, 또 사람이 하는 일을 이에 맞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정치를 함發政은 화백和白에 우선하는 것이 없고, 덕을 다스림治德에 있어 화禍를 꾸짖는 것보다 착한 것은 없다.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해나가는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였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발정은 화백으로 한다고 했으니, 100% 찬성을 도출하는 회의제도를 채용했다는 말이고, 치덕은 책화로 한다고 했으니, 법률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자연재해에 대하여 무과실책임을 묻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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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희시대


환웅천황의 후손 복희


복희伏羲는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의 6세손이다. 그는 신시배달나라 5세 천왕인 태우의太虞儀 한웅 89년 무오년(桓紀 475년경)에 태우의 한웅천왕의 열두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여왜 국女'國의 임금인 여왜와 혼인하여 동이문화東夷文化의 한 분파를 이루었다. 동이문화의 한 분파를 하화문화夏華文化라고 한다. 그가 하화문화의 시조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우리 동이문화가 하화문화에서 나왔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통치이념인 공자유교를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의 말이다.


화서華胥가 뇌택雷澤에서 대인大人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 성기成紀에서 복희를 낳았다. ('하도게명징河圖稽命徵')


화서는 화서족의 처녀라는 뜻이다. 대인은 발이 큰 사람으로 한웅천왕의 집안사람을 의미한다. 한웅천왕을 커 발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대인은 동이의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관자管子는 발인發人을 동이라고 하였다. 성기는 지금의 천수天水 성기현成紀縣이다. 지금 천수에는 복희 사당이 있고, 그와 관련되는 유적들이 있다.


화서는 뇌택에서 임신하여 성기에서 복희를 낳았다. 성기는 지금의 천수 성기현이다. 뇌택은 못의 이름이다. 여기는 후대에 태어난 순舜임금이 고기잡이하던 곳으로 전해오는데 현재 제음濟陰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의 도읍은 진(陳, 지금의 회양淮陽)이고, 재위는 115년이었고, 15세를 전했다. 그는 진륜陳侖을 다스렸는데, 진륜은 구이산仇夷山이고, 사방이 끊어져 고립되어 있다. 진륜은 태호 복희가 다스린 곳이고 태어난 곳이다.


위 기록을 근거로 하여 복희의 출생에 세 가지 설이 생겼다. 첫째 설은 뇌택이고, 둘째 설은 성기이고, 셋째 설은 구이산이다. 복희는 처음에 감숙甘肅에서 살다가 섬서陝西의 황토 고원에서 살았다. '삼황본기三皇本紀'에 따르면 복희는 진에 도읍하고, 동쪽을 태산으로 봉했으며, 재위한지 11년 만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남부南部에 장사지냈다.

('삼황의 으뜸' 태호 복희. 1998. 2. 중국하남미술출판사 발행)


이 기록을 보면 복희가 왕이 되어 진을 다스렸고, 그의 후대로 15세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배달나라의 6세 천왕인 다의 발 한웅이다. 6세 천왕이 15세를 이어갔으니, 배달나라의 각 천왕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면 될 것이다.


복희씨 여왜씨는 성이 풍風이다. 풍은 벌레에서 나온다. 큰 벌레는 뱀이 된다. 충'은 곧 뱀이다. 용 역시 뱀에서 나온다는데 따른다. 복희씨와 여왜씨는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으로 엉켜 있다. 복희와 여왜는 해와 달을 들고 있다. (복희문화 '시론 복희씨문화' 王彦俊 작 1994. 5.)


복희와 여왜가 풍씨라는 것은 이들이 풍씨의 조상이자 한국제桓國帝인 한인천제의 후예임을 말한다. 고구려시대엔 한인천제와 그의 부인 항영을 인두사족人頭蛇足의 형상으로 왕의 무덤인 오회분 4호묘에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은 복희와 여왜교미도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한인과 항영도'는 한인과 항영이 풍씨의 조상으로서 '일월을 숭상하겠다는 의도'로 그린 '일월마지그림'이지만, '복희와 여왜 교미도'는 '복희와 여왜 사이에서 후손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어 그린 '조상숭배그림'이다.


동이문화의 사생아 복희 문화


고시와 복희와 신농의 대를 거쳐서, 후대에 와서, 황제'신농유망'치우천왕이 아우른 탁록의 결전에서, 황제가 치우천왕의 청구 국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면서, 신농유망과 치우천왕의 뒤를 잇는 동이는 사실상 괴멸하고, 황제의 뒤를 잇는 동이만이 세력을 넓혀 갈 수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황제의 자손黃帝之孫이라고 하였고, 황제를 화하족의 시조로 하였다. 황제의 자손을 최근에 와서 한족漢族이라고 불렀다.


복희가 분명히 동이계열임에도 불구하고 하화의 조상으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은 복희가 이룩한 복희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화 족은 동이가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 가면서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던 복희의 유적을 활용하여 하화 족 문화를 열었다.


동이는 천부에 근거를 두고 우주의 이치를 3이라는 수로 한정하였다. 이 원리를 일석 삼 극 이라고 하였다. 이 원리에서 삼신사상이 나오고, 삼 태극이 나오고, 음양조화가 나왔다고 파악하였다. 1은 모든 구체球體의 지름이다. 3은 모든 구체의 지름으로 원주율 을 나누어 나오는 수이다. 1이 3으로 나뉘는 것이 일석 삼 극이다. 일석삼극은 우주가 운행하는 원리이다. 그러나 하화 족은 복희가 3의 사유체계에서 도출한 2의 사유체계를 기초로 하여 하와족의 문화를 구축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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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농 시대

풍이는 동이의 조상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는 풍이 출신이다. 후대에 와서 신시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의 후예인 복희 또한 풍이 출신이다. 복희는 한웅천왕의 6세손인 다의발한웅이라고 한다. 이들이 모두 풍이 출신이므로 결국 한웅천왕과 복희는 한인천제의 후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한웅 천왕시대에엔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가 있었다. 고시 다음으로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은 다의발한웅인 복희였다. 복희의 후대에 농사의 신으로 불리는 신농이 태어났다.


고시'복희'신농이 모두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들이므로, 가업을 세습으로 이어나갔던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농사를 관장했던 같은 집안 출신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고시와 복희와 신농은 모두 농사로 얽혀 있다. 따라서 이들을 고시의 후예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한웅천왕시대의 농관이었던 고시라는 이름이 단군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시례高矢禮로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고시 집안이 맡았던 역할이 오랜 동안 세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적제赤帝라는 신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이 같은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한인천제는 풍이 출신으로서 적제赤帝 부해復解('부소보서'에서 인용)로 불렸다.

복희 또한 부해復解로 불려지고, 신농을 염제炎帝라고 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한 집이 대대로 불을 관장해 온 집안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이상에서 신농이 복희와 같은 집안인 풍이 출신임을 밝혀 보았다.


신농 그는 누구인가?


중국 사람들은 신농과 그의 8세손 유망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염제 신농炎帝 神農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신농이라고 할 때는 시조 신농을 의미할 때가 많다. 유망의 의미로 불릴 때는 치우천왕과 황제와 탁록을 놓고 한판 싸움을 벌일 때일 뿐이다. 그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농사의 신, 약의 신, 차의 신등으로 불리는 시조 신농을 의미한다. 이렇게 신농은 시조 신농과 그의 8세손 유망으로 혼동되어 불린다.


신농은 쇠머리의 형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신농이 소를 몰아 농사를 지었음을 나타낸다. 그 이전까지 소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소였을 가능성이 많다. 야생의 소를 길들여 농사를 짓도록 한 사람이 신농 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농의 머리를 소의 형상으로 만들어 신격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농은 몽산곡蒙山谷에서 태어나 구룡천九龍川에서 목욕하고 강수姜水에서 오래 살았다. 그는 강수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성이 강姜씨가 되었다. 강씨의 마을은 지금 중국 보계寶鷄 남쪽 교외의 강성보姜城堡 일대가 된다. 보계는 신농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보계와 강 씨의 족보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따르면, 신농의 후예로 8대의 수령이 대를 이었다고 밝혔다. (寶鷄文史資料 제11집 44 ~ 45쪽) 근거는 '자치통감외기自治通鑒外紀'에 있다. 이를 차례대로 쓰면 다음과 같다.


제1세 염제신농 재위 120년 혹 140년

제2세 괴제 재위 60년 혹 80년

제3대 제승 재위 6년 혹 60년

제4대 제명 재위 49년 혹

제5대 제직 재위 45년

제6대 제리 재위 48년

제7대 제애 재위 43년

제8대 제유망 재위 55년


'외기'에 근거하면 신농에서 시작하여 유망까지 8세 사이에 해당하는 426년 동안이 신농의 나라가 존속한 기간이다. '초학기初學記' 9는 '제왕세기설帝王世紀說'에서 인용하여 신농에서 유망까지 무릇 8세까지 존속기간이 모두 530년이라고 하였다. 신농의 호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제2세 임괴 로부터 유망 사이이다.


'중국고금성씨사전中國古今姓氏辭典'에 따르면, '신농은 강수에 살았다. 이로써 성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염제는 강수에서 낳았다. 이로써 씨칭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신농이 강수에 살면서 이로써 성이 생겼다. 그 후로 제濟, 보甫, 신申, 여呂, 기紀, 허許, 향向, 예芮,씨가 생겼다. 그는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열두 아들이 오午씨, 병丙씨, 적赤씨, 신信씨, 정井씨, 기箕씨, 감甘씨가 되었다.'고 하였다.


우리 무가에서 불러지는 신농은 이상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조상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신농은 우리의 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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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조시대


삼조시대


현재 중국에서는 치우천왕'유망'황제 세 분을 '중국의 세 조상'이라고 부른다. 중국에 이들 세 분의 조상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 달리 염황치炎黃蚩 삼조라고도 한다. 염炎자는 염제 신농 즉 유망을 일컫는 말이고, 황黃자는 황제를 일컫는 말이고, 치蚩자는 치우천왕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인들이 염황치 삼조를 그들의 공동조상으로 공식화 한 때는 1993년 10월이다. 중공탁록현위부서기中共'鹿縣委副書記'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집행회장'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執行會長'중화염황문화연구회이사中華炎黃文化硏究會理事라는 긴 직책을 가진 임창화任昌和라는 사람이 1993년에 위 세 분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나서 그 해 10월에 제 1차로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중화염황문화연구회'중국선진사학회中國先秦史學會'대만중화논리교육학회 등에 제출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어서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를 개최하면서, 1995년 9월부터 삼조문화가 전국에 소개되고, 중화민족문명의 근원적인 명제로서 널리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 후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연구자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중화민족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저작물의 생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는 중국인의 염황치 삼조를 그대로 따라 쓰기로 하였다. 염황치가 우리의 조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중국인과 같은 의미로 쓴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1993년 이후에 들어와서 중국인들은 하북성 탁록현에 있는 탁록을 중화문명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여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는 중화문화를 시작한 사람은 황제뿐이라고 생각하여 유망과 치우천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유망과 치우천왕은 탁록에서 황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유망은 황제에게 항복했고, 치우천왕은 탁록의 기주에서 전사했다.


원래 유망과 황제는 배다른 형제 사이였다. 소전少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전은 시조 신농의 가계로 보면 제 7대 제애帝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황제 자체가 동이출신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환웅천황의 직계후손 치우천왕


소전은 한웅천왕 때 농관을 지낸 고시高矢 계열이다. 따라서 소전의 후손인 유망과 황제가 한웅천왕의 방계후손이므로 치우 유망 황제가 모두 한웅천왕의 후손이 된다고 하겠다.

현재 중국에서는 황제는 행정, 유망은 기술, 치우천왕은 군사를 시작한 분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들 행정'기술'군사를 일컬어 삼조문화라고 한다.

삼조문화는 다음 세 가지로 의미를 요약한다.


1. 중화민족의 문명을 시작한 시조는 세 사람이다. 염제(유망)와 황제 두 분만 아니라 치우를 포함한 세 분이 있다.

2. 중화민족의 문명을 창시한 분은 염제(유망) 황제 치우로, 이들 삼조가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 대표적인 마을과 마을연맹공동체를 만들었다.

3. 염제(유망), 황제, 치우 삼조가 처음으로 중화문명을 만들었다. 이들의 발자취가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남아 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사건이 탁록에서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조를 버린 우리의 현실


중국이 5000년 동안 황제 한 분만을 자기의 조상(黃帝之孫)이라고 주장해 오다가 갑자기 유망과 치우천왕 두 분을 추가하여 자기들의 조상(炎黃之孫)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저의는 무엇일까'

그 첫째 이유는 중국이 황제만을 붙들고 있으면 중국의 역사를 5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한족문화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동이문화가 있었다. 동이문화는 마고문화에서 시작이 되는데, 마고문화는 대체로 14000년 전에서 12000년 전에 발해만과 산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도군도가 그 발상지로 보인다. 황제만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할 때, 동이문화로 접근해 갈 수 있는 탈출로가 생기지 않는다. 한족이 동이문화로 가기 위해서는 동이출신인 유망과 치우천왕을 황제 쪽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군왕검 한 분을 놓고 민족종교진영과 기독교진영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진영은 단군왕검은 실재하지 않았으며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은 신화라는 것, 단군왕검은 특정한 민족종교의 우상숭배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민족진영은 목 메인 소리로 이를 부정하고 있다.

기독교진영이든 민족종교진영이든 우리 역사에 무지하므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간헐 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추적해 올라가면, 단군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은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신농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농은 성이 姜씨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의 성씨 또한 강 씨로 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단군왕검에 대하여 따로 다루게 될 때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더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단군왕검의 조상이 되는 신농을 중국이 자기의 조상으로 편입시켰다는 것은 중국이 동이라는 정체성 고백이 되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그들이 지녀 온 하화 족 즉 한족이 동이의 한 분파라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치우천황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의 직계후손인 치우천왕은 역사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치우천왕은 청구국을 세웠고, 무속에서 치우는 도깨비대왕으로 전해 온다. 천문에는 치우기蚩尤旗라는 혜성이 있다. 부적 오방부五方符에는 구이군九夷軍의 신명을 부르는 주문이 있다. 구이는 구려九黎를 의미한다. 치우천왕을 구려의 족장이라고 한다.


황제가 동이로서 동이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천왕은 황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 헌구야 잘 듣거라. 해의 아들이라고 함은 짐 한 사람 뿐이다.' ('삼한관경본기')


그는 자기가 한인천제의 적통임을 밝히고, 황제 토벌에 나섰다. 치우천왕은 탁록에서 황제와 싸우다가 탁록의 기주에서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동이와 하화 족이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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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홍제전욱 소호의 시대

유망의 아들 희화와 황제의 딸 항아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7-1993)가 작성한 삼황오제시대三皇五帝時代의 계보를 보면, 신농神農의 8세 손인 유망楡罔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다.

첫 아들은 희화羲和 주씨로 태양의 신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태양을 관측하는 직책을 가졌음으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둘째 아들은 금정金正 해該씨로 김金씨의 조상이 되는 분이다. 셋째 아들은 희熙씨로 물고기문양을 사용하는 집안의 선조가 된다. 넷째 아들은 수脩씨로 사냥하여 고기를 가공하는 집안의 선조가 된다. 넷째는 유일한 따님으로 누조'祖로 알려진 분이다. 누조를 양잠의 신이라고 하였다.


누조는 황제黃帝에게 시집가서 항아嫦娥와 소호금천少'金天(재위 BC2474-BC2468)을 낳았다. 항아는 달의 신으로 알려진 분이다. 그가 달을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벼슬 이름이었다.

항아의 아들 전욱고양과 황제의 소호금천


유망의 큰아들 희화주씨와 항아가 혼인하여 전욱고양'頊高陽을 낳았다. 삼조시대가 지나간 다음에 전욱고양과 소호금천少'金天은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전욱고양은 유망집안의 맹주였고, 소호금천은 황제 집안의 맹주였다.


황제는 희화로 하여금 해를 점치게 하고 항아로 하여금 달을 점치게 하였다.


黃帝使 羲和占日 尙儀(嫦娥)占月 황제사 희화점일 상의점월

('여씨춘추' 물궁편)


희화는 황제의 사위였고, 항아는 황제의 딸이었으므로, 희화가 항아와 함께 해와 달을 점쳤다면 희화가 황제의 집안으로 장가가서 처가살이를 할 때였다. 황제는 희화 부부에게 일관日官을 명하여 해와 달을 관측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화가 처가살이를 면하고 본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장자인 전욱고양을 낳아서 조상의 신상神像으로 모시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전욱고양이라고 하였다. 그가 일관으로 있으면서 지어 준 이름이었을 것이다. 중국인 역사학자인 '룩콴텐'의 세계표는 전욱고양과 곤을 거쳐서 우임금에 이르는 하나라의 세계표를 작성하였다. 전욱고양은 훨씬 후대에 와서는 고구려를 세운 고씨高氏의 조상이 된다.


그러나 제주도에 전해 오는 영주신화인 삼성혈신화에 보면 고씨가 전욱고양이 세상이 태어나는 기원전 2400년대 보다 무려 1만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난다. 고씨의 조상인 고지나高之(乙)那가 양지(을)나 부지(을)나와 함께 영주(제주도)의 삼성혈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씨의 조상을 소호금천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소호금천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유망의 아들로 금정해金正該가 태어난 것을 모르는 것이다. 금정은 소호금천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다. 금정은 소호금천의 어머니 누조와 남매 사이이다. 우리나라 김 씨들이 이렇게 오해를 하게 된 데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다. 그가 '삼국사기'에서 '신라인이 소호씨 후손이기 때문에 김 씨라고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호금천 이후에 한무제漢武帝(BC156-BC150) 때 와서 한 무제에게 정벌 당한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일제日'에게 김金씨를 사성賜姓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성씨로서 김 씨가 탄생한다. 김해김씨가 생겨나는(AD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 건국) 것은 한 무제 사후 192년이나 지나서 있게 되는 훨씬 후대의 일이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김씨 시조들은 중시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왕검의 장인 단국 배달의 홍제


소호금천이 BC 2474년에 제위에서 물러나고 BC2467년에 전욱고양이 그 뒤를 잇는다. 이때 단군왕검의 처조부가 되는 천일태제(신시배달나라의 17세 혁 다세 한웅)가 제위에 오른다. 그 해가 BC2457년, 나라 이름은 한국의 뒤를 이은 배달나라였다. 이 나라를 달리 단국檀國이라고도 하였다. 이 나라를 이고선의 '조선기'에서는 단국 배달나라라고 하였고, '한단고기'의 삼성기전하편에서는 신시 배달나라라고 하였다. 기묘 52년(BC2406년)에 유교有嬌씨가 빈객으로 와서 손님으로서 접대를 받았다.


유교씨는 소호금천과 항아 사이에서 태어난 교극嬌極이다. 유교有嬌의 교嬌는 모계혈족으로부터 받은 족칭族稱에서 나온 것이다. 할머니 누조'祖의 뒤를 잇고, 이어서 항아嫦娥의 뒤를 이은 모계혈족의 교嬌라는 뜻이다. 교喬자 앞에 여女자를 썼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교극에게서 제곡고신帝'高辛이 태어난다. 제곡고신이 BC2420년에 전욱고양의 뒤를 이제 제위에 오른다.


홍제는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제곡고신의 폭정을 이기지 못한 소풍蘇豊이 홍제 8년에 귀순해 왔을 때 그를 받아들여 불함산弗咸山 북쪽의 숙신肅愼 땅에 살게 하였다. ('蘇氏上上系')


단군왕검의 장인이 되는 단국의 2대 홍제 때인 기사 8년(BC2390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綏芬河 동쪽으로 쳐들어온다.(이고선의 '조선기') 이때 의려장이 되어 수분하 동쪽에서 제곡고신의 군대를 퇴치하였다. 홍제는 그 공을 치하하여 소성蘇城에 봉하고 하백河伯을 삼았다.('소씨상상계') 홍제가 풍에게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발견하는 기록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일찍이 사성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제곡고신 때에 와서 홍제가 다스리는 단국 배달나라를 침범하는 기록이 나오므로, 이때 중원에는 제곡고신의 영토와 단국 배달나라의 경계를 가르는 경계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북경의 북쪽을 횡으로 가로질러 가는 거대한 만리장성의 존재가 이를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홍제는 '한단고기'에서 신시 배달나라의 17세 혁다세 한웅으로 기록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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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군 왕검시대

신농은 유망가계의 시조


단군왕검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이다. 동이와 한족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시대가 단군왕검시대이기 때문이다.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대제국이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우리와 하화족의 구별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다만 동이로 불릴 수 있는 동이만이 산동반도 일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조의 시대에 황제가 동이로부터 독립해 나간 것이 하화 족으로 불리는 한족이었다.

단군왕검이 출현하는 시대 이전에 중원에는 큰 물줄기를 이루는 세 종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농을 조상으로 하였다. 이들은 신농으로부터 8대 유망까지 조상이 같았다. 유망대에 와서 황제와 갈라지고, 유망계열에서 4대를 내려와 배달나라의 태제泰帝가 나온다. 이렇게 세 종족이 중원을 가르게 되는 것이다.

유망의 가계 (동국역대東國歷代, 홍사한은鴻史桓殷)


1. 신농 2. 제승. 3. 제임. 4. 제내. 5. 제백. 6. 제즉. 7. 제양. 8. 제유. → ① 제괴 ② 제망 ③ 제성 ④ 泰帝 ⑤ 洪帝 ⑥ 檀君王儉


황제의 가계 (황제에서부터는 駱賓基 1917-1993 의 금문)


1. 신농 2. 제승. 3. 제임. 4. 제내. 5. 제백. 6. 제즉. 7. 제양. 8. 황제 → ① 소호 ② 교극 ③ 제곡 ④ 제지 ⑤ 제요 ⑥ 제순 ⑦ 禹王


전욱고양의 가계 (유망에서부터는 낙빈기의 금문)


1. 신농 2. 제승. 3. 제임. 4. 제내. 5. 제백. 6. 제즉. 7. 제양. 8. 유망 → ① 희화 ② 제전욱 ③ 곤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의 누비혼인


유망가계의 제양과 황제가계의 제양은 우리 역사와 중국 역사에서 소전少典으로 나오는 분이다. 소전은 유망과 황제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르다. 유망가계의 제유帝楡는 유망이다. 유망과 황제는 아버지 제양 즉 소전에서 갈라져 나오고 이들은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의 중시조가 된다.


낙빈기에 따르면,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은 누비혼인(Punalua)라는 양급제兩級制로 맺어진다. 두 집안이 이복형제간 임에도 불구하고 모계사회의 특징인 공동남편과 공동부인의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는 그의 이복형 유망의 딸 누조와 결혼한다. 이렇게 사위가 된 사람을 자子로 불렀고, 아들을 남男으로 불렀다. 백伯은 외삼촌으로서 조카딸 자매가 있는 씨족마을로 장가든 사람이다. 이 제도는 순임금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혼인제도는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이 한 대를 건너뛰며 제위帝位를 물려받고 돌려주는 기이한 혈연풍습을 유지한다.

유망의 딸 뉘조와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 사이에서 항아와 소호금천이 출생한다. 유망의 제위를 외손자 소호금천이 물려받는다. 따라서 제위의 대물림은 1대 유망, 2대 소호금천이 된다. 3대는 유망의 큰아들 희화와 황제의 딸 항아 사이에서 출생한 전욱고양(재위 47년)이 물려받는다. 4대 제위는 황제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재위 55년)이 물려받는다.


그러나 제곡고신 대에 와서 제곡고신은 5대 제위를 전욱고양의 양자인 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기와 측실 간적 사이에서 낳은 아들 지에게 물려주어 지가 5대 제위(재위 8년)를 잇는다. 이때 제위상속제도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곡고신의 정실인 중규의 아들 요堯가 이복형제인 지에게 제위를 도둑맞았으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찾아 6대 제요(재위 37년)가 된다. 이어서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죽이고 7대 제순(재위 9년)이 된다. 다음에 쿠데타를 일으켜 순을 죽이고 8대 제위를 이은 사람이 우(재위 8년)였다.



유망집안에서 떨어져 나온 단군왕검의 가계


유망(재위 43년)은 아들 4명과 딸 1명을 두었다. 1자는 희화 주, 2자는 금정 해, 3자는 희, 4자는 수였다. 이들 4명중에서 한 분이 제괴帝魁가 아닌가 한다.

제괴를 중시조로 하여 단군왕검이 태어나는 다른 한 분파가 유망집안에서 나온다. ②대 제망, ③대 제성, ④대 태제泰帝, ⑤대 홍제洪帝, ⑥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대를 잇는다.


이 고선은 그가 쓴 '단서대강檀書大綱'의 '조선기朝鮮紀'에서 조선의 시조를 '단군세기檀君世紀'처럼 단군왕검에서 시작하지 않고 2대를 거슬러 올라가 태제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보이는 대 가름이지만 설득력 있는 대 가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가 누비혼인이 성행했고, 누비혼인으로 출생한 외손자를 사위로 맞아들이던 던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단군왕검의 아버지 홍제는 그의 장인이 되고, 그의 할아버지 태제는 처 할아버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시대의 왕검과 곤과 우


단군왕검시대에 단군왕검(재위 93년, BC2333~BC2240)과 제순帝舜(재위 9년, BC2320-BC2312)과 우왕(재위 8년, BC2311~2304)과 곤(우왕의 장인)은 이 시대를 이끌어간 삼두마차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기록에는 곤은 도산국塗山國의 주인이었다. 우가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순이 제위에 오르면서 도산의 치산치수를 명하였다. 그는 7년 동안 치수에 힘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순은 책임을 물어 우에게 곤을 죽이라고 명했다. 하화의 기록은 산동반도에 있는 우산에서 우가 그를 처형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중원의 패권을 쥐고 있던 단군왕검이 홍제에게서 물려받은 배달나라라는 국호를 곤에게서 나온 조선으로 바꾸어 썼다는 점에서 그를 죽였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곤이 단군왕검과 동시대 사람이고, 그가 당시에 국제무대의 중심에 있었던 도산의 맹주였다는 점에서 그를 각별하게 생각하여, 도산으로 부루태자를 파견하여 그를 살릴 수 있는 외교적인 교섭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 기록된 도산회의塗山會議는 도산의 치수에 관한 회의와 각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는 이외에 곤을 살리는 회의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은 14세 때 갑진년(BC2357)웅심국왕熊心國王의 사위가 된다. 그래서 그를 웅녀군熊女君이라고 불렀다. 웅녀군이란 웅녀의 남편이라는 뜻이다. 웅녀란 웅녀라 불리는 모계집단의 족성族姓의 여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14세 때 족성이 웅熊인 모계집단에 데릴사위로 장가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장인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그는 장인의 대를 이어 웅심국의 왕검이 된다.


이어서 그는 단국檀國의 홍제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단국으로 돌아가 무진년(BC2333)에 제위를 물려받는다. 이고선의 '조선기'에는 그를 태자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태자는 오가에서 화백회의의 추대를 받아 임명받았으므로 홍제의 친자는 아니었다. 그는 홍제의 뒤를 이어 단국 즉 배달나라의 왕검이 되었다.


그는 단국의 제가 되던 해에 다시 한 번 비서갑菲西岬의 딸 하백녀에게 장가든다. 하백녀는 한인천제로부터 이어져 오는 소씨 집안의 딸이었다. 그는 웅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네 아들 중에서 장자 부루를 태자로 삼았다.


중국의 사서에서 우는 곤의 아들이라고 한다. 문자학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상고시대에 자子자는 사위로 해석하였다.




 

우리 민족의 신앙

(巫)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까지


한국 무(巫)의 역사는 문헌사료 이전의 시대인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적 상징으로 장식된 왕관이나 지금도 동북아시아의 무당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방울·칼·거울 등 각종 고고학적 유물자료들이 청동제로 제작되던 시기를 보건대, 적어도 기원전 1,000년 전부터는 그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형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어떤 종교적 의식이 한반도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군신화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사회는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오늘날의 무(巫)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가 정치와 통합되어 있던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중국 측의 기록인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은 고대 한민족이 세운 여러 초기국가의 종교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는 첫 사료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여·고구려·예 등지에 각각 영고·동맹·무천이라는 종교적 축제가 있었다. 또 마한에도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음력 5월과 10월에 큰 축제가 있었으며, 종교적 구역인 소도(蘇塗)의 존재에 대하여도 언급해 놓았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하늘을 섬기며 연일 음주 가무하는 이들을 눈여겨보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들 행사는 대개 추수를 기원하거나 감사하는 농경제의 적 성격을 가졌으리라 보이며 그 이후 한국인의 종교제의의 원형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 축제가 천제(天祭, 하늘 굿)이고 이를 주관한 것은 다름 아닌 무당이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마을 굿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이런 종교적 전통은 삼국시대 초기 이미 제정일치에서 정교분리가 이루어지고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유교·불교·도교 등의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의 신앙전통과 불교와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서양과 같은 대규모 탄압 및 순교나 전쟁 등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인도식 샤머니즘이라 할 정도의 면모를 갖추고 있던 데에다 우리 조상들 역시 워낙에 다신교전통이었기에 자연스런 융합이 가능하였다.


삼국 말기에는 도교가 전래되었는데 이 역시 중국식 샤머니즘에 다름 아니다. 도교는 한국의 전통종교였던 샤머니즘에 쉽게 포용된바 오늘날 무(巫)에 옥황상제가 등장하고 불교사찰에 칠성각이 있는 것이 그 흔적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우리에게 현묘한 도가 있으니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교는 국가경영이론인 유학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종교로서의 중국식 조상숭배를 말한다. 워낙에 종교전통 자체가 유불선 삼교의 면모가 있었다고 하니 융합에 무리가 없음은 당연하였으리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고려로 넘어오면 팔관회와 연등회가 국가적 종교행사로 자리하게 된다. 이 두 행사는 겉으로는 불교행사인 것처럼 보이나 그 내용은 기실 예로부터 전해오던 무(巫)의 축제전통을 이은 것이다. 양자가 겉으로는 불교적 이름을 취하고 있으나 내용은 모두 호국적 시조제·기복제의 성격을 지니며 군신(君臣)과 백성이 음주가무하고, 무당이 천신·용신·산신 및 하천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등 토속적 신앙의 면모를 보여준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간 서긍(徐兢)은 자신이 관찰한 바를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팔관회는 고구려의 동맹제(東盟祭)에서 유래한 것"이라 밝혔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로 오면서 급변하고 만다. 초기부터 굿을 단속하는 법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고, 무당을 한양에서 쫓아냈으며 급기야 무당은 노비·승려·백정 등과 함께 사회 최하층인 8천(賤)의 하나로 규정되는 등 박해가 연이었다.


고려의 국가적 제례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낭비로만 본 까닭도 있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유교 이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지배층이 종교를 핑계로 구시대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목표가 정말로 무당 천대에 있던 것이 아니어서 왕실에서도 19세기 말까지 꾸준히 굿을 벌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천민으로 떨어진 무당에 대한 사회적 천시는 매우 심각했고, 이에 함께 배척당하던 불교와의 융합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석가모니·무학 대사·삼불제석 등이 주요한 신령으로 모셔지고 불교 역시 무(巫)로부터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부터 현재


일 제시대로 오면서부터는 정말로 탄압이 벌어진다. 일본은 조선 침략기에 많은 학자들을 동원, 한국의 사회·역사·종교·풍속 등을 정밀히 조사한다. 그리고는 마을 단위의 굿이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질로 고래로부터 꾸준히 내려오며 지역주민의 유대감 형성에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군화발로 제상(祭床)을 짓밟고 무당들을 쫓아내고 구속하는 등 엄청난 핍박이 벌어졌다. 굿을 무조건 미신이라 강요하여 신령을 섬기지 못하게 했다. 또 나날이 교세가 늘어나던 이질적인 새로운 종교, 기독교와의 갈등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무(巫)와 함께 탄압받던 기독교 역시 굿을 마귀사탄을 섬기는 미신으로 몰아붙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늘날 굿판에서 무당이 사람들에게 돈을 추렴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런 행위도 굿이 끝나기 전에 비용을 확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무당들에 의하면 당시보다 더 심했던 때가 바로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조국근대화 시기였다. 당집이 폭파되고 무당등록증이 없으면 굿도 할 수 없었다. 근대화·서구화라는 국가경영이념 앞에 전통문화와 종교는 맥없이 허물어졌다. 굿과 무당은 단지 미신을 조장하는 근대화의 걸림돌로 인식될 뿐이었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 현재까지의 상황에서 한 가지 다행한 사실은 뒤늦게나마 무당과 무(巫)가 학문의 대상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전국 및 각 도 단위의 민속예술경연대회와 무형문화재 제도는 굿을 전통문화로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굿과 그 문화에 정통한 많은 큰무당들이 세상을 뜨면서 뛰어난 기예와 법도가 끊어지게 되었으며, 학습이 덜된 선무당이 많아지면서 굿과 무당의 세계가 위축·변질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굿을 하기 위한 비용 마련과 바쁜 세상살이 등의 문제로 인해 대개의 굿은 절차가 생략되어 간소하게 치러지고 있으며, 질병상황의 개선으로 마마배송 굿이 사라지는 등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무(巫) 안에는 자연과 인간의 포용, 타종교와의 자연스런 융합, 집단과 집단의 조화, 인생과 우주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다. 그러나 서양식 합리주의에 바탕 한 세계관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무(巫)의 정신은 그만 미신으로 치부되어 버리고 말았다.


최근 서구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거부하던 편협한 안목을 버리고 차츰 인간의 정신세계를 인정하고 그와 관련된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진행되면서 굿과 무당에 대한 이해가 예전보다는 제법 나아질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바른 평가를 받기에는 요원한 실정이다.


종교의 허구성


종교의 생성


종교가 생겨나려면 다양한 신화가 생성되어야 한다. 이들 신화가 갖는 상징체계와 논리체계가 결합하면서 종교가 생겨난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먼저 전제되는 것이 종교를 필요로 하는 종족이라는 혈연집단의 생성이다. 종족이라는 혈연집단이 생성되고 분화하고 다른 혈연집단과 결합하면서 최초로 생겨난 종교가 풍성해지고 신학적인 논리체계를 갖춘다.


우리가 세상에 제일 먼저 태어난 종교에 대하여 알려면 먼저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혈연집단인 어느 특정한 종족을 찾아야 한다. 그 특정한 종족을 찾았으면 그 종족의 역사를 추적하여 그 종족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종교를 천착해 내야 한다.


신화학자들이 연구해 낸 결과를 보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혈연 집단으로 볼 수 있는 종족이 인류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이다. 이 시대에 태백산에서 태어난 마고 족에 대한 기록이 <부도지>에 실려 있다. 마고는 인류문명을 최초로 자각한 여인이다. 그에게서 모계사회가 생성된다. 마고는 종교화하여 신선이나 삼신으로도 나타난다.


이 시대에 유대 땅에서는 멜키지덱 이라는 사람이 출현한다고 <구약성경>에 실려 있다.

멜키지덱은 플라톤이 그 존재를 밝힌 대서양에 가라앉았다는 아틀란티스의 생존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류의 시조로 창조했다는 아담(서기전 4004년 전 출생)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으로 기록하였다.

카발라주의자들도 그가 아틀란티스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밝힌 신비에 싸인 사람인데, 죽지 않고 살아서 6000년 동안 아담이 태어날 때를 기다렸고, 아담이 태어난 이후에도 1996년 동안 아담의 후손인 노아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무려 8000년을 기다린 끝에 노아가 태어났는데, 그 후로도 노아의 12대 후손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를 더 기다려야 하였다. 아브라함이 세상에 나오자, 그를 제사장으로 세워 유대교의 시조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없어서 허황하게 보인다.


그러나 터키의 소아시아반도 내륙에 있는 분지(800-1200m) 아나톨리아 평원에서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드가 이끄는 일단의 연구팀이 ‘사탈 휘익’으로 불리는 이중토루二重土壘를 발굴하면서 세상에 드러난 8천5백 년 전에서 7천7백 년 사이에서 살았던 원시 신석기시대 사람의 유적에서 발견한 종교의 흔적에서 우리는 1만 년 전에 종교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종교의 흔적은 프레스코화로 불길한 느낌을 주는 날개를 넓게 편 독수리처럼 생긴 새와 금문金文 천天자형의 빼빼마른 인간, 이 인간을 올려놓은 높은 망루와 망루로 올라가는 사다리 그림인데, 어떤 종교의식을 그렸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앤드류 콜린스는 그가 쓴 <금지된 신의 문명>에서 조장鳥葬의 장례의식이라고 하였다. (<금지된 신의 문명1> 212쪽, 215쪽)



인간 창조 신화에서 나오는 종교


사람이 있는 곳에는 종교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지에 대한 외포심이라든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영원성에 대한 희구가 종교를 만들어낸다고 종교학자들은 보고 있다.


어떠한 형태의 종교이든 종교가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성종교들은 모든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여 만들어졌다. 자신이 타고난 유한성에 대하여 외포심畏怖心을 가진 인간이 영원성을 갈구하면서 찾게 되는 것이 신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금 우리가 유일무이한 종교로 믿고 있는 기성종교이다. 인류의 역사는 길고, 이들 종교가 세상에 태어난 역사가 지극히 짧아 2000년 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들 종교는 최근에 태어난 유아기의 종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종교의 역사가 짧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종교가 태어나기 전에 어떤 종교가 있었는데, 먼저 있었던 종교가 이들 종교에 강제로 습합당한 것은 아닌가? 그러한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들 종교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들 종교가 태어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인종과 역사가 있었고, 그들이 생성해 낸 신화와 종교가 있었다. 종교가 인류의 문화적 산물이라면, 이런 종교가 생겨나기 전에 벌써 다른 종교들이 있어서, 이러한 종교가 태어날 수 있도록 종교적 기반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종교가 아닌 이상, 새로 태어났을 이들 종교가 내세워야 할 순수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령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나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처음에 엘로힘으로 나오고, 다음에 여호와 엘로힘으로 나오고, 마지막으로 여호와로 나온다. 집단신이 유일신이 되기 위하여 세탁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세탁과정을 거치는 도중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이 일을 “우리가 했다”고 실토한다. 이렇게 여러 신이 인간을 창조해 내는 일은 수메르의 ‘엔키와 난마 신화’에서도 보인다.

“신들은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을 한탄했다. 특히 운하를 준설하는 일은 뼈가 휘어질 듯 힘든 것이었다. 여신 남무는 아들인 지혜와 물의 신 엔키에게 이러한 신들의 한탄을 전하고, 신들을 위해 일할 인간들을 만들기를 권고했다. 이에 엔키는 어머니 남무에게 담수의 심연 아프수의 점토로 인간을 만들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여신 난마와 다른 여신들의 도움으로 인간을 만들고 그들의 운명을 정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세계 신화 101 요시다 아즈히코외 작 김수진 옮김 16쪽>


이 인간창조의 신화를 전한 수메르는 지금으로부터 9900년 전에 우리의 조상 풍이에 속했던 종족이었다. 그때 12국이 한인천제가 세운 12국에 속해 있었는데,(<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 임승국 역 27쪽) 수메르는 이미 그때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러므로 9900년 전에는 우리와 피를 나눈 동족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수메르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문명을 개회시킨 때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의 일이었다.


수메르의 인간창조신화가 한국의 인간창조신화에서 기원한다고 가정하기로 한다. 수메르가 한국 12국 중의 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러한 가정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창조신화의 원전이 수메르신화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조상이 영혼을 보는 눈


우리 조상은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신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는 천과 지와 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지인 모두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하늘에 생명이 있고, 땅에 생명이 있고, 인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생명은 기독교에서 말하듯이 죽어서 썩는 육신과 영원히 사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인에 내재한 성정명性精命이라는 신학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성은 인이 타고난 본성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인의 속성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본성에 의하여 만물이 그 성격과 형상을 갖는다고 인식한다. 천에 생명이 있고, 지에 생명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인에게 천의 생명과 지의 생명을 인식하는 인식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인은 상대성이론의 통일장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천지인이 통일장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은 정신이다. 기독교에서는 정신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이 타고나는 파장이 정이다. 생명체는 파장이 높은 사이클일수록 고급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다. 고급한 정신은 고급한 영혼의 집이 된다. 저급한 사이클일수록 저급한 정신을 소유하게 된다. 저급한 정신은 저급한 영혼을 형상화 한다. 단 하나의 파장은 극소화한 정신의 표현이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영혼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그 정신은 단 하나의 파장으로 극소화하여 하나의 파동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의 육신이 분해하여 원소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 파동을 정신으로 보면 정신이 되고, 영혼으로 보면 영혼이 된다. 그러므로 영혼의 존재를 믿는 눈으로 보면 영혼으로 보일 수 있고,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눈으로 보면 단 하나의 파동으로 보일 뿐이다. 인간 정신이 하나의 파동으로 존재하는 곳이 무기無氣한 곳이다. (<단군세기>) <천부경>에서는 이 곳을 무시無始라고 하였다.


명은 생명이다. 만물이 생명을 타고난다. 돌과 물과 쇠에도 타고나는 생명이 있다. 생명의 수명은 만물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명은 성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명을 성에 종속시켜 성정性精만을 인의 속성으로 보기로 한다.

우리 조상은 성정이 생활하는 곳을 심기心氣라고 하였다. 또한 심기를 만드는 것을 삼신三神이라고 하였다. 삼신이 심기를 만들고, 심기 안에 성정이 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삼신은 천지인 모두를 포용한다. 삼신은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한다. 인의 인식작용이 인이 갖는 성정을 신인합일神人合一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천지인에서 인과 천은 합일한다. 그러므로 삼신은 신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신이다. 이렇게 서로를 포용하려면 천지인이 조화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천지인의 조화가 신인합일로 가는 것이다.



외래종교 다시보기


기성종교는 영혼을 가진 인간과 영혼을 갖지 못한 인간을 구별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탈을 쓴 신을 만들어 내고 이 인간의 탈을 쓴 신에게 모조건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인간의 탈을 쓴 신의 뒤에는 인간을 억압하려는 인간이 만든 거대한 폭력집단이 있다. 폭력집단이 신을 앞세워 폭력을 행사한다. 이들이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이 인간의 영혼이다. 지옥과 천당을 내세우며 자기들의 종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고 귀의하면 천당에 간다고 혹세무민한다. 인간의 영혼은 이렇게 종교집단에 의하여 협박당한다.


종교집단은 협박과 세뇌를 병행한다. 인간의 영혼을 세뇌하기 위하여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집요하게 교육한다. 가르치는 대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하라는 대로 행동해야 하고, 의문을 제기해서는 아니 되며, 군중이 모일 수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집을 지어야 하며, 소수의 성직자들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한다.

영혼은 종교집단에 의하여 세뇌당하고 협박당하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대로 이끌려 간다. 그들이 이끌려 가는 곳이 어디인지 그들 자신과 종교집단조차도 모른다. 그들이 신이라는 존재로부터 너무 멀리 일탈하여 일상성에 안주해 있기 때문이다.


이 들 종교가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이 그들의 선생님이 세상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경전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놀랍게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이들 경전의 말씀을 팔아서 생활하고자 하거나 권력을 얻고자 하거나 치부하고자 하는 부류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일을 하였다. 정치적인 목적은 세력을 확장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 돈을 버는 일이었다.


이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특성에 맞게 이 일을 추진하였다. 주로 은밀한 침투나 공개적인 공격의 두 가지 방법이 채용되었다. 이들 종교가 어떠한 방법을 택하든 상대를 교화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경전과 경전을 전파하는 성직자를 앞에 내세웠다.


가지고 있는 경전의 특성은 그 경전이 추구하는 바가 다르므로 타민족을 동화시키거나 교화하는 방법이 달랐다.

공개적으로 공적하고자 하는 종교는 역사를 주관하는 절대자의 섭리를 공격의 당위성으로 하였고, 은밀하게 침투하고자 하는 종교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참마음을 일깨우는 은밀한 접근 책을 썼다. 접근방법이 전혀 다르다고 해도 이 들 두 부류의 종교가 추구하는 바는 결국 타민족의 동화와 교화였다.

이 목적을 추구하는 자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므로, 인간의 욕망이 종교의 본 모습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 종교를 소유한 인간들의 공격성과 사술 성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를 운영하는 세력은 먼저 백인들을 교화했고, 백인들은 선교사를 앞에 내세워, 그들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공격성을 발휘하여,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다수 민족을 공략하여 식민지화하였다. 여기에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자기모순이 발견된다. 기독교가 인류의 구원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가 인류를 구원하는 종교로서 존립할 수 있는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이렇게 그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공격성을 이용하려고 했던 인간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세계 1, 2차 대전도 공격성이 강한 기독교 국가들에 의하여 저질러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교는 창과 칼을 내세워 타민족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한번 침투하면 오랜 세월을 두고 먼저 있던 것을 벗겨 내고 그 위에다가 다른 것으로 칠을 하여 본래부터 있었던 것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절에 있는 칠성각이나, 삼성각은 아직도 절에 남아 있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한 종교의 유물이다. 대웅전도 한웅천왕을 모셨던 전각이었다. 불교는 이렇게 은밀하게 침투하여 상대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자기 내면의 각성과 무관한 행태가 외적인 면에서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이 불교가 가지고 있는 자기모순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그 이유는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올 당시의 권력자들이 권력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하여 새로운 종교로 무장을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격성이 가지고 있는 자기모순을 극대화하고 있다. 불교는 아직도 참마음이 추구하는 순수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외형적인 팽창에 몰두하고 있다. 참마음을 추구하면서도 세속화의 극을 달리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살아온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돌아보면, 이미 우리의 본모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외래종교에 길들여진 순한 양과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왜 내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이유를 망각하고 있는지 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다.


http://www.hollykim.com ARTIST - YONG GWAN KIM


영혼의 존재를 믿는 종교

인간은 영혼을 영원히 살아남게 하기 위하여 종교를 만든다.


초월성에 대한 기대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근원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 드넓은 공간에 대한 두려움, 무한성에 대한 두려움,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 등 두려움을 유발하는 대상을 열거하자면 무한하게 많다고 말할 수 있다.


우주가 근원적으로 또한 원초적으로 갖는 공간적 시간적 무한성이 인간 존재의 외소성과 유한성과 대비되어 공포심을 유발한다. 인간이 미물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생각은 인간의 우주적인 존재로서의 자각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무 공간 무시간의 존재, 무기無氣의 존재가 신이 존재하는 곳으로 인식되면서, 공간과 시간이 뒤섞이고 뒤틀린 상태에 존재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초월적인 공간과 시간의 특성이 유한한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수 없는 조건이 된다. 인간이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자각함으로써 공포심이 유발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미지의 저편에 초월적인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이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홀로 있게 함으로써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고 간다. 공포와 두려움의 근원에는 신神이나 무無나 도道나 공空이나 리理라는 문자로 표현되는 사유思惟의 심연深淵이 있다. 사유의 심연은 곧 우주적인 심연으로 확대된다. 신이 있는 곳은 여기이다.


인간의 이러한 자각은 초월성에의 동경으로 나타난다. 인간적 조건을 초월함으로써 우주적 존재, 무 공간 무시간의 존재로 승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초월성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초월성은 곧 영원성의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한다. 유한을 초월하는 것이 무한이요 무한은 곧 영원이다. 무한에는 무無로 돌아가는 무한無限과 유의 무한대無限大로 가는 무한의 두 가지가 있다.


인간은 신을 찾아서 우로 가야 할지 유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무도 무한이고, 유도 또한 무한이다. 어느 한쪽으로 가야하는데 어느 한쪽으로 가면 다른 한쪽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두 세계를 다 공유하고 있는 신의 세계로 인간이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성을 일탈하여 영원성으로 가고자 한다는 것은 실현이 불가능한 자가당착自家撞着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가 타고난 유한성은 극복되지 않는다. 인간의 불행은 이러한 데에 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정신은 선택적 존재이므로, 유한한 생명으로서 무를 택하든 유의 무한대를 택하든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가 어느 한쪽을 택했을 때, 그가 포기한 쪽에 대하여 포기하는 만큼 외포 심을 갖게 된다.


무든 유의 무한대든 택하게 되는 쪽은 살아있는 육신이 아니라, 이미 죽은 그의 영혼이다. 살아있는 육신은 아무것도 택할 수 없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영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무와 유의 무한을 선택당해야 하는 기로에 서서 영혼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내면에 내재해 있어야 한다고 자각한다. 그러나 그가 영혼을 인정할 때만이 영혼은 있는 듯이 보이고, 그가 영혼을 부정하면 영혼은 없는 듯이 보인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영혼이다. 영혼의 존재를 자각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영혼의 유무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는 자와 종교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는 자만이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그가 모태로부터 출생을 한다고 해서 영혼은 덤으로 따라오는 프레미엄이 아니다. 육신과 다른 별개의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그의 정신이 영혼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영혼은 그의 몸에 들어와서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는 영혼이 존재하는 자와 존재하지 않는 자의 두 종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이란 마치 그의 육신에서 공간에 발사하는 홀로그램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발사하는 장치가 그의 몸에 내장되어 있지 않다면 영혼은 발사되지 않는다. 이 영혼을 발사하는 장치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는 정신이다.

인체의 어디엔가 정신의 집이 있다면, 이 정신의 집에서 외부적 존재인 영혼을 받아들인다. 정신의 집을 인간의 뇌 안에 내장되어 있는 송과선松科腺이라고 한다. 송과선이 곧 영혼을 받아들이는 장치이자 영혼의 존재를 알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꿈에 보는 죽은 사람의 형상이 혹시 영혼은 아닐까? 우리가 영체靈體라고 말하는 것이 영혼이 아닐까? 기독교나 불교에서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다는데 그 영혼은 영체를 말하는 것일까? 영혼은 물질일까, 아니면 비 물질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우주에 떠돌아다니는 물질들을 초월한 비 물질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힘으로 존재하든, 파장으로 존재하든, 물질이 아닌 미세한 입자로 존재하든 우주 안에 존재해야 한다. 흔히들 영혼을 하나의 빛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에서는 빛의 존재로 묘사한다. 영혼이 빛의 존재로 묘사되려면 영혼이 광자의 형태로서 우주 안에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죽음으로써 육신은 원소의 형태로 분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광자의 형태로 단일화하여 우주 안을 떠돌아다닌다. 인간이 전기나 자기에 민감한 이유는 영혼이 광자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은 마치 방송이 끝난 TV화면 위에 떠돌아다니며 명멸하는 빛의 존재와 같다. 여기에 생기가 작용하면 생명체로 자라난다. 생기가 떠나가면 다시 전기에 반응하며 명멸하는 광자의 형태로 돌아간다. 전기에 반응하여 홀로그램으로 재현되는 것이 영혼은 아닐까?


인간의 영혼이 광자의 상태로 돌아가기 전엔 정신의 소멸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정신은 소멸하기 전에 지독한 공포심에 직면하게 된다. 이 공포심이 유발하는 것이 종교라는 허상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태어나는 고유한 종교


종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에게서 나온다. 태초로부터 그들의 조상이 살아온 경험이 종교를 생산한다. 역사가 일천한 종족은 종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만이 종교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외래종교인 불교나 기독교의 역사는 2천년에서 2천5백년이므로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역사가 너무 일천하다. 이들 일천한 종교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종교는 없을까? 물론 없을 리가 없다. 있기는 있는데,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필자가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종교는 이러한 일천한 종교들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그 역사의 상한선을 1만 4천 년으로 늘려 잡는다. 물론 인간이 고작 1만 4천 년 전부터 종교를 갖기 시작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도 틀림없이 종교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1만년 이전부터 있었을 종교를 구명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 출현의 상한선을 1만 4천 년 전으로 잡았을 뿐이다.


인류가 사고하기 시작한 역사가 10만년이 넘고, 문명을 갖기 시작한 역사가 1만년이 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를 구원한다는 종교의 역사가 왜 2천여 년에 불과한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전에도 인류를 구원한다고 외쳐 온 종교는 없는 것인가? 왜 인류를 구원할 종교라고 신학자와 종교인들이 목청을 높여 외쳐대고 있는 종교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늦게 세상에 나온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밝혀 준 종교는 아직 없다.

그러나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종교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대단히 훌륭한 종교가 있었다.


주 석

1)유태인의 경전인 '구약성경'엔 선민성과 천손의식이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유대인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선민성과 천손의식을 근거로 하여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매도하고 멸시하고 차별화 하였다. 극소수의 선각자들이 유대인들의 역사를 절대자가 다스리는 신정사神政史로 기록함으로써 타민족과의 차별화가 가능하였다. 유대인들은 선민 성을 내세우며 다른 종족이나 민족을 유대인과 차별화함으로써 신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2)이들이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신학자들이 출현하여 가세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협박할 수 있는 종교집단의 입지가 견고해졌다.


종교로 존재하기 위하여 갖추어야할 종교적요건


종교가 종교로서 존립을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만 하였다.


① 그 종교를 선포한 사람이 있다. 예수나 마호메트나 석가모니와 같은 사람들이다.

② 그분들의 언행을 기록한 경전이 있다. 기독교의 ?성경?, 불교의 ?불경?, 마호메트교의 ?코란? 등이다. 이들 경전은 민족이나 종족을 교화하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③ 선민성選民性 유태인의 경전인 ?구약성경? 엔 선민성과 천손의식이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유대인은 ?구약성경? 에 나타난 선민성과 천손의식을 근거로 하여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매도하고 멸시하고 차별화 하였다. 극소수의 선각자들이 유대인들의 역사를 절대자가 다스리는 신정사神政史로 기록함으로써 타민족과의 차별화가 가능하였다. 유대인들은 선민성을 내세우며 다른 종족이나 민족을 유대인과 차별화함으로써 신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을 내세운다. 그 종교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내세에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고, 그 종교를 선택한 자만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자식’이거나, ‘하늘에서 온 민족’이라고 하는 천손의식天孫意識을 내세운다.

④ 종교를 가진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데 무력과 함께 종교를 활용한다. 선교나 포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종교가 타민족을 동화시키거나 교화하는 데 쓰인다.

⑤ 이들 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서 보편성을 갖게 된 것은 그 종교를 체계화하고 절대화하여 가르칠 수 있는 종교적 선각자 이들이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신학자들이 출현하여 가세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협박할 수 있는 종교집단의 입지가 견고해졌다.

들이 일찍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⑥ 지금까지 지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그릇에 물을 떠놓고 그 물에 비춘 달이 자기들만의 달이라고 우기며 다른 그릇에도 달이 비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종교이다. 이들의 경전에는 이 달이 “군림하는 절대자”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달은 나를 비추는 자신의 마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달에서 “역사에 군림하는 절대자”를 끄집어 낸 민족이 유태민족이고, “달에서 달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끄집어내어 절대화한 민족”이 최초로 석가모니불교를 믿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절대자도 이 절대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한쪽은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로서 역사를 주관하는 존재가 절대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참에 도달하는 마음이 절대자가 된다.


다양한 신앙체계


종교라는 범주 안에 각종의 다양한 신앙체계가 발생한다. 기독교적인 신앙체계, 불교적인 신앙체계, 유교적인 신앙체계, 이슬람교적인 신앙체계 등 발생하는 신앙체계가 다양하다. 이외에 얼마든지 다른 신앙체계가 생성될 수 있다.


이 신앙체계가 생명을 갖고 존재하기 위하여 사회성을 띄기 시작한다. 인간을 교화하고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유신을 주장하는 신앙체계이든, 무신을 주장하는 신앙체계이든, 이들 신앙체계가 신앙체계로서 존립하려면 스스로 존립이유가 있어야 한다.


유신의 신앙체계인 경우에는 유신의 신앙체계로서 존립하려면 몇 가지 기본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유일신唯一神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일신으로서의 요건을 신이 갖는 7가지 속성이라고 말하는데, 이 7가지 속성은 다음과 같다.


① 태초 이전에 계셨고

② 창조주이고

③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④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고

⑤ 무소불능이고

⑥ 무소부재이며

⑦ 유일해야 한다.


유일신의 속성은 동이족이 인류 최초로 갖기 시작한 원형종교인 삼신교와 태백진교와 덕교 세상에 출현시키면서 일관되게 제기해 온 속성들이었다.

마고시대에는 삼신교가 천부삼인天符三印으로 이 속성을 나타내었고, 한웅시대에는 태백진교가 이理로서 이 속성을 나타내었고, 단군시대에는 덕교가 덕德으로서 이 속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내세에 누리게 될 온갖 시혜를 내세우며 인간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지 않았다.



사라진 우리의 원형종교


예지드 족이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71명의 아담이 있었다고 보는 관점과 같은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보면, 4335년 전에 조선이라는 국호를 내건 조선에도 당연히 종교가 없었다고 보거나, 종교는 있었지만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조선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인류가 향유하는 기독교나 불교의 원형종교로서, 삼신교三神敎니, 태백진교太白眞敎니, 덕교德敎니 하는 세 가지 종교가 있었다. 삼신교는 14000년 전에 마고가 세운 마고지나의 종교였고, 태백진교는 6000년 전에 한웅천왕이 세운 배달나라의 종교였고, 덕교는 4335년 전에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의 종교였다. 덕교는 이미 10000년 전에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桓國에 그 종교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 영혼을 지옥에 보내느냐 천당에 보내느냐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불교의 역사가 2500년의 역사를 상한선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의 선조가 무려 14000년 전부터 이런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삼신교의 발전된 형태가 태백진교이고, 태백진교의 발전된 형태가 덕교이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원시형태의 소박한 삼신교에 한인천제가 <천부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논리체계 제공함으로써 철학적이고도 신학전인 의미를 띄게 된 종교가 태백진교이다.


태백진교는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삼신으로 모시며 하나님으로 섬기던 시대에 천지인이라는 철학적이고도 신학적인 체계를 제공함으로써 천부天符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한웅천왕이 천부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道라고 하고 이를 세상에 펼쳤다.


단군왕검은 일석삼극의 논리체계를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의 논리체계로 발전시켜 원형이정元亨利貞을 근간으로 하는 덕교를 완성하였다. 삼신교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삼신교의 완성된 형태임을 알게 된다.

장구한 세월을 삼신교가 덕교로 발전해 가면서, 삼신교를 내세운 마고는 하화족에게는 서왕모로, 일본인에게는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로, 유태인에게는 마리아로, 러시아인에게는 마토르시카로 신격화 해 갔다고 필자는 추리한다.


한인천제를 배출한 풍이족은 뱀을 체제 아이콘으로 쓰고 있었다. 한국을 건국하면서 12국으로 분화해 나갔다.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이들의 무용이 희랍에 그대로 반영되어 히드라신화와 같은 신화로 발전한다.


한웅천왕은 대인족의 신화로 각국의 신화에 등재된다. 아이들이 동화로 읽고 있는 “콩 한 알이 싹이 나서 자라서 하늘에 닿아, 아이들이 이 콩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거인을 굴복시켰다는 거인의 이야기”는 서구인이 풍이에서 퍼져나간 대인 족에게 품고 있는 공포심을 반영한 신화로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은 올빼미를 체제 아이콘으로 가지고 있었다. 치효존??尊이라는 청동기에 표현된 여러 문양의 의미를 추적 하면 단군왕검시대의 역사에 맥이 닿는다. 그러므로 치효존이 단군왕검의 실체를 밝히는 증거물이 된다. <시경詩經>에는 단군왕검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떠는 요堯나라 사람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 한 편에서도 우리는 단군조선의 실체를 읽을 수 있다. 눈을 뜨고 보면, 단군조선의 실체가 보인다.


우리가 단군조선과 단군왕검을 찾은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이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과 종교를 찾는 일이다. 본 연재에서는 이 시대 사람들이 남긴 종교, 즉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의 원형종교가 되는 삼신교와 태백진교와 덕교의 흔적을 찾아서 추적한다.


고조선에 있다가 나라의 멸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덕교나, 배달나라의 멸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태백진교나, 마고지나와 한국의 멸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삼신교는 수명을 다하여 폐기처분된 종교 테이프에 수록된 기록물들과 같다.


필자는 이 종교 테이프에서, 고조선시대 사람들이 경천敬天하고 경지敬地하고 경인敬人하고 경물敬物하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화두로 삼았다.

우리 조상이 가졌던 종교

인류가 종교를 갖지 못했던 시대에 우리 조상이 3가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지성인의 화두 “ 종교의 도와 덕”


인간이 종교를 갖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우리 인류가 믿고 있는 종교가 대단히 완벽하지 못한 의문투성이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러한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이것저것 해답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지만 속 시원한 해답을 기대할 수 있는 책을 발견한다는 일이 쉽지 않다.


좋은 교과서를 발견하지 못한 채, 몇 달을 죽어라고 공부한 끝에 얻는 결론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인이 되거나, 불교인이 불교를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거나, 아예 자 포 자기하여 종교에 대하여 흥미를 잃게 되는 엉뚱한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서점에 가 보면, 우리가 갖는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해 주는 책은 눈에 띄지 않고, 온갖 종교를 팔아서 밥벌이하는 사람들이 쏟아놓은 종교에 덧칠한 종교서적들만 그득하게 서가에 꽂혀있다.


우리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비판하는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한다. 누가 가르쳐주는 대로 받아들여 달 달 달 달 외우는 학생과 같은 사람을 지능인 이라고 한다. 지성인은 무엇인가를 찾아서 깨달으려는 사람이요, 지능인은 많이 외운 것을 과시하는 사람이다. 지능 인이 잘못되면 지능범이 된다. 지성인은 역사나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지능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세상에서 명 사람쯤 없어졌다고 해서 표가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 달 달 달 외워서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에게 깨달음이란 없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의문을 제기하고 이 의문을 풀어가는 사람이라야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가 도를 예기할 때는 노자를 예기하고, 덕을 얘기할 때는 공자를 예기한다. 노자는 깨달음을 감추는 사람이고, 공자는 깨달음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깨달음이 감추어져 있는 상태가 도이고, 깨달음이 드러나 있는 상태가 덕이다. 그래서 노자는 “우리가 도를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공자가 도를 말했다면 그것은 덕을 말하는 것이지 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는 “도를 깨달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은 도를 깨닫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종교에도 노자가 생각하는 도와 공자가 생각하는 덕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도를 깨달은 종교인과 덕을 실현하려는 종교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회는 도를 깨달은 종교인은 없는 것 같고, 덕을 실천하려는 종교인은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도를 깨달은 종교인은 도를 들어내지 않아야 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도를 드러내어 덕을 실천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굳이 많은 교육을 받지 않고 학위를 따지 않고 경험을 쌓지 않아도 실천이 가능하다.


도가 드러나면 非道나 부도不道가 된다. 종교도 종교의 도가 드러나면 그때부터 이미 도가 아니므로 종교의 비도가 되거나 부도가 된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의도했던 도에 속하는 부분이 누군가에 의하여 노출되어 순수성을 훼손함으로써 비도나 부도가 실현되는 것이다.

도가 순수성을 훼손하여 세상에 드러나면 그것이 덕이다. 그러므로 덕목德目을 실천한다는 말처럼 위험한 말은 없을 것이다. 덕목을 실천하겠다고 도의 순수성을 훼손하여 비덕非德이나 부덕不德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


종교도 감추어지는 것과 드러나는 것이 도와 덕과 같이 표리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종교의 근본적인 것은 드러나지 않고 도와 같은 상태에 있다. 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한다. 종교의 덕에 대해서만 말하나,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생전에 가지신 것이 몸에 걸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 털어버리고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도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분들이 실천한 것은 그러한 면이었다.


그러나 이분들을 팔아서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고 돈을 버는 사람들은 이분들이 깨달은 종교의 근본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도를 멀리 하고 술수를 가르치는 일에만 매달려 있다. 술수에 능한 사람들이 가르치는 종교에서 종교의 도를 배울 수 있을 것인가? 그 알맹이 없는 현란한 말잔치에서 무엇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 허황한 빈 잔치를 파하고 나면 허기만 더할 것이다.


종교의 가르침을 받아서 내가 이다음에 죽어서 천당이나 극락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철석같이 믿게 된 사람이라면, 자기가 믿는 종교가 진짜 자기를 구원하거나 해탈하게 하여 극락으로 안내하는 종교임을 확신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의문을 갖고 진지하게 파고들어가, 내가 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덕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는 인류가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거듭난 이래 한 번도 버린 적이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도 없는 영원한 화두이다. 사람이라면 아무도 종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하여 더 진지해져야 하는 것이다. 종교는 인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독재자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나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도교를 믿는 사람은 그들이 믿는 종교에 대하여 그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열심히 시주 잘하고 헌금 잘하고, 교회나 법당에 오라는 날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기도회에 참석하고 법회에 참석하면 극락에 가거나 천당에 가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이것저것 파고들어갔다가는 알게 되는 것도 없고 골치만 아프고 머리가 돈 사람 취급을 받을 가능성만 높아진다. 이단으로 몰리면 사형선고를 당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어느 날 조용히 돌아서서 내가 해온 그 행적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면, 이제 그는 종교 지성인의 대열에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 역사의 상한선에 대한 의문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 역사의 상한선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2500년을 상한선을 넘지 못한다. 불교와 도교의 역사가 2500여 년을 넘지 못하고, 기독교의 역사가 2000년을 넘지 못한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아벨과 카인으로 나뉘어 2000년 동안을 상대방을 악의 자식으로 매도하며 피를 흘리며 싸워 왔다.

불교는 조용하게 나른 나라에 파고들어 그 나라에 있었던 종교 위에 불교를 입혀 안방차지를 하였다. 이러한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마호맷과 같은 신의 경지에 가 있는 분들이 종교를 운영하지 않고 인간이 종교 카르텔을 만들어 운영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하여 창안된 종교전술이나 종교경영의 기법이 발전하여 인류는 종교를 독점하는 사람들의 포로가 되었고, 이들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2500년 전에는 지상에 인류가 당연히 향유하여야 할 종교다운 종교가 없었다는 말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얻으려면 종교권력자들이 배급하는 종교지식에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그가 자유스러운 상태에 있어야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선사시대의 문명을 찾아서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나 신화학자들이다.


이들이 발굴하여 우리에게 던져주는 선사시대문명의 파편들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해답의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하여 다른 지식을 얻고 싶은 사람들, 근본적인 의문에 대하여 해답을 얻고 싶은 사람들은 서점에 가서 온갖 신화 이야기들을 찾아서 읽을 일이다. 종교가 신화에서 나왔으므로 신화를 공부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서기전 1만 년 전에 이집트사람이 스핑그스를 세웠을 때 이미 그때에도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에서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조상이라고 가르치기 전에 종교가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근거가 희박한 편견을 시정하기 위해서 ‘예지드족 종교’의 예를 들기로 한다.


쿠르드족의 일족인 예지드족이 이라크 북부와 인접한 터키의 이라크와 터키 쿠르디스탄의 구릉지대와 그 남쪽 이라크 사막에 있는 예벨 신자르 부근을 중심으로 고립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데, 쿠르드 인구의 약 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 좀더 범위를 넓혀 중앙 쿠르디스탄과 러시아 코카서스의 일부 지역을 비롯하여 북부 시리아, 이란에서 다른 공동체 속에서도 생활하고 있다. (?금지된 신의 문명1? 앤드류 콜린스 저 오정학 옮김 272쪽) 이들의 종족이름인 예지드는 “토착화한 천사의 혈통을 이어 오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글 269쪽) 이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타락천사들처럼 키가 크고 잘생겼고, 스칸디나비아 인형을 닮았다. (같은 책 315쪽)


이들이 믿는 종교를 예지드교라고 하는데, 고대 크루드어인 케르만지로 쓴 경전 <메샤피레쉬>를 가지고 있다. 예지드교의 우주기원론과 신화는 기독교, 이슬람교의 기원과 다르고, 페르시아인들의 교의, 특히 고대 종교인 마니교와 유사하여 마니교에서 영향을 받은 종교로 보고 있다. (같은 글 274쪽)


이들은 뱀을 숭상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을 타락시킨 사탄이라고 하여 싫어하는 뱀이 예지드교의 창조신화에서 인간을 포함하여 살아있는 동물들의 구원자로 등장한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방주가 신자르산 정상에 부딪쳐 구멍이 뚫려 물이 새기 시작하였다. 이때 지헤가 많은 뱀이 재빨리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 또아리를 틀어 물이 새지 못하도록 막았다.”


놀랍게도 예지드족이 지혜롭고 헌신적인 뱀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지드족은 축제 때마다 뱀을 숭상하는 의식을 행하고, 뱀을 부려 돈을 벌기도 한다. 또 묘소의 출입문에 장식하기도 한다. 그들은 뱀을 악마로 여기고 두려워하지 않고 지배한다고 믿는다. (같은 글 288쪽)

서기전 1세기에서 1950년대에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이전까지 티그라네스 1세가 세운 도시 근처에 살았던 크루드 유대인도 창조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신화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것과 전혀 다르다. 아담과 하와 앞에 뱀이 나타나는 것은 같은데, 서서 걷는 사악한 뱀으로 나타나지 않고 잘생긴 청년으로 나타나서,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처럼 하와를 유혹하지 않고 아담을 유혹한다. (같은 책 309쪽)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크루드족 유대인과 이스라엘 유대인의 창세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이슬람교도 입장에서 보면, 예지드족은 <코란>을 믿지 않고, <메샤피레쉬>를 믿으므로 이단자이다. 그들이 고유한 신앙을 버리고 온전한 이슬람교도가 되지 않는 한 영원히 제거되어 마땅한 이교도들일 뿐이다. (같은 책 272쪽) 오늘날 이라크가 쿠르드족을 미워하여 살상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예지드족이 가지고 있는 신앙 때문일 수도 있다고 본다.


예지드족의 민간전승에는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을 앤드류 콜린스는 “이들은 아담이 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모두 72명의 아담들이 있었고, 이들은 각각 1만년씩 살았으며, 그동안에 지구상에 아무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바로 그 72명의 아담 가운데 마지막 아담의 자손이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류의 역사는 1백44만년이나 된다.” 고 말한다. (같은 책 292쪽)


이 민간전승을 그대로 다 믿을 수야 없지만, 언젠가 이 전승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다면 72명의 아담이 섬겼을지도 모르는 신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조상의 - 신령

신령의 성격


우리말에 "신들렸다"는 말이 있다. 이때의 '신(神)'은 어떤 존재일까. 다름 아닌 한국 무(巫)의 신령들이다. 신령을 가리켜 흔히 부정적 어감이 들어있는 귀신이라는 말로 부르나 이는 신령과 그 세계를 타종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한 데서 비롯한다. 무업(巫業)에 종사하는 이들은 귀신이란 표현을 쓰지 않으니, 그들의 표현을 존중하여 우리도 역시 신령이라 칭함이 좋겠다.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신령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종류와 성격을 달리하며, 또 외부와의 접촉으로 이전에 없던 신령이 들어와 새로운 신령으로 섬겨지기도 한다. 대개의 신령은 인격화하여 인간과 대화를 하고, 착한 사람을 돕고 악한 사람을 징벌하는 등 인간이 살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신령과 그들의 이야기인 신화는 인간사회의 직능과 위계질서, 역사와 사람의 삶과 꿈이 표현되는 바, 인간사회와 자연환경의 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할 것이다.


한국 무에서의 신령은 자연신, 조상신, 지역 및 개인의 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또 특수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신령(예컨대 예능의 신령인 창부)이 있고, 최영장군과 같이 민중의 비원과 애환을 대변하는 역사적 인물이 신령이 되기도 하며, 전국적인 재난을 계기로 해서 신령(호구나 마마)이 생겨나기도 한다.


신령의 계급


신령들은 나름대로 위계질서를 갖는데, 이는 대개 그 신령들을 몸주로 모시고 있는 무당들의 계급과 일치한다. 첫째로 선관·보살 계급이 있는데, 여기에는 하늘(옥황상제·부처님·삼신제석), 땅(산신), 바다(용왕), 별자리(칠성), 자연현상(벽력신) 등이 주로 포함된다. 다음으로는 전내 계급이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인물이나 도교 계통의 신령이 많다. 관운장이나 오방신장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로는 박수·만신 계급의 신령으로, 최영 장군, 별상, 군웅, 창부, 호구, 대감 등이 그들이다. 네 번째로는 뒷전 계급으로, 걸립·말명·서낭 등 잡귀잡신의 범주에 드는 신령들이다.


마지막으로 넋 대신은 궂은 일(초상)과 관련된 시왕(십대왕), 사자(사재), 넋 대신 등을 모신다. 이 아래에 주로 어린아이의 영혼을 모시는 태주방과 명도 계급이 있다. 그러나 신령과 무당의 위계가 이와 같다 하더라도 기계적 분류는 곤란하다. 실제에 있어서는 칠성과 최영 장군을 같이 모실 수 있고, 걸립과 시왕을 동시에 모실 수 있다는 뜻이다.


신령은 대개 화본(무신도)의 형태로 모셔지나 조각상이나 자연물이 되기도 한다. 또 종이에 신령의 이름만 적어 모시기도 하며, 심지어는 신체가 없이 장소(안방의 아랫목 천장 부분 하는 식으로)를 마음으로 꺼려하고 정성으로 섬기기도 한다.


한국 무에서의 신령은 자연신, 조상신, 지역 및 개인의 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또 특수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신령(예컨대 예능의 신령인 창부)이 있고, 최영장군과 같이 민중의 비원과 애환을 대변하는 역사적 인물이 신령이 되기도 하며, 전국적인 재난을 계기로 해서 신령(호구나 마마)이 생겨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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