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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편지 !

+ 천국편지 / 신, 창조자가 창조하는 것 & 통일 의식 속에서 너 자신을 찾는 것

 

 

 

천국편지 / 신, 창조자가 창조하는 것


신, 창조자가 창조하는 것

What God, the Creator, Creates

 

Heavenletter #5647, - God  5/11/2016

http://heavenletters.org/what-god-the-creator-creates.html

Translated by Osiearth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은 너 자신을 과소평가(경시)하지 말 것을 의미한다. 너의 참 자기True Self가 되어라, 그러면 너는 아름다운 존재인 너를 너인 존재로 만든 신인, 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만약 네가 너 자신을 아름다운 존재로서 보지 않는다면, 너는 너 자신을 잘못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내가 하려는 말을 들어 보아라: 나는 역시 아름다운 존재들을 창조한다. 너는 내가 창조했던 한 아름다운 존재이다.

 

너무나 많은 나의 아이들이 마음과 가슴에서 그들 자신의 억압된(짓밟힌) 버전(견해)으로 귀를 기울여 왔던 것으로 보인다. 네가 너 자신을 ‘보다 적은 사람’으로서 마음에 품도록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자, 이제부터, 나는 나의 숨(호흡)을 ‘보다 적은 사람’에게 소모하지 않는다. 인간은 보다 적은 사람이 아니라, 보다 더 많은 사람이다.

 

나의 가장 위대한 존재들이 그들 자신을 보다 적은 사람으로 보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겸양(조심성)이 아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마음가짐이다. 이것은 경솔함이다. 이것은 부끄러워하면서 “아니야, 나는 적합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에고의 한 형태이다.

 

나는 네가 적합한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저 그런(평범한) 인간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나는 신의 존재들을 창조한다. 나는 너에게 신의 존재를 수여했다. 네가 거만해지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너의 소신(견해)이 너의 영혼과 어떤 관련이 있느냐?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명심하여라. 세상의 완벽함은 전하는 그 소문이 아니다. 세상의 완벽함은 부르는 그 노래가 아니다.

 

나는 한물간 사람(퇴물)을 창조하지 않는다, 너는 나의 말을 이해하며 읽느냐? 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들을 창조한다. 나는 신의 존재들을 창조한다.

 

순진한 동물들은 그들이 그들 스스로 무척 편안하기 때문에 그들의 완벽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왜 이렇고, 왜 저렇지?”라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나의 깊게 사랑하는 아이들로서 수락한다.

 

왜 네가 수락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우냐? 너는 마치 “하하, 신이여, 당신이 말한 것을 나에게 입증해 보세요.”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냉소적으로 나를 살필지도 모른다. “신이여, 우리 둘 다 당신이 그것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죠.”라고 마치 눈짓하는 것처럼, 너는 너의 엉덩이에 너의 손을 얹고, 너의 턱을 내민다.

 

사실, 나의 아이들 중 일부는 심지어 그들 자신을 지구에서의 쓰레기로 본다. 누가 너에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느냐? 너는 이것을 어딘가에서 배웠다. 내가 만들었던 것에 대한 어떤 비웃음도 없이, 너는 책임을 가지고 강한 기대감 속에서 태어났다.

 

나는 냉소주의가 영리하다고 네가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러면 순진한 사람은 그렇지 않으냐? 이번에는 네가 앞서 있기 때문에 대신에 냉소주의를 폐기하여라. 낙관적인 것은 어느 날이든 비관적인 것을 이긴다.

 

네가 너 자신을 깔아뭉개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닐뿐더러 네가 세상에 있는 누구라도 깔아뭉개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왜 너는 너 자신이나 누군가를 호되게 꾸짖느냐? 만약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럽혀왔다면 – 이제부터 중지하여라. 부정성을 해산시켜라. 너 자신의 마음속에 조화(화합)를 창조하여라.

 

침묵의 장소로부터 나오너라. 세상의 진동을 끌어올리는 한 곡조를 불러라. 너는 너 자신보다 더 높게 세상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 우주는 그것에 대한 너의 견해로 귀결(요약)되지 않는다.

 

나는 네가 장미 수목 중에 아름다운 장미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장미들은 그들의 가시로 그들 자신들을 찌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장미들은 의기양양하게 서있지만, 그들은 그들이 그 모든 것을 안다고 그들 자신들에게 농담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 망상을 그리고 너의 창조자보다 너 자신을 더 똑똑하다고 간주하는 것을 자제하여라. 너는 실로 우주의 훌륭한 비평가가 되기를 열망하느냐? 정중해지기를 열망하여라.

 

우주를 어지럽히지 마라. 네가 살고 있는 우주를 네가 주시하는 각도(관점)에 대해 주의하여라. 우리들의 것인 이 세상을 고무시켜라.

 

네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사실은, 너는 네가 너 자신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주를 축복하여라.





통일 의식 속에서 너 자신을 찾는 것

 

통일 의식 속에서 너 자신을 찾는 것

Finding Yourself in Unity Consciousness

 

Heavenletter #5651. - God  5/15/2016

http://heavenletters.org/finding-yourself-in-unity-consciousness.html

 

신이 말했다.

 

무한이 존재한다. 무한이란 말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과거나 현재, 미래가 없다. 시간선이 없고, 심지어 시간의 아주 조금도, 시간의 찻숟가락 크기도 없다. 모든 것이 동시적이고, 심지어 동시적인 것도 시간과 조율한다. 세상의 삶에서는 타이밍timing이 큰 역할을 한다.

 

너는 자주 현재에서 살라고 조언 받는다. 이것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것이 무한에 초점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의 이율배반이 있는데, 무한이 시간-없음이기 때문이다. 무한은 방대함보다 더 방대하다.

 

무한은 확실히 행함보다는 더 존재함이다. 얼마나 수없이 이것이 말해졌느냐?

 

그러나 순간 속에서 사는 것이 조언할만하다는데 합의가 있다. 소위 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의 의지의 행동이 될 수 있다. 나는 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이 네가 만들 하나의 결정이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의 욕망과 하나의 의도가 될 수 있지만, ‘현재present’에 대한 너의 앎은 너의 손가락 꺾기의 힘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너는 그처럼 쉽게 너 자신을 과거와 미래로 돌릴 수 없는데,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에도 말이다.

 

순간으로 부르는 것 안에서 사는 것은 초점을 요하지 않는다. 너는 현재 속에 존재함에 초점을 줄 수 없다. 너는 네가 우연히 있는 곳에 있으며, 온건하게 또는 그 장소로 온통 전력으로 말이다. 너는 삶의 분출들을 껐다 켰다 할 수 없는데, 네가 진실로 너의 의지로 사랑을 껐다 켰다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네가 있는 곳에 있다.

 

네가 바로 지금 있는 곳은 네가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고, 네가 항상 있게 될 곳도 아니다. 너는 새로운 바다를 항해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유독 순간 속에 있는 사랑과 삶이 의식의 상태이다. 지구상의 모든 이들은 확실히 현재 속에서 삶의 기쁨을 완전히 체험했는데, 의식이 끊임없이 죽어있는 선flat line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순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너는 “오, 내가 현재 속에서 살고 있군”하고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속에 사는 것은 관찰될 수 있지만, 비록 삶의 공정함에서 무엇이 또한 가능한가에 상관없이 그것은 그 사실이 현재 속으로 들어간 후에 관찰된다. 그것은 너를 위한 것이 되기 쉽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너를 위한 것이다.

 

과거 속에 사는 누군가는 그가 되살리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음을, 그 기억이 기억을 되살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모든 이들은 백일몽이 아직 생기지 않은, 바라는 사건들을 기쁨을 가지고 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현재 속에 사는 것은 말들 사이의 간격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예술가는 그림을 그린다. 그 순간에 그는 “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야”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그의 그림 속에 빠져 있고, 그의 그림 속에서 찾아진다.

 

이것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가, 그 개인이 그의 자신을 잊어버렸고, 통일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의 개인성은 들어가지 않는다.

 

만약 네가 마음대로 현재 속에서 살 수 있다면, 너는 항상 행복할 것이다. 현재 속의 삶은 자주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다. 현재 속의 삶은 실로 행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인데, 그러나 행복은 현재 속의 삶의 결과이다. 너는 말 앞에 수레를 놓음으로써 행복을 성취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네가 순간 속에서 살 때 행복이 보장된다. 너는 냄비들과 프라이팬들을 닦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네가 현재 속에 살 때 너는 이 냄비나 저 팬을 닦는데 기쁨을 느낄 텐데, 네가 냄비를 빛나게 만드는 것을 저절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냄비나 팬을 닦는 것을 미루지 않는다. 너는 그것을 통해 살지 않는다. 너는 이 순간을 즐기는데 네가 그것 속에서 살 때 말이다.

 

신의 구술Godwriting은 현재로 부르는 것 안에 사는 것의 한 예이다. 물론, 신의 구술Godwriting을 적을 때, 너의 의식이 일 밀리미터를 움직인다고 말하자 — 너는 통일 속에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번역출처: AH.Korea http://www.abundanthopekorea.net/board2_3/9462 신의 편지/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