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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편지 !

+ 천국편지 / 배움의 꽃잎들을 여는 것 & 신에게로 더 가까이 네가 있다

 

 

 

천국편지 / 배움의 꽃잎들을 여는 것

 

배움의 꽃잎들을 여는 것

Opening the Petals of Learning

 

Heavenletter #5598, - God  3/23/2016

http://heavenletters.org/heavenletters-feed?filter0=&filter1=&filter2=5598

Translated by Osiearth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얼마나 넓은 것이 넓은 것이고, 얼마나 높은 것이 높은 것이냐? 얼마나 높아야 하늘이냐? 얼마나 광대한 것이 무한이냐?

 

어머니가 그녀의 어린 아이에게 물을 수도 있다, 얼마만큼 너는 나를 사랑하니? 그래서 그 아이는 그의 팔들을 벌릴 수 있는 한 넓게 그의 양팔을 벌리며 말한다: “이렇게 크게요.”

 

아이가 그의 어머니에게 건네주는 민들레로, 그는 그녀에게 전체 우주를 선물하고 있다. 아이는 정말로 그가 한정된 세상을 아는 것보다 더 나은 무한성을 안다. 그 아이는 한정된 것 외에 그가 아직 모르는 것을 세상에서 배울 것이 무엇이 있느냐? 지식의 전체 배열에서, 그 아이는 결국 세부들과 측정들 그리고 규모의 축소로 귀결되고 세상에서 깨달은 자가 되지만, 진정한 배움은 깊이 연구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발화된 어떤 것이다.

 

아이는 전체성을 기억하고, 그런 다음 그가 정식으로 배운 것은 하나의 종류나 다른 것의 한계(범위)들로 한정되어진다. 지구에서 배우는 것 중 상당 부분이 기대하는 것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충실함 대신에, 충실함에 가깝지 않은, 말하자면 가스탱크 안에 몇 종류의 모래와 삐걱거리는 장비들의 쑤셔 넣기인, 일종의 가득 채우기가 된다.

 

배우는 것(배움)은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 아이는 한 줌의 지식을 파악하고 싶어 한다. 아이가 얼마나 언어를 매우 근사하고 아주 쉽게, 그리고 열심히 배우는지를 상상해 보아라. 언어를 배우기 위해 그 모든 것이 필수적인데, 혀의 전체 어울림과 입술의 기음들, 그리고 귀들은 앙코르를 제공한다. 누군가가 언어와 그것의 모든 파생된 문제들을 배울 수 있다면, 그는 그가 배우기를 욕망하는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

 

배움의 모든 것이 삶과 배움의 생동감에 대한 것일 때, 마치 배움이 발췌되고 그에게서 동떨어져 있으며 그를 밀어붙이는 어떤 것처럼, 언제 배움이 노동이나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는가. 마치 배움이 삶의 기쁨과 사랑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고 그 아이들은 화물차 안에 갇혀야 하며 다른 길이 아닌 오직 한 길로만 가야만 하는 것처럼, 언제부터 배움이 아이에게 되풀이하여 주입해야 하는 무언가가 되었느냐?

 

배움이 사랑과 기쁨을 자아내게 해라, 왜냐하면 사랑과 기쁨이 배움의 목적이 아니더냐? 정복하는데 의미가 없으며 정복의 필요성도 없다.

 

삶에서 한 가지 일은 다른 것으로 이어진다. 그 가슴과 마음은 지식으로 가득차기를 희구한다. 진정한 배움을 사실들이나 정보로 오인하지 마라. 진정한 지식은 연결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진정한 지식)은 서로 전혀 다른 요소들을 즐기는 것이고 어떻게 그것들이 통합하며 세상에서 삶의 소용돌이를 증가시키는지를 보는 것이다.

 

두 개의 다른 일들은 공통점을 갖는다. 배우는 것(배움/학습)은 일들을 함께 배열하고 있다. 배우는 것은 어떻게 이질적인 것들이 살아있고 서로 같은 것을 제외하고 이질적이지 않은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언어와 음악은 무엇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느냐? 심지어 언어와 음악 속에, 침묵이 있다. 말(논쟁)들 사이에 침묵이 있고, 음표들 사이에 침묵이 있다. 생각들 사이에 침묵이 있다. 주관성(자기본위) 안에 몰입(열중)이 있고, 너무 떨어져 있지 않아야 될 객관성이 있다. 객관성은 조만간 너를 나에게 더 가까이 데려올 수 있지만, 너의 가슴은 배움 속에 있어야만 한다.

 

배움(학습)은 기쁨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배움)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배움에 대한 시험(평가)은 배우고 있는 자에게 그것이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가이다. 배움(터득하는 것)은 연습과 반복보다 더 많은(중요한) 것이다. 배움은 세상에 대한 탐험(탐구)이다. 모든 것은 그것의 자리에 있을 수 있고, 모든 것은 어떤 방식과 그것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또는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될 수 없으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진정한 배움은 발견이다. 삶은 발견이 되어야만 한다. 완전한 발견이란 없다. 그것은 세계적이다. 그것은 우주적으로 광범위하다. 그것은 천국을 향해 있다. 삶은 그것을 분석하는 어떤 제한들을 초월하여 있다. 삶은 발견의 기적(경이)이다. 발견하는 것은 경계(테두리)들이 없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은 따야할 꽃이고 가장 먼 구역들로 선물을 줄(수여 할) 꽃이며, 모든 다른 이들을 포용하는 하나의 가슴들과 같은 무언가이다.

    



신에게로 더 가까이 네가 있다

 

신에게로 더 가까이 네가 있다

Nearer to God Are You

 

Heavenletter #5604. - God  3/29/2016

http://heavenletters.org/nearer-to-god-are-you.html


 

신이 말했다.

 

나에게 더 가까이 네가 있다. 너는 우리가 말할 때 나에게로 발사되고 있다. 너는 점점 더 빨리 나에게로 움직이고 있다. 너는 너무나 빨리 움직이고 있어서 네가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너는 네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 네가 사실상 시간 속에 얼어붙은 채 머물고 있다고, 마치 네가 빙하시대로부터 온 듯이 느낄 수 있다.

 

너는 시간의 절벽에 매달려 있고, 너의 엔진이 전 속력으로 달리고 있으며, 너는 알게 되는 마지막 자이다.

 

“어디에, 오, 어디에 내가 들어온 이 깨달음이 있습니까?” 너는 애원한다. “깨닫는다는 전망이 멀리 있는 당근처럼, 나의 도달을 넘어 있는 당근처럼 내게 보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언제 내가 내 것을 얻을까요? 언제 이 얘기되는 깨달음이 실제로 나의 것이 됩니까? 신이여, 추적해봅시다. 나는 모든 이들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기쁜데, 내가 내 것을 얻는 한 말입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깨달았을는지도 모르며,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무엇이 그것이 그처럼 오래 걸리게 합니까?”

 

사랑하는 이들아, 깨달음은 네가 얻는 무엇이 아니다. 너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다. 너는 그것을 처리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이미 너 자신인 무엇이다. 그것은 너의 존재이다. 너는 그것이며, 그러나 너에게 깨달음의 상태가 너무나 멀리 있는 듯 느껴져서 그것이 또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깨달음을 너의 포위된 앎으로부터 멀리 유지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비단이거나 심지어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모기장이다. 깨달음은 아쉬워하지 않는다. 너의 이 진실로부터 아쉬워하는 것은 너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말해왔던 것이다. 너는 망원경의 잘못된 끝을 통해 본다. 너는 아래쪽에 초점을 주는데, 마치 네가 보는 아래쪽이 너의 정도인 듯이 말이다. 눈부심이 너의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것의 존재보다는 네가 바라는 것의 부재로 초점을 주는 경향이 있다.

 

만약 네가 그것으로 만들어졌다고 내가 말하는 이 깨달음을 네가 알기를 원한다면, 그럼 네가 나의 아이라고, 네가 깨달았다고, 너의 DNA와 나의 DNA가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는 가능성, 혹은 실체성을 고려해라. 너는 증거를 원한다. 받아들임을 받아들여라. 네가 이미 깨달았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해라. 이런 식으로, 너는 다른 렌즈를 통해 본다.

 

멋진 확대경을 가진 셜록 홈즈와 같이 되어라. 그는 실마리들을 찾는다. 그는 그가 조립할 수 있는 실마리들이 거기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실마리들을 보는 것을 의도하면서 출발한다. 그는 그가 나오고 있는 곳으로 인해 아하AHA 체험을 갖는다.

 

그는 “난 실마리를 찾을 수 없어. 그래서 실마리들이 거기 없어”라고 말하면서 돌아다니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아, ‘할 수 있다can’와 ‘할 수 없다can’t’ 사이에는 생략 부호처럼 그처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너는 네가 갈망하는 이 깨달음의 상태로 한 번 뜀, 건너 뜀, 뛰어내림보다 더 가깝게 있다.

 

나는 너에게 다시 말할 텐데, 거리와 공간, 시간 등이 진실이 아니라고. 거리와 공간, 시간 등은 거짓 전제들이지만, 너는 그것들을 너의 모든 가치로 믿는다. 그것들은 너의 안전망이 아니다.

 

너에게 보이지 않는 것 속에 더 많은 확신을 가져라. 아직 너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진실하다 빛나는 은과 금보다 지구상에 더 진실한 다이아몬드들이 있다. 신God이 있고, 그들의 일상생활의 주마등 안에서 깨달음을 인정할 준비가 된 신God의 자손들이 있다.

 

물론 나는 이것이 너에게 허튼 소리로 들린다는 것을 이해한다.

 

언급을 멈추고, 너 자신에게 모든 구석들을 돌아 깨달음을 찾아보라고 조언해라.

 

깨달음은 동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깨달음은 그의 용감한 말을 타고 너에게 달려가 네가 삶이 그래야 한다고 믿는 대로 너를 위해 완벽한 삶을 만드는 매력적인 기사도 아니다. 그것은 곤란들이 단지 지금은 이전에 자주 그랬듯이 잘못된 방식으로 너를 문지르지 않는 것과 같다. 너는 삶의 더 큰 그림을 가지고 있다. 너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이 이제는 세상의 삶의 전체 파노라마에서는 단지 그것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삶의 이야기는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의 삶의 이야기Story of Life Come-What-May가 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데, 네가 벽들과 천장의 틈들 속의 너의 현재의 투자 없이 더 큰 전망으로부터 볼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출처: AH.Korea http://www.abundanthopekorea.net/board2_3/9288 신의 편지/1178